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으로 읽는 한국 근대의 풍경 - 개항부터 해방 후까지 역사를 응시한 결정적 그림으로, 마침내 우리 근대를 만나다!
이충렬 지음 / 김영사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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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차 교육과정단 하나뿐인 국사 교과서를 달달 외워 수능을 보고 근현대사를 얕게 배운 세대가 나다변명 같지만 예술고등학교를 다니느라 물리와 지구과학근대사를 배우지 못했다언제나 역사는 내 구멍이다그러니 그림으로 읽는 한국 근대의 풍경이 만만했을 리가결코 두꺼운 책이 아닌데도 시간이 꽤나 걸렸다하나하나 치밀하게 짚어간 것도 아닌데도 낯선 사람과 사건들이 페이지를 넘기는 데 걸리적거려 고생해야 했다
 
이충렬그는 내가 가장 신뢰하는 평전 작가다유려한 글줄뿐 아니라 인물의 생을 짜임새 있게 설명하는 구조가 그의 최고 장점이다간송 전형필(김영사), 김환기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유리창등은 예술 애호가와 예술가의 삶을 균형 있게 묘사한 전기다

과연 그답게 사료조사의 밀도가 대단했다다만 평전(評傳)이 한 인물의 생애를 한 권에 담았다면 그림으로 읽는 한국 근대의 풍경은 꼭지마다 다른 주제를 가지고 있어 작가가 가지고 있는 짜임새를 발휘하기에 미진한 구조일 수밖에 없다그럼에도 처음 보는 그림과 작가들저자가 기를 쓰고 수집한 당시 사진과 보조자료는 입을 떡 벌어지게 했다작년에 서울역사박물관이나 덕수궁미술관에서 본 전시가 그보다 먼저 책으로 만들어졌던 것 같았다


『그림으로 읽는 한국 근대의 풍경』을 읽으며 새로운 화가를 여럿 발견했지만 굳이 가장 인상적인 화가를 하나 꼽자면 엘리자베스 키스(Eizabeth Keith, 1887~1956). 스코틀랜드인 키스는 먼저 일본에 방문했다가 우연히 들른 한국에 반했다. 이즈음은 3.1운동 이후, 한국인의 존엄과 강인함이 생생하게 드러나던 시기였다. 그녀는 한국 사람에게 애정을 느꼈다. 직접 사람들과 어울리며 진짜 삶을 이미지화했다. 이후로도 자주 한국을 방문하며 독신으로 살면서 우리나라 아이들을 애정 어린 필치로 담았다. 독립운동을 하는 아들 때문에 고문을 당하고도 꼿꼿이 자존심을 드러내는 나이 든 부인, 빚을 지고 도망간 아버지 때문에 눈치가 보임에도 불구하고 품위를 지켜온 궁중예복을 입은 프린세스, 비단신과 나막신을 만들던 갖바치의 모습을 수채화와 연필 스케치, 판화로 그린다. 한국에 올 때마다 감리교 의료선교사 셔우드 홀의 어머니 집에 머물던 키스는 그러한 인연으로 홀이 시작한 크리스마스 실의 도안을 그리기도 한다. 세 번이나 그린 그녀의 그림은 전 세계에 조선 고유의 실 이미지를 제공한다. 
 
처음엔 오리엔탈리즘이었는지도 모른다, 한 여성이 낯선 나라를 사랑했던 것은. 그러나 어떻게 보아도 그녀의 그림은 정성 그 자체다. 시혜나 동정으로 보는 것이 아닌 친밀함과 성실. 친밀한 재료와 소박한 기법이 키스의 부지런한 손길을 더 돋보이게 한다. 특히 그녀가 담은 조선의 여자와 어린이들은 연약하나 어리석지 않다, 부러지지 않으며 탄력 있다. 오래전의 그녀가 지금 역시 고마웁다. 
또한 반가웠던 것은 《이쾌대전》, 《변월룡전》, 《신여성 도착하다》 등 덕수궁미술관에서 보았던 국립현대미술관 소장의 그림들을 책으로 다시 만난 것. (물론 이 책이 전시보다 먼저 나왔다.) 좋은 그림이 국립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는 것은 복이다()은 더욱 힘써야 한다
 
요즘 더 생각한다자료 수집 능력 없이는 좋은 저자가 될 수 없다고이건 성실함과는 또 다른 능력이다인연(因緣)의 영역이고 인복(人福)의 문제다내게도 치밀한 자료와의 인연이 간절하다언제나 이충렬은 상상 이상이다, 존경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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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인분 인문학 - 가장 괜찮은 삶의 단위를 말하다
박홍순 지음 / 웨일북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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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밥 먹는다고 정신병자 취급을 받던 시절이 내게 있었다당시 근무하던 회사 사장님은 비즈니스 마인드가 전혀 없다며 소리를 지르고 장래성 없는 사원 취급을 했다얼마나 기가 질렸는지 도망치듯 일을 그만두었다그야말로 나 홀로 또라이가 문제가 되던 시절이다. 십년도 훨씬 넘은 시간이 지나 드디어 혼밥’, ‘혼술’, 혼닭’, 혼행’, ‘혼영 아무렇지도 않은 시대가 왔다. 명실공히 나의 시대가 온 것이다

 
대부분의 시간나는 혼자다출근시간과 일하는 시간퇴근시간을 제외하면 늘 혼자다심지어는 점심시간마저도 부러 외톨이다사람들과 부대끼며 급식소에 있는 것보다 홀로 50분을 보내는 것이 훨씬 편안하기 때문이다그 시간에 나는 주로 책을 읽는다두유를 털어마시고 커피를 탄 후 멍하니 창문 밖을 바라보기도 한다책과 수저를 표지로 한 일인분 인문학은 처음부터 바로 내 이야기였다.
 
사실 일인분 인문학의 내용은 내게 새로울 것이 없었다다만 박홍순은 나날이 그림과 철학사회학과 문학을 연결하는 방법에 즐거움을 느끼는 것 같다최근작이 어김없이 그림으로 가득한 책들이다그의 글처럼 여유를 가지고 슬로 슬로 하게 유럽 미술관 앞에 호텔을 잡고 샅샅이 그림을 훑을 수 있는 삶이 지극히도 부럽다그의 예전 저작에서 단골처럼 등장하던 그림들이 많이 빠지고 이제는 색다른 그림들이 책을 채우고 있다자신의 자리에서 프로가 된 사람은 다른 분야에도 재빨리 프로가 될 수 있음을 또 확인한다구석구석 그림을 잘 주물러 글을 쓴다는 느낌이 든다. (다만 고갱에 대한 그의 긍정적 해석에는 동의할 수 없다.) 
 
솔로로 살면 슬로로 산다는 4장에 여러 가지 의미로 공감했다. ‘솔로는 세상의 과제에 맞출 필요가 없다바쁜 세상의 흐름에 멀리 떨어져 있어도 된다벌이를 조금 포기하면 효율성과 속도에서 떨어져 마음껏 숨을 고를 수 있다그러나 이게 어디 쉬운 선택인가당장 나라도 서울의 직장을 포기하고 산골짜기에 들어가 농사를 짓고 조용히 살라고 하면 펄쩍 뛸 테니다만 언제든 지금 일을 그만둘 수 있음을현재의 벌이가 영원하지 않을 것을 인지하고 차후 홀로 설 준비를 찬찬히 하고 있다마음의 준비뿐 아니라 실질적 준비도

저자 박홍순은 이 책으로 혼자를 택한 사람들의 능동적 의미를 발견하는 계기를 찾았으면 좋겠다고 했지만 아무래도 이 책은 내게 너무 늦게 온 것 같다돌아돌아 나는 혼자의 의미를 성실히 빚어왔고 혼자인 자부심을 그득 채웠다아주 오랫동안 자발적 외톨이로 살아온 내게 고독은 이미 충분하다외톨이 생활만큼은 프로 중의 프로다저자는 혼자가 더욱 충만하다 말하지만 나는 글쎄… 혼자의 시간을 잘 즐기다가도 얼핏 쏟아지는 공허는 인간에게 교감(交感)이 얼마나 절대적으로 필요한지를 알게 한다순간이나마 마음이 녹는 순간이 필요하다나머지 시간을 홀로 살아가기 위해서. 같은 식탁에서 일인분씩 만나는 이인분 혹은 삼사인분의 인문학도 분명 필요하다. 


단언컨대 내가 가장 공허하고 비참했을 때는 어른들의 압력으로 소개팅을 수행하고 돌아오던 길이었다단 한 번도 어김없었다타인의 억지와 세상의 틀에 나를 끼워 맞추려 자신을 가장했을 때였다나 말고는 그 누구도 나를 받아들일 수 없으며나 말고 어떤 것도 나를 인정할 수 없음을 너무 잘 안다저자는 스스로를 삶의 주인으로 세우려는타인 속에서도 외롭지 않은 개인으로 살아가려는 능동적인 한 명에게 우리는 더 관대해져야 한다.”라고 말한다그런데 사실... 그들이 내게 관대하지 않아도 나는 상관없다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나로 살아가고 있으므로. 그냥 나인 것으로 남은 생은 충분하다이것이 외톨이의 자부심이며 내가 끝까지 온전히 홀로일 이유이다


인간은 시간과 공간 안에서 살아간다. 시간과 공간의 주인일 때 비로소 그 사람은 자유인이다. 자유인이란 자기 운명의 주체가 자신인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중략) 혼족의 시간이 자기를 위한 시간의 확대로, 나만의 고독과 침묵으로, 나만의 독서로, 나만의 성찰로 이어질 때 비로소 우리는 자유인의 길로 한 걸음 다가설 수 있다. (P.36)

독서의 과정은 고독하다. 책과 단둘이 마주보고 실마리를 풀어내야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책이라는 놈은 그다지 친절하지 않다. 세세한 설명을 생략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에게 실마리만 던져놓곤 한다. 작고 희미한 실마리를 붙잡고 혼자서 자기 힘으로 밀고 나가야 한다. 하지만 고독한 독서를 통해 자기를 발견하고 스스로를 생생한 현실 위에 세운다. (P.74)

오히려 혼자 내적으로 충만함을 갖추는 법을 깨우칠 때 결핍에서 벗어날 수 있다. 자발적으로 외톨이가 되기로 결심한 사람들은 자신의 내면에 예민한 감지기를 갖추고 있다. 자신을 충분히 존중하기 때문에 사람들과의 불필요한 시간으로 낭비하려 하지 않는다. (P.182)

전업 방식의 예술가만이 진정한 예술가라는 사고방식을 바꾸어야 한다. 결과적으로 나중에 상당한 성취를 이루고, 자기만의 창의적 성과가 대중에게 인정을 받아 그 자체로 생계가 가능한 상태에 이른 극소수만 전업 형태를 가질 수는 있다. 모든 예술가에게 동일한 잣대를 들이대고 견디라고 하면 안 된다. 또한 예술가 스스로도 이러한 오만에서 벗어나야 한다. 자립은 예술가만이 아니라 인간의 일반 조건이다. (P.271)

그(니어링)는 너무나 많은 것이 낭비되는 현대인의 일상과 현실에 회의를 갖는다. 특히 대부분의 시간과 노력을 생활 유지에 할애하면서 에너지와 재능을 낭비하는 삶에 대해 심각한 문제의식을 지닌다. 안락하고 편리한 생활에 길들여져 가진 것을 잃을까 봐 두려워하는 마음이 생기며, 관습에 얽매이고 체제에 순응하는 경향이 광범위하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는 순응과 예속을 떨치고 자기 삶을 보다 훌륭하고 풍요로우며 보람차게 만들어야 한다고 우리에게 촉구한다. (P.281)

이 모든 방법의 공통점은 상대적으로 집단이나 타인에 의해 일을 박탈당할 우려가 적기 때문에 외부 압력으로 자신의 신념을 포기하거나 활동에 압박을 받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다. 또 하나의 공통점은 큰 규모의 직장에 취업했을 때보다 확실히 수입이 적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소박한 생활에서 만족을 구할 수 있는 확고한 자기 결정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자기의 만족을 풍요로운 소비와 풍요로운 정신에서 찾는 사람이어야 한다. (P.283)

소로우가 보여준 것은 불의에 저항하는 출발점부터 과정, 마무리에 이르기까지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주체는 바로 개인이라는 점이다. 개인은 국가나 다수에 의해 무력화될 수 없는 존재다. 개인의 동의에 의해서만 국가나 정부는 정당화된다. 시민 불복종은 주체로서의 개인이 스스로 생각하고, 자기 양심이 요구하는 바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다. (P.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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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인 글쓰기
류대성 지음 / 휴머니스트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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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인’이란 말은 예민한 감수성을 지녔다. 한 사람의 안팎을, 과거와 현재를 아우르는 좁고 깊으며 넓고 얕은 단어다. 한 사람을 모두 표현할 수 있으면서 한 사람을 제한할 수도 있는 단어다. 서울국제도서전에서 처음 만난 빨간 책, 『사적인 글쓰기』는 책을 사랑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자기 매력을 뽐냈다. 자기(自己) 글쓰기를 열망하는 사람을 끌어당겼다. 물론 나 역시 그중 하나다. 

 
‘사적인’ 책에서 가장 강조하는 것은 ‘오직 하나뿐인 나’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글쓰기 재능도 없는 주제에 나는 왜 쓰고 싶어 하는가. 그런 나는 무엇에 대해 쓰고 싶은가. 나는 왜 글을 못 쓰고 있는가. 왜 이 몸이 글쓰기를 시작하기가 그렇게 어려운가, 장소 탓인가 시간 탓인가. 나는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가. 내가 글을 못 쓰는 이유는 정녕 게으른 성격 탓인가를 먼저 쏟아내게 한다. 그리고 ‘자기 이야기’를 점검하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나’를 아는 일이라고. 그리고 이 ‘나’를 아는 일에 제일 도구는 ‘글쓰기’라고. 일단 쓰기 시작하면 ‘나만의 글쓰기’가 시작되고 이 글쓰기가 다음엔 나를 움직일 거라고. 
 
책은 크게 3부로 되어 있다. 먼저 자기 알기, 다음에 편견 없애기, 실제로 자기 글쓰기 스타일 만들기다. 4부의 부록은 희망자를 대상으로 저자가 조언한 글쓰기 예시다. 무엇보다 3부의 ‘글쓰기 비법’을 기대했는데, 이런... 저자는 정직했다, 글쓰기에는 콕콕 집어 족집게가 없었다. 그저 매일의 성실함, 편견도 두려움도 없이 쓰고 또 쓰는 것. 어떤 방법으로 어떤 도구를 쓰던지 쓰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서 내게 가장 잘 맞는 방법과 도구와 시간과 마감과 언어 감수성을 찾아가면 된다. 이 지난한 과정은 ‘온몸으로 글쓰기’ 그것뿐이다. 
 
저자는 ‘사(私)적인’ 글쓰기에 ‘공(公)적인’ 글쓰기를 대비시키기도 하고 긴밀히 연관시키기도 하면서 언제든 사적인 글쓰기가 공적인 글쓰기가 될 수 있음을 말한다. 이때 제일 먼저 내게 떠오른 것은 책(冊)이었다. 책을 읽다 보면 밑줄을 긋게 되고, 밑줄을 발췌하고 인용하다 보면 글을 옮기게 되고, 글을 옮기다 보면 자기 생각을 더하여 글을 쓰고 싶어진다. 대상을 바라보는 자기만의 관점이 쌓이고 구석구석 짜임새 있게 견고해진다. 이렇게 글을 쓰다 보면 글을 더 쌓고 싶어진다. 이렇게 삶이 쌓이면 글이 되고 수북한 글이 정제되면 책이 된다. 책을 읽으면 글을 쓰게 되고 글을 성실히 쓰다 보면 밀도 높은 저자가 나온다. 
 
서평(書評), 즉 북리뷰는 사적인 글쓰기와 공적인 글쓰기를 오가는 대표적인 쓰기 종류다. 『사적인 글쓰기』의 저자는 그것을 경험한 사람이다. “평범했던 국어 선생님이 (자기만의 마감을 설정하고 사적인 글쓰기를) 15년째 (지속했으며) 매년 100권이 넘는 책을 읽고 글을 쓰는 파워블로거가 되고 작가의 길을 택하기까지” 사적인 글쓰기가 함께했고 앞으로도 함께할 것이라고 한다. 저자는 글쓰기가 생각을 바꾸어 인생을 바꿀 수 있다고 목하 강조하지만, 시간과 생활에 쫓기는 직장인일 대부분의 독자에게는 드라마틱한 저자의 이야기가 더 매력적일 수도 있다. 
 

“아주 먼 옛날, 책과 글은 소수가 독점했습니다. 책을 읽는 것도 특권이었고 글을 쓰는 사람도 적었습니다. 인쇄술이 발달하면서 지식이 대중화되고 누구나 읽을 수 있는 시대가 되었지만 글을 쓰는 사람은 여전히 소수에 불과했죠. 그러나 시간이 흘러 이제는 모든 사람이 읽고 쓰는 시대입니다. 그야말로 ‘쓰는 인간’이 대세가 된 거죠. 이제, 누구도 아닌 ‘나’를 위한 이기적인 글을 써 보면 어떨까요.” (류대성,『사적인 글쓰기』, 휴머니스트, 2018,  P.8) 


『사적인 글쓰기』를 읽는 동안 ‘나의 사적인 글쓰기’란 무엇인가를 생각했다. 나는 왜 글을 쓰는지를 고민했다. 나는 내 마음과 맞는 파장을 찾고 싶어 글을 쓴다. 내가 사랑하는 것을 드러내고 나의 취향을 자랑하고 싶다. 누구에게 이해받기를 원하기보다 나와 맞닿는 사람을 찾고 싶어 글을 쓴다. 이기적이라는 것은 사적인 것에 맞닿는다고 믿는다. 지극히 이기적인 이것이 내 글쓰기의 이유다. 아 참, 나는 새 노트북을 사기 위해서도 글을 쓴다. 노트북이 빨리 쇠할 만큼 열심히 글을 써서 신상을 사려는 속셈.

내가 사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것이 무엇일까, 사물로 치자면 분명 책이 으뜸일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간 책을 아끼는 마음을 어떻게 표현했던가, 부끄럽도록 미미하다. 표현 없는 사랑은 죽은 것이라고 하는데, 나는 이 애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 것인가. 『사적인 글쓰기』를 덮은 후 나의 목표는 ‘세 권 읽으면 한 권이라도 리뷰 써 보기’다. 그간 읽는 데 비해 쓰는 데 너무 게을렀다. 삶은 이렇게도 조금씩 변한다. 사적인 글쓰기는 생활에 있으므로, 이것이 내게는 내 마감을 설정하고 써야 하는 사적인 글쓰기의 실제다. 
 
삶을 견딜 만하게 만드는 것은 언제나 ‘사적인’ 영역에서 찾아왔다. 어쩌면 글쓰기가 그런 한켠이 되어줄 수도 있지 않을까. 사적인 글쓰기는 일단 자기만족, ‘읽고 쓰는 삶’은 허영처럼 보이지만 한편 그럴듯하다. 읽고 쓰며 오직 나답게, 정말 그렇게 살 수 있다면 나는… 내가 좀더 좋아질지도 모른다. 


사적인 글쓰기가 곧‘에세이‘라고 오해하기 쉽다. 에세이는 문학의 한 갈래지만 허구와 가상의 세계가 아니라 현실에 바탕을 둔 실제 세계를 다룬다. 이것이 에세이가 시나 소설과 다른 점이다. 사적인 글쓰기는 현실에 두 발을 딛고 있다는 점에서 에세이와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그 범위는 사적인 글쓰기가 훨신 넓다. (P.84)

사적인 글쓰기는 내용 면에서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먼저 일상생활, 주변 사람, 여행 등 지극히 사적인 영역의 이야기를 쓰는 것이다. 두 번째는 사회적 사건, 정치뉴스, 경제상황, 문화 트렌드 등 공적인 영역의 이야기를 쓰는 것이다. 어느 쪽이든 사적인 글쓰기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대상에 대해 주관적 생각과 감정을 쓰면 사적인 글이 된다. 이것이 발표 매체에 따라 공공성과 책무를 띠고 일반 대중에게 영향을 미치면 공적인 글이 된다. (P.85)

새로운 단어를 익히는 일은 의식 세계를 넓히는 과정이다. 새로운 어휘를 만나는 일은 새로운 세계를 접하는 경이로움이다. 낯선 말, 모르는 단어, 익숙지 않은 개념을 기록해 보자. 나만의 단어장을 만들어도 좋고, 그러한 표현을 보았을 때 바로 밑줄치고 메모하는 방식도 좋다. 현란한 말솜씨로 상대방을 매혹시키는 사람도 있지만, 어눌한 말투로도 감동을 주는 이도 있다. 말하는 사람의 깊이와 넓이는 재치 있는 감언이설보다 상대가 이해할 수 있는 말로 설득하는 과정에서 보다 잘 드러난다. 그러기 위해서는 적절한 단어, 비유적 표현, 이해하기 쉬운 예를 활용해야 한다. 더 많이 읽고 기록하고 생각하고 정리하는 사람의 언어 세계가 풍부해질 수밖에 없는 법이다. (P.123)

언어 감수성을 예민하게 벼리고 싶다면 시집을 읽는 것만큼 좋은 방법도 없다. 가장 세련되고 정선된 언어의 정수를 시의 세계에서 맛볼 수 있다. 시대를 막론하고 시인은 어떤 사람보다도 모국어의 의미를 정확히 파악하고 그 아름다움을 표현할 줄 알았다. 틈틈이 시집을 읽으면서, 이미 알고 있는 단어의 개념을 확장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드러내는 연습을 한다면, 당신의 글쓰기는 새로운 영역으로 진입할 수 있다. (P.127)

사실 첫 문장은 두 번째 문장을 읽게 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두 번째 문장이 세 번째 문장으로 자연스레 이끌어 준다면 좋은 글이다. 문장과 문장 사이가 물 흐르듯 이어지는 글이, 첫 문장만 인상적이거나 마지막 문장만 그럴듯한 글보다 더 낫지 않을까? (P.140)

삶이 곧 글이다. 언행일치(言行一致)는 성인(聖人)의 경지에 도달해야 가능하지만, 삶의 경험을 편안하게 풀어내는 글쓰기는 지금 우리도 충분히 할 수 있다. 도입부와 마무리가 지극히 개인적인 영역에 머물지 않고 본문의 내용과 밀접하게 이어진다면 더할 나위 없다. 연결 고리를 만들고 유기적으로 엮기만 하면 된다. 억지로 꾸미고 과장하지 않아도 당신 이야기는 당신이 가장 잘 할 수 있을 테니까. (P.145)

요약은 전체를 통찰하는 안목을 길러 준다. 전체를 조망하면서 부분을 바라보면 의미가 보다 풍부하게 느껴진다.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사고 활동이 그 바탕을 이루기 때문이다. 완전히 이해하고 분석하지 못하면 요약은 불가능하다. 핵심과 주변을 구별하고 전체 구조를 알아야 가능하다. 텍스트의 의미와 글쓴이의 목적을 정확히 파악해야 요약할 수 있다. 따라서 요약은 독자가 글쓴이의 머릿속을 들여다보려는 노력이며, 글이 완성되기까지의 과정과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보는 연습이다. (P.174)

글쓰기는 알몸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나르키소스의 시선을 갖는 일이다. 영혼의 바닥을 드러내는 일이기 때문에 아무것도 숨길 수 없는 가장 내밀한 고백이다. 경험한 것, 아는 것, 생각한 것, 느낀 것 이상을 쓸 수 없다는 자명한 논리 앞에 모든 허세와 거품과 가면은 무력해진다. 그래서 사람들은 글을 쓰지 않는지도 모른다. 어렵기 때문이 아니라 두렵기 때문이다. (P.201)

한 편의 글을 완성하면서 신경 써야 하는 점은, 구조와 내용이 아니라 당신의 생각과 감정의 변화다. 헝클어진 생각과 혼란스런 감정으로 글을 완성하기는 어렵다. 정리되지 않은 생각을 두려움 없이 쏟아 내고,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과정도 필요하다. 완결성 있는 글을 쓰고 싶다면 끊임없이 고치고 다듬고 정리해야 한다. 하나의 단락에 하나의 중심 생각만 쓰는 연습을 하자. 단락의 분량과 길이가 다른 단락과 조화와 균형을 이루었는지 점검하자. 처음부터 끝까지 각 부분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었는지 살피자. 통일성 있게 주제를 향해 나아가는 당신의 글은 잘 정리된 생각과 감정의 고백이다. (P.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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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모자가 하고싶은 말 - 꽃 같은 말만 하라는 세상에 던지는 뱀 같은 말
조이스 박 지음 / 스마트북스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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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교에서 정년퇴임하신 교수님 한 분이 나에게 경악하신 적이 있다. “백마 탄 기사나 기다리는 줄 알았더니 보기와 다르네.”라고. 그분이 기대하는 나는 고분고분한 ‘여자애’ 였으므로 그 애가 ‘자아’를 드러내는 순간 놀라시는 건 당연했다. 그러나 그때의 내 나이가 서른이 한참 넘었다는 게 함정. 늘 겪는 일이라 아무렇지도 않다. 자아가 있는 여자는 세상 살기 불편하다. 조이스 박의 말을 빌리자면 “내게 백 개 혹은 천 개의 얼굴이 있는데, 그중 몇 가지만 보이라고 강요받는 것 같아 싫었다. 나의 전부가 아니라 일부만 수용하겠다는 세상이 너무 답답했다.” 그래도 살아남으려면 방법이 없었다. 이십 대의 나는 자아를 감추거나 죽이는 것이 가장 큰 과제였다. 그래야 덜 미움받고 지낼 수 있었으므로. 그래야 괴롭힘당하지 않을 수 있었으므로. 그 과제는 내게 현실이었다. 살기 위한 하나의 가면이었다.
‘현실’을 이야기하는 글을 좋아한다. 삶이 녹록지 않다는 걸 뼛속 깊이 겪었다. 꿈을 이야기하거나 희망을 이야기하는 상황은 아프다. 죽도록 노력하고 가까스로 정착한 나는 행복한 미래를 믿지 않는다. 이 험한 한국에서 여자의 삶은 더욱 그렇다. 성별 간 임금 격차뿐 아니라, 직장 내 지위 보유 역시 여자는 형편없다. 몸으로 마음으로 잘 살아남은 롤모델의 여자는 몇 보이지 않는다. 몰락(沒落) 하지 않으면 다행, 현재를 유지하기만 해도 선방(善防)이다. 여자의 현실은 이렇게 각박하다.
그런 내게 동화(童話)라니, 얼핏 전혀 어울리지 않다. 그런데도 동화를 매개로 한 에세이를 집어 든 것은 저자에 대한 신뢰였다. 모든 재료는 장인의 손에서 운명을 달리한다. 명장(名匠)은 명품(名品)을 만든다. 저자는 꿈틀거리는 표현력을 가졌다. 새빨간 장미처럼 강렬하고 달빛 아래 서늘한 칼날 같은 글들이 예쁘다. 피처럼 붉고 가시처럼 뾰족해서 불편하다. 추천사를 쓴 황정산의 말이 정확하다. “조이스 박의 글은 불온하고 불온한 만큼 아름답기도 하다. 남성들은 반성하고 여성들은 각성한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인간에 대한 진정한 이해를 얻게 된다.” 아파본 사람은 아픈 사람에게 꼭 맞는 글을 뱉어낸다. 그리고 저자는 여성으로서 자기 고통을 여성의 동화를 빗대어 풀어낸다. 이건 치유라기보다는 그녀 본성에서 나오는 애정이다.
조이스 박이 이야기하는 모든 동화는 ‘본질을 찾아 헤매는 여정’이다. 그리고 그 핵심엔 사랑과 슬픔이 있다. 그래서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먹먹하다. 생에 뒤통수를 맞고 가시덤불로 이끌리며 상처투성이로 살았던 모든 이에게 뿌연 안개를 내뿜는다. 나는 다시 고백한다. 삶은 너무도 슬프고 투명하고 날카로운 것이며, 그래서 아름답다는걸. 한편 세상이 가시투성이이므로, 사람은 상처받지 않으면 온전하지 않다는 걸 읽는다. 생명에 있어 완전(完全) 함은 상처투성이를 전제로 한다는 것을 확신한다. “그러나 살아 있다면 아직은 괜찮은 거다. 정말로 괜찮아서 괜찮은 게 아니라, 괜찮지 않아도 괜찮을 수 있는, 그렇게 살아가는 시기가 있다. 그 시기를 거치며 스스로 변한다.”(P.106)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너무나 여러 번,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사랑이다. 인정하기 싫지만 사람에게 있어 사랑보다 더 중요한 것이 어디 있겠나. 게다가 사랑에 목숨을 걸도록 배우고 길러진 여자아이에게. 모든 여자들은 “동화 속의 왕자님은 현실에 없는 거야”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고 자란다. 가족이 아니라도 사회로부터 백만 번을 듣는다. 첫 번째로는 ‘눈을 낮추라’는 말이고, 두 번째는 ‘너는 동화 수준이다’라는 의미이며, 세 번째는 ‘너는 현실을 모른다’는 말이다. 모두 여자의 자아와 지적 능력을 폄하하는 의미다. 여자의 생의 목표는 왕자라는 편견이다. 생의 여정에 있어 ‘사랑’을 중심에 둔다면 일견 맞는 소리다. 모든 것을 가진 왕자가 아니라 모든 것을 잃은 한 남자를 그녀가 왕자로 만들어줄 수 있을 테니.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여자는 사랑 때문에 자신을 잃는다. 시간과 영혼을 내어주어야 할 때도, 손발을 잘라주어야 할 때도 있다. 그건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성숙(成熟)을 전제로 하는 사랑의 속성 때문이다. 그래서 여자와 남자는 사랑으로 죽었다 사랑으로 다시 태어난다. “미모가 존재가치의 최고라 설파하는 여성관이 내어주는 독사과를 먹고 기어코 죽는다. 죽었다가 그 독사과를 내뱉을 때 비로소 진정한 파트너를 만난다. 죽은 존재여도 상관없다며 부둥켜 안아주는 대상을 비로소 만난다.”(P.178) / “남자야, 나를 사랑하거라. 난 죽었다 살아났느니 네가 함부로 규정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이 자체로 난 소중하고 아름다우니, 남자야 이제 날 사랑하거라.”(P.178)
수많은 페미니스트들이 남자를 사랑하지 말라고 주장한다. 남자를 사랑하는 여자는 가부장제에 복무하는 여자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게 어디 쉬운가, 꼭 이성애가 아니어도 사랑은 본질 중의 본질인데. 저자의 이야기가 울림이 있는 것은 현실에 기댄 사랑의 실패와 사랑의 성장을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사랑이 삶에서 중요한 이유는 한 사람의 됨됨이를 휘저어 다시 담금질하는 강렬한 시험이기 때문이다.”(P.133) / “사랑은 목적이 아닌 수단일 뿐이지만, 죽어서 우리 뒤에 남는 건 그래도 사랑뿐이다.”(P.109) / “사랑은 그래 봤자 고작 2%의 힘이다. 그 2%에 기대어 능히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그 2%에 자신을 의탁하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이제는 이룬 것이 너무 많고, 자칫하면 잃을 것이 너무 많아 그 2%에 자신을 내주기가 너무 힘들 것이다. 그러나 심장조차 녹이 슬면 그땐 정말 돌이킬 수 없다.” 심장이 녹슬기 전에 한 번 더 사랑해야 한다. 생이 허락한다면.

나는 조이스 박을 잘 모르지만 그녀가 택한 글이라는 방식이 마음에 든다. 그녀는 아마 겉치레를 잘 하는 사람은 아닐 것이다. 포근하고 따뜻한 휘장을 두르는 일을 잘 못하고 사회성이 뛰어나지 못해 손해 보는 사람에 가까우리라 생각한다. 마치 내가 그런 것처럼. 사람을 사랑하지만 사람을 피하면서 자기 애정을 내비친다. 그게 그녀의 방식이고 이번 택한 것이 그녀의 동화다. 그 글줄들이 그렇게 시원한 것은 같은 것을 가치 있게 여기는 마음이 닮았기 때문이리라, 사랑과 슬픔을 받들어 모시는 마음이. 저자의 샤프한 말이 뭉툭한 내 마음을 대신하여 설명한다, “능히 사랑하지 못해 수이 빛나지 못하나, 차마 사랑하려고 애쓰는 와중에 마침내 빛날 수 있는 그런 마음을 나는 믿는다.” 뭐라 더 표현할 수 없다. 먹먹하다.

덧) 표지부터 내지까지 알곡처럼 빼곡히 들어선 삽화가 놀랍다.
Daniel Egnéus(다니엘 이그네우스)의 표지를 비롯해 Nadezhda Illarionova(나제즈다 일라노료바), Kay Nielsen(케이 니얼슨), John Bauer(존 바우어), Arthur Rackham(아서 래컴)의 아름다움은 화가 날 정도.


"이따금 삶에 내몰려 정신없이 질주할 때, 아니 질주하지 않으면 이 삶을 버틸 힘이 없어서 죽지 않고 살기 위해 욕망에 나를 내주고 그 힘에 실려 달리다가 멈출 때, 문득 목도한다. 어두운 숲속을 생채기 투성이로 달리던 늑대 인간 하나가 차마 자신을 못 이겨 하늘의 달빛을 보며 울부짖으며 절규하는 모습을. / 소망은 아득하고 욕망은 강렬하다. 소망은 실낱같고 삶은 지랄 맞다. 인간만이 하늘을 올려다보는 머리를 가진지라, 달을 보며 표효한다."(P.193)

"햇빛처럼 빛나고, 달빛처럼 빛나며, 별빛처럼 스스로 빛을 낸다는 것은 내면의 자기 인정과 존중의 힘이 묵직한 닻처럼 드리워졌을 때 빚어내는 아름다움이다."(P.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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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화독서 - 그림으로 고전 읽기, 문학으로 인생 읽기
문소영 지음 / 은행나무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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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에버렛 밀레이의 <오필리아>를 처음 보았을 때의 충격을 잊을 수 없다햄릿을 몇 번쯤 읽었지만 오필리아의 죽음은 그저 문서상의 일이었다이미지의 힘은 크다밀레이의 걸작은 내가 상상했던 단아한 여자의 미친 아름다움을 뛰어넘은 강력한 충격이었다셰익스피어의 희곡에서 오필리아는 붙들고 있던 버드나무 줄기에서 미끄러져 죽는다버드나무는 버림받은 사랑을 의미하며여자의 목에 걸린 제비꽃은 신의와 순결요절을 상징한다오필리어의 오빠 레어티스는 동생을 오월의 장미라고 불렀다그림의 한켠에는 흰 장미가 만발했다여자의 손에서 떠나가는 양귀비는 죽음과 잠을 의미한다오랑캐꽃은 헛된 희망을 의미한다
 
화가는 그가 아는 모든 상징을 활용하여 그림을 완성한다그림을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그 안에 담긴 의미를 연결해 오필리어의 죽음을 뜻으로 채우기 바란 것이다밀레이가 속해 활동하던 라파엘 전파는 문학을 그림으로 옮기기 좋아했다자연히 화가의 상상별로 다양한 오필리아가 존재했다. ‘오필리아를 경험할수록 나의 햄릿력()은 넓고 강해졌다다양한 오필리어가 여러 얼굴과 여러 표정을 하고 다양한 목소리로 연약한 생을 내던진다
 
그림이 아니라면 몰랐을 문학은 더욱 많다그림을 보다가 반복해 나오는 이름들. ‘아리엘을 통해 <템페스토>를 알게 되었고, ‘퍼크를 통해 <한여름밤의 꿈>을 읽었다반복되는 주제 <무자비한 미녀>를 통해 요정의 시와 기사에 대한 인식을 알았다. 때로는 주먹구구로, 때로는 수박 겉핥기처럼, 때로는 기초부터 착실하게 그림과 문학을 배웠다
 
미술사는 인문학의 꽃이다역사 뿐 아니라 사회와 경제 등 당시를 지배한 문화 맥락을 알아야 그림을 깊이 즐길 수 있다당연히 고전문학 역시 그림과 얽혀 돌아갈 수밖에 없다그림만 보았던 나보다 문학도 읽은 후의 내가 작품에 더 깊이 빠져들고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당연하다
 
명화독서에는 내가 사랑해 온 그림들이 그득히 들었다내가 몰랐던 그림도 여럿 있었다목차를 훑어보자빼곡이 문학의 이름이 들이차 있다구석구석 잘 데려온 인용도 볼만하다그림은 문학과 결합하여 넓고 깊은 공간을 만든다. 3D가 되고 4D가 된다연극 스틸컷도 나오고영화 포스터도 나오고 동화 일러스트레이션도 나온다일본의 우키요에도 중국의 책가도도당연히 우리 나라 전통회화와 근대유화도 등장한다머릿속 시각문화는 폭을 넓혀간다균형잡힌 이미지의 향연은 일종의 사치다
 
문장은 명쾌하고 설명은 연결고리로서 적절하다그러나 나름 정보의 밀도가 높아서 초보독자에게 추천하기엔 부적절하다이미지와 문학에 대한 사전지식이 없다면 힘겨울 수 있는 책이다이럴 때는 머리가 좀 빡빡하지만 잠시 쉬었다 보면 된다독서라는 게 즐거우라고 하는 건데 굳이 힘겨울 필요가 있나마음을 편하게 가져 보자한 번에 다 읽으려 안 해도 된다같은 주제로 엮인 여러 화가의 다양한 그림만 모아 보아도 좋다그 다음에 마음에 드는 그림의 주제부터 한 꼭지씩 읽어보는 방법도 있으니
 
개인적으로는 셰익스피어의 작품이 세 꼭지나 등장하는 것이 참 좋았다역시 영국을 제패한 다작(多作), 다상량(多商量)의 작가다박완서와 박수근의 이야기를 사랑한다특별히 새로울 것 없는 꼭지였지만 박수근의 다감한 인품을 강조한 것만으로 충분히 만족스러웠다오 헨리를 높게 평가한 것도 기뻤다가난에 시달리다 범죄를 저지르고 도망갔으나 아내의 임종을 지키기 위해 돌아온그리고 3년간의 감옥살이를 해낸 남자딸의 생활비를 위해 감옥에서 단편소설을 써서 발표한 사랑이 가득한 오 헨리를 나는 아주 편애한다읽다가 여러 번 눈물을 흘렸던 <마지막 잎새>를 트롱프외유와 연결할 줄은 몰랐다. 진실로 탁월하다.
 
성실한 저자는 성실한 책을 쓴다그가 읽고 쓰는 삶이 책이 된다밀도 높은 책은 저자의 밀도 높은 인생이다그런 면에서 명화독서의 저자와 그분의 인생이 부럽다누구라도 그러하듯이 성실을 이길 힘은 많이 없다더 성실치 못한 내 인생이 아쉬울 뿐아무래도 조만간 명화독서를 한 번 더 읽어야겠다나도 저 밀도있는 센 글을 좀 닮아갈 수 있을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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