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빌리의 노래 - 위기의 가정과 문화에 대한 회고
J. D. 밴스 지음, 김보람 옮김 / 흐름출판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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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의 1973년작 도둑맞은 가난에는 가진 것이 가난 하나밖에 없는 여공 가 화자로 나온다아버지는 사업 실패로, 어머니는 체면으로 모든 걸 날려먹고 민폐만 끼치다 나중에는 연탄가스로 자살까지 한다외로운 는 어쩌다 지질한 남자 상훈을 만나 생활비를 줄이려 같이 산다그녀의 사랑도 가난다운 모양새다. ‘상훈은 알뜰한 에게 세상 못난 남자다호탕한 줄 돈을 아끼는 법을 모른다. 그러다 어느 날 홀연 사라진다. 떠나간 남자를 아파할 틈도 없이 생활에 몰두하던 어느 날, ‘상훈은 번쩍번쩍한 대학생 차림으로 를 찾아와 자기 정체를 밝힌다그는 그저 가난을 구경했을 뿐이란걸. ‘는 절망한다부자들은 가난마저 욕심낸다고가난까지 그들의 삶을 치장할 에피소드로 쓰다니가난마저 빼앗긴 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단 말이다가난마저 각을 떠 간 피 흘리는 빈곤이다
 
힐빌리의 노래를 덮는 순간 박완서의 단편이 떠오른 건 분명 그렇다가난을 경험하지 못한 이들이 상상하는 가난 해결 정책이 전혀 효과가 없다는 것 때문물론 힐빌리에서의 정책자들이 상훈의 가난 장난처럼 악랄하지는 않다그러나 가난이라는 건 이해하거나 분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절망해야만 알 수 있다는 걸 모른다는 데에선 동일하다
 
힐빌리는 누구인가, J. D. 밴스는 말한다나는 백인이긴 하나북동부에 거주하는 미국의 주류 지배 계급의 와스프는 아니다나는 스코틀랜드계 아일랜드인의 핏줄을 타고난 데다 대학 교육을 받지 못한 수백만 백인 노동 계층의 자손이다우리에게 가난은 가풍이나 다름없다우리 조상들은 대개 남부의 노예 경제시대에 날품팔이부터 시작하여 소작농과 광부를 거쳐 최근에는 기계공이나 육체노동자로 살았다미국인들은 이런 부류의 사람을 힐빌리레드넥, 화이트 트레시라고 부르지만나는 이들을 이웃친구가족이라고 부른다.” 쉽게 말해 힐빌리는 사회문화혜택을 받지 못하는 백인 최저소득 계층이다열심히 산다고 살지만 효율 없이 고생만 하고 그나마도 사회복지의 사각지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힐빌리로 태어난 J. D. 밴스는 그들이 어떤 생활을 하고 생각을 하고 살아가는지 감정의 동요 없이 담백하게 적어내려간다
 
책은 크게 1내 인생의 뿌리힐빌리에 관하여와 2힐빌리의 이방인그러나 벗어날 수 없는 그늘로 구성된다. 1부와 2부의 결은 매우 다른데전편은 불운한 밴스의 가족과 그 사이에서의 성장과정후편은 그에게 다가온 운을 붙잡아 나아가는 과정에서 그가 얻은 인사이트즉 힐빌리 문화를 어떻게 바라보고 접근해야 하는지에 대한 물음과 이에 대한 문제 제기다처음부터 끝까지 J. D. 밴스는 자기 성공담을 이야기하지 않는다자기가 어쩌다 운이 좋았음을 이야기한다그는 더 노력하라고 하지 않는다마음이 망가지고 문화가 절단된 이에게 바른 방향의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민간 세계에서 부하직원은 업무 시간만 지나면 상사의 간섭을 받지 않는다그러나 해병 상관은 내가 일을 잘하고 있는지만 확인하는 게 아니라방을 깨끗하게 치웠는지머리를 단정하게 깎았는지제복을 다림질했는지까지 확인했다. (중략내게 해병대는 통솔력이란 부하들을 쥐 잡듯 잡음으로써가 아니라 그들의 존경을 받음으로써 생긴다는 사실과내가 어떻게 해야 그런 존경을 받을 수 있는지를 가르쳐준 곳이다그리고 각기 다른 인종과 사회계층 출신의 남녀가 한 팀을 이루어 가족과 같은 유대를 맺고 작업할 수 있다는 것을 일깨워준 곳이다. (중략내가 처절하게 실패할 수 있는 첫 번째 기회를 주면서 어떻게든 그 기회를 잡도록 하고실패했을 때에는 어떻게 해서든 두 번째 기회를 준 곳이 해병대였다. (중략능력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능력은 당연히 큰 도움이 된다그러나 노력 부족을 능력 부족으로 착각해서 스스로의 가치를 떨어뜨리며 살아왔다는 사실을 깨닫는 건 굉장히 중요하다이것이 사람들이 내게 백인 노동 계층의 어떤 점을 가장 변화시키고 싶으냐고 물을 때마다내가 자신의 결정이 중요하지 않다고 느끼는 마음이라고 대답하는 까닭이다해병대는 외과 의사가 종양을 도려내듯 내게서 그런 마음을 도려냈다
 
J. D. 밴스에게 최초의 기회는 해병대에 간 것이었다집에서 학습된 무기력을 배웠다면 해병대에서 학습된 의지를 습득했다” 나는 그의 해병대’ 서술에서 굉장한 감화를 받았다아무래도 직업 때문인 것 같다세상의 의견과 좀 다를지 모르지만 나는 요즘 학교에서 가장 우선해야 하는 건 창의성보다는 인내라고 생각한다최소한의 인내 없이는 창의성의 재료로 사용할 최소한의 지식조차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무엇보다 인내 부족은 노력할 기회를 박탈한다. 그뿐만 아니라 기본적인 배려를 무시하게 한다마음과 몸 모든 면에서 치명적인 결함을 만드는 것이다밴스는 해병대에서 처음으로 제대로 된 제련을 받는다적절한 사회적 행동과 예의범절을 배운다알지 못했던 경제적 힌트와 사회적 자본올바른 충고를 경험한다이전에는 얻지 못했던 것들이다이런 과정 안에서 자기 효능감을 발견한다자신도 타인을 보호할 수 있고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존재라는걸. 자신도 아이비리그에 진학할 수 있고 로스쿨에 갈 수 있다는 걸 배운다’. 이를 가능하게 한 건 새로이 얻은 가느다란그리고 점점 촘촘해지는 사회적 자본이었다
 
밴스는 아직도 아프다고 한다과거의 습관과 생각의 패턴이 돌발 사건을 일으킬 때마다 이를 통제하려고 주의한다고 한다이를 이해하고 기다려 주는 아내와 가족 덕분에 나은 삶을 살고 있다고 기뻐한다. 그러나 담담한 서술 가운데에서도 스멀스멀 올라오는 불안은 감출 수 없다. 가난이 남긴 상처는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평생을 지배한다나는 단언할 수도 있다

그동안 힐빌리들은 자기의 언어가 없었다힐빌리를 상상하는 이들이 힐빌리를 이야기하고 있었을 뿐힐빌리의 노래가 이러한 반향을 가져온 이유는 드디어 그들이 자기 언어로 이야기하기 시작했기 때문이 아닐까우리 역시 마찬가지다내 곁의 누가 입을 열지 못하고 있는가마땅히 귀를 열고 들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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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4 - 1부 4권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 (마로니에북스) 4
박경리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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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삶은 평화로운 적이 드물다앞서 윤씨 부인과 봉순네 등 서희의 방패가 되어주던 어른들이 호열자로 사망하자서희의 재종인 조준구가 최 참판 댁을 접수한다최 참판 댁은 조 참판 댁으로 불릴 정도로 과거의 영광을 잃고조준구는 무참하도록 악행을 저지른다그는 이미 망해버린 나라에서 친일파로서 자기 자리를 잘 잡는다절대 악이다그 누구도 그에게서 호의를 기대할 수 없다어느 날 수동이조차 사망하자 서희는 막다른 데 몰린다조준구가 자기 아들과 결혼시켜 그녀를 허수아비 만들려는 계략을 세우나 버티기가 힘들다봉순이와 길상이로는 무리다조금 컸다 해도 역부족이다봉순과 길상은 서로 끌리는 마음을 어찌할 줄 모르나무엇을 우선순위로 두어야 할지 모른다이 감정이 너무나 강력해서자기 마음을 어찌해야 할지도 모르는 게 사랑과의 첫 만남이다
 
김훈장과 윤보이용은 의병을 일으킨다길상이도 이에 함께 한다조준구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이들은 산으로 도망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생겼다아무리 고민해도 방법이 없다여기를 떠나는 것밖에는그들은 간도행을 결심한다서희와 가족들을 설득하고자 한다
 
월선이는 생사를 모르는 용이를 애달피 기다린다임이네는 남편 용이가 어찌 되었든 제 살 길 찾기에 바쁘다오히려 월선이를 이용해 배불리 먹고살려 한다용이의 아들 홍이는 월선이보고 간도댁옴마라고부른다용이를 닮은 홍이 손을 쥐어보며 월선이는 애틋함을 느낀다내 연적의 아이인데도 내가 사랑한 남자의 아이이기에 그런 애정을 느끼는가나는 월선의 마음이 조금 두려웠다감히 범접할 수 없는 큰마음이기에 그랬다
 
이자 다시는 떨어지지 말자.”
.”
꿈결처럼 잠꼬대처럼 대답한다
이대로 죽어부맀이믄 싶다.”
눈물에 흠뻑 젖은 얼굴을 부비며 용이는 이 세상 모든 것을 잊은 듯풍랑의 바다에서 항구로 찾아온 듯 격렬하고 평화스럽게 희열하며 몸을 불태운다이윽고 사내는 재[속에 묻혀 들어가고 여자는 불안을 안고 일어서려 한다
임자.” 
빠져나가려는 몸을 끌어당긴다. “많이 야빘구나.”
늙어부맀소.”
늙으믄 우떻노우리 함께 늙는데.” 
 
용이와 월선은 재회한다월선이 그렇게 큰마음을 지닐 수 있었던 건전적으로 사랑받았던 경험 때문이며마지막까지 사랑받았다는 확신이 아니었을까이 답 없는 두 사람은 계속 한심한 사랑 노래를 부른다반란이 들켜 목숨이 위태하고 당장 간도로 도망가야 하는 상황에서도 사람의 온기는 절대적인 거다사람은 그렇게 위태한 존재다
 
봉순아.”
…….”
우리 거기 가믄 호혼인하자어떡허든지 무사하게 진주로 가야 한다!”
…….”
내 맹세하라믄 하하지.” 
그러나 봉순이는 뛰기 시작했다
봉순아!” 
부르다가 풀이 죽어서 뒤돌아보았을 때 용이는 강가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용이 떠난 뒤 봉순이는 길상을 만나지 않았다월선을 사이에 두고 연락을 취했을 뿐길상은 여러 번 월선을 통해 봉순이를 만나려 했으나 허사였다백주에 나다닐 수 없는 처지였기 때문에 월선의 집을 낮에 다녀가는 봉순을 만날 도리가 없었다설마 한 번쯤 와주겠지 하는 기대 때문에 기회를 놓치기도 했었다
 
봉순이는 길상을 못내 외면한다마음과 마음이 끝까지 마주할 수 없을 때가 있다서로의 마음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는이건 머리로가 아니라 혼으로써 아는 운명 때문이 아닐까사람의 마음이 아무리 정확해도 운명이 허락하지 않으면 생의 갈 길은 못 간다그건 알 수 없는 힘이다오해처럼 보여도 그건 정확한 힘이다. 지금 당장은 확신하지 못하지만 길상의 마음은 봉순에게 100퍼센트가 아니었으니. 봉순이도 길상이도 그리할 수밖에 없는 거였다고 생각한다조금 살아본 모두가 알지 않는가세상에는 얼마나 이러한 엇갈림이 많단 말인가
 
천질인지 혹은 다만 병적 체구 탓인지 병수는 감수성이 빨랐다직감은 정확했고 본능적으로 상대방의 특질을 파악한다단순히 선악의 기준에서 파악한다기보다 사람들 성격의 빛깔이랄까 분위기랄까의식한 것은 절대 아니지만 지극히 탐미적인 요소를 띤 느낌 같은 것이라 할까시원찮은 선생이었으나 이초시한테 소학(小學)을 배우고 통감(通鑑)을 떼고 사서(四書)를 배우면서 도덕률에 의한 가치를인간 행위의 존엄성을 헤아리는 의지를 지각하게 된다실로 병수는 조상이 남겼을 가풍에 접한 일이 없었고 부모의 훈도를 받은 일이 없었으며 스승의 인격을 느낀 바도 없었으나 옛날 성현의 글그 행간 행간에 배어난 위대한 사상을 가르치는 사람의 의도를 훨씬 넘어서 흡수하고 깨달으며 비약하고 상승해갔다물론 십오 세라는 나이의 한도에서 우수했었다는 얘기다이러한 자질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조석으로 함께 기거하는 이초시도 병수 내부에 형성되어가는 과정을 엿보지 못했고 부모 역시 그러했다관심이 없었다는 것도 이유겠으나 그들은 모두 어느 면으로서든지 범속한 인물들이었으니까
 
나는 사람이 날 때부터 종류가 정해진다고 믿는다그렇게 살 수 있는 사람과 그렇게 살 수 없는 사람이 있다그리고 나는 그렇게 살 수 없는 사람의 종족이다병수는 몸이 부자유했지만 감각은 탁월했다그도 나처럼 사람을 색과 분위기로 읽는 사람이다무어라 정확히 분류할 수 없지만 수용과 비수용으로 감각하는 인간 종족그들의 삶은 둔하지 못해 편치 않다병수 역시 고단한 생을 살아가리라그는 고단한 몸을 넘어서 큰 그릇을 열어 살아가리라범속한 인물들은 그런 인간들을 결코 이해할 수 없다아니 결코 알아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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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3 - 1부 3권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 (마로니에북스) 3
박경리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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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여자와 죽음과 병, 3권을 덮는 순간 떠오른 네 개의 단어다여기서의 은 호열자로 나타난 전염병마이기도 하지만 사랑의 병이기도 하다. 2권말에서도 그랬지만 3권에서도 이 병으로 수많은 사람의 목숨이 죽어나간다. 호열자는 지금의 콜레라다. 호열자 때문에 윤씨부인까지 사망하고 어린 최서희의 위치가 위태위태한다. 조준구는 최서희에게 자기 아들을 억지로 장가보내려 한다. 봉순이도 길상이도 서희도 많이 자랐다고 하지만 어른들을 상대하기는 역부족이다. 최참판 댁 사람들과 동네 농민들은 안팎으로 불안해 한다. 흉흉함은 죽음이 더할수록 깊어간다. 죽어서 어이없이 세상을 뜬 사람들도 많지만 살아 있어도 살아 있는 게 아닌 사람들도 여기 어찌나 많은가
 
어쩌면 귀녀의 생애가 끝나는 날 강포수의 생애도 끝나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함께 죽으리라는 뜻이 아니다귀녀의 죽음은 어떤 형태로든 지금까지의 강포수 인생과는 같을 수 없는다른 것으로 변할 것이라는 뜻이다지금 강포수는 귀녀와 더불어 있다옥중과 옥 밖의손이 닿을 수 없는 엄연한 법의 거리요 지척이면서 가장 먼 그들서로가 서로를 보고 느낄 뿐이지만 그러나 강포수는 일찍이 귀녀가 이같이 자신 가까이 있는 것을 느낀 적이 없다가랑잎 더미 위에 쓰러뜨렸을 적에도 귀녀는 강포수에게 멀고 먼 존재였었다강포수를 좋아하건 싫어하건 그것은 이제 아무것도 아니었다저주받은 악녀이건 축복받은 선녀이건 그것도 강포수하고는 관계가 없었다다만 거기 그 여자가 있다는 것과 그 여자를 위해 서러워해줄 단 한 사람으로서 자기가 있다는 것그것뿐이었다
 
욕망의 화신과도 같은 여자의 죽음은 상상 외로 충격적이다예정된 죽음이었다그러나 어떤 사람은 예정된 시간 가운데 사랑의 기회를 잡는다사악한 여자를 사랑하던 강포수란 남자볼품없는 이 남자의 마음 안에 사랑이 가득할 줄을 이전까지 그 누구도 몰랐다강포수가 이런 지고지순한 액션을 취할 거라고는 나 역시 생각지 못했다
 
강포수.”
머라꼬.” 
강포수는 흠씬 놀라며 물러섰다
.” 
귀녀는 여전히 창살 밖으로 손을 내밀어 놓고 있었다강포수는 겁을 내어 떨면서 조그마한 귀녀의 손을 잡아본다조그마한 손손아귀 속에서 바스러질 것 같은 손이다
많이 여빘고나.”
강포수의 손은 쇠가죽 겉소.” 
부드럽고 낮은 목소리였다
이거 배고플 긴데.” 
다시 꾸러미를 디밀려 하는데 이번에는 귀녀 쪽에서 강포수의 손을 거머잡았다
강포수내 잘못했소.”
알았이믄 됐다.”
내 그간 행패를 부리고 한 거는 후회스럽아서 그그랬소포전 쪼고 당신하고 살 것을강포수 아아낙이 되어 자식 낳고 살 것을으으흐흐…….”
밖에 나온 강포수는 담벼락에 머리를 처박고 짐승같이 울었다하늘에는 별이 깜박이고 있었다북두칠성이 뚜렷하게 나타나서 깜박이고 있었다오월 중순이 지나서 귀녀는 옥 속에서 아들을 낳았다그리고 여자는 세상을 원망하지 않고 죽었다강포수는 귀녀가 낳은 핏덩이를 안고 사라졌다그를 아는 사람 앞에 그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그를 보았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그의 소식을 아는 사람도 없었다
 
귀녀는 죽음을 앞두고 변한다. ‘세상을 원망하지 않고 죽었다.’는 게 그 증거다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 게 내 오랜 신념이다그래서 어떤 사건 앞에서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라고 누군가에게 충고하며사람 너무 믿는 게 아니라며 나 자신을 책망한다그러나 내가 이 신념을 양보하는 건 단 하나의 조건 앞에서다사람은 죽음을 앞둘 때 분명 변한다귀녀가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 앞에서 진실한 사랑을 만났을 때마녀 같은 여자도 순수한 영혼으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어쩌면 사랑이 가장 빛날 때는 죽음 앞에서그러니 우리가 사랑으로 돌격해야 하는 대상은 죽음처럼 살고 있는 사람이 아닐까사랑은 거기에서야 진실로 사랑다울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용이는 사람이 달라졌다월선이 떠난 뒤 변한 것과 정반대의 상태로 달라졌다뻔뻔스러워졌고 어딘지 모르게 추해진 것같이 보였다묶어두었던 주문(呪文)의 사슬이 끊어진 듯 용이는 두 여자를 번갈아가며 가까이했다임이네를 한 번 범한 뒤 강청댁에도 남자의 기능이 가능해졌던 것이다그는 그런 행위에서 자식을 소망하지는 않았다임이네로부터 임신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오히려 어리둥절했고 다음은 무감동의 상태로 돌아갔다임이네가 마을 여자들로부터 폭행을 당하던 그때 잠시 동안 임이네가 자기 자식을 가졌다는 것을 실감했을 뿐이며 삽짝을 나서면서부터 감동을 잃었다그 대신 정력은 그칠 줄 모르는 듯 두 여자에게 쏟아졌고 날로 황음(荒淫)해갔으며 거의 광적으로 되어갔지만 그는 여자 둘을 증오하고 멸시했다너희들이 짐승이지 사람이냐고 욕설을 퍼붓는가 하면 나도 짐승이지 사람은 아니라 하면서 헛웃음을 웃곤 했다그러면서도 여전히 아편쟁이처럼 육체에 탐닉하는 용이는 아무 쓸모 없는 놀량패가 되어갔다
 
사랑을 잃은 용이는 완전히 망가진다누군가는 용이가 여자들 사이에서 중심을 못 잡는 나쁜 남자라는 이야기를 하겠지만 나는 글쎄용이가 이해된다그가 저지른 일은 자포자기한 사람이 취할 수 있는 자연스러운 행동 중 하나가 아닐까용이가 잘했다거나 두둔하는 게 아니다잘못했지만 다 포기한 인간을 저럴 수도 있다는 거다그리고 남자와 여자의 일은 남녀의 문제뿐 아니라 성욕과 성욕과의 문제이기도 한다는 걸 다시금 느꼈다강청댁에게는 기능하지 않던 기능이 뜬금없이 임이네에게 기능했다는 게 그 충돌을 증거한다남자와 여자와의 관계는 역시 조건으로 되는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차라리 용이와 임이네처럼 저지르는 게 자연스럽지조건이 맞는다고 억지로 맺어놓는 게 아니란 말이다차라리 전자가 덜 모욕적이다결국 용이의 세 여자 중에서 가장 비참한 건 조건으로 맺어둔 강청댁이 아니었던가
 
고마운 척눈물겨운 척할 수 있는 교활한 지혜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그러나 넘쳐흐르는 생명력조금만 땅이 걸고 짓밟지만 않으면 무섭게 자라나는 잡풀 같은 생명력은 교활한 지혜를 위해 여유를 주지 않았다 할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마을 사람들 눈에 그가 거들먹거리는 것같이 보였다는 것은 윤씨부인이 도와준다거나 먹고 입는 것이 자기네들과 같아졌다는 시샘 때문에 그렇기도 하려니와 그 무성한 생명력에 압도당하는 것 같은 느낌에서 더욱 그렇게 보여졌는지도 모를 일이다더욱이 아낙들은 옛날로 돌아간 그 미모에 약이 올랐을 것이다이제 임이네한테서는 찌든 궁기를 찾아볼 수 없었다놀랄 만한 회복이었다
 
책을 읽어갈수록 임이네의 원시적 본능에 놀라게 된다그녀는 배부르고 등 따신 것이 제일인 여자다남편을 잃은 슬픔도 남편이 지은 죄의 두려움도 입에 뭘 넣는 문제 앞에선 곧 수그러든다임이네가 무엇인가(남편 문제)에 대해 고민하는 내용은 1권부터 3권까지 중에서 아주 조금밖에 안 나온다그녀는 먹고살기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치마를 걷어올릴 수 있는 여자고 거지꼴을 하고 구걸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는 여자다그러나 이 생명력은 얼마나 강인한가여자는 순식간에 뽀얀 생기 어린 얼굴로 돌아온다게다가 1번 연적(?)이던 본처까지 호열자로 죽는다이건 무슨… 임이네를 위한 맞춤 시나리오 같다게다가 용이가 그리 바라던 아들을 낳아버렸다귀녀와 다른 모양새지만 생명력이 이 모든 것을 이끌어가는가갑자기 신사상 종교에서 늘 말하는 긍정의 힘’, ‘생생하게 꿈꾸면 이루어진다가 생각난다내 삶이 이다지도 팍팍한 건 생에의 의지도 기대도 없어서인가
 
알고 보니께 영감 얻어간 기이 아니고 그 강원도 삼장사라는 남자는 월선이 애비 동생이라누마. 그러니께 그 삼촌 내외를 따라서 간도로 갔다던가거기 가서 멋을 했는지 그거사 모르지마는 거기 가믄 돈 번다 하더마하기사 우리겉이 쭈그렁박 늙은것이 간다믄 돈을 벌 긴지 그거는 모르겄소만.” 
주막에 건달패들이 모여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그들의 얘기도 월선에 관한 것이었다월선의 재물이 얼마쯤 되겠느냐는 것이었고 누가 그 여자를 낚느냐는 얘기였다
돈 좋지월선이 시세가 날로 올라가누만. 무당이고 백정이고 소용없는 기라옛날 그 손에서 술잔 받아묵던 장돌뱅이들이 이자는 장에서 월선이를 만나믄 굽신굽신어느 대가댁 마님을 대하는 것맨치로그러니 우찌 사람들이 돈을 보고 환장을 안 하겄노.” 
 
월선이는 도무지 옛날의 월선이 같지가 않았다그때보다 늙기는 했으나 아름다워졌으며 도방(도시여자같이 옷맵시가 고왔다그러나 그런 변화 때문에 옛날 같지 않다는 것은 아니었다윤보는 월선이 아닌 월선이 허깨비를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월선이가 평사리로 돌아온다그것도 큰돈을 벌어서여자 팔자는 뒤웅박 팔자라 남편에 달렸다지만 그것도 안 되면 돈을 버는 방법도 있다여자 팔자가 돈에도 좌우된다월선이에게 술을 따르라던 남자들이 이제 월선이에게 굽신거리며 마음을 얻으려 든다예나 지금이나 여자의 인생은 사랑에 있어서 녹록지 않다예전에는 사랑하는 남자와 이어지려면 부모의 검열을 거쳐야 했다부모들의 조건을 맞추지 못하면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고다행히 첫 검열을 통과하더라도 다음 의무를 또 통과해야 했으며아이를 갖지 못하면 다른 데서 아무렇지도 않게 아이를 들였다돈 한 푼 쓰려 해도 남편과 시부모의 눈치를 봐야 했다기댈 남자도 없어 돈이라도 악착같이 벌었더니 내가 아닌 돈을 원하는 게 눈에 뻔히 보인다돈을 번 월선이는 도시 여자처럼 세련되어졌지만 허깨비처럼 살고 있다여전히 사랑은 갖지 못해 허무하다
 
아들 낳고 사는 사람을 내내가 만내믄 머할 것고. ’ 주먹을 쥐고 자기 가슴을 쥐어박으며 월선이는 집을 향해 달음박질을 쳤다. ‘생각이 있이믄 날 찾아오겄지. ’ 그러나 그것은 절망에 가까운 기대였다
 
용이는 눈을 들어 나무 위를 올려다본다바람이 지나간다나뭇가지가 흔들리고 월선의 흰 명주 수건이 나부낀다. ‘그리 험한 꼴을 당했이믄서도 사람우 맴이란우찌 이리 끝이 없는 길까. ’ 다시 부끄러움을 느낀다
 
월선이는 벌떡 일어섰다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던 것이다의아스럽게 용이 쳐다본다. ‘아아내가 무신 소용고. 법으로 만낸 사람이 제일이고 이자는 자식 낳아준 사람이 제일 아니가. ’ 도로 주질러 앉는다용이처럼 둑길에 눈을 보낸다. ‘그런 생각하믄 벌 받는다. 지난가슬에 죽었이믄 이리 서로 만나볼 수 있었겄나. 내 박복을 한탄하지 누굴 원망하겄노. 이렇게 살라는 팔자라믄……. ’ 눈은 다시 용이 버선으로 옮겨졌다햇볕이 좀 두터워졌는가 한결 밝은 햇살이 버선등에 기어오르고 있었다
 
월선은 절망하고 또 절망하지만 기대를 버리지 못한다어리석어도 떨어질 수 없는 마음미련하고 또 미련하다사람들은 너무나 쉽게 그들을 손가락질하고 욕한다그러나 어떠한가사람이 다 그런 거지어리석어도 집착이어도 그것도 사랑이다두 사람이 서로의 마음을 질기도록 겹쳐왔다면 나빠도 어리석어도 부질없어도 그건 사랑이다용이가 저지른 일을 알고도 여전히 용이를 잊을 수 없다면 그건 깊은 사랑이다어쩌겠는가용이도 월선이도 이렇게 끝까지 갈 것이다두 번의 기회는 없다용이는 단 한 번의 기회를 날려버렸으니두 사람은 방법이 없다마음밖에는 방법이 없다
 
와 생깄는고 싶더마는 니라도 없었이믄 내가 우찌 살았겄노. 임 보듯이 니를 보고…… 보고 접을 때 니를 보고…….” 아비라던 그 사내의 죽음을 안 것은 그로부터 삼 년 후의 일이었다어미의 주량이 늘고 더러 바람도 피우는 세월 속에서그러나 여전히. “와 생깄는고 싶더마는 니라도 없었이믄 내가 우찌 살았겄노. 임 보듯이 니를 보고보고 접을 때 니를 보고 우찌 그리 애빌 닮았는고.” 그런 말을 했었다. ‘어매 맘 알겄소임 보듯이 니를 보고보고 접을 때 니를 보고…… 임이네 낳은 아이는 그이를 닮았이까. ’ 
 
명리학에서 육해살 인연이라는 게 있다사람과 사람 사이위기의 순간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결정적 인연을 이야기하는데무거운 지게를 지탱하는 받침대를 비유한다누구에게나 삶은 무겁다그러나 이 무거운 삶에 또 다른 무게가 될지언정 마음을 잠시 잠깐 걸 수 있는 존재는 삶을 지탱하는 결정적 이유가 된다월선이는 아이를 갖고 싶다월선엄마가 그녀에게 이야기한 너라도 없었으면 내가 어떻게 살았겠니라는 말은 지금도 유효하다그 말은 사람에게 마음 걸 무엇이 그렇게나 필요하다는 거다사람은 의미 없이 살 수 없는 존재다전적으로 이해한다아이 하나 있는 친구들이 진심으로 부럽다하루하루 아이가 커나갈 때내가 사랑했던 그 사람을 꼭 닮은 생명체가 살아 숨 쉴 때내 사랑은 살아 숨 쉬고 나날이 자라나는 것이다내 사랑은 죽어가지 않는 것이다내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게 그들의 눈에는 무엇인가 보인다내 삶은 하나도 달라지지 않고 똑같은데 그들의 삶은 매일 변화한다부모는 아이에게 기대어 산다
 
야속한 사람옛날에는 어무니가 기시서 그랬고 법으루 만낸 사램이 있어서 그랬고 지지금은 자식 낳아준 사램이 있어서 그렇고끝까지 남남이고나. 원망하는 거는 아니지마는 그이는 나를 남으로 치부하는 거만은 틀림이 없이니께야속하고 그그렇지마는 내 이녁 맘 알기사 알거마는. 그래도 야속하지. ’ 
 
야속하다는 건 사랑한다는 것월선과 용이는 이 세상에서 아무래도 안되는 인연이다그래도 나는 토지에서 월선이가 가장 행복한 여자가 아닌가 싶다아파도 끝까지 사랑을 품고, 사랑을 확인받으며 살아가므로사랑을 잊지 않고 살 수 있는 인간은 행복하다마음이 죽어가지 않는 인간은 행복하다그러므로 나는 상상한다. 월선이 역시 죽을 때 세상을 원망하지 않았을 거라고. 월선이 정도면 괜찮은 인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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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2 - 1부 2권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 (마로니에북스) 2
박경리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2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소설을 읽으면 읽을수록 모든 문학은 인간의 이야기라는 걸 깨닫게 된다이야기를 통해 인간의 속성은 드러난다인간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존재이며 선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한 수많은 단면들이 합하여 한 인간을 이룬다는 것이다우리는 이 인간에게 연민을 느끼고 정()을 주며끝내는 사랑하게 된다소설에서 익히는 인간은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인간과 너무나 닮았다이것이 우리가 문학에 빠져드는 이유우리는 소설을 통해 이미 알고 있었던미처 알지 못하던 인간성을 발견하게 된다
 
박경리는 토지의 등장인물 한 명 한 명을 살갑게 빚었다어느 구석을 읽어봐도 한 사람 한 사람의 사연을 허투루 보내지 않았다초반부에서는 용이의 기품이 특히 드러난다그 역시 최서희에게 매일 당하는 봉순이처럼 최치수에게 설움을 당하며 어린시절을 지냈다그를 달래던 어머니과 어린 시절 사망한 누이 서분의 이야기강청댁과 결혼하게 된 배경도최치수는 용이와 함께 자라며 그의 드높은 인간다움을 전적으로 깨닫게 된다사람의 신뢰(信賴)는 행동 하나하나로 설명하고 납득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신뢰는 오직 함께함에서 나온다시간을 통과해야 한다
 
용이는 나중에 월선이 머물던 주막의 지붕 이엉까지 갈아준다그녀의 집이 낡아가는 것이 마음이 아파서월선에게 옷을 입혀주는 것처럼그건 월선이 한시바삐 자신에게 돌아오기 바라는 주술이었는지도 모른다용이 같은 남자에게 끝까지 사랑받을 수 있다면 이 사랑이 아파도 세상을 얻은 것과 같으리라
 
사람이 존엄하다는 것을 용이 놈은 잘 알고 있지요그놈이 글을 배웠더라면 시인이 되었을 게고 말을 타고 창을 들었으면 앞장섰을 게고 부모 묘소에 벌초할 때마다 머리카락에까지 울음이 맺히고 여인을 보석으로 생각하는그렇지요복 많은 이 땅의 농부요.” 

사명감이라는 것도 식자깨나 배운 놈의 허울 좋은 겉옷이요헤치고 보면 크게 격차 나는 게 아니지사람의 존엄이란 능동에 있는 게 아니며 이치에 대한 피동에서 지켜져 나가는 게야.’‘학문이 진리를 찾는 것이기는 하되 반드시 진리가 이롭고 보탬이 되는 것은 아니네학문하는 태도 역시 이롭고 보탬이 된다는 생각이 앞선다면 장이 바치에 떨어지고 마는 법규격에 맞춰 틀에 끼울 것이 못 되지진리는 만인이 함께 가질 물건은 아니거든이 손 저 손 넘어가는 동안 쇠퇴되고 시체가 되고 썩어버리고 마른 허울만 남고 종국에는 얼토당토않게 본뜬 물건이 나타나서 만인을 호령하게 되는데 그것에 영합되면 학자는 학자가 아닌 동시 우중과 위정자들의 공범자가 될 수밖에 없지.’ 
 
윤씨부인 역시 말 못할 사연 있는 사람이다. “나를 용서하시오살아주어서 고맙소.” 이 한 마디로 늙은 여자의 눈에 늙은 남자는 소년 같은 미소와 부드럽고 가냘픈 몸집으로 변모한다나로서는 전혀 알 수 없다남자의 일방적인 관계였지만 자신이 낳은 아이의 아버지라는 것 때문에 마음이 이렇게 변화하는가이 남자 때문에 그녀에게 비밀이 생겼으며아들에게 못할 짓을 하게 된 것이다어머니와 최치수의 갈등도 나타난다최치수 역시 마음이 불일듯하다. ‘가 어디 있는지 어느 정도 확신이 섰다알지만 모르는 척 해야 하는지끝까지 캐물어 확인해야 하는지두 사람 사이에서는 푸른 칼과 칼이 맞닿는 것처럼’ 긴장으로 불꽃이 튄다살다 보면 이렇게 애매한 채로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 온다서로 알고 있지만 모르는 척 해야 옳다는 걸 두 사람 모두 안다그게 두 사람을 지키는 방법이다서로 아끼기 때문에 그래야 한다이 문제가 명확하게 드러나는 순간 이 소중한 거리는 깨어진다이 모자는 서로에게 끝까지 거리를 두었다누군가는 이 모자가 불행하다고 말할지 모르나나는 이것이 그들의 최선이었다고 믿는다도대체 그 누가 그 사람의 최선을 최선이 아니라 판단할 수 있는가사람의 세상은 그 어디에도 정답이 없다하동 평사리 하늘을 찌르는 윤씨부인과 최치수라 해도 뭘 어떻게 할 수 있었겠나그게 이 세상이 허무하도 두려우며 아프고 씁쓸한 이유다살기 싫은 이유다
 
신심이 없으면서 칠성이는 부처가 두려웠다촛불을 받으며 무수히 머리를 조아리는 귀녀의 옆모습은 처절하고 아름다웠다칠성이는 그 얼굴이 두려웠다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 같았고 달려들어 초를 넘어뜨리고 싶었다그러나 옴짝할 수 없다이윽고 귀녀는 나긋한 손을 들어 마치 바람에 날리는 꽃잎같이 촛불을 껐다칠성이 입에서 깊고 긴 숨결이 토해졌다

음란도 이 여자에게는 죄가 아니었다거짓도 이 여자에게는 죄가 아니었다살인도 이 여자에게는 죄가 아니었다오로지 소망을 들어달라는 다짐만이 간절했을 뿐이다신은 이 여자에게는 악도 선도 아니었다오로지 소망을 풀어줄 수 있는 능력영험이 있느냐 없느냐가 중한 일이었을 뿐이다.
 
한 여자의 욕망이 시커멓게 뜨거워서 눈에 띈다귀녀라는 여자최참판댁의 하녀인 그녀는 자기 처지를 미워하고 신분상승을 하려 불법을 저지른다부처님도 두렵지 않았다사랑도정조도 필요 없다이 여자를 이용해 자기 잇속을 챙기려는 남자들도 등장한다그녀를 이용하려고 했다가 나중에는 그녀에게 휘둘리지만 말이다
 
비단과 누더기를 구별하는 따위의 자존심야수 같은 강포수에의 허신과 인간쓰레기 같은 칠성이와의 동침을 거치면서 마지막까지 최치수에게 여자 대접을 받고자 하는 희망은 애정일까 허영일까 또는 집념일까악업(惡業)을 쌓기 위해 목욕재계하고 동자불 앞에서 도움의 기도를 올리던 귀녀모든 것은 밖에서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고귀함도 염원도 사랑도 밖에서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밖만 싱그러우면 마음속의 쓰레기는자기만이 아는 쓰레기에는 냄새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그래서 이 여자는 고독한 여자가 아니었던 것이다한밤중에 죽음을 생각해보는 여자도 아니었던 것이다부처님이 무섭지 않은 여자였던 것이다
 
욕망이 커지면 마력이 생기는지도 모른다귀녀는 마녀 같은 여자다놀랍게도 거기에 단 하나이런 (가치 없는여자를 지고지순하게 사랑하는 남자가 나타난다이거야말로 기적이다강포수는 스무 살이나 차이나는 어린 귀녀 때문에 애가 닳아 한다어울리지 않아도 그녀가 자기를 돌아보지 않아도 이 마음을 어째야 할지 몰라 가슴이 녹는다그는 그가 할 수 있는 일을 한다귀녀를 자기 사람으로 맞고 싶어 그녀의 주인 최치수에게 굽신굽신 충성을 다한다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메커니즘과 유효기간을 참 알 수 없다사랑은 하늘이 내리는 게 확실하다. (한숨
 
2권에서 드러나는 여성들은 참으로 하나하나 불행하다일찍 돌아간 용이의 동생부터 성희롱을 당하다가 자칫 죽은 것처럼 폭행을 당하는 봉순이사랑받지 못해 추하도록 발악하는 강청댁죄를 지은 남편 때문에 모든 것을 포기한 임이네와 함안댁까지상태 안좋은 남편을 보필하며 참고 참아가는 여자들은 그녀들의 삶이 도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시절이 있었던 것을 실감하게 한다그래서 그녀들은 더욱 남편의 애정에 집착하였나남편을 (더 멋진 사람으로포장하는 눈으로 바라보면서 버텨야 했었나 싶다
 
사는 건 정말 알 수 없다당장 내일 일을 모르는 나 역시 같은 한숨을 쉰다겨우 2권까지 읽었지만 인간의 생은 제각각 너무 설명할 수 없어 슬프다이 알 수 없음이 인간의 생을 설명하는 모든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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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가 되는 글쓰기 - 쓰기는 배움의 도구다
윌리엄 진서 지음, 서대경 옮김 / 유유 / 2017년 2월
평점 :
절판


 공부가 되는 글쓰기』, 너무나 정직한 제목이다심지어 부제는 쓰기는 배움의 도구다정직하다는 것은 한편으로 사람을 혹하게 하는 거짓이 없다는 의미다슬프게도 이 못생긴 제목 때문에 나는 이 책을 오랫동안 읽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책을 읽으면서 황당했다. ‘뭐니, 너무 좋은 책이잖아.’ 
 
저자인 윌리엄 진서는 이 책이 범교과적 글쓰기(writing across the curriculum)’를 소재로 한다고 서문에서 밝힌다. 국어나 문학 수업혹은 작가를 목적으로 하는 글쓰기 기회뿐이 아니라어떤 목적으로 하는 학문이어도 글쓰기가 탁월한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거다왜냐모든 글쓰기는 생각의 부산물이기 때문이다그리고 이런 과정을 통해 글쓰기가 즐거운 활동임을글쓰기와 생각하기배움이 함께 맞물려가는 통합과정임을 알려주는 게 이 책의 처음과 끝이다그래서 그가 제시한 것은 다양한 학문 분야에서 탁월한 글쓰기 사례이를 읽어봄으로써 읽는 이는 나도 할 수 있지 않을까라며 글을 써보게 된다
 
나는 그런 글들을 찾아 나서는 작업즉 다양한 학문 영역에서 생산된 명료하고 뛰어난 글쓰기 사례를 수집해 한 권의 책에 담는 작업이 가능한지 고민했다지금까지 한 번도 글쓰기 주제로 생각해 보지 않은 자기 전공에 대해 글을 써야 하는 상황에 놓인 교사와 학생을 위한 안내서적어도 글쓰기와 배움의 과정에 뒤따르는 두려움을 상당 부분 해소해 줄 책이런 책은 또한 좋은 글을 쓰는 원리가 어떤 주제의 글에서든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사실을가령 화학 분야의 잘 쓰인 글은 미술사 분야의 잘 쓰인 글과 동일한 글쓰기 원리를 따른다는 사실을 증명해 줄 것이다
 
우리가 그간 생각했던 좋은 글쓰기와 실제 좋은 글쓰기는 다르다우리는 문학적 스테레오타입에 갇혀 그와 닮지 않은 내 글쓰기를 미워한다내 생각을 추론 과정에 따라 명료하게 풀어나갈 수 있다면 그 글쓰기는 좋은 글쓰기다아름다운 느낌을 주지 않아도 된다내가 이 학문을 사랑하는 마음으로내가 오랫동안 사유한 내용의 전후 관계를 신나게 쓴다면 그걸로 이 글은 좋은 글이 된다
 
화가 파울 클레는 일찍이 제자들에게 예술이란 직관의 날개를 단 정확성이라고 말한 바 있다나는 이 말이 좋은 글쓰기의 정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나는 창작 과정 중 찾아오는 별난 생각들에 기꺼이 놀랄 준비가 되어 있는 클레의 열린 태도를 좋아한다너무나 정확하여 차가워 보일 수 있는 그의 그림은 창작자의 유머와 난센스변덕을 통해 비로소 생기를 얻는다클레의 그림에서는 언제나 그림의 물질성을 뛰어넘는 인간애가 느껴진다특히 그의 그림이 담고 있는 모든 난센스가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 순간나는 한 화가뿐 아니라 한 인간과 연결되어 있다고 느낀다
 
책은 크게 1부와 2부로 나뉜다. 1부의 내용은 쓰기가 어떻게 배움의 도구가 되는지 그 필요성을 서술하고, 2부에는 범교과적 글쓰기의 실제, 구체적인 예시를  미술, 수학, 화학, 물리학 등 교과별로 충실하게 담았다. 

특히 7 미술과 미술가들》 챕터는 내게 절망과 격려를 함께 안겨주었다훌륭한 예시 글들을 읽다 보면 어쩜 이렇게 훌륭한 표현력을 담고 있는지 감탄하느라 책장을 넘기지 못했고내 아둔한 글줄이 기억나 부끄럽기 그지없었다. 미술 글쓰기는 시각적 가능성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쓰는 이가 얼마나 많은 것을 보여줄 수 있는지를 인지하고, 읽는 이가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도록 촉매 지식을 전달해야 한다. 지식과 도전의식을 얼마나 매력적으로 전달할 수 있을 것인가. 중요한 건 저자 자신의 성품, 기쁨, 매력이다. 
 
미술에 관한 글쓰기는 적어도 다음 두 가지 요건을 갖추어야 한다첫째독자가 그 글을 통해 보는 법을 배울 수 있어야 한다그림건축조각사진은 물론이고 우리가 일상 풍경에서 마주치는 온갖 시각적 요소들을 어떻게 보고 이해해야 하는지를 제시해야 하는 것이다둘째우리가 보고 있는 것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
 
시각적 이해는 대단히 다양한 차원에서 이루어진다이런 측면에서 시각적 이해는 기본적으로 언어적 이해와 다르지 않다론 레인저와 그의 충직한 동반자 톤토 사막 위에 나 있는 말발굽 자국을 보고 무법자들이 방금 이 길을 지나갔으며흰 털이 섞인 붉은 말 위에 기막히게 아름다운 금발 아가씨를 인질로 태웠고이 무법자들의 두목이 탄 말은 최근 편자를 갈았다고 결론 내릴 때 우리는 얼마간의 어지럽혀진 모래흙을 보고 그토록 많은 정보를 읽어 내는 그들의 능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하지만 론 레인저와 톤토가 피카소의 게르니카」 앞에 선다면 과연 그 그림에서 어떤 걸 읽어 낼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그림을 읽는 것은 또 다른 기술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활기 넘치는 문체사진처럼 명료한 이미지(가장자리가 솜털처럼 번져 있는 사출물크리스털처럼 투명한 화석)와 함께 내가 좋아하는 이 글의 특성은 바로 자신감이다이는 사진 작업의 창조적인 과정과 기술적인 과정을 모두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오랜 세월 지식을 쌓아 온 저자만이 보일 수 있는 당당함이다자기 견해를 토로하는 데 거침이 없고 단호하다여행 가이드 역할을 맡은 작가가 수줍음을 타서는 안 될 노릇이다우리는 카리스마 있는 가이드를 원한다훌륭한 음악 글쓰기가 좀 더 잘 들을 수 있도록 독자를 돕듯이훌륭한 미술 글쓰기는 좀 더 잘 볼 수 있도록 독자를 돕는다미술 글쓰기가 다루는 영역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만큼이나 넓다우리는 종종 눈앞에 직접 보여 주어야 무엇이 올바른지 이해한다
 
시각예술에 대한 글을 쓰고자 한다면 이런 언어 외적인 요소의 중요성을 기억하라미술 작품에는 거의 언제나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의 어떤 것이 있다예를 들어 기억과 상상력은 시각 정보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 글을 소개하는 이유는 단순히 작가가 탁월하기 때문만은 아니다우리 책이 전제하고 있는 한 가지 사실즉 과학과 인문학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잘 보여 주는 글이기 때문이다미술 관련 글이지만 뛰어난 과학 글쓰기라 할 만하다명료하고생생하고유려하고우리가 경험에 비추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구체적인 사례들에 기초한 글이다 

각자 자신이 지극히도 사랑하는 무언가가 있다. 사랑하는 것 없는 인간은 없다, 하나쯤은 있다. 고양이 한 마리만 키워도 내 새끼가 제일 이쁜 법, 온 동네 SNS에 사진과 글로 도배를 한다. 사랑하면 자랑하고 싶다. 글쓰기는 내가 제일 사랑하는 학문을 여기저기 예쁘게 알려주는 일이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학문을 공부하다 보면 쓰게 된다. 생각을 논리적으로 정리하는 과정에서 사랑은 깊어진다. 이를 명료하게 쓰다 보면 더 잘 알게 된다. 사랑하면 쓰게 된다. That's all. 이게 다다. 

뭐라도, 뭔가 하나라도 써야겠다, 더 사랑하기 위해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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