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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 이야기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 작가정신 / 2004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나는 왜 믿는가?” 아주 오래전부터 습관처럼 물어온 질문이다. “나는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 몇 년 전부터 새로이 묻게 된 의문이다. 보이지 않고 잡히지 않는 것, 도저히 믿으려야 믿을 수 없는 것을 믿고 있는 자신이 가끔은 신기하다. 분명 나는 신의 존재를 믿는다. 그런데 그 존재를 왜, 어떻게 믿게 되었는가. 그건 가능한 것인가. 이유 중 하나는 분명하다. 절절히 외로워서일 것이다.
삶의 고달픈 시기가 닥칠 때마다 나는 늘 혼자였다. 누군가 손을 내밀어 주기를 바라지 않은지는 너무 오래됐다. 어떤 일이 벌어져도 ‘당연히’ 이 일은 내가 어떻게든 건사해야 한다는 생각으로만 버텨왔다. 인간은 그런 나를 대개 질려 했다. 내가 싫지 않은 사람들은 나와 똑같은 사람들, 그들도 언제나 홀로 자기 일에 휘청거리고 있었기에 언제나 서로, 멀리서 외로웠다. 그래서 나는 용기 있게 신을 떠나지 못했다. 한 번도 완벽히 홀로이고 싶지 않았으므로.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잡히지 않는 신에게, 말을 걸고 손을 내밀고 온기를 구했다. 그것만으로도 조금 버틸 만 했기에. 그것만으로도 신의 존재는 너무나 컸기에 그랬다. 나에게 삶은 늘 생존 투쟁에 가까웠으므로. ‘잔인한 완전체’로서라도 신은 필요했다.
『파이 이야기』의 원제는 ‘Life of Pi’다. 파이의 삶 전반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파이의 생명’에 초점을 둔 이야기일 수도 있는 것이다. 삶과 생존에 대한 내용이 중심을 차지하고 있지만, 파이의 삶의 태도가 인상적으로 읽힌다. 파이는 동물학과 종교학을 공부하는 우수한 학생이다. 신을 사랑하고 동물을 사랑하는 인간이다. 글의 중심에서 신과 동물은, 1, 2, 3부를 거쳐 지속적으로 등장하며 파이를 지탱하는 뼈대를 이룬다. 모든 종교에 열린 마음을 가진 파이는 한편 신을 수집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럼으로 인해 마음이 부유해진다. 가장 멋진 신들과 함께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가 “저는 신을 사랑하고 싶을 뿐이에요.”라고 말하고, “(아름답고 위풍당당한) 신의 존재는 최고의 보상인 것을.”이라고 생각하는 마음은 2부부터 시작하는 표류와 생존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동물에 대한 애정은 이야기 전반을 통 들어 훌륭한 비유가 되어 버틸 힘과 유머를 제공한다.
영화에서만 나오는 신에 대한 대사가 있다. “종교는 방이 많은 집과 같아요.” / “의심의 방은 없어요?” / “층마다 아주 많죠.” // “의심은 좋은 거예요. 믿음을 유지시켜 주죠. 시험에 들기 전까지는 믿음의 힘을 모르니까.” 어쩌면 신을 믿는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힘’을 기르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나는 신을 믿을 수 있는 인간과 믿지 못하는 인간의 DNA가 따로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DNA를 넘어서) 신을 믿지 않거나 믿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신비롭다고 생각한다. 신을 믿거나 믿지 않거나, 신의 존재와는 상관없다. 신이므로. 신은 그 누구라도 사랑하는 ‘아름답고 위풍당당한’ 존재다. 그에게 사랑받을 수 있다면, 사랑받고 의지하면 그만인 사람도 있는 것이다.
신형철은 말한다. “고통의 무의미를 견딜 수 없어 신을 발명한 사람들”이 있다고. 나는 그 마음을 이해한다. 나는 신을 믿고 있지만 내 고통에 손대지 않는 신을 익히 경험해 알기 때문이다. 《무죄한 이들의 고통에 대하여》와 《무정한 신 아래에서 사랑을 발명하다》는 인간의 고통 앞에서, ‘살기 위해’ 신과 사랑에 매달리는 인간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맞다. 저 글 전자는 세월호 유족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들은 대부분 신을 믿는다. 자신을 배신한 종교인들을 미워하면서도 신에 기대어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들이다. 파이는 자신을 잡아먹어도 이상하지 않을 벵골호랑이를 의지하여 삶을 연명하지 않았던가. 고통마저도 의지하여 생을 뼈저리게 느끼지 않았던가. 고통마저도 삶의 추동력으로 삼는 마당에 환상 같은 신을 의지하면 뭐 어떻다는 말이냐. 솔직히 나는, 환상이라도 좋겠다. 나에게는 신이 필요하다. 그가 나를 위무해 주기를 바란다. 신을 이용해서라도 살고 싶다.
죽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은 순간에 나는 왜 살고 싶은 실낱같은 희망을 버리지 못하는가. “내 안의 뭔가가 생명을 포기하려 하지 않았다. 놔주려 하지 않았다. 마지막 순간까지 싸우고 싶어 했다. 내 어떤 부분이 마음을 휘어잡았는지 모르겠다.”라는 파이의 마음에 공감했다. 책은 벵골 호랑이 리처드 파커를 ‘생에 대한 욕망’이나 ‘생존 의지’로 표현하는 것 같다. 나는 생존 앞에 선 나의 사악함을 떠올렸다. 나 자신에게서 자신을 증오하기 충분한 근거를 발견하는 순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야 한다는 욕망이 튀어나온다. 한편 파이는 순간순간을 기록하고 또 기록한다. 시련은 바쁘게 극복한다. 종이보다 펜이 먼저 떨어졌다. 잉크가 더 남아있었다면 227일간의 기록을 모두 남겼으리라. 나는 왜 꾸준히 쓰고 싶은가, 살아있다는 감각을 느끼기 위해서다. 파이는 더욱 그랬을 것이다.
어떤 인간들은 고통스러울수록 삶에 집착한다. 감각이 깊고 선명할수록 살고픈 욕망이 커져간다. 『파이 이야기』를 읽고 보면서 나는 정말 살고 싶었다. 삶에 있어 어떠한 정답이 있겠는가. 아무것도 없다. 정녕, 끝까지 살아남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