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이 피었다
치하야 아카네 지음, 김미형 옮김 / 엘리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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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전, 친하게 지내던 잉꼬부부가 있었다. 성실하고 믿음이 좋으며 똑똑하고 상냥하고 살림 잘 하는 오빠(이게 얼마나 어려운 조건인지 교회 다녀본 사람들은 다 안다)와 애교 많고 다정하고 너그러운 언니와의 만남은 어느 데 하나 흠잡을 데가 없었다. 특히 집안의 반대를 극복한 드라마틱 연애와 결혼 이야기는 두 사람의 ‘천생연분’을 의심하지 않게 했다. 그러나 십여 년이 지나 알게 된 두 사람의 현실은 나의 예상과 너무나 다른 곳에 있었다. 두 사람은 아이를 가질 수 없었다. 무자녀 주의자인 나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단 하나의 어려움 때문에 관계는 깨어졌고, 각자는 다른 사람과 재혼해 (아이를 갖지 않고, 혹은 아이를 여러 명 갖고) 너무나 다른 삶을 또 달리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첫 꽃》의 에피소드를 읽으며 잠시 그들을 생각했다. 인간은 복잡한 존재다. 그에게 가장 결정적인 사건이 무엇인지 타인은 절대 알 수 없다. 각자가 품고 있는 절대적인 무엇 때문에 사람들은 상처를 얻고, 한편으로 이야기를, 개성을 얻는다. 『벚꽃이 피었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평범하지 않다. 조금씩, 아니 많이 비뚤어진 데가 있는 이들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을지도 모른다. 책표지에는 “조금은 서투른 남자와 여자의 일곱 가지 사랑 이야기”라는 문장이 인쇄되어 있다. 나는 서툴다기보다는 불안한 남녀라고 말하고 싶다. 일곱 이야기의 주인공은 각자의 상처를 더 아프게 하는 것으로 자기 존재를 확인한다. 무표정한 미술관 직원, 남편이 잊지 못하는 사별한 아내 때문에 자기를 상처 주는 여자, 아빠에게 상처받은 엄마를 미워하면서 자기의 여성성을 불안해하는 아이, 뚱뚱한 외모에 부끄러워하면서 자신을 낮추는 남자, 사회성 떨어지고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것 없는 도서관 아르바이트생, 소녀의 유령을 보는 부정한 욕망을 지닌 소녀를 통해 우리 모두는 성치 못한 인간이라는 것을 확인한다. 그리고 나 역시 성한 데 없는 상처투성이, 불안해서 비뚤어진 인간이란 데에서 안심한다.

구구절절 적었지만 이 책의 위로는 《작가의 말》에서 폭발하고 맺음한다. “사람은 서로를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하지만 이어질 수는 있다. 아름다운 것, 다정한 것, 강렬한 것, 마음을 뒤흔드는 그런 것들을 접하면 사람의 마음은 한순간에 움직인다. 그럴 때에 교감할 수 있는 누군가를 만난다면, 무척 행복한 일이다. 그 순간은 분명 그 사람을 지탱해줄 것이다.” 부족하고 복잡한 인간 가운데 우리는 함께 불안하고 함께 서글퍼도 좋을 한 사람을 찾아 헤맨다. 교감할 수 있는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나는 진심으로 언젠가의 봄날, “그 사람과 함께 벚꽃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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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장소, 환대 현대의 지성 159
김현경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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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너무 설웁다”

벌써 사회생활한지 15년에 가까워진다. 몇 번의 이직 끝에 자리 잡은 이 직업도 이것저것 다 합하면 10년에 가깝다. 아직은 경력 많은 막내 역할이지만 어찌 됐건 기득권에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자주 서러움을 생각한다. 나의 사람됨이 사람으로 존중되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기 때문이다. 동료에게도, 고객님(?)에게도. 나와 당신의 존엄이 지극히 보호받을 권리는 나날이 희미해지는 것 같다. 사람이 평등하다는 것, 인권은 최우선 권리라는 것은 문자 상의 언명일 뿐이다. 문자와 현실은 일치되지 않는다. 너무나 당연한 그것이 안 되어서 나와 당신은 매일 좌절한다.

독서모임 책으로 『사람, 장소, 환대』를 추천한 이유는 사람들과 부대끼는 매일이 나날이 서러웠기 때문이며, 조건 없는 환대가 간절했기 때문이다. 나는 ‘환대’라는 단어에 무너진다. 읽기만 해도 듣기만 해도 눈물이 난다. 한 번도 예외가 없었다. ‘환대’만큼 인간에게 너그러운 단어가 없다. 저자 김현경은 사람, 장소, 환대라는 세 가지 상호작용하는 키워드를 사용하여, 나의 ‘사람다움’을 위해 타인이 무엇을 해주었으면 좋겠는지, 타인의 ‘사람다움’을 위해 내가 무엇을 해줄 것인지 생각해보게 한다.

저자는 ‘사회적 성원권’에 대해 지속적으로 강조한다. 성원권이라 함은 사람으로 인정된다는 것이다. 인간과 사람은 다르다. ‘사람’은 사회적인 의미를 포함하는 인간인 것이다. 나 홀로 사람임을 주장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타인을 통해서 나는 사람이 된다. 상호작용 속에서, 의례 속에서 나는 끊임없이 사람으로 확인된다. 이것이 환대이다. 이를 위해서 나는 끊임없이 사람을 연기하고 사람됨을 수행한다. 이 과정에서 가면도 쓰고, 내 얼굴을 위해 모욕을 거부하고 명예를 지킨다. 신성함을 지키려고 존엄을 몇 번이고 확인하기도 한다. 굴욕을 인정하지 않기도 한다. 저자는 여러 관점을 제시하고 관계성을 서술하지만 나는 사람의 본질이 생명의 영역에 사람됨이 더해지기에 신성하다고 판단했다. 인간은 신성한 존재이므로 모욕 받을 수 없는 존재이고, 굴욕 받지 않기 위해 존엄을 지켜주어야 한다. 이것은 ‘사람’이기에 누구든 서로 함께해야 하는 불문율이다. 사람은 타인에 의해, 타인과 함께 온전해질 수 있다.

또한 ‘사람은 장소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저자는 강조한다. “장소는 정체성을 구성하는 요소이기 때문”이고, 어떤 의미로는 장소가 (시간과 결합하여) 사람을 결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머물 자리, 그가 현상할 자리, 그가 사람으로서 사회적 활동을 할 자리를 주어야 한다. 한편 장소는 ‘오염의 메타포’로도 설명된다. “더럽다는 것은 제자리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라는 더글러스의 명제는 자주 등장하면서 장소성이 사람을 제약하기도 한다는 것을 알린다. 이 온건해 보이는 명제 뒤에는 차별에 대한 은폐가 숨어 있다. 하인, 노예에 대한 이야기일 뿐 아니라, 바깥-안으로 남-여의 장소를 구분하는 가부장제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저자는 다양한 예시로 안-밖의 구별이 대칭적이지 않으며 장소의 제한이 지배성을 강화한다는 것을 알린다.

본격적인 환대를 설명하기에 앞서, 저자는 상호작용과 의례를 통해 유동적으로 확인되는 인격에 대한 설명을 추가한다. 낙인과 배제, 신분과 모욕, 굴욕과 명예를 통해 사회는 역동적으로 사람에 작용한다. 사회가 사람대접을 해 주고 안 해주고의 문제는 한 개인의 존엄에 달린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때때로 폭력으로 존재감을 나타낸다. 얼굴을 유지하는 데는 돈이 들며, 사교라고 하는 명예가 걸린 게임에 참여하는 데는 자본이 든다. 옷과 신분, 경제력, 각종 관계성으로 사람은 구분된다. 이렇게 움직이면 굴러가 버릴 가벼운 권력의 차이로 사람의 값어치와 존엄은 달라진다. 경제적인 소외가 사회적으로 확장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되어버렸다.

환대란 무엇인가, 저자의 말을 빌자면 “환대란 타자에게 자리를 주는 것, 또는 그의 자리를 인정하는 것, 그가 편안하게 ‘사람’을 연기할 수 있도록 돕는 것, 그리하여 그를 다시 한 번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것이며, 주는 힘을 주는 것이며, 받는 사람을 줄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것”이다. 나는 환대가 상대방을 ‘나와 같은 사람으로 보아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와 같은 장소에 서서, 같은 눈높이에서, 함께 손을 잡는 일’이 나의 환대다. 이것을 생각하면 페미니즘이 다른 것이 아니다. 차이와 구별을 생각하기보다는 함께를 생각하는 것이 환대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페미니즘이 단순해진다. 남과 여가, 그리고 또 다른 성이 함께 현상하는 것이 환대다. 저자는 ‘절대적 환대’라는 말로 환대의 정점을 설명한다. 신원을 묻지 않고, 보답을 요구하지 않으며, 상대방의 적대에도 불구하고 지속되는 ‘복수하지 않는’ 환대가 그것이다. 그리고 사회란 본디 절대적 환대를 통해 성립한다고 강조하며, 아직 누리지 못한 이 유토피아가 “사회운동의 현재 속에서 그런(절대적 환대의) 사회는 언제나 도래해 있다"라고 천명한다. 그리고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이상을 담대히 선언하는 것, 이것이 진보다.

저자는 1장 《사람의 개념》으로 시작해 7장 《신성한 것》으로 마무리 짓는다. “자기를 위해서 나서주는 제삼자가 한 사람이라도 있는 한, 벌거벗은 생명은 아직 완전히 벌거벗은 게 아니다.” 그러므로 신성을 가진 사람을 절대적으로 환대해야 한다. 단 한 사람의 환대가 있다면, 몸도 마음도 헐벗은 한 사람은 기꺼이 환대 받을 권리를 얻는다. 한 사람 때문에 또 한 사람의 인생은 무너지기도 하고 부활하기도 한다. 사람은 사람으로 인해 장소를 얻고, 또한 사람으로 인해 환대 받는다. ‘인간’이 온전해지는 것은 ‘사람’에게 있다.

나는, ‘환대’라는 단어로 나에게 무너지는 설운 한 사람을 따뜻하게 끌어안고 싶다. 그리고 “아름다운 그대여, 당신이 나를 하루 더 살게 해요.”라고 말해주고 싶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고 바라는 따뜻하고 아름답고 절대적인 환대다. 단 한 사람이 있다면, 얼마든지 무너져도 된다. 전적으로 나에게 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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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너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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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마흔셋에 윌리엄 스토너는 다른 사람들이 훨씬 더 어린 나이에 이미 배운 것을 배웠다. 첫사랑이 곧 마지막 사랑은 아니며, 사랑은 종착역이 아니라 사람들이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이라는 것.

이제 중년이 된 그는 사랑이란 은총도 환상도 아니라는 것을 조금씩 깨닫기 시작했다. 사랑이란 무언가 되어가는 행위, 순간순간 하루하루 의지와 지성과 마음으로 창조되고 수정되는 상태였다.”

소설이나 문학작품을 잘 읽지 않는다. 이야기의 흐름을 꾸준히 따라갈 만큼 마음에 여유가 없는 삶의 굴곡을 지나가고 있다. 나에게는 해야 할 일이 아주 많고, 내게로 온 그 일에 애정을 쏟아주어야 한다. 이 삶을 가꾸는 데에만도 시간이 부족하다. 게다가 냉정한 나는 타인의 삶에 별 관심이 없다. 별로 궁금하지 않다.

스토너에 대한 찬사를 족히 들었다. 내가 궁금했던 것은 이 책의 미문이었다. 아름다운 인물이나 풍경의 묘사를 필사나 하고자 고르고 펼쳤다. 한 사람이 문학을 사랑하게 되고 고난 가운데 삶을 극복한다. 읽다 보면 고통스럽겠지. 인간의 삶이란 게 뭐 그런... 원래 슬픈 거니까. 슬픈 건 당연한 거니까.

스토너의 공부는 진지했지만 엄청난 두각을 나타내지는 않았으며, 결혼생활도 서툴렀다. 너무나 보통의 삶을 하루 하루 세어가는 나날들이었다. 나쁘게 표현하면 지겨운, 아름답게 표현하면 잔잔한. 그러나 삶은 가끔씩 반짝이고 그 반짝임은 온도로 남아 삶을 오래 버티게 한다.

마흔을 앞두고 있는 나는 자주 생각한다. 진정한 삶은 마흔부터인지도 모르겠다고. 삶이 그저 ‘살아가는’ 것뿐이라는 것을 알아버린 순간부터야 삶은 한 겹 한 겹 쌓이기 시작하며, 그 겹겹이 온기가 머물러 붙는 것이다. 사랑이란 은총도 환상도 아니라는 것을 알아버렸다. 그렇기에 내 삶에 이미 보잘것없는 모습의 사랑이 주어져 있으며, 나의 역할대로 그 사랑을 재설정해 나가는 매일이 빛나는 삶으로 남는다. 은총도 환상도 내가 만들어나갈 수 있는 것임을 새겨둔다. 사랑은 삶을 몇 번이고 재설정한다.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제한 없이 변화되고야 만다. 과거의 사랑이 있어주지 않았다면 나는 이미 내가 아니며, 미래의 사랑이 없을 것이라면 나는 결국 아무 것도 아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오래 계속된다.

“이것이 나의 인생이다.” 잠시 뒤돌아 삶을 세어볼 때면 단단히 삼키는 문장 하나이다. 스토너는 자신의 삶을 재설정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몇 번이고 돌아서 “이것이 나의 인생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었으리라 믿는다. 스토너의 인생을 빌려 읽었다. 어떤 사람은 스토너의 인생이 실패한 것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특별한 희망도 목표도 없고, 권력 싸움에서 밀려났고, 사랑했던 여자도 (그녀의 커리어를 짓밟아버리고) 떠나보냈다. 너무나 사랑했던 딸의 인생도 상처 가득한데 어찌 도와줄 수도 없다. 그저그런 삶처럼 보여도 할 수 없다. 마지막에 다가갈수록 먹먹하고 경건해졌다. 내가 경건하게 여기는 내 삶의 굴곡과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아주 많이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자신이 생겼다. 나의 인생도 이렇게 숭고하게 서술될 수 있는 삶이다. 그리고 나의 삶은 내가 직접 서술해 나간다.

이제 곧 마흔이다. 나는 아름답게 살 것이고 이보다 더 아름다운 이야기로 남을 것이다. “이것이 나의 인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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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 이야기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 작가정신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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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믿는가?” 아주 오래전부터 습관처럼 물어온 질문이다. “나는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 몇 년 전부터 새로이 묻게 된 의문이다. 보이지 않고 잡히지 않는 것, 도저히 믿으려야 믿을 수 없는 것을 믿고 있는 자신이 가끔은 신기하다. 분명 나는 신의 존재를 믿는다. 그런데 그 존재를 왜, 어떻게 믿게 되었는가. 그건 가능한 것인가. 이유 중 하나는 분명하다. 절절히 외로워서일 것이다.

삶의 고달픈 시기가 닥칠 때마다 나는 늘 혼자였다. 누군가 손을 내밀어 주기를 바라지 않은지는 너무 오래됐다. 어떤 일이 벌어져도 ‘당연히’ 이 일은 내가 어떻게든 건사해야 한다는 생각으로만 버텨왔다. 인간은 그런 나를 대개 질려 했다. 내가 싫지 않은 사람들은 나와 똑같은 사람들, 그들도 언제나 홀로 자기 일에 휘청거리고 있었기에 언제나 서로, 멀리서 외로웠다. 그래서 나는 용기 있게 신을 떠나지 못했다. 한 번도 완벽히 홀로이고 싶지 않았으므로.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잡히지 않는 신에게, 말을 걸고 손을 내밀고 온기를 구했다. 그것만으로도 조금 버틸 만 했기에. 그것만으로도 신의 존재는 너무나 컸기에 그랬다. 나에게 삶은 늘 생존 투쟁에 가까웠으므로. ‘잔인한 완전체’로서라도 신은 필요했다.

『파이 이야기』의 원제는 ‘Life of Pi’다. 파이의 삶 전반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파이의 생명’에 초점을 둔 이야기일 수도 있는 것이다. 삶과 생존에 대한 내용이 중심을 차지하고 있지만, 파이의 삶의 태도가 인상적으로 읽힌다. 파이는 동물학과 종교학을 공부하는 우수한 학생이다. 신을 사랑하고 동물을 사랑하는 인간이다. 글의 중심에서 신과 동물은, 1, 2, 3부를 거쳐 지속적으로 등장하며 파이를 지탱하는 뼈대를 이룬다. 모든 종교에 열린 마음을 가진 파이는 한편 신을 수집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럼으로 인해 마음이 부유해진다. 가장 멋진 신들과 함께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가 “저는 신을 사랑하고 싶을 뿐이에요.”라고 말하고, “(아름답고 위풍당당한) 신의 존재는 최고의 보상인 것을.”이라고 생각하는 마음은 2부부터 시작하는 표류와 생존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동물에 대한 애정은 이야기 전반을 통 들어 훌륭한 비유가 되어 버틸 힘과 유머를 제공한다.

영화에서만 나오는 신에 대한 대사가 있다. “종교는 방이 많은 집과 같아요.” / “의심의 방은 없어요?” / “층마다 아주 많죠.” // “의심은 좋은 거예요. 믿음을 유지시켜 주죠. 시험에 들기 전까지는 믿음의 힘을 모르니까.” 어쩌면 신을 믿는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힘’을 기르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나는 신을 믿을 수 있는 인간과 믿지 못하는 인간의 DNA가 따로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DNA를 넘어서) 신을 믿지 않거나 믿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신비롭다고 생각한다. 신을 믿거나 믿지 않거나, 신의 존재와는 상관없다. 신이므로. 신은 그 누구라도 사랑하는 ‘아름답고 위풍당당한’ 존재다. 그에게 사랑받을 수 있다면, 사랑받고 의지하면 그만인 사람도 있는 것이다.

신형철은 말한다. “고통의 무의미를 견딜 수 없어 신을 발명한 사람들”이 있다고. 나는 그 마음을 이해한다. 나는 신을 믿고 있지만 내 고통에 손대지 않는 신을 익히 경험해 알기 때문이다. 《무죄한 이들의 고통에 대하여》와 《무정한 신 아래에서 사랑을 발명하다》는 인간의 고통 앞에서, ‘살기 위해’ 신과 사랑에 매달리는 인간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맞다. 저 글 전자는 세월호 유족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들은 대부분 신을 믿는다. 자신을 배신한 종교인들을 미워하면서도 신에 기대어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들이다. 파이는 자신을 잡아먹어도 이상하지 않을 벵골호랑이를 의지하여 삶을 연명하지 않았던가. 고통마저도 의지하여 생을 뼈저리게 느끼지 않았던가. 고통마저도 삶의 추동력으로 삼는 마당에 환상 같은 신을 의지하면 뭐 어떻다는 말이냐. 솔직히 나는, 환상이라도 좋겠다. 나에게는 신이 필요하다. 그가 나를 위무해 주기를 바란다. 신을 이용해서라도 살고 싶다.

죽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은 순간에 나는 왜 살고 싶은 실낱같은 희망을 버리지 못하는가. “내 안의 뭔가가 생명을 포기하려 하지 않았다. 놔주려 하지 않았다. 마지막 순간까지 싸우고 싶어 했다. 내 어떤 부분이 마음을 휘어잡았는지 모르겠다.”라는 파이의 마음에 공감했다. 책은 벵골 호랑이 리처드 파커를 ‘생에 대한 욕망’이나 ‘생존 의지’로 표현하는 것 같다. 나는 생존 앞에 선 나의 사악함을 떠올렸다. 나 자신에게서 자신을 증오하기 충분한 근거를 발견하는 순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야 한다는 욕망이 튀어나온다. 한편 파이는 순간순간을 기록하고 또 기록한다. 시련은 바쁘게 극복한다. 종이보다 펜이 먼저 떨어졌다. 잉크가 더 남아있었다면 227일간의 기록을 모두 남겼으리라. 나는 왜 꾸준히 쓰고 싶은가, 살아있다는 감각을 느끼기 위해서다. 파이는 더욱 그랬을 것이다.

어떤 인간들은 고통스러울수록 삶에 집착한다. 감각이 깊고 선명할수록 살고픈 욕망이 커져간다. 『파이 이야기』를 읽고 보면서 나는 정말 살고 싶었다. 삶에 있어 어떠한 정답이 있겠는가. 아무것도 없다. 정녕, 끝까지 살아남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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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경사 바틀비 - 미국 창비세계문학 단편선
허먼 멜빌 외 지음, 한기욱 엮고 옮김 / 창비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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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종래 갈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필경사 바틀비(Bartleby, the Scrivener)』를 읽으면서 내내 들었던 생각. 아니 이건 내가 내내 집착해 온 생각 조각이다. 표제작인 「필경사 바틀비」뿐 아니라 너새니얼 호손의 「젊은 굿맨 브라운」, 에드거 앨런 포우의 「검은 고양이」, 스티븐 크레인의 「소형 보트」, 윌리엄 포크너의 「에밀리에게 장미를」을 읽으며 헤아린 답은 인간의 안식이었다.

사람은 안식할 곳을 찾아 헤맨다. 마음 둘 곳 하나에 눈물짓는 인간이 머무는 곳은 햇빛이 간신히 드는 창가이기도 하고, 창문도 없는 작은 단칸방이기도, 기대고픈 이의 따뜻한 품 안이기도 하며 그 사람의 눈부처 안이기도 하다. 그것도 없는 사람들, 그것마저 빼앗긴 사람들이 찾을 안식은 죽음이다.

오랜만에 신뢰할 만한 사람 아주 여럿과 책 이야기를 나누었다. 같은 책을 읽고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내게 금같이 귀하다. 나는 이 시간을 얻으려 한 달의 시간을 흘려보내는지 모른다. 이런 대화는 나를 살게 한다. 단언컨대 현재는 이곳이 나의 안식처다. 「필경사 바틀비」를 읽은 각자는 자기의 신발을 신고 바틀비를 읽는다. 누군가는 바틀비가 되어 글을 쓰고 누군가는 화자인 고용주가 되어 그를 쫓아낸다(나 같은 단순빵들이 그렇다). 바틀비를 노조의 모습으로 읽으신 분부터 월가가 들어서며 집을 잃은 원주민으로 읽으신 분까지… ‘자본주의와 불화하는 예술가’, ‘소외된 근대인의 전형’, ‘자본주의를 거부하는 인물’이라는 교과서적 해석 외에도 주인공은 제 나름의 해석이 가능하다. 멜빌이 만든 모호한 캐릭터는 궁금증을 불러일으킬수록 무한한 인물 스펙트럼의 별을 찍는다.

바틀비는 아파서 매력적이다. 맑고 밝고 사회성 좋은 인간이 아니라 뾰족한 인간이다. 거기에 뾰족한 끝이 부러져 더 날카롭고 연약하다. 그래서 우리는 그에게 마음을 쏟는다. 자신이 가진 가슴 안의 다친 부분을 맞추어 본다. 나는 생각했다, 바틀비는 나의 내일이 아닐까. 내가 “그렇게 안 하고 싶습니다.”라고 계속 말했을 때의 내일. 그래서 나는 “그렇게 안 하고 싶습니다.”를 감추고 생글생글 웃으며 “그렇게 하겠습니다.”를 주문처럼 외우며 직장에서의 하루하루를 흘려보낸다. 내 일은 안팎으로 100퍼센트 서비스직이다. 변명의 여지없이 나는 거짓말쟁이다.

그러나 이렇게 살아간다고 뭐가 크게 달라질까. 모든 인간의 끝은 동일하다. 어쩌면 공평하다. 똑같은 죽음이 인간을 기다리는데 뭘. 소설이 끝마무리하듯 “아 바틀비여, 아 인간이여.” 가면을 쓰고 살거나 바틀비처럼 거짓 없이 살거나 우리가 가는 곳은 같은 장소다. 바틀비가 먹는 것까지 “그렇게 안 하고 싶습니다.” 거부하며 생을 마무리 지었을 때에야 나는 안심했다, 드디어 그가 안식에 들었구나 싶어서. 그에게도 생은 고(苦)였으리라. 배달 불능 우편 취급소(The Dead Letter)에서 일하던 그의 시간이 죽음에 매혹되는 시간이었던 아니던, 소설의 화자가 자기를 변호하고 싶어 덧붙인 에피소드건 아니건, 나는 그의 마지막 얼마간이 편안하지 않았으므로 이 마지막에 안심하고 싶다. 덧붙여 ‘젊은 굿맨 브라운’의 혼란과 장미를 받아야 했던 ‘에밀리’의 선택까지도. 꽤 많은 것들이 죽음으로 해결되지는 않아도 이로 마무리된다.

우리나라에 5급 기술직 공무원으로 필경사(筆耕事, Scrivener)가 남아 있다. 그의 글씨가 놀랍도록 아름답다. 누군가는 그를 부러워하고 누군가는 그를 비난하며 ‘세금 낭비’라고 말한다. 이제는 부정할 수 없는 디지털 시대에 손으로 쓰고 다듬고 새기는 문서는 정녕 낭비일까? 바틀비의 시대만 해도 필경사는 의심의 여지없는 전문직이었다. 이제는 누구든 빠르고 정확한 프린터 말고 핸드 라이터를 원하지 않는다. 다만 필경(筆耕)을 캘리그래피, 손글씨라는 이름을 붙여 환상이나 취미로 남겨둘 뿐. ‘가성비’에 목매는 사람들은 언제까지 이 직업을 공무직으로 남겨주려나. 나는 지금까지도 악필을 교정하려 글씨 연습을 한다. 글씨는 글을 전하려 쓰는 법, 고운 글씨로 좋은 글을 써서 건네고 싶다. 뼛속까지 아날로그 인간인 나는 아무래도 바틀비 쪽에 좀 더 가까운 것 같으니, 바틀비의 이야기가 오래 슬프고 두려워서. 멜빌이 묘사한 연약한 얼굴과 무기력한 몸짓, “그렇게 안 하고 싶습니다.”라는 단호한 말이 마음에 오래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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