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빌리의 노래 - 위기의 가정과 문화에 대한 회고
J. D. 밴스 지음, 김보람 옮김 / 흐름출판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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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의 1973년작 도둑맞은 가난에는 가진 것이 가난 하나밖에 없는 여공 가 화자로 나온다아버지는 사업 실패로, 어머니는 체면으로 모든 걸 날려먹고 민폐만 끼치다 나중에는 연탄가스로 자살까지 한다외로운 는 어쩌다 지질한 남자 상훈을 만나 생활비를 줄이려 같이 산다그녀의 사랑도 가난다운 모양새다. ‘상훈은 알뜰한 에게 세상 못난 남자다호탕한 줄 돈을 아끼는 법을 모른다. 그러다 어느 날 홀연 사라진다. 떠나간 남자를 아파할 틈도 없이 생활에 몰두하던 어느 날, ‘상훈은 번쩍번쩍한 대학생 차림으로 를 찾아와 자기 정체를 밝힌다그는 그저 가난을 구경했을 뿐이란걸. ‘는 절망한다부자들은 가난마저 욕심낸다고가난까지 그들의 삶을 치장할 에피소드로 쓰다니가난마저 빼앗긴 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단 말이다가난마저 각을 떠 간 피 흘리는 빈곤이다
 
힐빌리의 노래를 덮는 순간 박완서의 단편이 떠오른 건 분명 그렇다가난을 경험하지 못한 이들이 상상하는 가난 해결 정책이 전혀 효과가 없다는 것 때문물론 힐빌리에서의 정책자들이 상훈의 가난 장난처럼 악랄하지는 않다그러나 가난이라는 건 이해하거나 분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절망해야만 알 수 있다는 걸 모른다는 데에선 동일하다
 
힐빌리는 누구인가, J. D. 밴스는 말한다나는 백인이긴 하나북동부에 거주하는 미국의 주류 지배 계급의 와스프는 아니다나는 스코틀랜드계 아일랜드인의 핏줄을 타고난 데다 대학 교육을 받지 못한 수백만 백인 노동 계층의 자손이다우리에게 가난은 가풍이나 다름없다우리 조상들은 대개 남부의 노예 경제시대에 날품팔이부터 시작하여 소작농과 광부를 거쳐 최근에는 기계공이나 육체노동자로 살았다미국인들은 이런 부류의 사람을 힐빌리레드넥, 화이트 트레시라고 부르지만나는 이들을 이웃친구가족이라고 부른다.” 쉽게 말해 힐빌리는 사회문화혜택을 받지 못하는 백인 최저소득 계층이다열심히 산다고 살지만 효율 없이 고생만 하고 그나마도 사회복지의 사각지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힐빌리로 태어난 J. D. 밴스는 그들이 어떤 생활을 하고 생각을 하고 살아가는지 감정의 동요 없이 담백하게 적어내려간다
 
책은 크게 1내 인생의 뿌리힐빌리에 관하여와 2힐빌리의 이방인그러나 벗어날 수 없는 그늘로 구성된다. 1부와 2부의 결은 매우 다른데전편은 불운한 밴스의 가족과 그 사이에서의 성장과정후편은 그에게 다가온 운을 붙잡아 나아가는 과정에서 그가 얻은 인사이트즉 힐빌리 문화를 어떻게 바라보고 접근해야 하는지에 대한 물음과 이에 대한 문제 제기다처음부터 끝까지 J. D. 밴스는 자기 성공담을 이야기하지 않는다자기가 어쩌다 운이 좋았음을 이야기한다그는 더 노력하라고 하지 않는다마음이 망가지고 문화가 절단된 이에게 바른 방향의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민간 세계에서 부하직원은 업무 시간만 지나면 상사의 간섭을 받지 않는다그러나 해병 상관은 내가 일을 잘하고 있는지만 확인하는 게 아니라방을 깨끗하게 치웠는지머리를 단정하게 깎았는지제복을 다림질했는지까지 확인했다. (중략내게 해병대는 통솔력이란 부하들을 쥐 잡듯 잡음으로써가 아니라 그들의 존경을 받음으로써 생긴다는 사실과내가 어떻게 해야 그런 존경을 받을 수 있는지를 가르쳐준 곳이다그리고 각기 다른 인종과 사회계층 출신의 남녀가 한 팀을 이루어 가족과 같은 유대를 맺고 작업할 수 있다는 것을 일깨워준 곳이다. (중략내가 처절하게 실패할 수 있는 첫 번째 기회를 주면서 어떻게든 그 기회를 잡도록 하고실패했을 때에는 어떻게 해서든 두 번째 기회를 준 곳이 해병대였다. (중략능력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능력은 당연히 큰 도움이 된다그러나 노력 부족을 능력 부족으로 착각해서 스스로의 가치를 떨어뜨리며 살아왔다는 사실을 깨닫는 건 굉장히 중요하다이것이 사람들이 내게 백인 노동 계층의 어떤 점을 가장 변화시키고 싶으냐고 물을 때마다내가 자신의 결정이 중요하지 않다고 느끼는 마음이라고 대답하는 까닭이다해병대는 외과 의사가 종양을 도려내듯 내게서 그런 마음을 도려냈다
 
J. D. 밴스에게 최초의 기회는 해병대에 간 것이었다집에서 학습된 무기력을 배웠다면 해병대에서 학습된 의지를 습득했다” 나는 그의 해병대’ 서술에서 굉장한 감화를 받았다아무래도 직업 때문인 것 같다세상의 의견과 좀 다를지 모르지만 나는 요즘 학교에서 가장 우선해야 하는 건 창의성보다는 인내라고 생각한다최소한의 인내 없이는 창의성의 재료로 사용할 최소한의 지식조차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무엇보다 인내 부족은 노력할 기회를 박탈한다. 그뿐만 아니라 기본적인 배려를 무시하게 한다마음과 몸 모든 면에서 치명적인 결함을 만드는 것이다밴스는 해병대에서 처음으로 제대로 된 제련을 받는다적절한 사회적 행동과 예의범절을 배운다알지 못했던 경제적 힌트와 사회적 자본올바른 충고를 경험한다이전에는 얻지 못했던 것들이다이런 과정 안에서 자기 효능감을 발견한다자신도 타인을 보호할 수 있고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존재라는걸. 자신도 아이비리그에 진학할 수 있고 로스쿨에 갈 수 있다는 걸 배운다’. 이를 가능하게 한 건 새로이 얻은 가느다란그리고 점점 촘촘해지는 사회적 자본이었다
 
밴스는 아직도 아프다고 한다과거의 습관과 생각의 패턴이 돌발 사건을 일으킬 때마다 이를 통제하려고 주의한다고 한다이를 이해하고 기다려 주는 아내와 가족 덕분에 나은 삶을 살고 있다고 기뻐한다. 그러나 담담한 서술 가운데에서도 스멀스멀 올라오는 불안은 감출 수 없다. 가난이 남긴 상처는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평생을 지배한다나는 단언할 수도 있다

그동안 힐빌리들은 자기의 언어가 없었다힐빌리를 상상하는 이들이 힐빌리를 이야기하고 있었을 뿐힐빌리의 노래가 이러한 반향을 가져온 이유는 드디어 그들이 자기 언어로 이야기하기 시작했기 때문이 아닐까우리 역시 마찬가지다내 곁의 누가 입을 열지 못하고 있는가마땅히 귀를 열고 들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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