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모자가 하고싶은 말 - 꽃 같은 말만 하라는 세상에 던지는 뱀 같은 말
조이스 박 지음 / 스마트북스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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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교에서 정년퇴임하신 교수님 한 분이 나에게 경악하신 적이 있다. “백마 탄 기사나 기다리는 줄 알았더니 보기와 다르네.”라고. 그분이 기대하는 나는 고분고분한 ‘여자애’ 였으므로 그 애가 ‘자아’를 드러내는 순간 놀라시는 건 당연했다. 그러나 그때의 내 나이가 서른이 한참 넘었다는 게 함정. 늘 겪는 일이라 아무렇지도 않다. 자아가 있는 여자는 세상 살기 불편하다. 조이스 박의 말을 빌리자면 “내게 백 개 혹은 천 개의 얼굴이 있는데, 그중 몇 가지만 보이라고 강요받는 것 같아 싫었다. 나의 전부가 아니라 일부만 수용하겠다는 세상이 너무 답답했다.” 그래도 살아남으려면 방법이 없었다. 이십 대의 나는 자아를 감추거나 죽이는 것이 가장 큰 과제였다. 그래야 덜 미움받고 지낼 수 있었으므로. 그래야 괴롭힘당하지 않을 수 있었으므로. 그 과제는 내게 현실이었다. 살기 위한 하나의 가면이었다.
‘현실’을 이야기하는 글을 좋아한다. 삶이 녹록지 않다는 걸 뼛속 깊이 겪었다. 꿈을 이야기하거나 희망을 이야기하는 상황은 아프다. 죽도록 노력하고 가까스로 정착한 나는 행복한 미래를 믿지 않는다. 이 험한 한국에서 여자의 삶은 더욱 그렇다. 성별 간 임금 격차뿐 아니라, 직장 내 지위 보유 역시 여자는 형편없다. 몸으로 마음으로 잘 살아남은 롤모델의 여자는 몇 보이지 않는다. 몰락(沒落) 하지 않으면 다행, 현재를 유지하기만 해도 선방(善防)이다. 여자의 현실은 이렇게 각박하다.
그런 내게 동화(童話)라니, 얼핏 전혀 어울리지 않다. 그런데도 동화를 매개로 한 에세이를 집어 든 것은 저자에 대한 신뢰였다. 모든 재료는 장인의 손에서 운명을 달리한다. 명장(名匠)은 명품(名品)을 만든다. 저자는 꿈틀거리는 표현력을 가졌다. 새빨간 장미처럼 강렬하고 달빛 아래 서늘한 칼날 같은 글들이 예쁘다. 피처럼 붉고 가시처럼 뾰족해서 불편하다. 추천사를 쓴 황정산의 말이 정확하다. “조이스 박의 글은 불온하고 불온한 만큼 아름답기도 하다. 남성들은 반성하고 여성들은 각성한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인간에 대한 진정한 이해를 얻게 된다.” 아파본 사람은 아픈 사람에게 꼭 맞는 글을 뱉어낸다. 그리고 저자는 여성으로서 자기 고통을 여성의 동화를 빗대어 풀어낸다. 이건 치유라기보다는 그녀 본성에서 나오는 애정이다.
조이스 박이 이야기하는 모든 동화는 ‘본질을 찾아 헤매는 여정’이다. 그리고 그 핵심엔 사랑과 슬픔이 있다. 그래서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먹먹하다. 생에 뒤통수를 맞고 가시덤불로 이끌리며 상처투성이로 살았던 모든 이에게 뿌연 안개를 내뿜는다. 나는 다시 고백한다. 삶은 너무도 슬프고 투명하고 날카로운 것이며, 그래서 아름답다는걸. 한편 세상이 가시투성이이므로, 사람은 상처받지 않으면 온전하지 않다는 걸 읽는다. 생명에 있어 완전(完全) 함은 상처투성이를 전제로 한다는 것을 확신한다. “그러나 살아 있다면 아직은 괜찮은 거다. 정말로 괜찮아서 괜찮은 게 아니라, 괜찮지 않아도 괜찮을 수 있는, 그렇게 살아가는 시기가 있다. 그 시기를 거치며 스스로 변한다.”(P.106)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너무나 여러 번,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사랑이다. 인정하기 싫지만 사람에게 있어 사랑보다 더 중요한 것이 어디 있겠나. 게다가 사랑에 목숨을 걸도록 배우고 길러진 여자아이에게. 모든 여자들은 “동화 속의 왕자님은 현실에 없는 거야”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고 자란다. 가족이 아니라도 사회로부터 백만 번을 듣는다. 첫 번째로는 ‘눈을 낮추라’는 말이고, 두 번째는 ‘너는 동화 수준이다’라는 의미이며, 세 번째는 ‘너는 현실을 모른다’는 말이다. 모두 여자의 자아와 지적 능력을 폄하하는 의미다. 여자의 생의 목표는 왕자라는 편견이다. 생의 여정에 있어 ‘사랑’을 중심에 둔다면 일견 맞는 소리다. 모든 것을 가진 왕자가 아니라 모든 것을 잃은 한 남자를 그녀가 왕자로 만들어줄 수 있을 테니.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여자는 사랑 때문에 자신을 잃는다. 시간과 영혼을 내어주어야 할 때도, 손발을 잘라주어야 할 때도 있다. 그건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성숙(成熟)을 전제로 하는 사랑의 속성 때문이다. 그래서 여자와 남자는 사랑으로 죽었다 사랑으로 다시 태어난다. “미모가 존재가치의 최고라 설파하는 여성관이 내어주는 독사과를 먹고 기어코 죽는다. 죽었다가 그 독사과를 내뱉을 때 비로소 진정한 파트너를 만난다. 죽은 존재여도 상관없다며 부둥켜 안아주는 대상을 비로소 만난다.”(P.178) / “남자야, 나를 사랑하거라. 난 죽었다 살아났느니 네가 함부로 규정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이 자체로 난 소중하고 아름다우니, 남자야 이제 날 사랑하거라.”(P.178)
수많은 페미니스트들이 남자를 사랑하지 말라고 주장한다. 남자를 사랑하는 여자는 가부장제에 복무하는 여자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게 어디 쉬운가, 꼭 이성애가 아니어도 사랑은 본질 중의 본질인데. 저자의 이야기가 울림이 있는 것은 현실에 기댄 사랑의 실패와 사랑의 성장을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사랑이 삶에서 중요한 이유는 한 사람의 됨됨이를 휘저어 다시 담금질하는 강렬한 시험이기 때문이다.”(P.133) / “사랑은 목적이 아닌 수단일 뿐이지만, 죽어서 우리 뒤에 남는 건 그래도 사랑뿐이다.”(P.109) / “사랑은 그래 봤자 고작 2%의 힘이다. 그 2%에 기대어 능히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그 2%에 자신을 의탁하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이제는 이룬 것이 너무 많고, 자칫하면 잃을 것이 너무 많아 그 2%에 자신을 내주기가 너무 힘들 것이다. 그러나 심장조차 녹이 슬면 그땐 정말 돌이킬 수 없다.” 심장이 녹슬기 전에 한 번 더 사랑해야 한다. 생이 허락한다면.

나는 조이스 박을 잘 모르지만 그녀가 택한 글이라는 방식이 마음에 든다. 그녀는 아마 겉치레를 잘 하는 사람은 아닐 것이다. 포근하고 따뜻한 휘장을 두르는 일을 잘 못하고 사회성이 뛰어나지 못해 손해 보는 사람에 가까우리라 생각한다. 마치 내가 그런 것처럼. 사람을 사랑하지만 사람을 피하면서 자기 애정을 내비친다. 그게 그녀의 방식이고 이번 택한 것이 그녀의 동화다. 그 글줄들이 그렇게 시원한 것은 같은 것을 가치 있게 여기는 마음이 닮았기 때문이리라, 사랑과 슬픔을 받들어 모시는 마음이. 저자의 샤프한 말이 뭉툭한 내 마음을 대신하여 설명한다, “능히 사랑하지 못해 수이 빛나지 못하나, 차마 사랑하려고 애쓰는 와중에 마침내 빛날 수 있는 그런 마음을 나는 믿는다.” 뭐라 더 표현할 수 없다. 먹먹하다.

덧) 표지부터 내지까지 알곡처럼 빼곡히 들어선 삽화가 놀랍다.
Daniel Egnéus(다니엘 이그네우스)의 표지를 비롯해 Nadezhda Illarionova(나제즈다 일라노료바), Kay Nielsen(케이 니얼슨), John Bauer(존 바우어), Arthur Rackham(아서 래컴)의 아름다움은 화가 날 정도.


"이따금 삶에 내몰려 정신없이 질주할 때, 아니 질주하지 않으면 이 삶을 버틸 힘이 없어서 죽지 않고 살기 위해 욕망에 나를 내주고 그 힘에 실려 달리다가 멈출 때, 문득 목도한다. 어두운 숲속을 생채기 투성이로 달리던 늑대 인간 하나가 차마 자신을 못 이겨 하늘의 달빛을 보며 울부짖으며 절규하는 모습을. / 소망은 아득하고 욕망은 강렬하다. 소망은 실낱같고 삶은 지랄 맞다. 인간만이 하늘을 올려다보는 머리를 가진지라, 달을 보며 표효한다."(P.193)

"햇빛처럼 빛나고, 달빛처럼 빛나며, 별빛처럼 스스로 빛을 낸다는 것은 내면의 자기 인정과 존중의 힘이 묵직한 닻처럼 드리워졌을 때 빚어내는 아름다움이다."(P.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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