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지 1 - 1부 1권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 (마로니에북스) 1
박경리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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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한 달에 한 번 도서모임을 함께하는 진숙은 토지를 매년 한 번씩 읽는다고 한다보통 봄바람이 불어오면 시작해 가을바람이 불어오면 마친다고아이 셋을 기르면서도 틈틈이 읽는 독서의 기쁨은 쏠쏠한데토지는 그 가운데 이야기의 즐거움을 매년 준다고 했다어린시절 동네 놀이터 인연으로 TV 드라마 토지의 아역 탤런트와 같이 놀았다연예인은 어려도 후광이 달랐다너덧 번 정도 만났을 뿐인데 뽀얀 얼굴과 새카만 눈동자가 너무 예뻐서 나는 주눅이 들었다귀티나는 얼굴이 오래 잊히지 않았다내게 토지가 특별히 기억에 남았다면 그것 때문일 것이다. ‘어린 최서희를 눈앞에서 보았던 경험
 
토지는 1987년 KBS에서, 2004년 SBS에서 TV드라마로 두 차례 방영되었다. (이재은은 87년작에선 어린 최서희로, 2004년에는 서희의 몸종 봉순으로 등장한다. 완전 토지배우!)굳이 열심히 찾아본 드라마는 아니지만 틈틈이 보았던 한복 입은 최수지와 김현주의 얼굴은 인상적이었고중간중간 누구와 누가 결혼했다 정도만 기억에 남았다언젠가는 읽어야지 읽어야지 했던 스무 권의 책재작년에 기회가 되어 Ebook으로 마로니에북스에서 토지』 전집을 구매하고도 영 들춰보기가 쉽지 않았다
 
이제는 더 늦출 수 없다고 생각했다새 Ebook리더기를 샀기 때문조심스레 토지』 1권을 펼쳐 그 안에 든 것들을 들여다본다물론 이 책을 읽는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재작년 작년 모두 토지』 몰입의 가장 큰 어려움은 1권에서도 헷갈리는 수많은 인물들이었으므로그렇다고 토지 인물사전을 먼저 훑어보기도 뭐하다인물과 인물의 구체적 성격을 파악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일단 읽으면서 흐름에 묻어가 보기로 한다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아름다운 것들진실이 손에 잡힐 것만 같았고 그것들을 위해 좀 더 일을 했으면 싶었다고뇌스러운 희망이었다글을 쓰지 않는 내 삶의 터전은 아무 곳에도 없었다목숨이 있는 이상 나는 또 글을 쓰지 않을 수 없었고보름 만에 퇴원한 그날부터 가슴에 붕대를 감은 채 토지의 원고를 썼던 것이다백 매를 쓰고 나서 악착스런 내 자신에 나는 무서움을 느꼈다어찌하여 빙벽(氷壁)에 걸린 자일처럼 내 삶은 이토록 팽팽해야만 하는가가중되는 망상(妄想)의 무게 때문에 내 등은 이토록 휘어들어야 하는가나는 주술(呪術)에 걸린 죄인인가내게서 삶과 문학은 밀착되어 떨어질 줄 모르는징그러운 쌍두아(雙頭兒)였더란 말인가달리 할 일도 있었으련만다른 길을 갈 수도 있었으련만……
 
진실이 머문 강물 저켠을 향해 한 치도 헤어나갈 수 없는 허수아비의 언어그럼에도 언어에 사로잡혀 빠져날 수 없는 것은 그것만이 강을 건널 가능성을 지닌 유일한 것이기 때문이라고나는 전율(戰慄없이 그 말을 되풀이할 수가 없다
(박경리토지』 자서(自序), 1973) 
 
개인적으로 1권에서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박경리(朴景利, 1926~2008)의 서문이라고 생각한다토지』 책의 실물한 권의 두께는 보통이 아니다이런 책을 스무 권이나 썼다니 피를 쏟고 뼈를 갈아넣었으리라는 것은 당연한 수순글쓰는 이는 천형(天刑)을 얻었다는 말도 이에 있겠다. 1973, 1993, 2002박경리의 서문은 한 줄 한줄 핏빛으로 아름다웠다나는 이 책을 읽을 것이다
 
토지 1권은 경남 하동의 평사리 마을몇 대째 지주인 최참판댁을 중심으로 펼쳐진다동학혁명은 실패로 끝나고 그 가운데 참판댁 역시 상처를 입는다어린 최서희를 중심으로 함께하는 어린이들그리고 어른들의 얽히고 설킨 관계성이것만 지루하지 않게 읽어도 1권의 독서는 성공이다가장 눈에 띄는 건 용이와 월선의 사랑이다현실에서 연결되지 않았지만 마음은 떨어지지 않는이것이 사랑이 아니라면 무엇으로 말해야 하는가이것을 손쉽게 이루어지지 않아(끝을 보지 않아끝나지 않는 집착이라고 말한다면 이 사랑이 너무나 싸구려가 아닌가싸구려라고 하기에 용이와 월선은 서로를 배려한다서로가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제일이다이루지 못해도 끝내 눈에 밟히는 사람그게 이 사랑의 힘이고 역량인 것 같다
 
얼굴을 바싹 들이대며 용이는 속삭이듯이 말했다
니는 내 목구멍에 걸린 까시다우찌 그리 못 살았노못 살고 와 돌아왔노.” 
하다가 용이는 울었다월선이는 비실비실 도망치려 했다매를 치켜든 아버지 앞에서 달아나려는 계집아이처럼울음을 죽이려고 이를 악무는 용이 이빨 사이에서 괴상한 소리가 났다그는 월선의 손목을 낚아챘다손목을 끌고 방으로 들어온 용이는 갓을 벗어던지고 등잔불을 불어 껐다그리고 나머지 한 손으로 여자의 나머지 한 손을 꼭 잡고 방바닥에 주질러 앉는다
어느 시 어느 때 니 생각 안 한 날이 없었다모두 다 내 죄다와 니는 원망이 없노!” 
끌어안아 여자 얼굴에 얼굴을 비벼댄다남녀의 눈물이 한 줄기가 되어 흘러내리고또한 그들의 몸도 하나가 되어 높이 높이 떠올라가서 영원히 풀어헤칠 수 없는 처절한 사랑의 의식을 올리는 것이었다
 
우찌 그리 못 살고 왔노용이가 그러데요우찌 그리 못 살고 왔겄소어매불쌍한 우리 어매팔자 치리 하고 살라 카더마는 내 신세가 어매 한세상맨치로 우찌 그리 똑같겄소짝도 없고 임자도 없고 어매 자식 어매 안 닮고 뉘 닮았겄느냐고 했더마는…… 너무 보고 접아서 왔소용이 사는 울타리라도 한분 보았이믄 싶어서 왔소어매날 미친년아기든년아 하겄지요나도 모르겄소보고 접아서 미치고 기들겄십디다*. 나도 모르겄소.’ 
 
용이하고 살 수 없다면 애꾸눈이건 절름발이이건 월선에게는 상관이 없었을 것이다누구를 따라가든지 그는 제 집 없는 뜨내기의 신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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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이충호 만화 삼국지 1 - 난세에 태어나다 황석영.이충호 만화 삼국지 1
황석영 지음, 이충호 그림, 김태관 각색 / 문학동네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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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정판 『만화 삼국지가 나왔다고 한다, 그것도 문학동네에서. 황석영의 글과 이충호의 그림이라는 이야기를 듣기도 전에 애니북스도 아니고 문학동네 타이틀을 달고 나왔다는 데 무작정 신뢰가 갔다. 만화 전문 임프린트도 있는데 문학 전문 출판사 이름으로 만화책을 냈다는 건 그만큼 개정판 퀄리티에 자신이 있다는 이야기다. 안 읽어볼 수가 없다.
 
새로이 만화 삼국지가 나왔다는 이야기가 들 때 요코야마 미쓰테루의 전략 삼국지가 떠오르는 건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다. 물론 일대일로 비교할 수는 없다. 이충호의 15 권짜리 전집과 요코야마 미쓰테루의 60권짜리 대작은 디테일의 차이가 없을 수 없기 때문에. 다만 한때 만화가를 꿈꾸었던 전공자로써, 중학생 눈높이를 나름 알고 있는 직업인으로써 몇 마디를 얹자면 이번 삼국지는 꽤 괜찮다.
 
무엇보다 컬러다, 그림이 시원시원하다. 그림에 강약이 있어 한눈에 쏙 들어온다. 황석영의 글은 만화로 연출할 때 재구성할 터라 잘 모르겠지만 이충호의 그림은 요즘 애들 취향에 꼭 맞다. 이미 소년 만화에서 안정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작가를 섭외해 친밀한 작화를 제공한다. 소년 만화에서 필수적으로 등장하는 인체 과장법이 부자연스럽지 않다. 미안하지만 미쓰테루의 그림은 부자연스러운 왜곡과 부적절한 인체 표현이 무척 많았던 기억이 있다. 게다가 잔인한 표현도 있었다는 걸 숨길 수 없겠다. (좋은 말로 하면 지나치게 디테일이 뛰어났다.) 배경 처리도 부자연스러운 데가 없다. 물론 컴퓨터 그래픽 페인팅 덕이겠지만 정확한 원근법이다. 필요할 때마다 중간중간 나오는 지도는 이해에 편리하다. 만화만의 장점이다. 그리고 15권이면 딱 알맞다. 너무 권수가 많지 않아서도 맘에 든다.
 
술술 넘어간 컬러풀한 만화 페이지도 만족스러웠지만 기대하지 않았던 권말 부록이 압권이었다. 연표와 인물 스토리로 정리한 삼국지 이야기. 역시 비주얼 차트는 중요하다. 레이아웃도 단정하고 가독성과 판독성도 뛰어나다. 좋은 말인지 나쁜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부록은 학습교재 같아서 공부하기에 딱 맞다. 이 말은 만화를 먼저 본 후, 정본 삼국지를 글로 읽기 적절하다는 말이다.
 
, 세상이 점점 좋아진다. 국민학생 때 누런 이문열 삼국지를 꾸역꾸역 읽었던 기억이 나는데, 지도며 인물관계며 머리에 남는 게 별로 없었다. 특히 지도. 인물은 자꾸 뒤섞였고. 근데 이 만화는 이미지로 먼저 뇌리에 도장 찍으니 짱짱맨이다. 요즘 애들은 얼마나 좋은가. 이런데도 책을 안 읽는단 말인가! 학생용이지만 정말 탐나는 만화 삼국지다. 그러니 얘들아 책좀 읽어라 책좀. 책 좀 읽어라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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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노동 이반 일리치 전집
이반 일리치 지음, 노승영 옮김 / 사월의책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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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년에 한 번 오는 2월 14일, 내게 그날은 사랑을 전하는 밸런타인데이가 아니라 쓰디쓴 공인인증서 갱신의 날이다. 내가 가장 ‘빡치는’ 그림자 노동이 그것, 발급받은 은행에서 갱신 한 번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거래하는 모든 은행마다 새롭게 인증서를 등록해야 한다. 매번 영문, 숫자, 특수기호를 조합해 더 까다롭게 바꾸라는 비밀번호 설정은 사람을 아주 미치게 한다. 한두 시간은 아무것도 아니다. 과장 좀 보태서 하루를 종일 인증서 바꾸는 데 사용해야 한다. 인격이 좀 수양된 줄 알았는데 이럴 때 보면 아직 멀었다. 분노로 가득 찬 미친 인간 하나가 눈이 시뻘건 채로 컴퓨터 모니터와 스마트폰을 노려보고 있다. 은행에서 신경 써야 할 보안 책임이 나란 인간에게 전이된다. 내가 추정하는 인증서 갱신 수당은 최하 5만 원이다. 
 
새로 문 여는 음식점 카페 모두 점원 대신 키오스크다. 내 손으로 화면을 터치하고 카드를 긁는 일은 익숙하다. 리터당 백몇십 원 싼 ‘셀프 주유소’는 키오스크의 원조다. 사실 나처럼 낯가리는 인간은 이쪽이 더 편하기도 하다. 그렇지만 그들이 절감한 인건비가 내 상품 구입비에 제대로 적용되는지는 잘 모르겠다. 솔직히 같은 품목의 옆집과 별 차이 없이 비싸다. 물론 옆 가게가 내게 가격보다 과한 서비스를 해주었다고 하면 할 말 없지만. 그것도 그들의 그림자 노동일 테니. 
 
이반 일리치를 처음 만난 건 ‘교육사회학’ 갈등론적 접근 이론에서의 ‘탈학교론’이었다. ‘가장 급진적인 사상가’라거나 ‘지식의 저격수’라는 수식어를 지닌 학자라며 칭찬을 쏟아내시던 선생님의 제스처가 생생히다. 그는 사제 서품을 받은 가톨릭 신학자로서 12개 언어를 할 수 있었고 여러 학위가 있어 교수로도 일할 수 있었음에도 미국의 슬럼가에서 신부로 근무했다고 한다. 자기가 누릴 수 있는 달콤함을 포기한 이는 매력적이다. 『그림자 노동』(사월의 책, 2015)을 반갑게 맞이한 것은 무엇보다 저자 때문이었다. 
 
저자는 머리말에서 ‘그림자 경제’라는 새로운 현상에 대해 언급한다. 2장의 초반부에서 ‘그림자 가격’을, 본격적으로 그림자 노동을 다루는 5장에서 ‘그림자 노동’을 자세하게 설명한다. 그가 살았던 시기는 2차대전 이후 그 모든 것이 재건되어야만 했던 급진적 (새로운 산업화) 시기이며 한편 인류의 밑바닥이 얼마나 더러운지 실감할 수밖에 없었던 시기다. ‘화폐 거래 영역에 속하지 않으면서 산업화 이전 사회에서 찾아볼 수 없던 경제 형태’는 당시의 그에게 충격이었던 것이 틀림없다. ‘산업화 사회’의 문제는 보이지 않아서 대응할 수 없고, 보이지 않아서 더 잔인하다. 
 
일리치는 노동의 첫 모양새를 ‘자급자족 노동‧토박이 노동’이라 부른다. 이후 ‘임금 노동’이 등장했으며, 세 번째로 ‘그림자 노동’이 나타났다고 말한다. 총 다섯 장으로 이루어진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책 제목과 동명인 마지막 챕터이리라. 삶이 거대화되고 산업화되고 의무화될수록 많은 것들이 획일화된다. 선택의 여지가 사라진다. 이전에는 없었던 토박이말-모어, 일하는 남자-집안일하는 여자의 이분법이 등장한다. 자연히 유급노동과 무급노동의 개념도 등장한다. 기업이 이익을 극대화하려면 무급노동의 범위가 넓어져야 한다. 자연히 고객의 무급노동이 중요해진다. 이 개념이 가정 내로 적용된다. 여자의 가사노동이 그것이다. “임금노동을 하려면 발탁되어야 하지만 그림자 노동은 배정받는다.”(P.178) 
 
전업주부 아내에게 “집에서 노는 데 뭐가 힘들어?”라고 짜증 내는 남편의 이야기는 낯설지 않다. “집에서 노는 나는 왜 이렇게 바쁘지?”라고 자책하는 전업주부 이야기 역시 그렇다. 경제적 능력이 없어 이혼하지 못한다는 전업주부들 사연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돈을 받지 못하는 일은 가치 없는 일인가? 유럽 어디에서는 애 셋을 낳은 여자에게 연금도 준다는데. ‘아이 때문에’ 일을 떠넘기는 동료 때문에 부글부글 끓는 직장인 이야기가 바로 내 얘기다. 근데 그녀들이 정말 이기적이기만 한 걸까? 왜 그들의 overwork은 인정받지 못하는가. 혹은 왜 그렇게 overwork 해야 하는 걸까. 
 
그림자 노동의 성격을 파악하려면 두 가지 점에서 혼동을 피해야 한다. 첫째, 그림자 노동은 자급자족 활동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림자 노동은 사회적 자급자족이 아니라 공식 경제에 기여한다. 둘째, 그림자 노동은 저임금 노동이 아니라는 점이다. 무급의 그림자 노동은 임금 노동의 전제 조건이다. (중략) 나는 그림자 노동을 노예제나 임금 노동만이 아니라 강제 노동과도 다른 특이한 형태의 예속이라는 관점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P.177)
 
그림자 노동은 일종의 ‘서비스’다. 더 친절하게. 더 다감하게, 더 기분 좋게. 감정 노동뿐 아니라 육체노동으로도 이 서비스는 증가한다. 여기에 ‘자발적인’이 붙는다는 게 기가 막히는 포인트다. 이렇게 자발적으로 노동하게 만드는 것은 ‘그림자 노동 신비화’의 전략이다. 
 
첫째, 여성과 남성의 생물학적 분류로, 여성이 하는 일을 노동이 하는 일로 규정하는 것. 둘째, 그림자 노동을 사회적 재생산과 뒤섞어버리는 것. 셋째, 화폐시장 바깥에서 이뤄지는 온갖 행동에까지 그림자 가격을 매기는 것. 넷째, 여성주의자들의 관점 실수로, 보수의 유무 면에만 집중하는 것. (무익한 노동을 강요받고 있음을 간과하는 것) 다섯째, 산업적 존재 양식의 절반을 여성 노동으로 만들어버린 것.   
 
일리치는 이 그림자 노동의 신비화가 “경제적 통제를 위해 발명된 성을 가지고 여성 본연의 인격을 영원히 더럽히려는 시도”이며, “그림자 노동이야말로 근대의 가사 노동으로 대표되는 사회 현상을 가장 잘 가리키는 용어”(P.201)라고 주장한다. 일리치는 남성으로서 여성의 가사를 최초로 경제적 가시화한 최초의 인물이 아닐까. 그건 가부장(家父長)이 아닌 신부(神父)의 몸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걸까. 
 
 『그림자 노동』은 1981년에 출간되었다. 2018년의 오늘날, 더 이상 가사(家事)가 ‘그림자 노동’을 대표하지 않는다. 남녀노소 어디에나 그림자 노동이 강요되는 시대다. 물론 아직도 가사노동의 가치는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지만. 그림자 노동은 나날이 거대한 괴물이 되어간다. 키오스크 조작법을 공들여 알려주는 점원이 언제 ‘키오스크 때문에’ 일자리를 잃을지 모른다. 일리치의 시대보다 더욱 잔인하다. 대가를 준다는 것은 가치를 인정한다는 것이다. 그림자 노동이 늘어난다는 것은 가치를 덜어낸다는 것이다. 기계에게 금액을 지불하고 인간에게 줄 금액은 절감한다. 정녕 사피엔스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전에 대안을 찾을 수 있을까? 못내 우울하다.  

발전이 입히는 피해를 모면하는 것이 새로운 ‘만족’을 얻는 것보다 더 절실하게 추구하는 특권이 되었다. 출퇴근 시간대를 피해 통근할 수 있는 사람은 알고 보면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사람이고, 가정 분만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알고 보면 엘리트 학교를 나온 사람이며, 아플 때 의사를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알고 보면 이미 희귀하고 특별한 정보를 가진 사람이다. 또 맑은 공기를 마실 수 있는 사람은 알고 보면 부자이거나 행운아이며, 허름한 집이나마 직접 지을 수 있는 사람 역시 진짜 가난한 이가 아니다. 오늘의 하층민은 후견인을 자처하는 이들이 제공하는 역생산성 꾸러미와 도움을 어쩔 수 없이 소비해야 하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반면, 특권층은 그런 것들을 마음대로 거부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P.22)

나는 인간을 호모 에코노미쿠스로 보는 사회에 대하여 호모 아르티펙스 수브시스텐스(자급자족적 삶의 기술을 갖춘 인간)의 전통을 복원한 사회를 맞세운다. (P.25)

산업 노동의 무미건조한 역사는 이런 식으로 경제학의 사각지대를 없애왔따. 호모 에코노미쿠스는 한 번도 중성적인 적이 없었다. 그것은 애초부터 비르 라보란스와 페미나 도메스티카 즉 ‘일하는 남자’와 ‘집안일하는 여자’ 커플로 창조되었고, 이로부터 호모 인두스트리알리스가 탄생했다. 완전 고용이라는 목표를 향해 발전해 온 사회치고 그림자 노동이 고용 노동과 나란히 성장하지 않는 곳이 없다. 그림자 노동은 여성이 더 우세할 수밖에 없는 활동을 깎아내리고 남성에게 유리한 활동을 높여주는, 전례 없이 효과적인 장치가 되었다. (P.45)

그러니 성장과 완전 고용이라는 목표를 여전히 포기하지 않는다면, 훈련받은 사람들을 금전적 보상 없이 일하게끔 만드는 경영방식이 ‘발전’의 최종 형태로 펼쳐질 것이다. 호모 인두스트리알리스는 이제 청바지 차림으로 경제의 성적 통합을 추구하고 있다. (P.46)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성직자 계급이 자기들의 서비스를 인간의 본성적 필요로 정의하고, 이 서비스 상품을 영생에 없어서는 안 될 필수적 요소로 둔갑시켰다는 점이다. (P.106)

내가 주제로 택한 것은 산업 경제의 가려진 측면, 더 구체적으로는 노동의 그림자 측면이다. 나는 지금 저임금 노동이나 실업이 아니라 ‘무급 노동’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산업경제의 고유한 특징인 무급 노동이야말로 내가 말하려는 주제다. 과거 대다수 사회에서는 남녀 할 것 없이 무급 활동을 통해 가족의 생계를 유지하고 개선해 왔다. 필요한 것이 생기면 그 대부분을 가족 스스로 만들곤 했다. 하지만 이러한 자급자족 활동은 지금 내가 다루려는 주제가 아니다. 내 관심은 이와는 전혀 다른 무급 노동에 있다. 산업사회가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하는 데 있어서 필수적인 보완물로 요구하는 무급 노동이 그것이다. 이러한 무급의 봉사는 자급자족에 기여하지 않는다. 임금 노동이 그렇듯이 오히려 자급자족을 파괴할 뿐이다. 나는 임금 노동의 이런 보완물을 ‘그림자 노동’이라 부른다. (P.176)

오늘날 여성이 불구의 처지가 된 것은 경제적인 면에서 보수를 받지 못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자급자족의 측면에서도 무익한 노동을 강요받고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 (P.196)

우리 사회는 ‘돌봄’이라는 미명 하에 피해자 스스로 억압의 조력자가 되게끔 강요한다. 도와주고 구제하고 해방시켜야 마땅할 사람들에게 고작 감성적 연민을 품을 때 이 사회는 평범한 행복을 느낀다. (P.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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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파친코 1~2 세트 - 전2권
이민진 지음, 이미정 옮김 / 문학사상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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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사전 정보 없이 이민진의 파친코를 읽기로 했을 때 제일 처음 든 생각은 제목이 이게 뭐람?”이었다파친코』 1권을 펼쳐들었을 때 등장한 부산 영도의 인물들을 보고 들었던 생각은 장애인 가족과 파친코랑 무슨 관련이지? ‘토지처럼 지어야 하는 거 아닌가? (제목을 잘못 지은 거 아냐?)”였다어찌 되었든 술술 넘어가는 책장하룻밤만에 800페이지를 육박하는 소설을 뚝딱하고 고개를 드니 새벽 다섯 시였다파친코』 최고의 장점은 잘 읽힌다는 것
 
소설의 흡입력은 쉬운 문장력에서 나온다감성 소설가나 에세이스트가 자랑하는 간질간질한 표현력이나 기억에 남을 만한 여구도 없이 문장은 단순하기 그지없다미국 공영방송 NPR과 뉴욕타임스,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 등 미국 대륙과 유럽 언론에서 큰 호평을 받았으며영국의 BBC는 ‘2017년에 꼭 읽어야 할 책 10’ 중 하나로 파친코를 소개했다고 한다는데책뚜껑을 열면 내용은 의외로 투박하다펄 벅의 대지처럼 몇 대에 걸친 가족의 인생을 그렸다는데 솔직히 2의 제인 오스틴이라는 작가에의 호평은 좀 부담스럽다
 
자이니치에 대한 간략한 지식이 있을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이 이야기는 큰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못할 것 같다그러나 자이니치의 삶을 전혀 모를 사람들에게는 너무도 쉽고 절절하게 그들의 삶을 전달해버리는 빠르고 강력한 이야기가 되었을지도
 
자연스레 일본으로 넘어가게 되는 주인공의 상황 설명을 위해 장치된 앞부분의 촘촘한 인물 설정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불편함을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인생을 망친 여자와 그를 구해 일본으로 데려가는 구원자 목사의 모습은 자연스럽지만 불편했다너무나 진부하게 열여섯 순자는 인생을 망친다그녀를 임신시킨 가정이 있는 남자는 돌아오지 않는다순자가 간호해 폐병에서 살린 남자가 그녀를 구원한다여자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남자로 인해 인생을 망치고남자로 인해 인생을 구원받는다아무리 그 시절이 그랬다고 해도 다시금 읽기에는 불편하다
 
순자를 구원한 남자는 실제로 그녀를 구원하고자 한다그는 기독교 목사다자연스레 이야기에는 기독교 세계관뿐 아니라 기독교 용어와 성경의 말씀성경의 인물 이름을 딴 주인공이 계속 등장한다기독교 문화가 너무나 익숙한 나에게는 설정과 용어가 편안했고작가가 설정한 세계관을 쉽게 이해할 수 있었으나기독교 문화를 잘 모르고 싫어하는 사람들은 읽기가 꽤 불편했을 것이다
 
순자의 두 남자인 한수와 이삭은 너무나 극과 극을 달리는 인물이다세상의 모든 것이 자기 손에 있다고 믿으며 재빠른 머리로 돈을 긁어모으고 힘과 재력으로 사랑을 표현하는 능력자 한수세상의 모든 것에 집착하지 않으며 모든 고통을 받아들이고 희생으로 사랑을 표현하는 무능력한 이삭둘 다 각자의 방식으로 순자를 사랑한다순자 역시 각자를 깊이 사랑한다현실에서 이삭을 좋아할 나는 솔직히 한수의 사랑도 크고 깊었다고 생각한다
한편 남편 있는 경희를 향한 사랑을 견디지 못해 의외의 방식으로 자신을 불태워버린 창호창호를 사랑하지만 그를 포기하려고 애를 쓰는 경희의 사랑 역시 또 다른 차원에서 완성되었다고 생각한다
 
완연히 다른 기질을 가지고 태어난 순자의 아들 노아와 모자수(모세) 처음부터 달리 살았고 다르게 살고자 했으나태생 자이니치라는 숙명은 파친코라는 공동의 무대로 둘을 데려간다. ‘그들처럼 살지 않고자한 노아는 실패한다아무리 그렇게 살지 않으려 했어도 노아는 자이니치였다일찍이 파친코 매장에서 돈을 벌기 시작한 쾌활한 모자수는 승승장구한다모자수는 자이니치의 현실을 순순히 받아들여 욕심을 냈다두 사람은 모두 파친코에 발을 담그고 일본인인 체자이니치인 채 살아간다
 
어떻게 야쿠자를 옹호할 수 있겠는가그들은 어느 곳에서나 조직적인 범죄자였고 나쁜 짓을 일삼았다하지만 순자는 많은 조선인들이 다른 일자리가 없어서 그들 밑에서 일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정부와 좋은 회사들은 조선인들을 고용하지 않았다교육받은 조선인도 마찬가지였다그런 사람들은 모두 일을 해야 했다동네에 사는 많은 사람들이 일을 하지 않은 사람들보다 훨씬 더 친절하고 더 존경스러운 사람들이었다. (P.124)
 
이야기 후반부 노아의 선택을 생각한다연약하나 꿈 많은 한 인간에게 자이니치라는 굴레가 얼마나 끔찍한 한계였을지를 실감한다일본인의 신분을 버리고 다시 자이니치로 돌아가느니 다른 선택을 할 정도로 이 신분은 굴레였다작가는 이야기의 말미에 가까워지면서 노골적으로 의중을 드러낸다. 3세대인 모자수의 독백을순자와 노아와의 대화를 통해, 4세대인 솔로몬과 피비의 대화를 통해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건 명백히 드러난다왜 자이니치는 이렇게 불합리하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이다
 
미국에서는 강꼬꾸징이니 조센징이라는 게 없었어왜 내가 남한 사람 아니면 북한 사람이 돼야 하는 거야이건 말도 안 돼난 시애틀에서 태어났어우리 부모님은 조선이 분단되지 않았을 때 미국으로 갔고.” 피비가 그날 하루 동안 편협한 대우를 받았던 일들 가운데 하나를 소리 높여 이야기했다. “왜 일본은 아직도 조선인 거주자들의 국적을 구분하려고 드는 거야자기 나라에서 4대째 살고 있는 조선인들을 말이야넌 여기서 태어났어외국인이 아니라고이건 완전 미친 짓이야네 아버지도 여기서 태어났는데 왜 너희 두 사람은 아직도 남한 여권을 가지고 다니는 거야정말 이상해.” (P.315) 
 
고등학교를 중퇴한 모자수도 영문학을 사랑하고 공부에 매진하여 와세다 대학으로 진학한 노아도 할 수 있는 것 똑같았다미국 유학을 하고도 결국 파친코를 이어받을 수밖에 없었단 모자수의 아들 솔로몬도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파친코뿐이었다잠시 쓰기를 멈추고 검색해보니 자산 1조 2000억의 일본 파친코 황제는 한국인이라고 한다그의 이름은 한창우, ‘경제대국’ 일본의 24위를 차지하는 거부다자이니치 기업 ()마루한은 일본 파친코 대부분을 장악했다그의 이야기를 읽어보니 그 역시 일본에서 자이니치로서 성공할 수 있는 일이 파친코뿐이었다고 한다솔로몬의 말이 오버랩된다아버지는 폭력배가 아니에요. 나쁜 짓을 하지 않아요평범한 사업가죠세금을 모두 내고모든 일을 규칙대로 처리해요그런 사업을 불법적으로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아버지는 한 치도 틀림없이 정확하게 일을 처리하고 도덕적인 분이에요파친코를 세 개 운영하고 있지만 그건… 아버지는 자기 것이 아닌 것은 아무것도 받지 않아요돈에도 크게 관심이 없어요많은 돈을 기부하고”(P.327) 
 
삶은 왜 이다지도 길고 질긴가, ‘외국인으로 분류되어 선거도 할 수 없고 공무원도 될 수 없는손발이 묶인 신분이 재일 한국인이다그들에게 삶은 꽃길이었던 적이 한 번도 없다그럼에도 살아야 한다먹고살아야 한다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밑바닥 허드렛일이거나 조직폭력배도박사업뿐이다. 그러니 방법이 없다굶거나 악착같이 돈을 벌거나이런파친코 업계 1위의 (주)마루한뿐만 아니라 업계 2위를 차지하는 ()다이남 역시 한국계 파친코다
 
동양풍을 그린 건지 뭔지 뭘 표현하고 싶은지 모를 희한한 표지와 잊을만하면 툭툭 튀어나오는 오타는 책의 품위를 마구 떨어트린다나는 외형과 마감에 무척 민감한 인간이어서 좀 힘들었다앞서 말했듯 도입부의 종교성 역시 누군가에게 쉽지 않다물론 이런 단점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800페이지를 극복한다면 피부로 와닿는 재일 한국인의 슬픔과 한숨을 읽어낼 수 있을 것인간의 현실보다 더 강하고 극적인 것은 없다. 바람이 불면 풀이 눕는다. 세찬 바람이 불면 풀이 더 낮게 눕는다. 어떻게든 살아남는다. 그들은 바람처럼 강인하고 잡초처럼 우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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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앞의 생
에밀 아자르 지음, 용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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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앞의 생에서 모모가 하밀 할아버지에게 물었습니다. “할아버지사람이 사랑 없이도 살 수 있나요?” “살 수 있지슬프지만.” 하밀 할아버지의 대답은 정답이 못 됩니다살 수 있다면 결코 슬프지 않습니다생각하면 우리가 생명을 저버리지 않고 살아가고 있는 한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습니다그리고 사랑한다는 것은 기쁨만이 아닙니다슬픔도 사랑의 일부입니다마치 우리의 삶이 그런 것처럼
_신영복담론돌베개, 2015, P.418


사람이 사랑 없이 살 수 있나요?”라는 말은 세상 사람들의 흔한 의문이다. 정말로 사랑 없이 살고 있는 사람들도 있고, 사랑 흉내를 내며 살고 있는 사람도 있다. 사랑을 부를 때 사랑은 실제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는 것 같기도 하다. 사랑타령만이 주는 환상도 있고, 위안도 있다. 

나의 친구 하나는 만날 사랑타령을 한다그게 그 친구의 인생 중심이고그의 원동력이다그이가 사랑타령을 할 때 그이는 가장 그답다그의 재능이 사랑타령을 하며 반짝반짝 빛난다그는 말을 가지고 노는 예비 작가다시 같기도 하고 소설 같기도 한 그의 사랑타령은 언제나 책의 한 문장 같아서 나를 놀라게 한다

자기 앞의 생의 주인공 모모 역시 사랑타령의 일인자일 것이다입에 사랑을 달고 살지는 않지만 그가 이야기하는 것은 모두 사랑이다이 동네에 사는 누구든 모모와 이야기를 나누기만 하면 사랑을 이야기하게 된다세상의 온갖 연약한 것들이 그의 입에서 사랑으로 변화한다장사치도둑창부뚜쟁이포주성소수자이민자인 그들이 모모의 입을 통해 유일하고 현명하고 독특한 사람으로 표현된다그들 역시 각자가 가진 사랑의 이야기를 한다그중에서 제일 많은 사랑으로 언급된 이가 모모와 함께 사는 로자 아줌마다
 
모모는 회교도로자 아줌마는 유대인이다결코 있을 수 없는 가정의 조합창부의 아이를 거두어 키우는 로자 아줌마는 독특한 재치를 지닌 모모를 너무나 사랑한다거칠고 두려운 원래 가정에 돌려보내지 않으려 이름과 나이를 속일 만큼아줌마는 이제 너무나 늙고 병들었다가족은 오래전에 잃은 아줌마는 어디에서도 도움받을 데가 없다고객도 떠나고 건강도 떠났으며 이제는 돈도 없다허름한 7층 아파트에 간신히 몸을 눕히지만 여기서도 곧 나가야 할 처지다정신도 온전하지 않다나날이 비참해진다언제든 두 사람이 헤어져도 이상하지 않다
 
로자 아줌마는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어떻게 보아도 아름답지 않다이전의 미모는 사라졌을 뿐 아니라 뚱뚱해졌고 움직일 수도 없다부담스러울 만큼의 외형과 답 없는 건강 상태, 그 누구도 그녀를 사랑할 수 없다조건으로는 그녀를 결코 사랑할 수 없다그러나 조건과 상관없는그것만이 ‘사랑’의 이름을 가진다조건의 이름을 단 사랑은 사랑과 닮은 사랑이다땅에 매인 사람은 조건에 매여 사랑할 수밖에 없지만 한편 가끔 조건을 벗어난 사랑이 있어 거기에 진실된이라는 왕관을 얻는다그리고 여기모모가 그런 이름표를 얻었다
 
사람은 사랑을 통해 성장한다. 사랑할 때만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떠올리고, 깊이 생각하고, 표현하고, 또 다른 방법으로 표현하고, 거절당했을 때에도 성장한다. 사랑을 배우고 사랑을 연구할 때 더 놀랍게 성장한다. 이 책을 읽고 무언가를 느끼고, 표현할 수 없는 이 잔상을 글로 표현하려고 낑낑거리는 이런 순간을 통해서도 사랑은 자라나고 나는 하루 더 사랑할 수 있는 사람으로 되어간다. 

모모는 아줌마의 마지막을 아름답게 하려고 최선을 다한다아줌마가 원하는 장소에서 가장 원하는 방식으로 마지막을 맺기를 바란다나의 변함없는 소망 하나도 비슷하다내가 목숨처럼 사랑하는 사람의 임종을 지키고 싶은 소망그 사람이 가장 편안한 장소에서 가장 원하는 방식으로 보내주고 싶다가장 예쁜 모습으로 그 사람의 마지막 시야에 남고 싶다모모는 나의 소망을 먼저 경험했다나 역시 꼭 그리하리라 다짐한다

그러나 그리하여도 그리하지 못해도 괜찮다. 책장의 마지막을 덮으며 내가 알게 된 것은 여기내가 원하는 마지막을 맺지 않아도 사람은 행복할 수 있다는 것충만하게 사랑했다면 된다사랑은 존재 그 자체로 완성이므로. 치장 없는 내 모습으로, 사랑처럼 안 보이는 사랑이라도, 그저 사랑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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