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경사 바틀비 - 미국 창비세계문학 단편선
허먼 멜빌 외 지음, 한기욱 엮고 옮김 / 창비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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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종래 갈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필경사 바틀비(Bartleby, the Scrivener)』를 읽으면서 내내 들었던 생각. 아니 이건 내가 내내 집착해 온 생각 조각이다. 표제작인 「필경사 바틀비」뿐 아니라 너새니얼 호손의 「젊은 굿맨 브라운」, 에드거 앨런 포우의 「검은 고양이」, 스티븐 크레인의 「소형 보트」, 윌리엄 포크너의 「에밀리에게 장미를」을 읽으며 헤아린 답은 인간의 안식이었다.

사람은 안식할 곳을 찾아 헤맨다. 마음 둘 곳 하나에 눈물짓는 인간이 머무는 곳은 햇빛이 간신히 드는 창가이기도 하고, 창문도 없는 작은 단칸방이기도, 기대고픈 이의 따뜻한 품 안이기도 하며 그 사람의 눈부처 안이기도 하다. 그것도 없는 사람들, 그것마저 빼앗긴 사람들이 찾을 안식은 죽음이다.

오랜만에 신뢰할 만한 사람 아주 여럿과 책 이야기를 나누었다. 같은 책을 읽고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내게 금같이 귀하다. 나는 이 시간을 얻으려 한 달의 시간을 흘려보내는지 모른다. 이런 대화는 나를 살게 한다. 단언컨대 현재는 이곳이 나의 안식처다. 「필경사 바틀비」를 읽은 각자는 자기의 신발을 신고 바틀비를 읽는다. 누군가는 바틀비가 되어 글을 쓰고 누군가는 화자인 고용주가 되어 그를 쫓아낸다(나 같은 단순빵들이 그렇다). 바틀비를 노조의 모습으로 읽으신 분부터 월가가 들어서며 집을 잃은 원주민으로 읽으신 분까지… ‘자본주의와 불화하는 예술가’, ‘소외된 근대인의 전형’, ‘자본주의를 거부하는 인물’이라는 교과서적 해석 외에도 주인공은 제 나름의 해석이 가능하다. 멜빌이 만든 모호한 캐릭터는 궁금증을 불러일으킬수록 무한한 인물 스펙트럼의 별을 찍는다.

바틀비는 아파서 매력적이다. 맑고 밝고 사회성 좋은 인간이 아니라 뾰족한 인간이다. 거기에 뾰족한 끝이 부러져 더 날카롭고 연약하다. 그래서 우리는 그에게 마음을 쏟는다. 자신이 가진 가슴 안의 다친 부분을 맞추어 본다. 나는 생각했다, 바틀비는 나의 내일이 아닐까. 내가 “그렇게 안 하고 싶습니다.”라고 계속 말했을 때의 내일. 그래서 나는 “그렇게 안 하고 싶습니다.”를 감추고 생글생글 웃으며 “그렇게 하겠습니다.”를 주문처럼 외우며 직장에서의 하루하루를 흘려보낸다. 내 일은 안팎으로 100퍼센트 서비스직이다. 변명의 여지없이 나는 거짓말쟁이다.

그러나 이렇게 살아간다고 뭐가 크게 달라질까. 모든 인간의 끝은 동일하다. 어쩌면 공평하다. 똑같은 죽음이 인간을 기다리는데 뭘. 소설이 끝마무리하듯 “아 바틀비여, 아 인간이여.” 가면을 쓰고 살거나 바틀비처럼 거짓 없이 살거나 우리가 가는 곳은 같은 장소다. 바틀비가 먹는 것까지 “그렇게 안 하고 싶습니다.” 거부하며 생을 마무리 지었을 때에야 나는 안심했다, 드디어 그가 안식에 들었구나 싶어서. 그에게도 생은 고(苦)였으리라. 배달 불능 우편 취급소(The Dead Letter)에서 일하던 그의 시간이 죽음에 매혹되는 시간이었던 아니던, 소설의 화자가 자기를 변호하고 싶어 덧붙인 에피소드건 아니건, 나는 그의 마지막 얼마간이 편안하지 않았으므로 이 마지막에 안심하고 싶다. 덧붙여 ‘젊은 굿맨 브라운’의 혼란과 장미를 받아야 했던 ‘에밀리’의 선택까지도. 꽤 많은 것들이 죽음으로 해결되지는 않아도 이로 마무리된다.

우리나라에 5급 기술직 공무원으로 필경사(筆耕事, Scrivener)가 남아 있다. 그의 글씨가 놀랍도록 아름답다. 누군가는 그를 부러워하고 누군가는 그를 비난하며 ‘세금 낭비’라고 말한다. 이제는 부정할 수 없는 디지털 시대에 손으로 쓰고 다듬고 새기는 문서는 정녕 낭비일까? 바틀비의 시대만 해도 필경사는 의심의 여지없는 전문직이었다. 이제는 누구든 빠르고 정확한 프린터 말고 핸드 라이터를 원하지 않는다. 다만 필경(筆耕)을 캘리그래피, 손글씨라는 이름을 붙여 환상이나 취미로 남겨둘 뿐. ‘가성비’에 목매는 사람들은 언제까지 이 직업을 공무직으로 남겨주려나. 나는 지금까지도 악필을 교정하려 글씨 연습을 한다. 글씨는 글을 전하려 쓰는 법, 고운 글씨로 좋은 글을 써서 건네고 싶다. 뼛속까지 아날로그 인간인 나는 아무래도 바틀비 쪽에 좀 더 가까운 것 같으니, 바틀비의 이야기가 오래 슬프고 두려워서. 멜빌이 묘사한 연약한 얼굴과 무기력한 몸짓, “그렇게 안 하고 싶습니다.”라는 단호한 말이 마음에 오래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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