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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3 - 1부 3권 ㅣ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 (마로니에북스) 3
박경리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2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사랑과 여자와 죽음과 병, 3권을 덮는 순간 떠오른 네 개의 단어다. 여기서의 ‘병’은 호열자로 나타난 전염병마이기도 하지만 사랑의 병이기도 하다. 2권말에서도 그랬지만 3권에서도 이 병으로 수많은 사람의 목숨이 죽어나간다. 호열자는 지금의 콜레라다. 호열자 때문에 윤씨부인까지 사망하고 어린 최서희의 위치가 위태위태한다. 조준구는 최서희에게 자기 아들을 억지로 장가보내려 한다. 봉순이도 길상이도 서희도 많이 자랐다고 하지만 어른들을 상대하기는 역부족이다. 최참판 댁 사람들과 동네 농민들은 안팎으로 불안해 한다. 흉흉함은 죽음이 더할수록 깊어간다. 죽어서 어이없이 세상을 뜬 사람들도 많지만 살아 있어도 살아 있는 게 아닌 사람들도 여기 어찌나 많은가.
어쩌면 귀녀의 생애가 끝나는 날 강포수의 생애도 끝나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함께 죽으리라는 뜻이 아니다. 귀녀의 죽음은 어떤 형태로든 지금까지의 강포수 인생과는 같을 수 없는, 다른 것으로 변할 것이라는 뜻이다. 지금 강포수는 귀녀와 더불어 있다. 옥중과 옥 밖의, 손이 닿을 수 없는 엄연한 법의 거리요 지척이면서 가장 먼 그들, 서로가 서로를 보고 느낄 뿐이지만 그러나 강포수는 일찍이 귀녀가 이같이 자신 가까이 있는 것을 느낀 적이 없다. 가랑잎 더미 위에 쓰러뜨렸을 적에도 귀녀는 강포수에게 멀고 먼 존재였었다. 강포수를 좋아하건 싫어하건 그것은 이제 아무것도 아니었다. 저주받은 악녀이건 축복받은 선녀이건 그것도 강포수하고는 관계가 없었다. 다만 거기 그 여자가 있다는 것과 그 여자를 위해 서러워해줄 단 한 사람으로서 자기가 있다는 것, 그것뿐이었다.
욕망의 화신과도 같은 여자의 죽음은 상상 외로 충격적이다. 예정된 죽음이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예정된 시간 가운데 사랑의 기회를 잡는다. 사악한 여자를 사랑하던 강포수란 남자, 볼품없는 이 남자의 마음 안에 사랑이 가득할 줄을 이전까지 그 누구도 몰랐다. 강포수가 이런 지고지순한 액션을 취할 거라고는 나 역시 생각지 못했다.
“강포수, 손.”
“머라꼬.”
강포수는 흠씬 놀라며 물러섰다.
“손.”
귀녀는 여전히 창살 밖으로 손을 내밀어 놓고 있었다. 강포수는 겁을 내어 떨면서 조그마한 귀녀의 손을 잡아본다. 조그마한 손, 손아귀 속에서 바스러질 것 같은 손이다.
“마, 마, 많이 여빘고나.”
“강포수의 손은 쇠가죽 겉소.”
부드럽고 낮은 목소리였다.
“이, 이거 배고플 긴데.”
다시 꾸러미를 디밀려 하는데 이번에는 귀녀 쪽에서 강포수의 손을 거머잡았다.
“강포수, 내 잘못했소.”
“알았이믄 됐다.”
“내 그간 행패를 부리고 한 거는 후회스럽아서 그, 그랬소. 포전 쪼고 당신하고 살 것을, 강포수 아, 아낙이 되어 자식 낳고 살 것을, 으으흐흐…….”
밖에 나온 강포수는 담벼락에 머리를 처박고 짐승같이 울었다. 하늘에는 별이 깜박이고 있었다. 북두칠성이 뚜렷하게 나타나서 깜박이고 있었다. 오월 중순이 지나서 귀녀는 옥 속에서 아들을 낳았다. 그리고 여자는 세상을 원망하지 않고 죽었다. 강포수는 귀녀가 낳은 핏덩이를 안고 사라졌다. 그를 아는 사람 앞에 그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그를 보았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의 소식을 아는 사람도 없었다.
귀녀는 죽음을 앞두고 변한다. ‘세상을 원망하지 않고 죽었다.’는 게 그 증거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 게 내 오랜 신념이다. 그래서 어떤 사건 앞에서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라고 누군가에게 충고하며, 사람 너무 믿는 게 아니라며 나 자신을 책망한다. 그러나 내가 이 신념을 양보하는 건 단 하나의 조건 앞에서다. 사람은 죽음을 앞둘 때 분명 변한다. 귀녀가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 앞에서 진실한 사랑을 만났을 때, 마녀 같은 여자도 순수한 영혼으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 어쩌면 사랑이 가장 빛날 때는 죽음 앞에서. 그러니 우리가 사랑으로 돌격해야 하는 대상은 죽음처럼 살고 있는 사람이 아닐까, 사랑은 거기에서야 진실로 사랑다울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용이는 사람이 달라졌다. 월선이 떠난 뒤 변한 것과 정반대의 상태로 달라졌다. 뻔뻔스러워졌고 어딘지 모르게 추해진 것같이 보였다. 묶어두었던 주문(呪文)의 사슬이 끊어진 듯 용이는 두 여자를 번갈아가며 가까이했다. 임이네를 한 번 범한 뒤 강청댁에도 남자의 기능이 가능해졌던 것이다. 그는 그런 행위에서 자식을 소망하지는 않았다. 임이네로부터 임신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오히려 어리둥절했고 다음은 무감동의 상태로 돌아갔다. 임이네가 마을 여자들로부터 폭행을 당하던 그때 잠시 동안 임이네가 자기 자식을 가졌다는 것을 실감했을 뿐이며 삽짝을 나서면서부터 감동을 잃었다. 그 대신 정력은 그칠 줄 모르는 듯 두 여자에게 쏟아졌고 날로 황음(荒淫)해갔으며 거의 광적으로 되어갔지만 그는 여자 둘을 증오하고 멸시했다. 너희들이 짐승이지 사람이냐고 욕설을 퍼붓는가 하면 나도 짐승이지 사람은 아니라 하면서 헛웃음을 웃곤 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아편쟁이처럼 육체에 탐닉하는 용이는 아무 쓸모 없는 놀량패가 되어갔다.
사랑을 잃은 용이는 완전히 망가진다. 누군가는 용이가 여자들 사이에서 중심을 못 잡는 나쁜 남자라는 이야기를 하겠지만 나는 글쎄, 용이가 이해된다. 그가 저지른 일은 자포자기한 사람이 취할 수 있는 자연스러운 행동 중 하나가 아닐까. 용이가 잘했다거나 두둔하는 게 아니다. 잘못했지만 다 포기한 인간을 저럴 수도 있다는 거다. 그리고 남자와 여자의 일은 남녀의 문제뿐 아니라 성욕과 성욕과의 문제이기도 한다는 걸 다시금 느꼈다. 강청댁에게는 기능하지 않던 기능이 뜬금없이 임이네에게 기능했다는 게 그 충돌을 증거한다. 남자와 여자와의 관계는 역시 조건으로 되는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차라리 용이와 임이네처럼 저지르는 게 자연스럽지, 조건이 맞는다고 억지로 맺어놓는 게 아니란 말이다. 차라리 전자가 덜 모욕적이다. 결국 용이의 세 여자 중에서 가장 비참한 건 조건으로 맺어둔 강청댁이 아니었던가.
고마운 척, 눈물겨운 척할 수 있는 교활한 지혜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넘쳐흐르는 생명력, 조금만 땅이 걸고 짓밟지만 않으면 무섭게 자라나는 잡풀 같은 생명력은 교활한 지혜를 위해 여유를 주지 않았다 할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마을 사람들 눈에 그가 거들먹거리는 것같이 보였다는 것은 윤씨부인이 도와준다거나 먹고 입는 것이 자기네들과 같아졌다는 시샘 때문에 그렇기도 하려니와 그 무성한 생명력에 압도당하는 것 같은 느낌에서 더욱 그렇게 보여졌는지도 모를 일이다. 더욱이 아낙들은 옛날로 돌아간 그 미모에 약이 올랐을 것이다. 이제 임이네한테서는 찌든 궁기를 찾아볼 수 없었다. 놀랄 만한 회복이었다.
책을 읽어갈수록 임이네의 원시적 본능에 놀라게 된다. 그녀는 ‘배부르고 등 따신 것’이 제일인 여자다. 남편을 잃은 슬픔도 남편이 지은 죄의 두려움도 입에 뭘 넣는 문제 앞에선 곧 수그러든다. 임이네가 무엇인가(남편 문제)에 대해 고민하는 내용은 1권부터 3권까지 중에서 아주 조금밖에 안 나온다. 그녀는 먹고살기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치마를 걷어올릴 수 있는 여자고 거지꼴을 하고 구걸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는 여자다. 그러나 이 생명력은 얼마나 강인한가. 여자는 순식간에 뽀얀 생기 어린 얼굴로 돌아온다. 게다가 1번 연적(?)이던 본처까지 호열자로 죽는다. 이건 무슨… 임이네를 위한 맞춤 시나리오 같다. 게다가 용이가 그리 바라던 아들을 낳아버렸다. 귀녀와 다른 모양새지만 생명력이 이 모든 것을 이끌어가는가, 갑자기 신사상 종교에서 늘 말하는 ‘긍정의 힘’, ‘생생하게 꿈꾸면 이루어진다’가 생각난다. 내 삶이 이다지도 팍팍한 건 생에의 의지도 기대도 없어서인가.
“알고 보니께 영감 얻어간 기이 아니고 그 강원도 삼장사라는 남자는 월선이 애비 동생이라누마. 그러니께 그 삼촌 내외를 따라서 간도로 갔다던가? 거기 가서 멋을 했는지 그거사 모르지마는 거기 가믄 돈 번다 하더마. 하기사 우리겉이 쭈그렁박 늙은것이 간다믄 돈을 벌 긴지 그거는 모르겄소만.”
주막에 건달패들이 모여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들의 얘기도 월선에 관한 것이었다. 월선의 재물이 얼마쯤 되겠느냐는 것이었고 누가 그 여자를 낚느냐는 얘기였다.
“돈 좋지. 월선이 시세가 날로 올라가누만. 무당이고 백정이고 소용없는 기라. 옛날 그 손에서 술잔 받아묵던 장돌뱅이들이 이자는 장에서 월선이를 만나믄 굽신굽신, 어느 대가댁 마님을 대하는 것맨치로, 그러니 우찌 사람들이 돈을 보고 환장을 안 하겄노.”
월선이는 도무지 옛날의 월선이 같지가 않았다. 그때보다 늙기는 했으나 아름다워졌으며 도방(도시) 여자같이 옷맵시가 고왔다. 그러나 그런 변화 때문에 옛날 같지 않다는 것은 아니었다. 윤보는 월선이 아닌 월선이 허깨비를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월선이가 평사리로 돌아온다. 그것도 큰돈을 벌어서. 여자 팔자는 뒤웅박 팔자라 남편에 달렸다지만 그것도 안 되면 돈을 버는 방법도 있다. 여자 팔자가 돈에도 좌우된다. 월선이에게 술을 따르라던 남자들이 이제 월선이에게 굽신거리며 마음을 얻으려 든다. 예나 지금이나 여자의 인생은 사랑에 있어서 녹록지 않다. 예전에는 사랑하는 남자와 이어지려면 부모의 검열을 거쳐야 했다. 부모들의 조건을 맞추지 못하면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고, 다행히 첫 검열을 통과하더라도 다음 의무를 또 통과해야 했으며, 아이를 갖지 못하면 다른 데서 아무렇지도 않게 아이를 들였다. 돈 한 푼 쓰려 해도 남편과 시부모의 눈치를 봐야 했다. 기댈 남자도 없어 돈이라도 악착같이 벌었더니 내가 아닌 돈을 원하는 게 눈에 뻔히 보인다. 돈을 번 월선이는 도시 여자처럼 세련되어졌지만 허깨비처럼 살고 있다. 여전히 사랑은 갖지 못해 허무하다.
‘아들 낳고 사는 사람을 내, 내가 만내믄 머할 것고. ’ 주먹을 쥐고 자기 가슴을 쥐어박으며 월선이는 집을 향해 달음박질을 쳤다. ‘생각이 있이믄 날 찾아오겄지. ’ 그러나 그것은 절망에 가까운 기대였다.
용이는 눈을 들어 나무 위를 올려다본다. 바람이 지나간다. 나뭇가지가 흔들리고 월선의 흰 명주 수건이 나부낀다. ‘그리 험한 꼴을 당했이믄서도 사람우 맴이란, 우찌 이리 끝이 없는 길까. ’ 다시 부끄러움을 느낀다.
월선이는 벌떡 일어섰다.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던 것이다. 의아스럽게 용이 쳐다본다. ‘아아, 내가 무신 소용고. 법으로 만낸 사람이 제일이고 이자는 자식 낳아준 사람이 제일 아니가. ’ 도로 주질러 앉는다. 용이처럼 둑길에 눈을 보낸다. ‘그런 생각하믄 벌 받는다. 지난가슬에 죽었이믄 이리 서로 만나볼 수 있었겄나. 내 박복을 한탄하지 누굴 원망하겄노. 이렇게 살라는 팔자라믄……. ’ 눈은 다시 용이 버선으로 옮겨졌다. 햇볕이 좀 두터워졌는가 한결 밝은 햇살이 버선등에 기어오르고 있었다.
월선은 절망하고 또 절망하지만 기대를 버리지 못한다. 어리석어도 떨어질 수 없는 마음, 미련하고 또 미련하다. 사람들은 너무나 쉽게 그들을 손가락질하고 욕한다. 그러나 어떠한가, 사람이 다 그런 거지. 어리석어도 집착이어도 그것도 사랑이다. 두 사람이 서로의 마음을 질기도록 겹쳐왔다면 나빠도 어리석어도 부질없어도 그건 사랑이다. 용이가 저지른 일을 알고도 여전히 용이를 잊을 수 없다면 그건 깊은 사랑이다. 어쩌겠는가. 용이도 월선이도 이렇게 끝까지 갈 것이다. 두 번의 기회는 없다, 용이는 단 한 번의 기회를 날려버렸으니. 두 사람은 방법이 없다. 마음밖에는 방법이 없다.
“와 생깄는고 싶더마는 니라도 없었이믄 내가 우찌 살았겄노. 임 보듯이 니를 보고…… 보고 접을 때 니를 보고…….” 아비라던 그 사내의 죽음을 안 것은 그로부터 삼 년 후의 일이었다. 어미의 주량이 늘고 더러 바람도 피우는 세월 속에서, 그러나 여전히. “와 생깄는고 싶더마는 니라도 없었이믄 내가 우찌 살았겄노. 임 보듯이 니를 보고, 보고 접을 때 니를 보고 우찌 그리 애빌 닮았는고.” 그런 말을 했었다. ‘어매 맘 알겄소. 임 보듯이 니를 보고, 보고 접을 때 니를 보고…… 임이네 낳은 아이는 그이를 닮았이까. ’
명리학에서 ‘육해살 인연’이라는 게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 위기의 순간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결정적 인연을 이야기하는데, 무거운 지게를 지탱하는 받침대를 비유한다. 누구에게나 삶은 무겁다. 그러나 이 무거운 삶에 또 다른 무게가 될지언정 마음을 잠시 잠깐 걸 수 있는 존재는 삶을 지탱하는 결정적 이유가 된다. 월선이는 아이를 갖고 싶다. 월선엄마가 그녀에게 이야기한 ‘너라도 없었으면 내가 어떻게 살았겠니’라는 말은 지금도 유효하다. 그 말은 사람에게 ‘마음 걸 무엇’이 그렇게나 필요하다는 거다. 사람은 의미 없이 살 수 없는 존재다. 전적으로 이해한다. 아이 하나 있는 친구들이 진심으로 부럽다. 하루하루 아이가 커나갈 때, 내가 사랑했던 그 사람을 꼭 닮은 생명체가 살아 숨 쉴 때. 내 사랑은 살아 숨 쉬고 나날이 자라나는 것이다. 내 사랑은 죽어가지 않는 것이다. 내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게 그들의 눈에는 무엇인가 보인다, 내 삶은 하나도 달라지지 않고 똑같은데 그들의 삶은 매일 변화한다. 부모는 아이에게 기대어 산다.
‘야속한 사람, 옛날에는 어무니가 기시서 그랬고 법으루 만낸 사램이 있어서 그랬고 지, 지금은 자식 낳아준 사램이 있어서 그렇고, 끝까지 남남이고나. 원망하는 거는 아니지마는 그이는 나를 남으로 치부하는 거만은 틀림이 없이니께. 야속하고 그, 그렇지마는 내 이녁 맘 알기사 알거마는. 그래도 야속하지. ’
야속하다는 건 사랑한다는 것, 월선과 용이는 이 세상에서 아무래도 안되는 인연이다. 그래도 나는 『토지』에서 월선이가 가장 행복한 여자가 아닌가 싶다. 아파도 끝까지 사랑을 품고, 사랑을 확인받으며 살아가므로. 사랑을 잊지 않고 살 수 있는 인간은 행복하다. 마음이 죽어가지 않는 인간은 행복하다. 그러므로 나는 상상한다. 월선이 역시 죽을 때 세상을 원망하지 않았을 거라고. 월선이 정도면 괜찮은 인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