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인 글쓰기
류대성 지음 / 휴머니스트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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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인’이란 말은 예민한 감수성을 지녔다. 한 사람의 안팎을, 과거와 현재를 아우르는 좁고 깊으며 넓고 얕은 단어다. 한 사람을 모두 표현할 수 있으면서 한 사람을 제한할 수도 있는 단어다. 서울국제도서전에서 처음 만난 빨간 책, 『사적인 글쓰기』는 책을 사랑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자기 매력을 뽐냈다. 자기(自己) 글쓰기를 열망하는 사람을 끌어당겼다. 물론 나 역시 그중 하나다. 

 
‘사적인’ 책에서 가장 강조하는 것은 ‘오직 하나뿐인 나’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글쓰기 재능도 없는 주제에 나는 왜 쓰고 싶어 하는가. 그런 나는 무엇에 대해 쓰고 싶은가. 나는 왜 글을 못 쓰고 있는가. 왜 이 몸이 글쓰기를 시작하기가 그렇게 어려운가, 장소 탓인가 시간 탓인가. 나는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가. 내가 글을 못 쓰는 이유는 정녕 게으른 성격 탓인가를 먼저 쏟아내게 한다. 그리고 ‘자기 이야기’를 점검하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나’를 아는 일이라고. 그리고 이 ‘나’를 아는 일에 제일 도구는 ‘글쓰기’라고. 일단 쓰기 시작하면 ‘나만의 글쓰기’가 시작되고 이 글쓰기가 다음엔 나를 움직일 거라고. 
 
책은 크게 3부로 되어 있다. 먼저 자기 알기, 다음에 편견 없애기, 실제로 자기 글쓰기 스타일 만들기다. 4부의 부록은 희망자를 대상으로 저자가 조언한 글쓰기 예시다. 무엇보다 3부의 ‘글쓰기 비법’을 기대했는데, 이런... 저자는 정직했다, 글쓰기에는 콕콕 집어 족집게가 없었다. 그저 매일의 성실함, 편견도 두려움도 없이 쓰고 또 쓰는 것. 어떤 방법으로 어떤 도구를 쓰던지 쓰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서 내게 가장 잘 맞는 방법과 도구와 시간과 마감과 언어 감수성을 찾아가면 된다. 이 지난한 과정은 ‘온몸으로 글쓰기’ 그것뿐이다. 
 
저자는 ‘사(私)적인’ 글쓰기에 ‘공(公)적인’ 글쓰기를 대비시키기도 하고 긴밀히 연관시키기도 하면서 언제든 사적인 글쓰기가 공적인 글쓰기가 될 수 있음을 말한다. 이때 제일 먼저 내게 떠오른 것은 책(冊)이었다. 책을 읽다 보면 밑줄을 긋게 되고, 밑줄을 발췌하고 인용하다 보면 글을 옮기게 되고, 글을 옮기다 보면 자기 생각을 더하여 글을 쓰고 싶어진다. 대상을 바라보는 자기만의 관점이 쌓이고 구석구석 짜임새 있게 견고해진다. 이렇게 글을 쓰다 보면 글을 더 쌓고 싶어진다. 이렇게 삶이 쌓이면 글이 되고 수북한 글이 정제되면 책이 된다. 책을 읽으면 글을 쓰게 되고 글을 성실히 쓰다 보면 밀도 높은 저자가 나온다. 
 
서평(書評), 즉 북리뷰는 사적인 글쓰기와 공적인 글쓰기를 오가는 대표적인 쓰기 종류다. 『사적인 글쓰기』의 저자는 그것을 경험한 사람이다. “평범했던 국어 선생님이 (자기만의 마감을 설정하고 사적인 글쓰기를) 15년째 (지속했으며) 매년 100권이 넘는 책을 읽고 글을 쓰는 파워블로거가 되고 작가의 길을 택하기까지” 사적인 글쓰기가 함께했고 앞으로도 함께할 것이라고 한다. 저자는 글쓰기가 생각을 바꾸어 인생을 바꿀 수 있다고 목하 강조하지만, 시간과 생활에 쫓기는 직장인일 대부분의 독자에게는 드라마틱한 저자의 이야기가 더 매력적일 수도 있다. 
 

“아주 먼 옛날, 책과 글은 소수가 독점했습니다. 책을 읽는 것도 특권이었고 글을 쓰는 사람도 적었습니다. 인쇄술이 발달하면서 지식이 대중화되고 누구나 읽을 수 있는 시대가 되었지만 글을 쓰는 사람은 여전히 소수에 불과했죠. 그러나 시간이 흘러 이제는 모든 사람이 읽고 쓰는 시대입니다. 그야말로 ‘쓰는 인간’이 대세가 된 거죠. 이제, 누구도 아닌 ‘나’를 위한 이기적인 글을 써 보면 어떨까요.” (류대성,『사적인 글쓰기』, 휴머니스트, 2018,  P.8) 


『사적인 글쓰기』를 읽는 동안 ‘나의 사적인 글쓰기’란 무엇인가를 생각했다. 나는 왜 글을 쓰는지를 고민했다. 나는 내 마음과 맞는 파장을 찾고 싶어 글을 쓴다. 내가 사랑하는 것을 드러내고 나의 취향을 자랑하고 싶다. 누구에게 이해받기를 원하기보다 나와 맞닿는 사람을 찾고 싶어 글을 쓴다. 이기적이라는 것은 사적인 것에 맞닿는다고 믿는다. 지극히 이기적인 이것이 내 글쓰기의 이유다. 아 참, 나는 새 노트북을 사기 위해서도 글을 쓴다. 노트북이 빨리 쇠할 만큼 열심히 글을 써서 신상을 사려는 속셈.

내가 사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것이 무엇일까, 사물로 치자면 분명 책이 으뜸일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간 책을 아끼는 마음을 어떻게 표현했던가, 부끄럽도록 미미하다. 표현 없는 사랑은 죽은 것이라고 하는데, 나는 이 애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 것인가. 『사적인 글쓰기』를 덮은 후 나의 목표는 ‘세 권 읽으면 한 권이라도 리뷰 써 보기’다. 그간 읽는 데 비해 쓰는 데 너무 게을렀다. 삶은 이렇게도 조금씩 변한다. 사적인 글쓰기는 생활에 있으므로, 이것이 내게는 내 마감을 설정하고 써야 하는 사적인 글쓰기의 실제다. 
 
삶을 견딜 만하게 만드는 것은 언제나 ‘사적인’ 영역에서 찾아왔다. 어쩌면 글쓰기가 그런 한켠이 되어줄 수도 있지 않을까. 사적인 글쓰기는 일단 자기만족, ‘읽고 쓰는 삶’은 허영처럼 보이지만 한편 그럴듯하다. 읽고 쓰며 오직 나답게, 정말 그렇게 살 수 있다면 나는… 내가 좀더 좋아질지도 모른다. 


사적인 글쓰기가 곧‘에세이‘라고 오해하기 쉽다. 에세이는 문학의 한 갈래지만 허구와 가상의 세계가 아니라 현실에 바탕을 둔 실제 세계를 다룬다. 이것이 에세이가 시나 소설과 다른 점이다. 사적인 글쓰기는 현실에 두 발을 딛고 있다는 점에서 에세이와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그 범위는 사적인 글쓰기가 훨신 넓다. (P.84)

사적인 글쓰기는 내용 면에서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먼저 일상생활, 주변 사람, 여행 등 지극히 사적인 영역의 이야기를 쓰는 것이다. 두 번째는 사회적 사건, 정치뉴스, 경제상황, 문화 트렌드 등 공적인 영역의 이야기를 쓰는 것이다. 어느 쪽이든 사적인 글쓰기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대상에 대해 주관적 생각과 감정을 쓰면 사적인 글이 된다. 이것이 발표 매체에 따라 공공성과 책무를 띠고 일반 대중에게 영향을 미치면 공적인 글이 된다. (P.85)

새로운 단어를 익히는 일은 의식 세계를 넓히는 과정이다. 새로운 어휘를 만나는 일은 새로운 세계를 접하는 경이로움이다. 낯선 말, 모르는 단어, 익숙지 않은 개념을 기록해 보자. 나만의 단어장을 만들어도 좋고, 그러한 표현을 보았을 때 바로 밑줄치고 메모하는 방식도 좋다. 현란한 말솜씨로 상대방을 매혹시키는 사람도 있지만, 어눌한 말투로도 감동을 주는 이도 있다. 말하는 사람의 깊이와 넓이는 재치 있는 감언이설보다 상대가 이해할 수 있는 말로 설득하는 과정에서 보다 잘 드러난다. 그러기 위해서는 적절한 단어, 비유적 표현, 이해하기 쉬운 예를 활용해야 한다. 더 많이 읽고 기록하고 생각하고 정리하는 사람의 언어 세계가 풍부해질 수밖에 없는 법이다. (P.123)

언어 감수성을 예민하게 벼리고 싶다면 시집을 읽는 것만큼 좋은 방법도 없다. 가장 세련되고 정선된 언어의 정수를 시의 세계에서 맛볼 수 있다. 시대를 막론하고 시인은 어떤 사람보다도 모국어의 의미를 정확히 파악하고 그 아름다움을 표현할 줄 알았다. 틈틈이 시집을 읽으면서, 이미 알고 있는 단어의 개념을 확장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드러내는 연습을 한다면, 당신의 글쓰기는 새로운 영역으로 진입할 수 있다. (P.127)

사실 첫 문장은 두 번째 문장을 읽게 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두 번째 문장이 세 번째 문장으로 자연스레 이끌어 준다면 좋은 글이다. 문장과 문장 사이가 물 흐르듯 이어지는 글이, 첫 문장만 인상적이거나 마지막 문장만 그럴듯한 글보다 더 낫지 않을까? (P.140)

삶이 곧 글이다. 언행일치(言行一致)는 성인(聖人)의 경지에 도달해야 가능하지만, 삶의 경험을 편안하게 풀어내는 글쓰기는 지금 우리도 충분히 할 수 있다. 도입부와 마무리가 지극히 개인적인 영역에 머물지 않고 본문의 내용과 밀접하게 이어진다면 더할 나위 없다. 연결 고리를 만들고 유기적으로 엮기만 하면 된다. 억지로 꾸미고 과장하지 않아도 당신 이야기는 당신이 가장 잘 할 수 있을 테니까. (P.145)

요약은 전체를 통찰하는 안목을 길러 준다. 전체를 조망하면서 부분을 바라보면 의미가 보다 풍부하게 느껴진다.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사고 활동이 그 바탕을 이루기 때문이다. 완전히 이해하고 분석하지 못하면 요약은 불가능하다. 핵심과 주변을 구별하고 전체 구조를 알아야 가능하다. 텍스트의 의미와 글쓴이의 목적을 정확히 파악해야 요약할 수 있다. 따라서 요약은 독자가 글쓴이의 머릿속을 들여다보려는 노력이며, 글이 완성되기까지의 과정과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보는 연습이다. (P.174)

글쓰기는 알몸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나르키소스의 시선을 갖는 일이다. 영혼의 바닥을 드러내는 일이기 때문에 아무것도 숨길 수 없는 가장 내밀한 고백이다. 경험한 것, 아는 것, 생각한 것, 느낀 것 이상을 쓸 수 없다는 자명한 논리 앞에 모든 허세와 거품과 가면은 무력해진다. 그래서 사람들은 글을 쓰지 않는지도 모른다. 어렵기 때문이 아니라 두렵기 때문이다. (P.201)

한 편의 글을 완성하면서 신경 써야 하는 점은, 구조와 내용이 아니라 당신의 생각과 감정의 변화다. 헝클어진 생각과 혼란스런 감정으로 글을 완성하기는 어렵다. 정리되지 않은 생각을 두려움 없이 쏟아 내고,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과정도 필요하다. 완결성 있는 글을 쓰고 싶다면 끊임없이 고치고 다듬고 정리해야 한다. 하나의 단락에 하나의 중심 생각만 쓰는 연습을 하자. 단락의 분량과 길이가 다른 단락과 조화와 균형을 이루었는지 점검하자. 처음부터 끝까지 각 부분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었는지 살피자. 통일성 있게 주제를 향해 나아가는 당신의 글은 잘 정리된 생각과 감정의 고백이다. (P.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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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모자가 하고싶은 말 - 꽃 같은 말만 하라는 세상에 던지는 뱀 같은 말
조이스 박 지음 / 스마트북스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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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교에서 정년퇴임하신 교수님 한 분이 나에게 경악하신 적이 있다. “백마 탄 기사나 기다리는 줄 알았더니 보기와 다르네.”라고. 그분이 기대하는 나는 고분고분한 ‘여자애’ 였으므로 그 애가 ‘자아’를 드러내는 순간 놀라시는 건 당연했다. 그러나 그때의 내 나이가 서른이 한참 넘었다는 게 함정. 늘 겪는 일이라 아무렇지도 않다. 자아가 있는 여자는 세상 살기 불편하다. 조이스 박의 말을 빌리자면 “내게 백 개 혹은 천 개의 얼굴이 있는데, 그중 몇 가지만 보이라고 강요받는 것 같아 싫었다. 나의 전부가 아니라 일부만 수용하겠다는 세상이 너무 답답했다.” 그래도 살아남으려면 방법이 없었다. 이십 대의 나는 자아를 감추거나 죽이는 것이 가장 큰 과제였다. 그래야 덜 미움받고 지낼 수 있었으므로. 그래야 괴롭힘당하지 않을 수 있었으므로. 그 과제는 내게 현실이었다. 살기 위한 하나의 가면이었다.
‘현실’을 이야기하는 글을 좋아한다. 삶이 녹록지 않다는 걸 뼛속 깊이 겪었다. 꿈을 이야기하거나 희망을 이야기하는 상황은 아프다. 죽도록 노력하고 가까스로 정착한 나는 행복한 미래를 믿지 않는다. 이 험한 한국에서 여자의 삶은 더욱 그렇다. 성별 간 임금 격차뿐 아니라, 직장 내 지위 보유 역시 여자는 형편없다. 몸으로 마음으로 잘 살아남은 롤모델의 여자는 몇 보이지 않는다. 몰락(沒落) 하지 않으면 다행, 현재를 유지하기만 해도 선방(善防)이다. 여자의 현실은 이렇게 각박하다.
그런 내게 동화(童話)라니, 얼핏 전혀 어울리지 않다. 그런데도 동화를 매개로 한 에세이를 집어 든 것은 저자에 대한 신뢰였다. 모든 재료는 장인의 손에서 운명을 달리한다. 명장(名匠)은 명품(名品)을 만든다. 저자는 꿈틀거리는 표현력을 가졌다. 새빨간 장미처럼 강렬하고 달빛 아래 서늘한 칼날 같은 글들이 예쁘다. 피처럼 붉고 가시처럼 뾰족해서 불편하다. 추천사를 쓴 황정산의 말이 정확하다. “조이스 박의 글은 불온하고 불온한 만큼 아름답기도 하다. 남성들은 반성하고 여성들은 각성한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인간에 대한 진정한 이해를 얻게 된다.” 아파본 사람은 아픈 사람에게 꼭 맞는 글을 뱉어낸다. 그리고 저자는 여성으로서 자기 고통을 여성의 동화를 빗대어 풀어낸다. 이건 치유라기보다는 그녀 본성에서 나오는 애정이다.
조이스 박이 이야기하는 모든 동화는 ‘본질을 찾아 헤매는 여정’이다. 그리고 그 핵심엔 사랑과 슬픔이 있다. 그래서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먹먹하다. 생에 뒤통수를 맞고 가시덤불로 이끌리며 상처투성이로 살았던 모든 이에게 뿌연 안개를 내뿜는다. 나는 다시 고백한다. 삶은 너무도 슬프고 투명하고 날카로운 것이며, 그래서 아름답다는걸. 한편 세상이 가시투성이이므로, 사람은 상처받지 않으면 온전하지 않다는 걸 읽는다. 생명에 있어 완전(完全) 함은 상처투성이를 전제로 한다는 것을 확신한다. “그러나 살아 있다면 아직은 괜찮은 거다. 정말로 괜찮아서 괜찮은 게 아니라, 괜찮지 않아도 괜찮을 수 있는, 그렇게 살아가는 시기가 있다. 그 시기를 거치며 스스로 변한다.”(P.106)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너무나 여러 번,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사랑이다. 인정하기 싫지만 사람에게 있어 사랑보다 더 중요한 것이 어디 있겠나. 게다가 사랑에 목숨을 걸도록 배우고 길러진 여자아이에게. 모든 여자들은 “동화 속의 왕자님은 현실에 없는 거야”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고 자란다. 가족이 아니라도 사회로부터 백만 번을 듣는다. 첫 번째로는 ‘눈을 낮추라’는 말이고, 두 번째는 ‘너는 동화 수준이다’라는 의미이며, 세 번째는 ‘너는 현실을 모른다’는 말이다. 모두 여자의 자아와 지적 능력을 폄하하는 의미다. 여자의 생의 목표는 왕자라는 편견이다. 생의 여정에 있어 ‘사랑’을 중심에 둔다면 일견 맞는 소리다. 모든 것을 가진 왕자가 아니라 모든 것을 잃은 한 남자를 그녀가 왕자로 만들어줄 수 있을 테니.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여자는 사랑 때문에 자신을 잃는다. 시간과 영혼을 내어주어야 할 때도, 손발을 잘라주어야 할 때도 있다. 그건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성숙(成熟)을 전제로 하는 사랑의 속성 때문이다. 그래서 여자와 남자는 사랑으로 죽었다 사랑으로 다시 태어난다. “미모가 존재가치의 최고라 설파하는 여성관이 내어주는 독사과를 먹고 기어코 죽는다. 죽었다가 그 독사과를 내뱉을 때 비로소 진정한 파트너를 만난다. 죽은 존재여도 상관없다며 부둥켜 안아주는 대상을 비로소 만난다.”(P.178) / “남자야, 나를 사랑하거라. 난 죽었다 살아났느니 네가 함부로 규정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이 자체로 난 소중하고 아름다우니, 남자야 이제 날 사랑하거라.”(P.178)
수많은 페미니스트들이 남자를 사랑하지 말라고 주장한다. 남자를 사랑하는 여자는 가부장제에 복무하는 여자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게 어디 쉬운가, 꼭 이성애가 아니어도 사랑은 본질 중의 본질인데. 저자의 이야기가 울림이 있는 것은 현실에 기댄 사랑의 실패와 사랑의 성장을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사랑이 삶에서 중요한 이유는 한 사람의 됨됨이를 휘저어 다시 담금질하는 강렬한 시험이기 때문이다.”(P.133) / “사랑은 목적이 아닌 수단일 뿐이지만, 죽어서 우리 뒤에 남는 건 그래도 사랑뿐이다.”(P.109) / “사랑은 그래 봤자 고작 2%의 힘이다. 그 2%에 기대어 능히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그 2%에 자신을 의탁하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이제는 이룬 것이 너무 많고, 자칫하면 잃을 것이 너무 많아 그 2%에 자신을 내주기가 너무 힘들 것이다. 그러나 심장조차 녹이 슬면 그땐 정말 돌이킬 수 없다.” 심장이 녹슬기 전에 한 번 더 사랑해야 한다. 생이 허락한다면.

나는 조이스 박을 잘 모르지만 그녀가 택한 글이라는 방식이 마음에 든다. 그녀는 아마 겉치레를 잘 하는 사람은 아닐 것이다. 포근하고 따뜻한 휘장을 두르는 일을 잘 못하고 사회성이 뛰어나지 못해 손해 보는 사람에 가까우리라 생각한다. 마치 내가 그런 것처럼. 사람을 사랑하지만 사람을 피하면서 자기 애정을 내비친다. 그게 그녀의 방식이고 이번 택한 것이 그녀의 동화다. 그 글줄들이 그렇게 시원한 것은 같은 것을 가치 있게 여기는 마음이 닮았기 때문이리라, 사랑과 슬픔을 받들어 모시는 마음이. 저자의 샤프한 말이 뭉툭한 내 마음을 대신하여 설명한다, “능히 사랑하지 못해 수이 빛나지 못하나, 차마 사랑하려고 애쓰는 와중에 마침내 빛날 수 있는 그런 마음을 나는 믿는다.” 뭐라 더 표현할 수 없다. 먹먹하다.

덧) 표지부터 내지까지 알곡처럼 빼곡히 들어선 삽화가 놀랍다.
Daniel Egnéus(다니엘 이그네우스)의 표지를 비롯해 Nadezhda Illarionova(나제즈다 일라노료바), Kay Nielsen(케이 니얼슨), John Bauer(존 바우어), Arthur Rackham(아서 래컴)의 아름다움은 화가 날 정도.


"이따금 삶에 내몰려 정신없이 질주할 때, 아니 질주하지 않으면 이 삶을 버틸 힘이 없어서 죽지 않고 살기 위해 욕망에 나를 내주고 그 힘에 실려 달리다가 멈출 때, 문득 목도한다. 어두운 숲속을 생채기 투성이로 달리던 늑대 인간 하나가 차마 자신을 못 이겨 하늘의 달빛을 보며 울부짖으며 절규하는 모습을. / 소망은 아득하고 욕망은 강렬하다. 소망은 실낱같고 삶은 지랄 맞다. 인간만이 하늘을 올려다보는 머리를 가진지라, 달을 보며 표효한다."(P.193)

"햇빛처럼 빛나고, 달빛처럼 빛나며, 별빛처럼 스스로 빛을 낸다는 것은 내면의 자기 인정과 존중의 힘이 묵직한 닻처럼 드리워졌을 때 빚어내는 아름다움이다."(P.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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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화독서 - 그림으로 고전 읽기, 문학으로 인생 읽기
문소영 지음 / 은행나무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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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에버렛 밀레이의 <오필리아>를 처음 보았을 때의 충격을 잊을 수 없다햄릿을 몇 번쯤 읽었지만 오필리아의 죽음은 그저 문서상의 일이었다이미지의 힘은 크다밀레이의 걸작은 내가 상상했던 단아한 여자의 미친 아름다움을 뛰어넘은 강력한 충격이었다셰익스피어의 희곡에서 오필리아는 붙들고 있던 버드나무 줄기에서 미끄러져 죽는다버드나무는 버림받은 사랑을 의미하며여자의 목에 걸린 제비꽃은 신의와 순결요절을 상징한다오필리어의 오빠 레어티스는 동생을 오월의 장미라고 불렀다그림의 한켠에는 흰 장미가 만발했다여자의 손에서 떠나가는 양귀비는 죽음과 잠을 의미한다오랑캐꽃은 헛된 희망을 의미한다
 
화가는 그가 아는 모든 상징을 활용하여 그림을 완성한다그림을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그 안에 담긴 의미를 연결해 오필리어의 죽음을 뜻으로 채우기 바란 것이다밀레이가 속해 활동하던 라파엘 전파는 문학을 그림으로 옮기기 좋아했다자연히 화가의 상상별로 다양한 오필리아가 존재했다. ‘오필리아를 경험할수록 나의 햄릿력()은 넓고 강해졌다다양한 오필리어가 여러 얼굴과 여러 표정을 하고 다양한 목소리로 연약한 생을 내던진다
 
그림이 아니라면 몰랐을 문학은 더욱 많다그림을 보다가 반복해 나오는 이름들. ‘아리엘을 통해 <템페스토>를 알게 되었고, ‘퍼크를 통해 <한여름밤의 꿈>을 읽었다반복되는 주제 <무자비한 미녀>를 통해 요정의 시와 기사에 대한 인식을 알았다. 때로는 주먹구구로, 때로는 수박 겉핥기처럼, 때로는 기초부터 착실하게 그림과 문학을 배웠다
 
미술사는 인문학의 꽃이다역사 뿐 아니라 사회와 경제 등 당시를 지배한 문화 맥락을 알아야 그림을 깊이 즐길 수 있다당연히 고전문학 역시 그림과 얽혀 돌아갈 수밖에 없다그림만 보았던 나보다 문학도 읽은 후의 내가 작품에 더 깊이 빠져들고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당연하다
 
명화독서에는 내가 사랑해 온 그림들이 그득히 들었다내가 몰랐던 그림도 여럿 있었다목차를 훑어보자빼곡이 문학의 이름이 들이차 있다구석구석 잘 데려온 인용도 볼만하다그림은 문학과 결합하여 넓고 깊은 공간을 만든다. 3D가 되고 4D가 된다연극 스틸컷도 나오고영화 포스터도 나오고 동화 일러스트레이션도 나온다일본의 우키요에도 중국의 책가도도당연히 우리 나라 전통회화와 근대유화도 등장한다머릿속 시각문화는 폭을 넓혀간다균형잡힌 이미지의 향연은 일종의 사치다
 
문장은 명쾌하고 설명은 연결고리로서 적절하다그러나 나름 정보의 밀도가 높아서 초보독자에게 추천하기엔 부적절하다이미지와 문학에 대한 사전지식이 없다면 힘겨울 수 있는 책이다이럴 때는 머리가 좀 빡빡하지만 잠시 쉬었다 보면 된다독서라는 게 즐거우라고 하는 건데 굳이 힘겨울 필요가 있나마음을 편하게 가져 보자한 번에 다 읽으려 안 해도 된다같은 주제로 엮인 여러 화가의 다양한 그림만 모아 보아도 좋다그 다음에 마음에 드는 그림의 주제부터 한 꼭지씩 읽어보는 방법도 있으니
 
개인적으로는 셰익스피어의 작품이 세 꼭지나 등장하는 것이 참 좋았다역시 영국을 제패한 다작(多作), 다상량(多商量)의 작가다박완서와 박수근의 이야기를 사랑한다특별히 새로울 것 없는 꼭지였지만 박수근의 다감한 인품을 강조한 것만으로 충분히 만족스러웠다오 헨리를 높게 평가한 것도 기뻤다가난에 시달리다 범죄를 저지르고 도망갔으나 아내의 임종을 지키기 위해 돌아온그리고 3년간의 감옥살이를 해낸 남자딸의 생활비를 위해 감옥에서 단편소설을 써서 발표한 사랑이 가득한 오 헨리를 나는 아주 편애한다읽다가 여러 번 눈물을 흘렸던 <마지막 잎새>를 트롱프외유와 연결할 줄은 몰랐다. 진실로 탁월하다.
 
성실한 저자는 성실한 책을 쓴다그가 읽고 쓰는 삶이 책이 된다밀도 높은 책은 저자의 밀도 높은 인생이다그런 면에서 명화독서의 저자와 그분의 인생이 부럽다누구라도 그러하듯이 성실을 이길 힘은 많이 없다더 성실치 못한 내 인생이 아쉬울 뿐아무래도 조만간 명화독서를 한 번 더 읽어야겠다나도 저 밀도있는 센 글을 좀 닮아갈 수 있을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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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애의 마음
김금희 지음 / 창비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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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경애하는 동혁 씨!’
영신이가 한곡리를 떠난 지 사흘 만에 온 편지의 서두에는 전에 단골로 쓰던 ‘존경’ 두 자의 높을 존(尊) 자가 떨어지고 그 대신으로 사랑 애(愛) 자가 또렷이 달렸다.

경애(敬愛)는 내게 무엇보다 로맨틱한 두 단어 한자다. 심훈의 『상록수』 한 구절을 읽은 이후로 오랫동안 나는 ‘경애’를 그러한 상황에 그러한 수식어로 사용해 왔다. 『경애의 마음』의 ‘경애’는 그래서 가장 사랑 많은 인물로 읽힌다. 내가 생각하는 그런 마음을 가진, 그런 사람으로 읽힌다.

이 소설은 경애를 포함한 몇 명의 사람, 조금 허접하고 조금 부실하고 아주 상처 많은 사람들의 연결고리를 다룬다. 단편으로 구성된 전작 『너무 한낮의 연애』를 읽는 데 좀 많은 집중력이 필요했기에 『경애의 마음』을 고르는 손길에 그리 큰 기대는 없었다. 장편소설이라는 것도 모르고 골랐던 터, 이번에도 단편 모음집일 것이라는 안이한 생각뿐이었다. 그러나 너무나 예상외, 술술 읽히는 소설의 흐름에 놀라고 말았다.

남과 여와 사랑 이야기가 연달아 나오는 연애소설이지만, 김금희는 연애소설 같은 친밀함보다는 한 걸음 멀어선 거리를 지킨다. 이 소설이 그렇게 뜨겁고 절실하지 않아서 더 좋았다. 지금 이 시대에는 절실한 사랑이 사람을 죽이기도 하므로, 목숨을 부지하는 힘겨운 하루하루에 뜨거운 사랑이 버거워서 두려웁기도 하므로.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허접한’ 삶을 살아간다. 국회의원 집안에서 버린 자식처럼 빠져나와 좁은 빌라에서 홀로 사는 상수는 아버지 낙하산으로 들어간 회사 반도미싱에서도 전혀 환영받지 못하고 겉돈다. 반도미싱사 파업에 참여했다 ‘해일이 이는데 조개를 줍다가’ 큰일을 망쳐 우스운 꼴을 당한 경애는 지금 최악의 남자와 비참한 관계를 이어간다. 두 사람 사이에는 끔찍한 사건 하나가 과거에의 말뚝을 박고 있다. 미싱 기술자 나이 많은 조 선생은 겉보기만 멀쩡하지 알코올 중독으로 이도 저도 못하는 상황이다. 그들은 서로 얽히고설켰다가 한 걸음 떨어지고 함께 떠나고 홀로 돌아오기도 하면서 서로의 사연을 나누고 서로의 비밀을 알아가다가 돌아서기도 한다. 그들에게는 아직 죽지 않은 ‘마음’이 있었으므로 얼마든 그리되는 것은 자연스럽다.

『경애의 마음』에서 내가 읽은 것은 단 하나였다. 마음, 넓고도 깊고도 얇고도 뾰족하고도 반짝거리고 건조하고 팍팍하고 윤이 나다가도 피가 뚝뚝 흐르는 누군가의 마음. 이 나의 마음을, 그의 마음을 곡진(曲盡)하게 여기는 또 다른 마음을 읽었다. 사실 경애(敬愛)라는 게 그런 게 아니던가, 사랑하고 존경한다는 것. 가끔은 이 결곡함을 가진 인간이 허름하고 나약한 모습으로 세상에 굴러다니고 있음을 확인하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마음을 폐기하지 마세요. 마음은 그렇게 어느 부분을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더라고요. 우리는 조금 부스러지기는 했지만 파괴되지 않았습니다.”라는 작중 ‘언니’의 말이 이 책의 핵심 문장이 아닐까.

이 사랑과 존경의 ‘마음’을 이야기하려고 김금희는 3년간 356페이지를 썼다. 손바닥만 한 책의 두툼한 두께, 작지만 한편 너무나 크다. 사람의 마음은 그리 정성을 들여야 할 정도로 알 수 없고 알 수 있다. “어떤 말은 그렇게 기억에 빼앗기는 것 같았어, 쓸 수 없었어, 그런데 그런 말이 아니라 그렇게 일상적으로 써야 하는 말이 아니라 다른 말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했어. 이를테면 경배 같은 단어, 그런 단어는 자주 쓰지 않으니까 불편할 것이 없잖아. 숙고 같은 말도 있겠지, 그런 말 따위는 쓰지 않아도 상관없잖아. 그런데 따뜻하다는 말은 어쩔 수가 없었어.” 이 책의 마음은 경애가 사용한 그 표현 그대로 ‘따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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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책을 읽다 - 미술책 만드는 사람이 읽고 권하는 책 56
정민영 지음 / 아트북스 / 2018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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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화가 면허’는 ‘장롱면허’다. 미대를 졸업했지만 더 이상 그림을 그리지 않는다. 한때 그림 속에서 인생을 설계했다. 밤낮으로 캔버스와 씨름하다가 현대미술 이론과 동서양의 철학을 접하면서 개념미술과 설치미술로 나아갔고, 돌연 붓을 놓았다. 눈을 뜨고 보니 그림은 더 이상 ‘목매달아 죽어도 좋은 나무’가 아니었다.”(P.28, 「늦깎이 ‘옥상화가’의 탄생」

두 번째 챕터를 여는 글을 읽다가 목이 메었다. 저자와 나와의 기막힌 공통점을 발견했다, 손이 떨렸다.

가끔 생각한다. 그림도 못 그리는데 내게 책이라도 없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고. 작년 초 회의를 기다리며 책장을 넘기던 내게 설화가 물었다. “제인, 제인은 그림이 더 좋아 책이 더 좋아?” 나는 머뭇거리지도 않고 대답했다. “책이요.” 의외의 반응에 설화는 되물었다. “아니 미술로 먹고살면서 그래도 돼?” 나는 복잡한 표정으로 응답했다. “책은 나에게 한 번도 상처 준 적이 없거든요.”

나 역시 저자처럼 열심히 그렸다. 인용문에서 ‘개념미술’만 빼면 꽤나 비슷하리라. 새벽 7시면 학교에 도착해 그림을 그렸고 주 3-4일 학원 아르바이트에 쫓기면서도 한 번도 합평을 미룬 적이 없으며 제출 기한이나 400호 분량을 어긴 적도 없다. 밤을 새가며 설치 작업도 했다. 나무를 톱질하고 칼질을 하다가 무릎을 찢어먹어 상처를 남기기도 했다. 졸업한 후에도 꾸준히 그리다가 공모전과 출판·잡지사에 내내 퇴짜를 맞으면서도 크게 다른 진로를 고려하지 않았다. 그림 그리는 데 도움이 된다며 도서관에서 희한한 책은 얼마나 많이 빌려봤는지, 현대 독일 철학이니 발터 베냐민, 아도르노 미학을 이해도 못하면서 열정 하나로 읽고 또 읽었다. 내 젊은 날에는 이미지의 길 말고 한 번도 곁길을 생각하지 않았다.

이제 미술은 열정이 아니고 생활이다, 먹고사는 일이다. 미술실 구석에 세워둔 내 그림들을 아이들이 사랑한다. 왜 요즘은 그림을 그리지 않냐고 묻는다, 나는 그저 웃는다. 미술이 생계가 되다 보니 더 이상 그림을 그리는 데 기쁨이 없다. 좋아하는 것이 직업이 되면 이렇게 된다. 약간 서글프지만 그래도 담담하다. 세상 이치가 나를 피해 갈 리는 없으므로 다 괜찮다.

『미술책을 읽다』는 나처럼 화가를 꿈꾸었던 책벌레 선배님의 피와 땀 같은 흔적이다. “한 권의 책을 만난다는 것은 하나의 세계를 만나는 것이다. 나는 그 세계를 지그시 품었다. (정민영, 『미술책을 읽다』, 아트북스, 2018)” 그 역시 미술을 직업으로 먹고산다. 게다가 17년간 ‘아트북스’란 간판으로 미술 출판을 섬겨온 분이라니 그야말로 ‘미술+책’의 운명이다.

한 챕터에 책 하나씩(물론 곁가지로 짧게 설명하는 책까지 더하자면 수없다.) 56개의 책을 소개하면서 저자는 애타도록 ‘미술의 대중화’를 외친다. ‘미술책은 어렵다’는 생각이 정말 편견일까? 전문가가 아닌 일반인의 입장에서 미술책은 좀 부담스럽다. 그림 보는 게 좋은 거지 미학과 철학과 역사와 미술사가 빽빽한 설명은 독자를 작아지게 한다. 그래서 나는 아트북스 책을 좋아한다. 읽는 이에게 어려운 내용을 가르치려 들기보다는 존중하려는 느낌이 있다. 기획뿐 아니라 내지 디자인을 높이 평가한다. 레이아웃이 편안하고 폰트 선정이 좋다. 튀지 않는 디자인에 가독성을 중시한 글자 흐름이 빛난다. 내 생각이 맞는다면 최근 나오는 책은 빛을 반사하는 코팅지가 아니라 무광지다. 읽는 이를 배려하는 섬세함이다. 몇 년 전부터 아트북스 책에는 ‘일상을 예술로, 예술을 일상으로’라는 소형 팸플릿이 들었다. ‘미술의 대중화’, ‘미술의 생활화’라는 저자의 신념이 한결같다.

책은 무게감이 있다. 미술 책임에도 불구하고 그림은 적고 글자가 빽빽하다. 솔직히 미술 초보자에게는 약간 어려울 수도 있다. 그림을 기대하고 (표지를 열어보지 않고) 책을 샀다면 놀랄 정도로 그림은 적고 인용문이 가득하다. 미술 책을 꾸준히 읽어온 이가 아니라면 잠깐 덮어두어도 좋다. 그러나 미술책을 제대로, 잘 읽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면 시간을 들여 읽어야 한다. 밀도도 좋지만 무엇보다도 균형감이 좋은 책이다. 차곡차곡 쌓아올린 흰 돌벽 같은 책이랄까. 56권의 책마다 알곡 같은 발췌와 인용은 여기 소개된 모든 책을 읽어보고픈 열망을 갖게 한다. “한 권의 책을 만난다는 것은 하나의 세계를 만나는 것”이므로 그의 미술 책장 한 권은 크고 깊고 넓다.

책을 덮자마자 저자가 소개한 책을 읽고 싶어졌다. 온 동네를 뒤져 『김환기·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이충렬, 유리창)를 구해 읽었다. 절판된 책이라 소장한 도서관이 드물었다. 몇 번을 읽고서도 반납하기 아쉬워 전문을 카피해 보관했다. 그만큼 잘 쓴 귀한 책이다. 뿐만 아니라 내가 동양화를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걸 깨달았다. 당장은 무리지만『미술책을 읽다』에서 소개한 동양화 책을 차근차근 찾아 읽으려 한다, 앞으로 몇 년간의 목표다. 내 미술 책장도 균형을 잡아야 할 것이다. 읽지 않은 책들을 추려 무엇부터 먼저 읽을지 별표를 친다. 3월부터 두달간 이 책은 내 사무실 책상 왼편에서 독서를 재촉했다. 그러다보니『미술책을 읽다』는 벌써 삼독(三讀)이다.

오랫동안 화가가 되지 못한 패배감이 나를 짓눌렀다. 사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내게 제일의 열등감이 있다면 ‘재능 없음’이다. 수치스럽게 ‘뻥’ 차인 첫사랑이 끝내 잊히지 않고 인생을 지배하는 것처럼 그림 역시 그랬다. 화마(火魔)가 할퀴고 간 화상(火傷)이 여전히 날카롭다. 미련이 없다면 거짓말이다. 그래도『미술책을 읽다』의 저자 같을 수 있다면 어떠한가, 화가가 안 되었어도 세상천지 훌륭하지 않은가. 부디 나의 운명도 그러하기를…『미술책을 읽다』가 내게 준 최고의 선물은 그것이다. 나는 좀 더 가벼워졌다. 앞으로도 기분 좋게 읽고 또 읽을 것이다. 내게 한결같은 나의 책들을. 좋은 책은 좋은 운명을 선물한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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