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앞의 생
에밀 아자르 지음, 용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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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앞의 생에서 모모가 하밀 할아버지에게 물었습니다. “할아버지사람이 사랑 없이도 살 수 있나요?” “살 수 있지슬프지만.” 하밀 할아버지의 대답은 정답이 못 됩니다살 수 있다면 결코 슬프지 않습니다생각하면 우리가 생명을 저버리지 않고 살아가고 있는 한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습니다그리고 사랑한다는 것은 기쁨만이 아닙니다슬픔도 사랑의 일부입니다마치 우리의 삶이 그런 것처럼
_신영복담론돌베개, 2015, P.418


사람이 사랑 없이 살 수 있나요?”라는 말은 세상 사람들의 흔한 의문이다. 정말로 사랑 없이 살고 있는 사람들도 있고, 사랑 흉내를 내며 살고 있는 사람도 있다. 사랑을 부를 때 사랑은 실제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는 것 같기도 하다. 사랑타령만이 주는 환상도 있고, 위안도 있다. 

나의 친구 하나는 만날 사랑타령을 한다그게 그 친구의 인생 중심이고그의 원동력이다그이가 사랑타령을 할 때 그이는 가장 그답다그의 재능이 사랑타령을 하며 반짝반짝 빛난다그는 말을 가지고 노는 예비 작가다시 같기도 하고 소설 같기도 한 그의 사랑타령은 언제나 책의 한 문장 같아서 나를 놀라게 한다

자기 앞의 생의 주인공 모모 역시 사랑타령의 일인자일 것이다입에 사랑을 달고 살지는 않지만 그가 이야기하는 것은 모두 사랑이다이 동네에 사는 누구든 모모와 이야기를 나누기만 하면 사랑을 이야기하게 된다세상의 온갖 연약한 것들이 그의 입에서 사랑으로 변화한다장사치도둑창부뚜쟁이포주성소수자이민자인 그들이 모모의 입을 통해 유일하고 현명하고 독특한 사람으로 표현된다그들 역시 각자가 가진 사랑의 이야기를 한다그중에서 제일 많은 사랑으로 언급된 이가 모모와 함께 사는 로자 아줌마다
 
모모는 회교도로자 아줌마는 유대인이다결코 있을 수 없는 가정의 조합창부의 아이를 거두어 키우는 로자 아줌마는 독특한 재치를 지닌 모모를 너무나 사랑한다거칠고 두려운 원래 가정에 돌려보내지 않으려 이름과 나이를 속일 만큼아줌마는 이제 너무나 늙고 병들었다가족은 오래전에 잃은 아줌마는 어디에서도 도움받을 데가 없다고객도 떠나고 건강도 떠났으며 이제는 돈도 없다허름한 7층 아파트에 간신히 몸을 눕히지만 여기서도 곧 나가야 할 처지다정신도 온전하지 않다나날이 비참해진다언제든 두 사람이 헤어져도 이상하지 않다
 
로자 아줌마는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어떻게 보아도 아름답지 않다이전의 미모는 사라졌을 뿐 아니라 뚱뚱해졌고 움직일 수도 없다부담스러울 만큼의 외형과 답 없는 건강 상태, 그 누구도 그녀를 사랑할 수 없다조건으로는 그녀를 결코 사랑할 수 없다그러나 조건과 상관없는그것만이 ‘사랑’의 이름을 가진다조건의 이름을 단 사랑은 사랑과 닮은 사랑이다땅에 매인 사람은 조건에 매여 사랑할 수밖에 없지만 한편 가끔 조건을 벗어난 사랑이 있어 거기에 진실된이라는 왕관을 얻는다그리고 여기모모가 그런 이름표를 얻었다
 
사람은 사랑을 통해 성장한다. 사랑할 때만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떠올리고, 깊이 생각하고, 표현하고, 또 다른 방법으로 표현하고, 거절당했을 때에도 성장한다. 사랑을 배우고 사랑을 연구할 때 더 놀랍게 성장한다. 이 책을 읽고 무언가를 느끼고, 표현할 수 없는 이 잔상을 글로 표현하려고 낑낑거리는 이런 순간을 통해서도 사랑은 자라나고 나는 하루 더 사랑할 수 있는 사람으로 되어간다. 

모모는 아줌마의 마지막을 아름답게 하려고 최선을 다한다아줌마가 원하는 장소에서 가장 원하는 방식으로 마지막을 맺기를 바란다나의 변함없는 소망 하나도 비슷하다내가 목숨처럼 사랑하는 사람의 임종을 지키고 싶은 소망그 사람이 가장 편안한 장소에서 가장 원하는 방식으로 보내주고 싶다가장 예쁜 모습으로 그 사람의 마지막 시야에 남고 싶다모모는 나의 소망을 먼저 경험했다나 역시 꼭 그리하리라 다짐한다

그러나 그리하여도 그리하지 못해도 괜찮다. 책장의 마지막을 덮으며 내가 알게 된 것은 여기내가 원하는 마지막을 맺지 않아도 사람은 행복할 수 있다는 것충만하게 사랑했다면 된다사랑은 존재 그 자체로 완성이므로. 치장 없는 내 모습으로, 사랑처럼 안 보이는 사랑이라도, 그저 사랑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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