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너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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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마흔셋에 윌리엄 스토너는 다른 사람들이 훨씬 더 어린 나이에 이미 배운 것을 배웠다. 첫사랑이 곧 마지막 사랑은 아니며, 사랑은 종착역이 아니라 사람들이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이라는 것.

이제 중년이 된 그는 사랑이란 은총도 환상도 아니라는 것을 조금씩 깨닫기 시작했다. 사랑이란 무언가 되어가는 행위, 순간순간 하루하루 의지와 지성과 마음으로 창조되고 수정되는 상태였다.”

소설이나 문학작품을 잘 읽지 않는다. 이야기의 흐름을 꾸준히 따라갈 만큼 마음에 여유가 없는 삶의 굴곡을 지나가고 있다. 나에게는 해야 할 일이 아주 많고, 내게로 온 그 일에 애정을 쏟아주어야 한다. 이 삶을 가꾸는 데에만도 시간이 부족하다. 게다가 냉정한 나는 타인의 삶에 별 관심이 없다. 별로 궁금하지 않다.

스토너에 대한 찬사를 족히 들었다. 내가 궁금했던 것은 이 책의 미문이었다. 아름다운 인물이나 풍경의 묘사를 필사나 하고자 고르고 펼쳤다. 한 사람이 문학을 사랑하게 되고 고난 가운데 삶을 극복한다. 읽다 보면 고통스럽겠지. 인간의 삶이란 게 뭐 그런... 원래 슬픈 거니까. 슬픈 건 당연한 거니까.

스토너의 공부는 진지했지만 엄청난 두각을 나타내지는 않았으며, 결혼생활도 서툴렀다. 너무나 보통의 삶을 하루 하루 세어가는 나날들이었다. 나쁘게 표현하면 지겨운, 아름답게 표현하면 잔잔한. 그러나 삶은 가끔씩 반짝이고 그 반짝임은 온도로 남아 삶을 오래 버티게 한다.

마흔을 앞두고 있는 나는 자주 생각한다. 진정한 삶은 마흔부터인지도 모르겠다고. 삶이 그저 ‘살아가는’ 것뿐이라는 것을 알아버린 순간부터야 삶은 한 겹 한 겹 쌓이기 시작하며, 그 겹겹이 온기가 머물러 붙는 것이다. 사랑이란 은총도 환상도 아니라는 것을 알아버렸다. 그렇기에 내 삶에 이미 보잘것없는 모습의 사랑이 주어져 있으며, 나의 역할대로 그 사랑을 재설정해 나가는 매일이 빛나는 삶으로 남는다. 은총도 환상도 내가 만들어나갈 수 있는 것임을 새겨둔다. 사랑은 삶을 몇 번이고 재설정한다.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제한 없이 변화되고야 만다. 과거의 사랑이 있어주지 않았다면 나는 이미 내가 아니며, 미래의 사랑이 없을 것이라면 나는 결국 아무 것도 아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오래 계속된다.

“이것이 나의 인생이다.” 잠시 뒤돌아 삶을 세어볼 때면 단단히 삼키는 문장 하나이다. 스토너는 자신의 삶을 재설정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몇 번이고 돌아서 “이것이 나의 인생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었으리라 믿는다. 스토너의 인생을 빌려 읽었다. 어떤 사람은 스토너의 인생이 실패한 것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특별한 희망도 목표도 없고, 권력 싸움에서 밀려났고, 사랑했던 여자도 (그녀의 커리어를 짓밟아버리고) 떠나보냈다. 너무나 사랑했던 딸의 인생도 상처 가득한데 어찌 도와줄 수도 없다. 그저그런 삶처럼 보여도 할 수 없다. 마지막에 다가갈수록 먹먹하고 경건해졌다. 내가 경건하게 여기는 내 삶의 굴곡과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아주 많이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자신이 생겼다. 나의 인생도 이렇게 숭고하게 서술될 수 있는 삶이다. 그리고 나의 삶은 내가 직접 서술해 나간다.

이제 곧 마흔이다. 나는 아름답게 살 것이고 이보다 더 아름다운 이야기로 남을 것이다. “이것이 나의 인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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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 이야기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 작가정신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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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믿는가?” 아주 오래전부터 습관처럼 물어온 질문이다. “나는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 몇 년 전부터 새로이 묻게 된 의문이다. 보이지 않고 잡히지 않는 것, 도저히 믿으려야 믿을 수 없는 것을 믿고 있는 자신이 가끔은 신기하다. 분명 나는 신의 존재를 믿는다. 그런데 그 존재를 왜, 어떻게 믿게 되었는가. 그건 가능한 것인가. 이유 중 하나는 분명하다. 절절히 외로워서일 것이다.

삶의 고달픈 시기가 닥칠 때마다 나는 늘 혼자였다. 누군가 손을 내밀어 주기를 바라지 않은지는 너무 오래됐다. 어떤 일이 벌어져도 ‘당연히’ 이 일은 내가 어떻게든 건사해야 한다는 생각으로만 버텨왔다. 인간은 그런 나를 대개 질려 했다. 내가 싫지 않은 사람들은 나와 똑같은 사람들, 그들도 언제나 홀로 자기 일에 휘청거리고 있었기에 언제나 서로, 멀리서 외로웠다. 그래서 나는 용기 있게 신을 떠나지 못했다. 한 번도 완벽히 홀로이고 싶지 않았으므로.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잡히지 않는 신에게, 말을 걸고 손을 내밀고 온기를 구했다. 그것만으로도 조금 버틸 만 했기에. 그것만으로도 신의 존재는 너무나 컸기에 그랬다. 나에게 삶은 늘 생존 투쟁에 가까웠으므로. ‘잔인한 완전체’로서라도 신은 필요했다.

『파이 이야기』의 원제는 ‘Life of Pi’다. 파이의 삶 전반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파이의 생명’에 초점을 둔 이야기일 수도 있는 것이다. 삶과 생존에 대한 내용이 중심을 차지하고 있지만, 파이의 삶의 태도가 인상적으로 읽힌다. 파이는 동물학과 종교학을 공부하는 우수한 학생이다. 신을 사랑하고 동물을 사랑하는 인간이다. 글의 중심에서 신과 동물은, 1, 2, 3부를 거쳐 지속적으로 등장하며 파이를 지탱하는 뼈대를 이룬다. 모든 종교에 열린 마음을 가진 파이는 한편 신을 수집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럼으로 인해 마음이 부유해진다. 가장 멋진 신들과 함께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가 “저는 신을 사랑하고 싶을 뿐이에요.”라고 말하고, “(아름답고 위풍당당한) 신의 존재는 최고의 보상인 것을.”이라고 생각하는 마음은 2부부터 시작하는 표류와 생존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동물에 대한 애정은 이야기 전반을 통 들어 훌륭한 비유가 되어 버틸 힘과 유머를 제공한다.

영화에서만 나오는 신에 대한 대사가 있다. “종교는 방이 많은 집과 같아요.” / “의심의 방은 없어요?” / “층마다 아주 많죠.” // “의심은 좋은 거예요. 믿음을 유지시켜 주죠. 시험에 들기 전까지는 믿음의 힘을 모르니까.” 어쩌면 신을 믿는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힘’을 기르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나는 신을 믿을 수 있는 인간과 믿지 못하는 인간의 DNA가 따로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DNA를 넘어서) 신을 믿지 않거나 믿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신비롭다고 생각한다. 신을 믿거나 믿지 않거나, 신의 존재와는 상관없다. 신이므로. 신은 그 누구라도 사랑하는 ‘아름답고 위풍당당한’ 존재다. 그에게 사랑받을 수 있다면, 사랑받고 의지하면 그만인 사람도 있는 것이다.

신형철은 말한다. “고통의 무의미를 견딜 수 없어 신을 발명한 사람들”이 있다고. 나는 그 마음을 이해한다. 나는 신을 믿고 있지만 내 고통에 손대지 않는 신을 익히 경험해 알기 때문이다. 《무죄한 이들의 고통에 대하여》와 《무정한 신 아래에서 사랑을 발명하다》는 인간의 고통 앞에서, ‘살기 위해’ 신과 사랑에 매달리는 인간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맞다. 저 글 전자는 세월호 유족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들은 대부분 신을 믿는다. 자신을 배신한 종교인들을 미워하면서도 신에 기대어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들이다. 파이는 자신을 잡아먹어도 이상하지 않을 벵골호랑이를 의지하여 삶을 연명하지 않았던가. 고통마저도 의지하여 생을 뼈저리게 느끼지 않았던가. 고통마저도 삶의 추동력으로 삼는 마당에 환상 같은 신을 의지하면 뭐 어떻다는 말이냐. 솔직히 나는, 환상이라도 좋겠다. 나에게는 신이 필요하다. 그가 나를 위무해 주기를 바란다. 신을 이용해서라도 살고 싶다.

죽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은 순간에 나는 왜 살고 싶은 실낱같은 희망을 버리지 못하는가. “내 안의 뭔가가 생명을 포기하려 하지 않았다. 놔주려 하지 않았다. 마지막 순간까지 싸우고 싶어 했다. 내 어떤 부분이 마음을 휘어잡았는지 모르겠다.”라는 파이의 마음에 공감했다. 책은 벵골 호랑이 리처드 파커를 ‘생에 대한 욕망’이나 ‘생존 의지’로 표현하는 것 같다. 나는 생존 앞에 선 나의 사악함을 떠올렸다. 나 자신에게서 자신을 증오하기 충분한 근거를 발견하는 순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야 한다는 욕망이 튀어나온다. 한편 파이는 순간순간을 기록하고 또 기록한다. 시련은 바쁘게 극복한다. 종이보다 펜이 먼저 떨어졌다. 잉크가 더 남아있었다면 227일간의 기록을 모두 남겼으리라. 나는 왜 꾸준히 쓰고 싶은가, 살아있다는 감각을 느끼기 위해서다. 파이는 더욱 그랬을 것이다.

어떤 인간들은 고통스러울수록 삶에 집착한다. 감각이 깊고 선명할수록 살고픈 욕망이 커져간다. 『파이 이야기』를 읽고 보면서 나는 정말 살고 싶었다. 삶에 있어 어떠한 정답이 있겠는가. 아무것도 없다. 정녕, 끝까지 살아남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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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경사 바틀비 - 미국 창비세계문학 단편선
허먼 멜빌 외 지음, 한기욱 엮고 옮김 / 창비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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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종래 갈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필경사 바틀비(Bartleby, the Scrivener)』를 읽으면서 내내 들었던 생각. 아니 이건 내가 내내 집착해 온 생각 조각이다. 표제작인 「필경사 바틀비」뿐 아니라 너새니얼 호손의 「젊은 굿맨 브라운」, 에드거 앨런 포우의 「검은 고양이」, 스티븐 크레인의 「소형 보트」, 윌리엄 포크너의 「에밀리에게 장미를」을 읽으며 헤아린 답은 인간의 안식이었다.

사람은 안식할 곳을 찾아 헤맨다. 마음 둘 곳 하나에 눈물짓는 인간이 머무는 곳은 햇빛이 간신히 드는 창가이기도 하고, 창문도 없는 작은 단칸방이기도, 기대고픈 이의 따뜻한 품 안이기도 하며 그 사람의 눈부처 안이기도 하다. 그것도 없는 사람들, 그것마저 빼앗긴 사람들이 찾을 안식은 죽음이다.

오랜만에 신뢰할 만한 사람 아주 여럿과 책 이야기를 나누었다. 같은 책을 읽고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내게 금같이 귀하다. 나는 이 시간을 얻으려 한 달의 시간을 흘려보내는지 모른다. 이런 대화는 나를 살게 한다. 단언컨대 현재는 이곳이 나의 안식처다. 「필경사 바틀비」를 읽은 각자는 자기의 신발을 신고 바틀비를 읽는다. 누군가는 바틀비가 되어 글을 쓰고 누군가는 화자인 고용주가 되어 그를 쫓아낸다(나 같은 단순빵들이 그렇다). 바틀비를 노조의 모습으로 읽으신 분부터 월가가 들어서며 집을 잃은 원주민으로 읽으신 분까지… ‘자본주의와 불화하는 예술가’, ‘소외된 근대인의 전형’, ‘자본주의를 거부하는 인물’이라는 교과서적 해석 외에도 주인공은 제 나름의 해석이 가능하다. 멜빌이 만든 모호한 캐릭터는 궁금증을 불러일으킬수록 무한한 인물 스펙트럼의 별을 찍는다.

바틀비는 아파서 매력적이다. 맑고 밝고 사회성 좋은 인간이 아니라 뾰족한 인간이다. 거기에 뾰족한 끝이 부러져 더 날카롭고 연약하다. 그래서 우리는 그에게 마음을 쏟는다. 자신이 가진 가슴 안의 다친 부분을 맞추어 본다. 나는 생각했다, 바틀비는 나의 내일이 아닐까. 내가 “그렇게 안 하고 싶습니다.”라고 계속 말했을 때의 내일. 그래서 나는 “그렇게 안 하고 싶습니다.”를 감추고 생글생글 웃으며 “그렇게 하겠습니다.”를 주문처럼 외우며 직장에서의 하루하루를 흘려보낸다. 내 일은 안팎으로 100퍼센트 서비스직이다. 변명의 여지없이 나는 거짓말쟁이다.

그러나 이렇게 살아간다고 뭐가 크게 달라질까. 모든 인간의 끝은 동일하다. 어쩌면 공평하다. 똑같은 죽음이 인간을 기다리는데 뭘. 소설이 끝마무리하듯 “아 바틀비여, 아 인간이여.” 가면을 쓰고 살거나 바틀비처럼 거짓 없이 살거나 우리가 가는 곳은 같은 장소다. 바틀비가 먹는 것까지 “그렇게 안 하고 싶습니다.” 거부하며 생을 마무리 지었을 때에야 나는 안심했다, 드디어 그가 안식에 들었구나 싶어서. 그에게도 생은 고(苦)였으리라. 배달 불능 우편 취급소(The Dead Letter)에서 일하던 그의 시간이 죽음에 매혹되는 시간이었던 아니던, 소설의 화자가 자기를 변호하고 싶어 덧붙인 에피소드건 아니건, 나는 그의 마지막 얼마간이 편안하지 않았으므로 이 마지막에 안심하고 싶다. 덧붙여 ‘젊은 굿맨 브라운’의 혼란과 장미를 받아야 했던 ‘에밀리’의 선택까지도. 꽤 많은 것들이 죽음으로 해결되지는 않아도 이로 마무리된다.

우리나라에 5급 기술직 공무원으로 필경사(筆耕事, Scrivener)가 남아 있다. 그의 글씨가 놀랍도록 아름답다. 누군가는 그를 부러워하고 누군가는 그를 비난하며 ‘세금 낭비’라고 말한다. 이제는 부정할 수 없는 디지털 시대에 손으로 쓰고 다듬고 새기는 문서는 정녕 낭비일까? 바틀비의 시대만 해도 필경사는 의심의 여지없는 전문직이었다. 이제는 누구든 빠르고 정확한 프린터 말고 핸드 라이터를 원하지 않는다. 다만 필경(筆耕)을 캘리그래피, 손글씨라는 이름을 붙여 환상이나 취미로 남겨둘 뿐. ‘가성비’에 목매는 사람들은 언제까지 이 직업을 공무직으로 남겨주려나. 나는 지금까지도 악필을 교정하려 글씨 연습을 한다. 글씨는 글을 전하려 쓰는 법, 고운 글씨로 좋은 글을 써서 건네고 싶다. 뼛속까지 아날로그 인간인 나는 아무래도 바틀비 쪽에 좀 더 가까운 것 같으니, 바틀비의 이야기가 오래 슬프고 두려워서. 멜빌이 묘사한 연약한 얼굴과 무기력한 몸짓, “그렇게 안 하고 싶습니다.”라는 단호한 말이 마음에 오래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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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가 누군가를 부르면 내가 돌아보았다 창비시선 411
신용목 지음 / 창비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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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시인을 좋아하세요?”라는 질문은 유명한 어떤 사건이후로 내게 좋은 질문은 아니다. 대신 나는 어떤 시를 좋아하세요라거나 어떤 시인을 좋아하세요라는 질문을 수용한다. 물론 전자의 질문은 대답하기 어렵다. 너무너무 많기 때문에. 한편 후자의 질문은 몇 가지로 대답 가능하다. 그중에서도 신용목 시인은 내가 생각하는 시인이라면 이래야 해!’라는, ‘시인의 이상상과 같은 사람이다. 시만 바라본 지극히도 개인적인 판단이지만, 그는 선하고 안온한 마음을 가진 사람 같다. 선하고 부드럽고 아름다운 시인.

 

내가 죽은 자의 이름을 써도 되겠습니까? 그가 죽었으니

내가 그의 이름을 가져도 되겠습니까? 오늘 또 하나의 이름을 얻었으니

나의 이름은 갈수록 늘어나서, 머잖아 죽음의 장부를 다 가지고

 

나는 천국과 지옥으로 불릴 수도 있겠습니까?

 

(중략)

 

네 이름을 훔치기 위해

아무래도 죽음은 나에게 눈을 심었나 보다, 네 이름을 가져간 돌이 비를 맞는다.

귀를 달았나 보다, 돌 위에서 네 이름을 읽는 비처럼,

내가

천국과 지옥을 섞으며 젖어도 되겠습니까?

저기

공원을 떠나는 여자의 붉은 입술처럼, 죽음을 두드리는 모든 꽃잎이 나에게 기도를 전하는……

여기서도

인생이 가능하다면, 오직 부르는 순간에 비가 그치고 무지개가 뜨는 것처럼

사랑이 가능하다면,

죽은 자에게 나의 이름을 주어도 되겠습니까? 그가 죽었으니 그를 내 이름으로 불러도 되겠습니까?

 

공동체

아름다운 이름을 수집하는 이가 있다. 나는 그 기분을 이해한다. 내 것으로 훔치고 싶을 정도로 탐이 나는 이름이 내게도 있으므로. 나는 언제나 이름을 관찰한다. 나의 이름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변명하지만 그것은 이미 과거의 문제, 지금은 이 이름을 지극히도 사랑하는데 왜 나는 그것에 집착하는가. 나에게 호칭의 문제, 이름을 붙여주는 문제는 왜 중요한 것인가. 특별한 누군가의 이름은 나를 왜 전율하게 하는가. 나는 이 탐구에 아직 답을 얻지 못했다. ‘인생이 가능하다면’, ‘사랑이 가능하다면죽은 자에게 나의 이름을 주고 싶다는 그 감정이 무엇인지 아직 나는 적절한 언어를 찾지 못하였다.

 

 

 

사랑은 내가 꾸는 꿈이 나를 찾아 헤매는 순간이어서 번번이 아침은 실패한 꿈을 물컹한 몸으로 바꿔놓는다.

 

 

진흙 반죽 속에서 조금씩 내가 되어 걸어나오는 진흙 인간처럼(전문)

이 단 한 문장의 시에서 오래오래 눈을 떼지 못했다. 멍한 마음으로 오래오래 바라보았다. 이 한 줄의 시로 마음을 채워 넣어야 할 것 같았다. 내 텅 빈 매일의 아침이 이런 것이었나 그런 거였나. 나는 그런 밤을 바삐 수행해 온 것이었나 싶어서 조금 기뻐졌다. 매일 아침마다 겪어내는 실패가 기뻐졌다.

 

이 시간이면 모든 그림자들이 뚜벅뚜벅 동쪽으로 걸어가 한꺼번에 떨어져 죽습니다. 아름다운 광경이죠. 그것을 보고 있으면, 우리 몸에서 끝없이 천사들이 달려나와 지상의 빛 아래서 살해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묻게 됩니다. 나의 시선과 나의 목소리와 거리의 쇼윈도에도 끝없이 나타나는 그들 말입니다.

오랫동안 생각했죠. 깜빡일 때마다 눈에서 잘려나간 시선이 바람에 돌돌 말리며 풍경 너머로 사라지는 것을 보거나, 검은 소떼를 끌고 돌아오는 내 그림자를 맞이하는 밤의 창가에서…… 목소리는 또 어떻구요. 투명한 나뭇잎처럼 바스라져 흩날리는 목소리에게도 내세가 있을까? , 메아리라면, 그들에게도 구원이 있겠지요.

 

갑자기 쇼윈도에 불이 들어올 때,

 

마네킹은 꼭 언젠가 살아 있었을 것만 같습니다. 아니, 끝없이 살해되고 있는지도 모르죠. 밤새 사랑했지만,

 

아침이 오고 또 하루가 저뭅니다. 이 시간이면 서서히 어두워지다가 갑자기 환해지는 거리에서 태어났던 것들이 태어나고 죽었던 것들이 죽는 것을 보곤 합니다. 그러나 내가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시, 한꺼번에 깜깜해지는 거리처럼, 사랑하는 순간에 태어난 천사에게만 윤회가 허락될 리는 없으니까요.

 

지나가나, 지나가지 않는(전문)

내 몸에서 그림자가 걸어나가가고 내 몸에서 천사들이 달려나간다. 나는 얼마나 무한한 존재인가. 그리고 그들이 떠난 이후의 나는 얼마나 텅 빈 존재인가. 마네킹이나 천사나 사랑받고 버려지기는 매한가지다. 마네킹이나 천사나 인간이 아니기는 매한가지다. 나는 밤이 되면 이상해진다. 내가 사람 아닌 것이 된 양 이상해진다. 지금이 꼭 그렇다.

 

내가 가장 훔치고 싶은 재주는 어둠을 차곡차곡 쌓아올리는, 저녁의 오래된 기술.

 

불현듯 네 방 창에 불이 들어와, 어둠의 벽돌 한장이 차갑게 깨져도

허물어지지 않는 밤의 건축술.

 

검은 물속에 숨어 오래 숨을 참는 사람처럼.

 

내가 가진 재주는 어둠이 깨진 자리에 정확한 크기로 박히는, 슬픔의 오래된 습관.

 

공터에서 먼 창(전문)

슬픔의 오래된 습관이라는 맺음말에 시선이 오래 머문다. 레이어가 한 겹 한 겹 쌓이듯 차곡차곡 슬픔의 이미지가 쌓인다. 슬픔은 역시 엷은 푸른빛이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 몫의 슬픔이 쌓인다. 한 겹 한 겹 오늘의 몫이 쌓일수록 어둠이, 밤이 찾아온다. 오늘도 그렇게 습관처럼 충실히 하루분의 슬픔을 쌓는구나. 견고하게.

 

어떤 사랑은 혼자서는 할 수 없는 것이라고 했다. 내가 아직 사랑하고 있으므로…… 그는 죽은 것이 아니다. 아름다운 밤이다. 아름다운 밤이다. 중얼거리며 집으로 돌아왔을 때, 거기 내가 살고 있었다. 뻔했다. 영화는 밤에 자는 낮잠 같다.

 

영화는 밤에 자는 낮잠 같다(맺음 부분)

시인은 너의 이름을 읽고 있었다.”라고 했다. 삶도 죽음도 이름을 사이에 두고 줄다리기를 한다. 이름을 읽는 순간만큼은 가 살아있는 것이 아닐까. 재차 묻는다. 나에게 이름은, 호칭은 대체 무엇인지. 부모가 부여하고 내가 부여하는 고유명사 하나가 생과 사를 가로지른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이름을 사랑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고, 이름을 지우는 것으로 끝나는가. 이름이 있다면 사랑은 지속되는가.

 

죽음이 인생을 엿보려고 사람에게 사랑을 심어놓았다.

첩자로 키워놓았다.

 

나는 신들의 플러그를 다시 꽂는다.

 

내 분노를 전하기 위하여 - 아직 내게 남은 재앙이 있다면

오늘 자정이 가기 전에 보내주기를.

 

내가 쓰러져 꿈꾸기 전에(전문)

신용목은 R이 좋아하는 시인이다. 작년 R의 추천으로 신용목의 산문집을 읽고 나 역시 그를 좋아하게 되었다. 이전 시집을 찾아 읽었다. 닮았다. R과 신용목은. “죽음이 인생을 엿보려고 사람에게 사랑을 심어놓았다.”라는 문장은 꼭 그녀의 스타일이다. 죽음이 인생을 망치려고 사랑을 첩자로 보냈다니, 죽음과 사랑은 꼭 집어 한편인 것이다. 그래서 사랑에 어떤 인생은 살해당할지도 모른다. 시인은 분노했다지만 나는 너무 로맨틱해서 어이가 없다. 어찌됐건 이제 R이 보고 싶을 때는 이 슬픔엔 규격이 없다는 신용목의 문장이 생각날 것이다. 물론, R은 신철규도 소개해 주었으므로, 나날이 우리의 세계는 확장된다 : )

 

신용목의 시는 자극적이지 않다. 심보선 시인이 칼처럼 날카롭고 독처럼 위험해서 매혹적이라면, 신용목 시인은 선하디 선해서 누군가 상처 입을까 피곤하게 주변을 살피는 감동이 있달까. 시를 너무나 사랑해서 시인과는 가까이하고 싶지 않지만, 신용목 시인이라면 꼭 한번 친하게 지내보고 싶다. 요즘 손에 쥐는 시집마다 어메이징, 어메이징 하다. 꽤 좋은 밤이다. 손끝에 피가 돌고 긴장이 풀린다. 건조한 얼굴을 감싸 안는다. 온기 가득한 시에 매달릴 수 있어서 약간 행복해졌다.

 

신용목 시인은 정말로 균형 잡힌, 인상 좋은 미남이다. 꼭 그렇게 잘 생겨야 좋은 시를 쓸 수 있는 건가요? (진심)

 

이번 시인의 말은 기대에 못 미치게 너무 심심하다. “이 얼마나 다행인가... 아직은 가끔씩 사랑이 나를 소환한다는 것은.”이라는 그의 유명한 시작 노트에 비하면...

 

제 꼬리를 잡지 못해 빙빙 돌다 터뜨리는 울음처럼. 우는 아이의 달리기처첨. ‘잡고 싶음잡을 수 없음으로서의 사랑! 이 얼마나 다행인가. 안하무인 신공안의 검경이 아니라 아직은 가끔씩 사랑이 나를 소환한다는 것은. (신용목의 공터의 달리기시작 노트, 한국대표시인 70-, 사랑에 빠지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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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을 읽어내는 과학 - 1.4킬로그램 뇌에 새겨진 당신의 이야기
김대식 지음 / 21세기북스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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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애하는 국어 선생님 K에게 가끔 이야기한다. “당신은 ‘미문의 인생’(김연수)을 살고 있네요”라고. 그렇다면 내 인생은 어떤가, ‘오독의 인생’이 아닐까. 한 미남 작가의『책을 읽는 방법 : 히라노 게이치로의 슬로 리딩』을 통해 마음껏 오독하라는 면죄부를 얻은 이후 나는 마음놓고 ‘오독’한다. 이번 독서도 그렇다. 윌리엄 블레이크의 「뉴턴, 1795」이 표지 이미지로 나왔을 때 정해진 것이다. 『인간을 읽어내는 과학』이란 제목과 상관없이 나는 이 책의 어떤 부분에 꽂혀버렸다고. 재빨리 오독은 결정되었다고. 

영국의 신비주의 시인이자 화가 
윌리엄 블레이크는 당대의 과학자 아이작 뉴턴을 좋아하지 않았다. 지나친 과학주의와 이성적 합리주의가 인간의 영적인 부분을, 특히 예술성을 위축시키고 폄하하며 망친다고 생각했기에. 그래서 블레이크는 “신이여, 부디 우리를 깨어 있게 해주옵소서. 외눈박이 시각과 뉴턴의 잠으로부터….”(친구 토머스 버츠에게 보낸 편지)라고 말하며 이 그림을 그렸다. 블레이크는 자기가 만든 지옥의 삼위일체에 아이작 뉴턴과 프란시스 베이컨, 존 로크를 집어넣었다. 뉴턴의 과학적 유물론을 비난하기 위한 그림이었고, 영적인 세계에 비하면 너무나도 작은 인간이라는 의미였다. 세상의 거대함을 알지 못하고 기하학으로만, 혹은 과학적 사고로만 세상을 재단하는 인간이라는 비웃음이었다. 그러나 어쩌면 좋은가, 그를 알아보는 사람들은 드물었고 그의 시는 읽히지 않았고 그림도 팔리지 않았다. 윌리엄 블레이크는 당대에 뉴턴에게 패배했다. (오늘날 이 그림은 뉴턴으로 대표되는 과학주의의 상징으로 정착했다. 대영도서관 앞에는 이 작품을 현대화시킨 파올로찌의  조각상이 세워져 있다. )

저자가 그림을 표지에 실은 것은 타당하다. 저자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뇌과학’, 뇌라는 기계의 매뉴얼을 알려주기 위한 것이므로. 또한 뉴턴은 세계가 하나의 거대한 기계 시스템임을 강조했던 과학자이므로. 과학의 세계에서 뉴턴은 영웅이었고, 그를 반대한 블레이크도 예술의 세계에 있어서는 영웅이었다. 저자는 이 책의 서문에서 말한다. “100년 후 미래에는 ‘인공지능’이 등장할지도 모른다.” 과거 동물과 인간의 운명이 바뀌었듯이, 이제는 새로운 운명이 출현할지도 모른다고. 그래서 [1] 뇌과학, [2] 뇌와 정신, [3] 뇌와 의미, [4] 뇌와 영생의 흐름을 따라 뇌과학에 기반을 두어 어떤 운명을 찾을 것이냐고 반문한다. 

“나는 어디에 있는가?”, “나는 심장이 아니라 뇌에 있다.”, “나는 뇌다, 고로 존재한다.”, “나라는 존재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 혹은 우리가 모르는 것, 우리가 모른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라는 과학과 철학을 넘나드는 질문은 만나면 만날수록 흥미롭다. 저자가 원한 것이 뇌과학의 정보 전달이 아니라, 뇌과학을 철학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이라는 것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김대식 저자는 장절마다 멋진 그림을 삽입하여 눈을 즐겁게 하고 머리를 쉬어가게 하는데, 그것참 내 취향이다. “모든 예술 작품은 나의 다른 표현이다.”라며 삽입한 화가의 자화상 표현은 어떤 미술 도서의 한 챕터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논리적이고 깔끔했다. 카프카와 그레고르 잠자를 활용한 연장성(Continuity) 설명 역시 손뼉을 칠만큼 흥미로웠고. 인간은 ‘합리적인 존재’라기보다 ‘합리화하는 존재’라는, 정당화 기계로서의 뇌 이야기 역시 동의할 만했다. 전반적으로 어렵다기보다는 쉽게 풀이한 훌륭한 대중 도서라는 데 동의하며, 저자의 놀라운 글 솜씨에 경의를 표한다. 

여러 챕터 중에 내 마음을 빼앗은 것은 역시 [3] 뇌와 의미 부분이리라. “아이를 가진다는 것이 삶의 의미”라는 진화생물학적 입장에서는 동의할 수 없었지만, 저자의 “늙는다는 것은 삶의 의미를 스스로 정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기는 것”이라는 해석에는 십분 동의한다. 늙음의 공포는 인생을 포기하게 하지만, 삶의 여백을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삽입한 《길가메시 서사시(Epic of Gilgamesh)》역시 나의 고민에 적절하게 젖어든다. “어차피 죽어 땅에 묻히는 것을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운명이라면, 왜 이렇게 고생스러운 삶을 살아야 하는가.”라는 길가메시의 질문은, 지금 이 순간에도 뼛속까지 동일한 나의 고민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번번이 행복을 강조한다.길가메시 서사시》의 지혜 역시 ‘행복’이었고저자가 책 말미에서 인정하는 성공적인 인생이란?” 물음의 대답 역시 그냥 행복하면 된다.”라는 대답이다그리고 그건 독립적인 자아를 갖는 것이라고 갈무리한다. 이에 저자는 독립적인 자아를 찾는 방법은 “예측 가능한 세상에 잡음을 집어넣음으로써예측 코드로는 더 이상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드는 것이라고 추가 설명한다. 가치를 얻기 위해 기꺼이 수련하기 원하는 누군가가 떠오른다. 일본 만화에서 우스갯소리로 (폄하하여이야기하는 ‘자아 찾기 여행은 역으로 한 개인에게는 거대한 여행이다그래서 나는그것을 영웅의 인생이라고 믿고 싶다

저자는 질의응답에서 자기에게 진실해지는 경험이 필요하다고, “그 순간 자아가 성장한다.”라고 말한다그런데 나는 어떠했는가의지했던 치장을 벗고 나에게 진실해지는 순간은 언제나 나의 한계를 인정하는 순간이었다내 용어로 말하자면 나의 비참을 OK 하는 순간이라고나 할까과학의 세계는 언제나 내게 낯설다과학의 인간은 불가능이 없는 존재 같다뇌과학(?)은 이제 인공지능도 만든다고 한다그런데 현실의 나는인간이 맞나나는 인생의 비전을 차곡차곡 이루어내기는커녕 하루 일도 제대로 못 하고 이것저것 놓치며 실수투성이로 살고 있는데... 실상 너무나 무력하다
 
나는 이 무력함만이 인간다움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인간과 기계와의 너무나 다른 점, 그것이 인간의 고유성이며, 이 무력함을 사용하는 방법에서 예술과 문학이 발전했으며, 인간성의 매력이 드러난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 매력이 극대화된 인물이 영웅이 아닐까 생각한다. 길가메시나 오디세우스를 굳이 이야기할 생각도 없다. 문학의 영웅 중에 완벽하기만 한 인간은 몇이나 있었나. 내 기억에는 분명 없다. 혹여 완벽해 보이더라도 그건 그를 사랑하는 단 한 사람에 의한 완벽성이다. 그의 무력함이 사랑스러운 사람에 의한 완벽성이다. 그러하니 자신의 무력함을 사랑하는 사람, 타인의 무력성을 보호하는 사람만이 영웅의 인생을 산다고 믿는다. 

영웅의 인생이란, 자신에게 진실해지는 경험의 합이 아닐까. 자신의 밑바닥을 확인하고 우뚝 서 다시 걸어가는 인간, 또다시 먼지를 뒤집어쓰고 진흙을 묻히는 인간, 샘터에 이르러 무릎을 꿇고 손을 씻고 얼굴을 씻는 인간, 그 낮은 위치에서 진실을 비추어보는 낡아가는 인간이 영웅이다. 뉴턴 역시 그러하였고 윌리엄 블레이크 역시 그러하였다. 그리고 누군가는 각각 그들을 영웅이라고 불렀다. 
인간의 연약함은 분명, 사랑으로 수렴된다. 때때로 나 같은 냉혈한도 인간의 연약함에 사랑을 느낀다. 사람은 강인한 인간에게 기대고는 싶어도 강인한 인간을 사랑하지는 않는다. 인간의 연약함만이 사랑을 끌어들인다. 길가메시가 영생을 찾아가게 된 계기도 사랑하는 친구 엔키두의 죽음이었지 않은가. 놀랍게도 연약함을 사랑하게 된 인간은 강인해지기로 결심한다. 일종의 영웅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행복의 관점에서 이 책을 다시 바라보면 ‘인간을 읽어내는 과학’이라는 제목도 뭐 그리 심오한 의미가 있을까. 결국 과학도 종래 인간의 행복을 위한 것일 테니. 크게 볼 때 (뇌)과학이란 ‘행복해지기 위한 뇌 사용법’ 같은 것이리라. 

행복은 어디 있나, 여러 번 생각해도 다를 것이 없다. 진심으로 나 자신을 깊이 사랑하는 것이 행복이다. 진심으로 나를 나만큼 사랑해주는 사람이 있는 것이 행복이다. 그걸 거짓 없이 누리고 사는 것이 행복이다. 뜬금없이 워런 버핏의 성공론이 떠오른다. “하지만 내 나이가 되면 말입니다, 당신이 사랑해줬으면 하는 사람이 당신을 사랑해주면, 그게 성공입니다.”라고 말했던 바로 그 문장 말이다. 
그는 성공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성공’을 ‘행복’으로 바꾸어 읽어도 훌륭한 대답이 될 터이다. 

“어떤 사람들은 성공이란 원하는 것을 많이 얻는 것, 행복이란 많이 얻기를 바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하나는 다른 하나를 반드시 포함한다고 느끼죠.(성공해야 행복하다고 느낀다는 의미.) 하지만 내 나이(82세)가 되면 말입니다, 당신이 사랑해줬으면 하는 사람이 당신을 사랑해주면, 그게 성공입니다. 당신은 세상의 모든 부를 다 얻을 수도 있고 당신 이름을 딴 빌딩들을 가질 수도 있겠죠. 그러나 사람들이 당신을 생각해주지 않으면 그건 성공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막대한 부를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도 자녀들이,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그런 (주위) 사람들이 당신을 사랑한다면 나이가 든 후 오랫동안 당신은 성공한 겁니다.” (워런 버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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