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장소, 환대 현대의 지성 159
김현경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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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너무 설웁다”

벌써 사회생활한지 15년에 가까워진다. 몇 번의 이직 끝에 자리 잡은 이 직업도 이것저것 다 합하면 10년에 가깝다. 아직은 경력 많은 막내 역할이지만 어찌 됐건 기득권에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자주 서러움을 생각한다. 나의 사람됨이 사람으로 존중되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기 때문이다. 동료에게도, 고객님(?)에게도. 나와 당신의 존엄이 지극히 보호받을 권리는 나날이 희미해지는 것 같다. 사람이 평등하다는 것, 인권은 최우선 권리라는 것은 문자 상의 언명일 뿐이다. 문자와 현실은 일치되지 않는다. 너무나 당연한 그것이 안 되어서 나와 당신은 매일 좌절한다.

독서모임 책으로 『사람, 장소, 환대』를 추천한 이유는 사람들과 부대끼는 매일이 나날이 서러웠기 때문이며, 조건 없는 환대가 간절했기 때문이다. 나는 ‘환대’라는 단어에 무너진다. 읽기만 해도 듣기만 해도 눈물이 난다. 한 번도 예외가 없었다. ‘환대’만큼 인간에게 너그러운 단어가 없다. 저자 김현경은 사람, 장소, 환대라는 세 가지 상호작용하는 키워드를 사용하여, 나의 ‘사람다움’을 위해 타인이 무엇을 해주었으면 좋겠는지, 타인의 ‘사람다움’을 위해 내가 무엇을 해줄 것인지 생각해보게 한다.

저자는 ‘사회적 성원권’에 대해 지속적으로 강조한다. 성원권이라 함은 사람으로 인정된다는 것이다. 인간과 사람은 다르다. ‘사람’은 사회적인 의미를 포함하는 인간인 것이다. 나 홀로 사람임을 주장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타인을 통해서 나는 사람이 된다. 상호작용 속에서, 의례 속에서 나는 끊임없이 사람으로 확인된다. 이것이 환대이다. 이를 위해서 나는 끊임없이 사람을 연기하고 사람됨을 수행한다. 이 과정에서 가면도 쓰고, 내 얼굴을 위해 모욕을 거부하고 명예를 지킨다. 신성함을 지키려고 존엄을 몇 번이고 확인하기도 한다. 굴욕을 인정하지 않기도 한다. 저자는 여러 관점을 제시하고 관계성을 서술하지만 나는 사람의 본질이 생명의 영역에 사람됨이 더해지기에 신성하다고 판단했다. 인간은 신성한 존재이므로 모욕 받을 수 없는 존재이고, 굴욕 받지 않기 위해 존엄을 지켜주어야 한다. 이것은 ‘사람’이기에 누구든 서로 함께해야 하는 불문율이다. 사람은 타인에 의해, 타인과 함께 온전해질 수 있다.

또한 ‘사람은 장소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저자는 강조한다. “장소는 정체성을 구성하는 요소이기 때문”이고, 어떤 의미로는 장소가 (시간과 결합하여) 사람을 결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머물 자리, 그가 현상할 자리, 그가 사람으로서 사회적 활동을 할 자리를 주어야 한다. 한편 장소는 ‘오염의 메타포’로도 설명된다. “더럽다는 것은 제자리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라는 더글러스의 명제는 자주 등장하면서 장소성이 사람을 제약하기도 한다는 것을 알린다. 이 온건해 보이는 명제 뒤에는 차별에 대한 은폐가 숨어 있다. 하인, 노예에 대한 이야기일 뿐 아니라, 바깥-안으로 남-여의 장소를 구분하는 가부장제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저자는 다양한 예시로 안-밖의 구별이 대칭적이지 않으며 장소의 제한이 지배성을 강화한다는 것을 알린다.

본격적인 환대를 설명하기에 앞서, 저자는 상호작용과 의례를 통해 유동적으로 확인되는 인격에 대한 설명을 추가한다. 낙인과 배제, 신분과 모욕, 굴욕과 명예를 통해 사회는 역동적으로 사람에 작용한다. 사회가 사람대접을 해 주고 안 해주고의 문제는 한 개인의 존엄에 달린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때때로 폭력으로 존재감을 나타낸다. 얼굴을 유지하는 데는 돈이 들며, 사교라고 하는 명예가 걸린 게임에 참여하는 데는 자본이 든다. 옷과 신분, 경제력, 각종 관계성으로 사람은 구분된다. 이렇게 움직이면 굴러가 버릴 가벼운 권력의 차이로 사람의 값어치와 존엄은 달라진다. 경제적인 소외가 사회적으로 확장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되어버렸다.

환대란 무엇인가, 저자의 말을 빌자면 “환대란 타자에게 자리를 주는 것, 또는 그의 자리를 인정하는 것, 그가 편안하게 ‘사람’을 연기할 수 있도록 돕는 것, 그리하여 그를 다시 한 번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것이며, 주는 힘을 주는 것이며, 받는 사람을 줄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것”이다. 나는 환대가 상대방을 ‘나와 같은 사람으로 보아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와 같은 장소에 서서, 같은 눈높이에서, 함께 손을 잡는 일’이 나의 환대다. 이것을 생각하면 페미니즘이 다른 것이 아니다. 차이와 구별을 생각하기보다는 함께를 생각하는 것이 환대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페미니즘이 단순해진다. 남과 여가, 그리고 또 다른 성이 함께 현상하는 것이 환대다. 저자는 ‘절대적 환대’라는 말로 환대의 정점을 설명한다. 신원을 묻지 않고, 보답을 요구하지 않으며, 상대방의 적대에도 불구하고 지속되는 ‘복수하지 않는’ 환대가 그것이다. 그리고 사회란 본디 절대적 환대를 통해 성립한다고 강조하며, 아직 누리지 못한 이 유토피아가 “사회운동의 현재 속에서 그런(절대적 환대의) 사회는 언제나 도래해 있다"라고 천명한다. 그리고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이상을 담대히 선언하는 것, 이것이 진보다.

저자는 1장 《사람의 개념》으로 시작해 7장 《신성한 것》으로 마무리 짓는다. “자기를 위해서 나서주는 제삼자가 한 사람이라도 있는 한, 벌거벗은 생명은 아직 완전히 벌거벗은 게 아니다.” 그러므로 신성을 가진 사람을 절대적으로 환대해야 한다. 단 한 사람의 환대가 있다면, 몸도 마음도 헐벗은 한 사람은 기꺼이 환대 받을 권리를 얻는다. 한 사람 때문에 또 한 사람의 인생은 무너지기도 하고 부활하기도 한다. 사람은 사람으로 인해 장소를 얻고, 또한 사람으로 인해 환대 받는다. ‘인간’이 온전해지는 것은 ‘사람’에게 있다.

나는, ‘환대’라는 단어로 나에게 무너지는 설운 한 사람을 따뜻하게 끌어안고 싶다. 그리고 “아름다운 그대여, 당신이 나를 하루 더 살게 해요.”라고 말해주고 싶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고 바라는 따뜻하고 아름답고 절대적인 환대다. 단 한 사람이 있다면, 얼마든지 무너져도 된다. 전적으로 나에게 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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