-
-
토지 1 - 1부 1권 ㅣ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 (마로니에북스) 1
박경리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2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한 달에 한 번 도서모임을 함께하는 진숙은 『토지』를 매년 한 번씩 읽는다고 한다. 보통 봄바람이 불어오면 시작해 가을바람이 불어오면 마친다고. 아이 셋을 기르면서도 틈틈이 읽는 독서의 기쁨은 쏠쏠한데, 『토지』는 그 가운데 ‘이야기’의 즐거움을 매년 준다고 했다. 어린시절 동네 놀이터 인연으로 TV 드라마 《토지》의 아역 탤런트와 같이 놀았다. 연예인은 어려도 후광이 달랐다. 너덧 번 정도 만났을 뿐인데 뽀얀 얼굴과 새카만 눈동자가 너무 예뻐서 나는 주눅이 들었다. 귀티나는 얼굴이 오래 잊히지 않았다. 내게 《토지》가 특별히 기억에 남았다면 그것 때문일 것이다. ‘어린 최서희’를 눈앞에서 보았던 경험.
《토지》는 1987년 KBS에서, 2004년 SBS에서 TV드라마로 두 차례 방영되었다. (이재은은 87년작에선 어린 최서희로, 2004년에는 서희의 몸종 봉순으로 등장한다. 완전 토지배우!)굳이 열심히 찾아본 드라마는 아니지만 틈틈이 보았던 한복 입은 최수지와 김현주의 얼굴은 인상적이었고, 중간중간 누구와 누가 결혼했다 정도만 기억에 남았다. 언젠가는 읽어야지 읽어야지 했던 스무 권의 책, 재작년에 기회가 되어 Ebook으로 마로니에북스에서 『토지』 전집을 구매하고도 영 들춰보기가 쉽지 않았다.
이제는 더 늦출 수 없다고 생각했다, 새 Ebook리더기를 샀기 때문. 조심스레 『토지』 1권을 펼쳐 그 안에 든 것들을 들여다본다. 물론 이 책을 읽는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재작년 작년 모두 『토지』 몰입의 가장 큰 어려움은 1권에서도 헷갈리는 수많은 인물들이었으므로. 그렇다고 『토지 인물사전』을 먼저 훑어보기도 뭐하다. 인물과 인물의 구체적 성격을 파악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일단 읽으면서 흐름에 묻어가 보기로 한다.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아름다운 것들, 진실이 손에 잡힐 것만 같았고 그것들을 위해 좀 더 일을 했으면 싶었다. 고뇌스러운 희망이었다. 글을 쓰지 않는 내 삶의 터전은 아무 곳에도 없었다. 목숨이 있는 이상 나는 또 글을 쓰지 않을 수 없었고, 보름 만에 퇴원한 그날부터 가슴에 붕대를 감은 채 『토지』의 원고를 썼던 것이다. 백 매를 쓰고 나서 악착스런 내 자신에 나는 무서움을 느꼈다. 어찌하여 빙벽(氷壁)에 걸린 자일처럼 내 삶은 이토록 팽팽해야만 하는가. 가중되는 망상(妄想)의 무게 때문에 내 등은 이토록 휘어들어야 하는가. 나는 주술(呪術)에 걸린 죄인인가. 내게서 삶과 문학은 밀착되어 떨어질 줄 모르는, 징그러운 쌍두아(雙頭兒)였더란 말인가. 달리 할 일도 있었으련만, 다른 길을 갈 수도 있었으련만……
진실이 머문 강물 저켠을 향해 한 치도 헤어나갈 수 없는 허수아비의 언어, 그럼에도 언어에 사로잡혀 빠져날 수 없는 것은 그것만이 강을 건널 가능성을 지닌 유일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나는 전율(戰慄) 없이 그 말을 되풀이할 수가 없다.
(박경리, 『토지』 자서(自序), 1973년)
개인적으로 1권에서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박경리(朴景利, 1926~2008)의 서문이라고 생각한다. 『토지』 책의 실물한 권의 두께는 보통이 아니다. 이런 책을 스무 권이나 썼다니 피를 쏟고 뼈를 갈아넣었으리라는 것은 당연한 수순. 글쓰는 이는 천형(天刑)을 얻었다는 말도 이에 있겠다. 1973년, 1993년, 2002년, 박경리의 서문은 한 줄 한줄 핏빛으로 아름다웠다. 나는 이 책을 읽을 것이다.
토지 1권은 경남 하동의 평사리 마을, 몇 대째 지주인 최참판댁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동학혁명은 실패로 끝나고 그 가운데 참판댁 역시 상처를 입는다. 어린 최서희를 중심으로 함께하는 어린이들, 그리고 어른들의 얽히고 설킨 관계성. 이것만 지루하지 않게 읽어도 1권의 독서는 성공이다. 가장 눈에 띄는 건 용이와 월선의 사랑이다. 현실에서 연결되지 않았지만 마음은 떨어지지 않는, 이것이 사랑이 아니라면 무엇으로 말해야 하는가. 이것을 손쉽게 이루어지지 않아(끝을 보지 않아) 끝나지 않는 집착이라고 말한다면 이 사랑이 너무나 싸구려가 아닌가. 싸구려라고 하기에 용이와 월선은 서로를 배려한다. 서로가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제일이다. 이루지 못해도 끝내 눈에 밟히는 사람, 그게 이 사랑의 힘이고 역량인 것 같다.
얼굴을 바싹 들이대며 용이는 속삭이듯이 말했다.
“니는 내 목구멍에 걸린 까시다. 우찌 그리 못 살았노. 못 살고 와 돌아왔노.”
하다가 용이는 울었다. 월선이는 비실비실 도망치려 했다. 매를 치켜든 아버지 앞에서 달아나려는 계집아이처럼. 울음을 죽이려고 이를 악무는 용이 이빨 사이에서 괴상한 소리가 났다. 그는 월선의 손목을 낚아챘다. 손목을 끌고 방으로 들어온 용이는 갓을 벗어던지고 등잔불을 불어 껐다. 그리고 나머지 한 손으로 여자의 나머지 한 손을 꼭 잡고 방바닥에 주질러 앉는다.
“어느 시 어느 때 니 생각 안 한 날이 없었다. 모두 다 내 죄다. 와 니는 원망이 없노!”
끌어안아 여자 얼굴에 얼굴을 비벼댄다. 남녀의 눈물이 한 줄기가 되어 흘러내리고, 또한 그들의 몸도 하나가 되어 높이 높이 떠올라가서 영원히 풀어헤칠 수 없는 처절한 사랑의 의식을 올리는 것이었다.
‘우찌 그리 못 살고 왔노, 용이가 그러데요. 우찌 그리 못 살고 왔겄소. 어매, 불쌍한 우리 어매. 팔자 치리 하고 살라 카더마는 내 신세가 어매 한세상맨치로 우찌 그리 똑같겄소. 짝도 없고 임자도 없고 어매 자식 어매 안 닮고 뉘 닮았겄느냐고 했더마는…… 너무 보고 접아서 왔소. 용이 사는 울타리라도 한분 보았이믄 싶어서 왔소. 어매, 날 미친년아, 기든년아 하겄지요? 나도 모르겄소. 보고 접아서 미치고 기들겄십디다*. 나도 모르겄소.’
용이하고 살 수 없다면 애꾸눈이건 절름발이이건 월선에게는 상관이 없었을 것이다. 누구를 따라가든지 그는 제 집 없는 뜨내기의 신세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