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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가 되는 글쓰기 - 쓰기는 배움의 도구다
윌리엄 진서 지음, 서대경 옮김 / 유유 / 2017년 2월
평점 :
절판
『공부가 되는 글쓰기』, 너무나 정직한 제목이다. 심지어 부제는 ‘쓰기는 배움의 도구다’다. 정직하다는 것은 한편으로 사람을 혹하게 하는 거짓이 없다는 의미다. 슬프게도 이 못생긴 제목 때문에 나는 이 책을 오랫동안 읽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 책을 읽으면서 황당했다. ‘뭐니, 너무 좋은 책이잖아.’
저자인 윌리엄 진서는 이 책이 ‘범교과적 글쓰기(writing across the curriculum)’를 소재로 한다고 서문에서 밝힌다. 즉, 국어나 문학 수업, 혹은 작가를 목적으로 하는 글쓰기 기회뿐이 아니라, 어떤 목적으로 하는 학문이어도 글쓰기가 탁월한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거다. 왜냐, 모든 글쓰기는 생각의 부산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과정을 통해 글쓰기가 즐거운 활동임을, 글쓰기와 생각하기, 배움이 함께 맞물려가는 통합과정임을 알려주는 게 이 책의 처음과 끝이다. 그래서 그가 제시한 것은 다양한 학문 분야에서 탁월한 글쓰기 사례. 이를 읽어봄으로써 읽는 이는 ‘나도 할 수 있지 않을까’라며 글을 써보게 된다.
나는 그런 글들을 찾아 나서는 작업, 즉 다양한 학문 영역에서 생산된 명료하고 뛰어난 글쓰기 사례를 수집해 한 권의 책에 담는 작업이 가능한지 고민했다. 지금까지 한 번도 글쓰기 주제로 생각해 보지 않은 자기 전공에 대해 글을 써야 하는 상황에 놓인 교사와 학생을 위한 안내서, 적어도 글쓰기와 배움의 과정에 뒤따르는 두려움을 상당 부분 해소해 줄 책. 이런 책은 또한 좋은 글을 쓰는 원리가 어떤 주제의 글에서든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사실을, 가령 화학 분야의 잘 쓰인 글은 미술사 분야의 잘 쓰인 글과 동일한 글쓰기 원리를 따른다는 사실을 증명해 줄 것이다.
우리가 그간 생각했던 좋은 글쓰기와 실제 좋은 글쓰기는 다르다. 우리는 문학적 스테레오타입에 갇혀 그와 닮지 않은 내 글쓰기를 미워한다. 내 생각을 추론 과정에 따라 명료하게 풀어나갈 수 있다면 그 글쓰기는 좋은 글쓰기다. 아름다운 느낌을 주지 않아도 된다. 내가 이 학문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내가 오랫동안 사유한 내용의 전후 관계를 신나게 쓴다면 그걸로 이 글은 좋은 글이 된다.
화가 파울 클레는 일찍이 제자들에게 “예술이란 직관의 날개를 단 정확성”이라고 말한 바 있다. 나는 이 말이 좋은 글쓰기의 정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창작 과정 중 찾아오는 별난 생각들에 기꺼이 놀랄 준비가 되어 있는 클레의 열린 태도를 좋아한다. 너무나 정확하여 차가워 보일 수 있는 그의 그림은 창작자의 유머와 난센스, 변덕을 통해 비로소 생기를 얻는다. 클레의 그림에서는 언제나 그림의 물질성을 뛰어넘는 인간애가 느껴진다. 특히 그의 그림이 담고 있는 모든 난센스가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 순간, 나는 한 화가뿐 아니라 한 인간과 연결되어 있다고 느낀다.
책은 크게 1부와 2부로 나뉜다. 1부의 내용은 쓰기가 어떻게 배움의 도구가 되는지 그 필요성을 서술하고, 2부에는 범교과적 글쓰기의 실제, 구체적인 예시를 미술, 수학, 화학, 물리학 등 교과별로 충실하게 담았다.
특히 7장 《미술과 미술가들》 챕터는 내게 절망과 격려를 함께 안겨주었다. 훌륭한 예시 글들을 읽다 보면 어쩜 이렇게 훌륭한 표현력을 담고 있는지 감탄하느라 책장을 넘기지 못했고, 내 아둔한 글줄이 기억나 부끄럽기 그지없었다. 미술 글쓰기는 시각적 가능성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쓰는 이가 얼마나 많은 것을 보여줄 수 있는지를 인지하고, 읽는 이가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도록 촉매 지식을 전달해야 한다. 지식과 도전의식을 얼마나 매력적으로 전달할 수 있을 것인가. 중요한 건 저자 자신의 성품, 기쁨, 매력이다.
미술에 관한 글쓰기는 적어도 다음 두 가지 요건을 갖추어야 한다. 첫째, 독자가 그 글을 통해 ‘보는 법’을 배울 수 있어야 한다. 그림, 건축, 조각, 사진은 물론이고 우리가 일상 풍경에서 마주치는 온갖 시각적 요소들을 어떻게 보고 이해해야 하는지를 제시해야 하는 것이다. 둘째,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
시각적 이해는 대단히 다양한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이런 측면에서 시각적 이해는 기본적으로 언어적 이해와 다르지 않다. 론 레인저와 그의 충직한 동반자 톤토가 사막 위에 나 있는 말발굽 자국을 보고 무법자들이 방금 이 길을 지나갔으며, 흰 털이 섞인 붉은 말 위에 기막히게 아름다운 금발 아가씨를 인질로 태웠고, 이 무법자들의 두목이 탄 말은 최근 편자를 갈았다고 결론 내릴 때 우리는 얼마간의 어지럽혀진 모래흙을 보고 그토록 많은 정보를 읽어 내는 그들의 능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론 레인저와 톤토가 피카소의 「게르니카」 앞에 선다면 과연 그 그림에서 어떤 걸 읽어 낼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그림을 읽는 것은 또 다른 기술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활기 넘치는 문체, 사진처럼 명료한 이미지(가장자리가 솜털처럼 번져 있는 사출물, 크리스털처럼 투명한 화석)와 함께 내가 좋아하는 이 글의 특성은 바로 자신감이다. 이는 사진 작업의 창조적인 과정과 기술적인 과정을 모두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오랜 세월 지식을 쌓아 온 저자만이 보일 수 있는 당당함이다. 자기 견해를 토로하는 데 거침이 없고 단호하다. 여행 가이드 역할을 맡은 작가가 수줍음을 타서는 안 될 노릇이다. 우리는 카리스마 있는 가이드를 원한다. 훌륭한 음악 글쓰기가 좀 더 잘 들을 수 있도록 독자를 돕듯이, 훌륭한 미술 글쓰기는 좀 더 잘 볼 수 있도록 독자를 돕는다. 미술 글쓰기가 다루는 영역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만큼이나 넓다. 우리는 종종 눈앞에 직접 보여 주어야 무엇이 올바른지 이해한다.
시각예술에 대한 글을 쓰고자 한다면 이런 언어 외적인 요소의 중요성을 기억하라. 미술 작품에는 거의 언제나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의 어떤 것이 있다. 예를 들어 기억과 상상력은 시각 정보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 글을 소개하는 이유는 단순히 작가가 탁월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우리 책이 전제하고 있는 한 가지 사실, 즉 과학과 인문학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잘 보여 주는 글이기 때문이다. 미술 관련 글이지만 뛰어난 과학 글쓰기라 할 만하다. 명료하고, 생생하고, 유려하고, 우리가 경험에 비추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구체적인 사례들에 기초한 글이다
각자 자신이 지극히도 사랑하는 무언가가 있다. 사랑하는 것 없는 인간은 없다, 하나쯤은 있다. 고양이 한 마리만 키워도 내 새끼가 제일 이쁜 법, 온 동네 SNS에 사진과 글로 도배를 한다. 사랑하면 자랑하고 싶다. 글쓰기는 내가 제일 사랑하는 학문을 여기저기 예쁘게 알려주는 일이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학문을 공부하다 보면 쓰게 된다. 생각을 논리적으로 정리하는 과정에서 사랑은 깊어진다. 이를 명료하게 쓰다 보면 더 잘 알게 된다. 사랑하면 쓰게 된다. That's all. 이게 다다.
뭐라도, 뭔가 하나라도 써야겠다, 더 사랑하기 위해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