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노동 이반 일리치 전집
이반 일리치 지음, 노승영 옮김 / 사월의책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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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년에 한 번 오는 2월 14일, 내게 그날은 사랑을 전하는 밸런타인데이가 아니라 쓰디쓴 공인인증서 갱신의 날이다. 내가 가장 ‘빡치는’ 그림자 노동이 그것, 발급받은 은행에서 갱신 한 번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거래하는 모든 은행마다 새롭게 인증서를 등록해야 한다. 매번 영문, 숫자, 특수기호를 조합해 더 까다롭게 바꾸라는 비밀번호 설정은 사람을 아주 미치게 한다. 한두 시간은 아무것도 아니다. 과장 좀 보태서 하루를 종일 인증서 바꾸는 데 사용해야 한다. 인격이 좀 수양된 줄 알았는데 이럴 때 보면 아직 멀었다. 분노로 가득 찬 미친 인간 하나가 눈이 시뻘건 채로 컴퓨터 모니터와 스마트폰을 노려보고 있다. 은행에서 신경 써야 할 보안 책임이 나란 인간에게 전이된다. 내가 추정하는 인증서 갱신 수당은 최하 5만 원이다. 
 
새로 문 여는 음식점 카페 모두 점원 대신 키오스크다. 내 손으로 화면을 터치하고 카드를 긁는 일은 익숙하다. 리터당 백몇십 원 싼 ‘셀프 주유소’는 키오스크의 원조다. 사실 나처럼 낯가리는 인간은 이쪽이 더 편하기도 하다. 그렇지만 그들이 절감한 인건비가 내 상품 구입비에 제대로 적용되는지는 잘 모르겠다. 솔직히 같은 품목의 옆집과 별 차이 없이 비싸다. 물론 옆 가게가 내게 가격보다 과한 서비스를 해주었다고 하면 할 말 없지만. 그것도 그들의 그림자 노동일 테니. 
 
이반 일리치를 처음 만난 건 ‘교육사회학’ 갈등론적 접근 이론에서의 ‘탈학교론’이었다. ‘가장 급진적인 사상가’라거나 ‘지식의 저격수’라는 수식어를 지닌 학자라며 칭찬을 쏟아내시던 선생님의 제스처가 생생히다. 그는 사제 서품을 받은 가톨릭 신학자로서 12개 언어를 할 수 있었고 여러 학위가 있어 교수로도 일할 수 있었음에도 미국의 슬럼가에서 신부로 근무했다고 한다. 자기가 누릴 수 있는 달콤함을 포기한 이는 매력적이다. 『그림자 노동』(사월의 책, 2015)을 반갑게 맞이한 것은 무엇보다 저자 때문이었다. 
 
저자는 머리말에서 ‘그림자 경제’라는 새로운 현상에 대해 언급한다. 2장의 초반부에서 ‘그림자 가격’을, 본격적으로 그림자 노동을 다루는 5장에서 ‘그림자 노동’을 자세하게 설명한다. 그가 살았던 시기는 2차대전 이후 그 모든 것이 재건되어야만 했던 급진적 (새로운 산업화) 시기이며 한편 인류의 밑바닥이 얼마나 더러운지 실감할 수밖에 없었던 시기다. ‘화폐 거래 영역에 속하지 않으면서 산업화 이전 사회에서 찾아볼 수 없던 경제 형태’는 당시의 그에게 충격이었던 것이 틀림없다. ‘산업화 사회’의 문제는 보이지 않아서 대응할 수 없고, 보이지 않아서 더 잔인하다. 
 
일리치는 노동의 첫 모양새를 ‘자급자족 노동‧토박이 노동’이라 부른다. 이후 ‘임금 노동’이 등장했으며, 세 번째로 ‘그림자 노동’이 나타났다고 말한다. 총 다섯 장으로 이루어진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책 제목과 동명인 마지막 챕터이리라. 삶이 거대화되고 산업화되고 의무화될수록 많은 것들이 획일화된다. 선택의 여지가 사라진다. 이전에는 없었던 토박이말-모어, 일하는 남자-집안일하는 여자의 이분법이 등장한다. 자연히 유급노동과 무급노동의 개념도 등장한다. 기업이 이익을 극대화하려면 무급노동의 범위가 넓어져야 한다. 자연히 고객의 무급노동이 중요해진다. 이 개념이 가정 내로 적용된다. 여자의 가사노동이 그것이다. “임금노동을 하려면 발탁되어야 하지만 그림자 노동은 배정받는다.”(P.178) 
 
전업주부 아내에게 “집에서 노는 데 뭐가 힘들어?”라고 짜증 내는 남편의 이야기는 낯설지 않다. “집에서 노는 나는 왜 이렇게 바쁘지?”라고 자책하는 전업주부 이야기 역시 그렇다. 경제적 능력이 없어 이혼하지 못한다는 전업주부들 사연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돈을 받지 못하는 일은 가치 없는 일인가? 유럽 어디에서는 애 셋을 낳은 여자에게 연금도 준다는데. ‘아이 때문에’ 일을 떠넘기는 동료 때문에 부글부글 끓는 직장인 이야기가 바로 내 얘기다. 근데 그녀들이 정말 이기적이기만 한 걸까? 왜 그들의 overwork은 인정받지 못하는가. 혹은 왜 그렇게 overwork 해야 하는 걸까. 
 
그림자 노동의 성격을 파악하려면 두 가지 점에서 혼동을 피해야 한다. 첫째, 그림자 노동은 자급자족 활동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림자 노동은 사회적 자급자족이 아니라 공식 경제에 기여한다. 둘째, 그림자 노동은 저임금 노동이 아니라는 점이다. 무급의 그림자 노동은 임금 노동의 전제 조건이다. (중략) 나는 그림자 노동을 노예제나 임금 노동만이 아니라 강제 노동과도 다른 특이한 형태의 예속이라는 관점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P.177)
 
그림자 노동은 일종의 ‘서비스’다. 더 친절하게. 더 다감하게, 더 기분 좋게. 감정 노동뿐 아니라 육체노동으로도 이 서비스는 증가한다. 여기에 ‘자발적인’이 붙는다는 게 기가 막히는 포인트다. 이렇게 자발적으로 노동하게 만드는 것은 ‘그림자 노동 신비화’의 전략이다. 
 
첫째, 여성과 남성의 생물학적 분류로, 여성이 하는 일을 노동이 하는 일로 규정하는 것. 둘째, 그림자 노동을 사회적 재생산과 뒤섞어버리는 것. 셋째, 화폐시장 바깥에서 이뤄지는 온갖 행동에까지 그림자 가격을 매기는 것. 넷째, 여성주의자들의 관점 실수로, 보수의 유무 면에만 집중하는 것. (무익한 노동을 강요받고 있음을 간과하는 것) 다섯째, 산업적 존재 양식의 절반을 여성 노동으로 만들어버린 것.   
 
일리치는 이 그림자 노동의 신비화가 “경제적 통제를 위해 발명된 성을 가지고 여성 본연의 인격을 영원히 더럽히려는 시도”이며, “그림자 노동이야말로 근대의 가사 노동으로 대표되는 사회 현상을 가장 잘 가리키는 용어”(P.201)라고 주장한다. 일리치는 남성으로서 여성의 가사를 최초로 경제적 가시화한 최초의 인물이 아닐까. 그건 가부장(家父長)이 아닌 신부(神父)의 몸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걸까. 
 
 『그림자 노동』은 1981년에 출간되었다. 2018년의 오늘날, 더 이상 가사(家事)가 ‘그림자 노동’을 대표하지 않는다. 남녀노소 어디에나 그림자 노동이 강요되는 시대다. 물론 아직도 가사노동의 가치는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지만. 그림자 노동은 나날이 거대한 괴물이 되어간다. 키오스크 조작법을 공들여 알려주는 점원이 언제 ‘키오스크 때문에’ 일자리를 잃을지 모른다. 일리치의 시대보다 더욱 잔인하다. 대가를 준다는 것은 가치를 인정한다는 것이다. 그림자 노동이 늘어난다는 것은 가치를 덜어낸다는 것이다. 기계에게 금액을 지불하고 인간에게 줄 금액은 절감한다. 정녕 사피엔스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전에 대안을 찾을 수 있을까? 못내 우울하다.  

발전이 입히는 피해를 모면하는 것이 새로운 ‘만족’을 얻는 것보다 더 절실하게 추구하는 특권이 되었다. 출퇴근 시간대를 피해 통근할 수 있는 사람은 알고 보면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사람이고, 가정 분만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알고 보면 엘리트 학교를 나온 사람이며, 아플 때 의사를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알고 보면 이미 희귀하고 특별한 정보를 가진 사람이다. 또 맑은 공기를 마실 수 있는 사람은 알고 보면 부자이거나 행운아이며, 허름한 집이나마 직접 지을 수 있는 사람 역시 진짜 가난한 이가 아니다. 오늘의 하층민은 후견인을 자처하는 이들이 제공하는 역생산성 꾸러미와 도움을 어쩔 수 없이 소비해야 하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반면, 특권층은 그런 것들을 마음대로 거부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P.22)

나는 인간을 호모 에코노미쿠스로 보는 사회에 대하여 호모 아르티펙스 수브시스텐스(자급자족적 삶의 기술을 갖춘 인간)의 전통을 복원한 사회를 맞세운다. (P.25)

산업 노동의 무미건조한 역사는 이런 식으로 경제학의 사각지대를 없애왔따. 호모 에코노미쿠스는 한 번도 중성적인 적이 없었다. 그것은 애초부터 비르 라보란스와 페미나 도메스티카 즉 ‘일하는 남자’와 ‘집안일하는 여자’ 커플로 창조되었고, 이로부터 호모 인두스트리알리스가 탄생했다. 완전 고용이라는 목표를 향해 발전해 온 사회치고 그림자 노동이 고용 노동과 나란히 성장하지 않는 곳이 없다. 그림자 노동은 여성이 더 우세할 수밖에 없는 활동을 깎아내리고 남성에게 유리한 활동을 높여주는, 전례 없이 효과적인 장치가 되었다. (P.45)

그러니 성장과 완전 고용이라는 목표를 여전히 포기하지 않는다면, 훈련받은 사람들을 금전적 보상 없이 일하게끔 만드는 경영방식이 ‘발전’의 최종 형태로 펼쳐질 것이다. 호모 인두스트리알리스는 이제 청바지 차림으로 경제의 성적 통합을 추구하고 있다. (P.46)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성직자 계급이 자기들의 서비스를 인간의 본성적 필요로 정의하고, 이 서비스 상품을 영생에 없어서는 안 될 필수적 요소로 둔갑시켰다는 점이다. (P.106)

내가 주제로 택한 것은 산업 경제의 가려진 측면, 더 구체적으로는 노동의 그림자 측면이다. 나는 지금 저임금 노동이나 실업이 아니라 ‘무급 노동’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산업경제의 고유한 특징인 무급 노동이야말로 내가 말하려는 주제다. 과거 대다수 사회에서는 남녀 할 것 없이 무급 활동을 통해 가족의 생계를 유지하고 개선해 왔다. 필요한 것이 생기면 그 대부분을 가족 스스로 만들곤 했다. 하지만 이러한 자급자족 활동은 지금 내가 다루려는 주제가 아니다. 내 관심은 이와는 전혀 다른 무급 노동에 있다. 산업사회가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하는 데 있어서 필수적인 보완물로 요구하는 무급 노동이 그것이다. 이러한 무급의 봉사는 자급자족에 기여하지 않는다. 임금 노동이 그렇듯이 오히려 자급자족을 파괴할 뿐이다. 나는 임금 노동의 이런 보완물을 ‘그림자 노동’이라 부른다. (P.176)

오늘날 여성이 불구의 처지가 된 것은 경제적인 면에서 보수를 받지 못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자급자족의 측면에서도 무익한 노동을 강요받고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 (P.196)

우리 사회는 ‘돌봄’이라는 미명 하에 피해자 스스로 억압의 조력자가 되게끔 강요한다. 도와주고 구제하고 해방시켜야 마땅할 사람들에게 고작 감성적 연민을 품을 때 이 사회는 평범한 행복을 느낀다. (P.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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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파친코 1~2 세트 - 전2권
이민진 지음, 이미정 옮김 / 문학사상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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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 정보 없이 이민진의 파친코를 읽기로 했을 때 제일 처음 든 생각은 제목이 이게 뭐람?”이었다파친코』 1권을 펼쳐들었을 때 등장한 부산 영도의 인물들을 보고 들었던 생각은 장애인 가족과 파친코랑 무슨 관련이지? ‘토지처럼 지어야 하는 거 아닌가? (제목을 잘못 지은 거 아냐?)”였다어찌 되었든 술술 넘어가는 책장하룻밤만에 800페이지를 육박하는 소설을 뚝딱하고 고개를 드니 새벽 다섯 시였다파친코』 최고의 장점은 잘 읽힌다는 것
 
소설의 흡입력은 쉬운 문장력에서 나온다감성 소설가나 에세이스트가 자랑하는 간질간질한 표현력이나 기억에 남을 만한 여구도 없이 문장은 단순하기 그지없다미국 공영방송 NPR과 뉴욕타임스,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 등 미국 대륙과 유럽 언론에서 큰 호평을 받았으며영국의 BBC는 ‘2017년에 꼭 읽어야 할 책 10’ 중 하나로 파친코를 소개했다고 한다는데책뚜껑을 열면 내용은 의외로 투박하다펄 벅의 대지처럼 몇 대에 걸친 가족의 인생을 그렸다는데 솔직히 2의 제인 오스틴이라는 작가에의 호평은 좀 부담스럽다
 
자이니치에 대한 간략한 지식이 있을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이 이야기는 큰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못할 것 같다그러나 자이니치의 삶을 전혀 모를 사람들에게는 너무도 쉽고 절절하게 그들의 삶을 전달해버리는 빠르고 강력한 이야기가 되었을지도
 
자연스레 일본으로 넘어가게 되는 주인공의 상황 설명을 위해 장치된 앞부분의 촘촘한 인물 설정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불편함을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인생을 망친 여자와 그를 구해 일본으로 데려가는 구원자 목사의 모습은 자연스럽지만 불편했다너무나 진부하게 열여섯 순자는 인생을 망친다그녀를 임신시킨 가정이 있는 남자는 돌아오지 않는다순자가 간호해 폐병에서 살린 남자가 그녀를 구원한다여자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남자로 인해 인생을 망치고남자로 인해 인생을 구원받는다아무리 그 시절이 그랬다고 해도 다시금 읽기에는 불편하다
 
순자를 구원한 남자는 실제로 그녀를 구원하고자 한다그는 기독교 목사다자연스레 이야기에는 기독교 세계관뿐 아니라 기독교 용어와 성경의 말씀성경의 인물 이름을 딴 주인공이 계속 등장한다기독교 문화가 너무나 익숙한 나에게는 설정과 용어가 편안했고작가가 설정한 세계관을 쉽게 이해할 수 있었으나기독교 문화를 잘 모르고 싫어하는 사람들은 읽기가 꽤 불편했을 것이다
 
순자의 두 남자인 한수와 이삭은 너무나 극과 극을 달리는 인물이다세상의 모든 것이 자기 손에 있다고 믿으며 재빠른 머리로 돈을 긁어모으고 힘과 재력으로 사랑을 표현하는 능력자 한수세상의 모든 것에 집착하지 않으며 모든 고통을 받아들이고 희생으로 사랑을 표현하는 무능력한 이삭둘 다 각자의 방식으로 순자를 사랑한다순자 역시 각자를 깊이 사랑한다현실에서 이삭을 좋아할 나는 솔직히 한수의 사랑도 크고 깊었다고 생각한다
한편 남편 있는 경희를 향한 사랑을 견디지 못해 의외의 방식으로 자신을 불태워버린 창호창호를 사랑하지만 그를 포기하려고 애를 쓰는 경희의 사랑 역시 또 다른 차원에서 완성되었다고 생각한다
 
완연히 다른 기질을 가지고 태어난 순자의 아들 노아와 모자수(모세) 처음부터 달리 살았고 다르게 살고자 했으나태생 자이니치라는 숙명은 파친코라는 공동의 무대로 둘을 데려간다. ‘그들처럼 살지 않고자한 노아는 실패한다아무리 그렇게 살지 않으려 했어도 노아는 자이니치였다일찍이 파친코 매장에서 돈을 벌기 시작한 쾌활한 모자수는 승승장구한다모자수는 자이니치의 현실을 순순히 받아들여 욕심을 냈다두 사람은 모두 파친코에 발을 담그고 일본인인 체자이니치인 채 살아간다
 
어떻게 야쿠자를 옹호할 수 있겠는가그들은 어느 곳에서나 조직적인 범죄자였고 나쁜 짓을 일삼았다하지만 순자는 많은 조선인들이 다른 일자리가 없어서 그들 밑에서 일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정부와 좋은 회사들은 조선인들을 고용하지 않았다교육받은 조선인도 마찬가지였다그런 사람들은 모두 일을 해야 했다동네에 사는 많은 사람들이 일을 하지 않은 사람들보다 훨씬 더 친절하고 더 존경스러운 사람들이었다. (P.124)
 
이야기 후반부 노아의 선택을 생각한다연약하나 꿈 많은 한 인간에게 자이니치라는 굴레가 얼마나 끔찍한 한계였을지를 실감한다일본인의 신분을 버리고 다시 자이니치로 돌아가느니 다른 선택을 할 정도로 이 신분은 굴레였다작가는 이야기의 말미에 가까워지면서 노골적으로 의중을 드러낸다. 3세대인 모자수의 독백을순자와 노아와의 대화를 통해, 4세대인 솔로몬과 피비의 대화를 통해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건 명백히 드러난다왜 자이니치는 이렇게 불합리하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이다
 
미국에서는 강꼬꾸징이니 조센징이라는 게 없었어왜 내가 남한 사람 아니면 북한 사람이 돼야 하는 거야이건 말도 안 돼난 시애틀에서 태어났어우리 부모님은 조선이 분단되지 않았을 때 미국으로 갔고.” 피비가 그날 하루 동안 편협한 대우를 받았던 일들 가운데 하나를 소리 높여 이야기했다. “왜 일본은 아직도 조선인 거주자들의 국적을 구분하려고 드는 거야자기 나라에서 4대째 살고 있는 조선인들을 말이야넌 여기서 태어났어외국인이 아니라고이건 완전 미친 짓이야네 아버지도 여기서 태어났는데 왜 너희 두 사람은 아직도 남한 여권을 가지고 다니는 거야정말 이상해.” (P.315) 
 
고등학교를 중퇴한 모자수도 영문학을 사랑하고 공부에 매진하여 와세다 대학으로 진학한 노아도 할 수 있는 것 똑같았다미국 유학을 하고도 결국 파친코를 이어받을 수밖에 없었단 모자수의 아들 솔로몬도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파친코뿐이었다잠시 쓰기를 멈추고 검색해보니 자산 1조 2000억의 일본 파친코 황제는 한국인이라고 한다그의 이름은 한창우, ‘경제대국’ 일본의 24위를 차지하는 거부다자이니치 기업 ()마루한은 일본 파친코 대부분을 장악했다그의 이야기를 읽어보니 그 역시 일본에서 자이니치로서 성공할 수 있는 일이 파친코뿐이었다고 한다솔로몬의 말이 오버랩된다아버지는 폭력배가 아니에요. 나쁜 짓을 하지 않아요평범한 사업가죠세금을 모두 내고모든 일을 규칙대로 처리해요그런 사업을 불법적으로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아버지는 한 치도 틀림없이 정확하게 일을 처리하고 도덕적인 분이에요파친코를 세 개 운영하고 있지만 그건… 아버지는 자기 것이 아닌 것은 아무것도 받지 않아요돈에도 크게 관심이 없어요많은 돈을 기부하고”(P.327) 
 
삶은 왜 이다지도 길고 질긴가, ‘외국인으로 분류되어 선거도 할 수 없고 공무원도 될 수 없는손발이 묶인 신분이 재일 한국인이다그들에게 삶은 꽃길이었던 적이 한 번도 없다그럼에도 살아야 한다먹고살아야 한다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밑바닥 허드렛일이거나 조직폭력배도박사업뿐이다. 그러니 방법이 없다굶거나 악착같이 돈을 벌거나이런파친코 업계 1위의 (주)마루한뿐만 아니라 업계 2위를 차지하는 ()다이남 역시 한국계 파친코다
 
동양풍을 그린 건지 뭔지 뭘 표현하고 싶은지 모를 희한한 표지와 잊을만하면 툭툭 튀어나오는 오타는 책의 품위를 마구 떨어트린다나는 외형과 마감에 무척 민감한 인간이어서 좀 힘들었다앞서 말했듯 도입부의 종교성 역시 누군가에게 쉽지 않다물론 이런 단점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800페이지를 극복한다면 피부로 와닿는 재일 한국인의 슬픔과 한숨을 읽어낼 수 있을 것인간의 현실보다 더 강하고 극적인 것은 없다. 바람이 불면 풀이 눕는다. 세찬 바람이 불면 풀이 더 낮게 눕는다. 어떻게든 살아남는다. 그들은 바람처럼 강인하고 잡초처럼 우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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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앞의 생
에밀 아자르 지음, 용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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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앞의 생에서 모모가 하밀 할아버지에게 물었습니다. “할아버지사람이 사랑 없이도 살 수 있나요?” “살 수 있지슬프지만.” 하밀 할아버지의 대답은 정답이 못 됩니다살 수 있다면 결코 슬프지 않습니다생각하면 우리가 생명을 저버리지 않고 살아가고 있는 한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습니다그리고 사랑한다는 것은 기쁨만이 아닙니다슬픔도 사랑의 일부입니다마치 우리의 삶이 그런 것처럼
_신영복담론돌베개, 2015, P.418


사람이 사랑 없이 살 수 있나요?”라는 말은 세상 사람들의 흔한 의문이다. 정말로 사랑 없이 살고 있는 사람들도 있고, 사랑 흉내를 내며 살고 있는 사람도 있다. 사랑을 부를 때 사랑은 실제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는 것 같기도 하다. 사랑타령만이 주는 환상도 있고, 위안도 있다. 

나의 친구 하나는 만날 사랑타령을 한다그게 그 친구의 인생 중심이고그의 원동력이다그이가 사랑타령을 할 때 그이는 가장 그답다그의 재능이 사랑타령을 하며 반짝반짝 빛난다그는 말을 가지고 노는 예비 작가다시 같기도 하고 소설 같기도 한 그의 사랑타령은 언제나 책의 한 문장 같아서 나를 놀라게 한다

자기 앞의 생의 주인공 모모 역시 사랑타령의 일인자일 것이다입에 사랑을 달고 살지는 않지만 그가 이야기하는 것은 모두 사랑이다이 동네에 사는 누구든 모모와 이야기를 나누기만 하면 사랑을 이야기하게 된다세상의 온갖 연약한 것들이 그의 입에서 사랑으로 변화한다장사치도둑창부뚜쟁이포주성소수자이민자인 그들이 모모의 입을 통해 유일하고 현명하고 독특한 사람으로 표현된다그들 역시 각자가 가진 사랑의 이야기를 한다그중에서 제일 많은 사랑으로 언급된 이가 모모와 함께 사는 로자 아줌마다
 
모모는 회교도로자 아줌마는 유대인이다결코 있을 수 없는 가정의 조합창부의 아이를 거두어 키우는 로자 아줌마는 독특한 재치를 지닌 모모를 너무나 사랑한다거칠고 두려운 원래 가정에 돌려보내지 않으려 이름과 나이를 속일 만큼아줌마는 이제 너무나 늙고 병들었다가족은 오래전에 잃은 아줌마는 어디에서도 도움받을 데가 없다고객도 떠나고 건강도 떠났으며 이제는 돈도 없다허름한 7층 아파트에 간신히 몸을 눕히지만 여기서도 곧 나가야 할 처지다정신도 온전하지 않다나날이 비참해진다언제든 두 사람이 헤어져도 이상하지 않다
 
로자 아줌마는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어떻게 보아도 아름답지 않다이전의 미모는 사라졌을 뿐 아니라 뚱뚱해졌고 움직일 수도 없다부담스러울 만큼의 외형과 답 없는 건강 상태, 그 누구도 그녀를 사랑할 수 없다조건으로는 그녀를 결코 사랑할 수 없다그러나 조건과 상관없는그것만이 ‘사랑’의 이름을 가진다조건의 이름을 단 사랑은 사랑과 닮은 사랑이다땅에 매인 사람은 조건에 매여 사랑할 수밖에 없지만 한편 가끔 조건을 벗어난 사랑이 있어 거기에 진실된이라는 왕관을 얻는다그리고 여기모모가 그런 이름표를 얻었다
 
사람은 사랑을 통해 성장한다. 사랑할 때만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떠올리고, 깊이 생각하고, 표현하고, 또 다른 방법으로 표현하고, 거절당했을 때에도 성장한다. 사랑을 배우고 사랑을 연구할 때 더 놀랍게 성장한다. 이 책을 읽고 무언가를 느끼고, 표현할 수 없는 이 잔상을 글로 표현하려고 낑낑거리는 이런 순간을 통해서도 사랑은 자라나고 나는 하루 더 사랑할 수 있는 사람으로 되어간다. 

모모는 아줌마의 마지막을 아름답게 하려고 최선을 다한다아줌마가 원하는 장소에서 가장 원하는 방식으로 마지막을 맺기를 바란다나의 변함없는 소망 하나도 비슷하다내가 목숨처럼 사랑하는 사람의 임종을 지키고 싶은 소망그 사람이 가장 편안한 장소에서 가장 원하는 방식으로 보내주고 싶다가장 예쁜 모습으로 그 사람의 마지막 시야에 남고 싶다모모는 나의 소망을 먼저 경험했다나 역시 꼭 그리하리라 다짐한다

그러나 그리하여도 그리하지 못해도 괜찮다. 책장의 마지막을 덮으며 내가 알게 된 것은 여기내가 원하는 마지막을 맺지 않아도 사람은 행복할 수 있다는 것충만하게 사랑했다면 된다사랑은 존재 그 자체로 완성이므로. 치장 없는 내 모습으로, 사랑처럼 안 보이는 사랑이라도, 그저 사랑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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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 살롱 - 10개의 테마로 만나는
유경희 지음 / 아트북스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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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나를 벨 사방(Belle Savante)이라고 불러주는 사람이 있었다세상에… 머리가 텅텅 빈 나를 그렇게 불러주다니고맙고 또 고마웠다나는 주제 파악이 특기인 인간이다내 얼굴과 두뇌 수준과 그 안에 든 정보량을 잘 알고 있으니나는 감히 얻을 수 없는 호칭을 주워얻다니! ‘벨 사방은 미모의 학식 있는 여성이면서 18세기에 예술과 철학이 자라나도록 하는 살롱을 열던 여자다일단 미모는 확실히 빼고다음에 학식도 좀 덜어내고 나면 양심에 덜 찔리지 않을까그러고 나니 좀 안심이 되었다그래서 내가 선택한 책은 아트살롱, ‘벨 사방 마담 퐁파두르가 표지를 장식한 유경희 작가의 책이었다
 
예술은 시대를 반영한다그중에서도 그림은 사진처럼 문화의 한순간을 포착한다아트살롱은 결혼아이요리정물패션살롱카페여행축제후원이라는 10개의 테마로 그림을 고르고그림과 함께 시대상과 문화위인화가의 이야기를 풀어나간다이 테마가 시대별로 변화하는 과정을 그림 한 장 한 장 안에 든 문화적 요소들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시대 이야기를 하는 게 이 마담유경희의 역할이다그러다 보면 과거와 현재는 다름과 닮음을 구별하며 새로운 오늘의 눈을 뜨게 된다
 
그림으로 읽는 교양(敎養) 사전, 그것이 이 아트 살롱이다책에서 언급된 살롱 이야기를 여기에 몇 줄 옮긴다당대의 여자들이 남자의 시선을 끌 수 있는 유일한 기회는 발코니에 나가 앉아 있는 것밖에 없었다살롱이 생기면서 상황은 급변했고여성들은 가정학교수도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사교문화와 토론문화를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살롱은 여성들이 타인과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공간이었기에 무척 소중했다.” “살롱의 여주인이 되는 것이야말로 여자들이 자신의 능력을 시험하고 입지를 실현할 수 있는 길이었다남자들도 성공하고 싶다면 유력한 살롱의 여주인들에게 낙점돼야 했다.” 살롱은 모든 교양의 백화점이다. 음악가와 미술가, 철학가와 사회학자들이 모여 서로 이야기하고 토론하고 싸우며 서로 배우고 즐거워하는 장소. 그러다가 일어서 거리로 나가 세상을 이롭게 하는 혁명까지 다다르는 일. 이 모든 것은 아름다움이고 총명이며 기쁨이고 힘이다. 즐겁고 가치로운 일, 이런 일들이 살롱에서 일어난다. 

잠시나마 살롱의 마담이 되는 일은 예술정치와 철학을 거머쥔 권력자가 되는 일이다꼭 이 밀도 높은 책이 아니어도 좋다문명 겉핥기라도 좋으니 살롱을 여는 시간을 자주 가져야 한다그러다 보면 이 모든 것에 푹 빠져들어 좀 괜찮은 마담이 될 수 있지는 않을까, 언젠가 마담 퐁파두르처럼 대단한 살롱 마담 흉내를 낼 날이 오리라 믿는다. 후훗!

이 시대에 결혼이란 여자들에게는 둘도 없는 취직자리였다. 당시에는 여성이 가질 수 있는 직업이 거의 없었고, 보통 여자들은 수녀, 아내, 창녀 세 가지 직업이 자신들이 취할 수 있는 전부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아! 그의 예술에는 결혼하여 평범한 일상에 매몰된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범접할 수 없는 절대적인 신의 경지가 있다. 미켈란젤로는 자신은 그저 만물에 갇혀 있는 형상을 붓 혹은 조각칼로 떨어내기만 하면 된다고, 모든 사물은 신의 분유分有물이고, 자신은 그저 신의 중재자일 뿐이라고 말했지만, 그는 진정 ‘신의 애인’이었다. 미켈란젤로 정도 되는 예술가는 진정 신과 결혼한 예술가 혹은 예술이라는 신과 결혼한 자일 것이다. 신新 플라토닉 러브인 셈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네덜란드 정물화는 의인화된 알레고리다. 특히 정물화의 내용은 하나의 텍스트처럼 재구성하여 읽을 수 있다. 네덜란드 특유의 종교적 배경 아래 제작된 정물화는 교훈과 훈계, 즐거움이 결합되어, 예술이란 즐거운 것이어야 함을 설파했다.

살롱 문화는 로코코 양식과 불가분의 관계다. 로코코 양식에는 궁정과 귀족사회의 환락과 방종이 스며들어 있으며, 이성의 모든 법칙을 무시하고 유희적인 선들과 과도한 풍부함 등이 특징이다. 개인생활에 적합한 감각적이고 쾌적한 미감을 표현하는 데 집중한 탓에 로코코 시대에는 회화나 조각 같은 순수미술은 발전이 더뎠고, 실내장식과 패션, 액세서리를 비롯한 공예가 첨예하게 발전했다. 로코코 시대는 친밀한 삶의 영역을 치장하는 장식예술의 시대였다.

카페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예술가들의 만남의 장소였다는 점이다. 약속을 하지 않아도 카페에 가면 언제라도 동지를 만날 수 있었다. 예술가들에게 카페는 작업실이었을 뿐만 아니라 아카데미 혹은 미술학교를 대체해주는 요긴한 공간이었다. 그들은 삶이 생생하게 꿈틀대는 현장, 역동적인 삶의 현장으로서 카페를 필요로 했다.

19세기 프랑스, 스페인, 네덜란드에는 미술 대전과 같은 공모전이 있었는데, 수상의 특전으로 이탈리아로 유학을 보내주거나 여행을 시켜주는 일이 흔했다. 프랑스 화가 앵그르는 라파엘로의 환생이라고 할 정도로 고전적인 화면을 구사했는데, 그것은 그가 로마 상을 받고 로마로 유학을 가서 받은 영향 덕분이었다.

책은 담배보다 훨씬 더 중요한 소재다. 중세 시대에 사람들은 세계를 ‘읽을 수 있는 책’처럼 여겼다. 세계는 신의 의지가 실연되는 무대였다. 책은 통상 세속적 지식과 인간적 성취를 상징한다. 원래 책은 시간 속으로 사라지는 인류의 경험과 지식을 담고 있는 것으로, 인간 존재의 유한성을 극복하려는 의지를 담고 있다. 바니타스 정물화에서 책은 해골과 함께 자주 나타난다. 해골 아래 놓인 낡은 책은 지식과 지혜도 결코 영원한 진리가 될 수 없음을 뜻한다. 세태에 혐오감을 느끼는 사람은 현실에 전혀 지침이 되지 못하는 책을 퇴락한 지식이나 쓸모없는 쓰레기로 보았을 것이며, 어떤 이들은 책을 곧 어둠 속으로 묻힐 모든 허무 앞에서 낡은 형태로나마 지속되고 있는 영원한 진리로 감지했을 것이다. 또 어떤 이들은 죽음 앞의 책은 무용지물, 헛되고 헛된 것으로 치부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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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적인 것의 사회학
기시 마사히코 지음, 김경원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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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이쯤 되면 뭐든 좋을 줄 알았다. 아침에 출근하면 노련한 직업인으로 자신감이 넘치고, 저녁에 퇴근하면 따뜻한 인간관계 안에서 고이 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현실은 형편없다업무에서 생기를 찾기 어렵고 관계에서 의미를 얻지 못한다행복하고 싶다고 고민한 적이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요즘 나의 고민은 행복보다는 의미다어쩌면 안정적으로 보이는 삶은 단 하나의 변화가희망이 없다는 뜻나는 단 한 번도 이런 허무한 미래를 가늠해본 적이 없다

오히려 우리 인생은 몇 번이나 기술한 것처럼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단지 시간만 흘러가는 듯한그런 인생이다우리 대다수는 배신당한 인생을 살고 있다우리 자신이라는 것은 태반이 이럴 리 없었던’ 자신이다.” 기시 마사히코의 말에 눈물이 솟았다행복은 무슨우리는 너무 행복을 우상화하며 산다꼭 행복해야 할 것처럼 간절히 매달린다그러나 행복은 거의 없다목숨 값의 디폴트는 이럴 리 없었던’ 나 자신의 허무다
 
단편적인 것의 사회학은 자칫 산만한 책이다저자 기시 마사히코의 생각의 단편을 여기저기 그러모았다고나 할까에세이 한 편 한 편은 다채로이 반짝인다작열(灼熱)이 아니라 반짝임’ 그것이 내가 이 책에서 얻은 첫인상이다그래서 저자는 이야기를 강조한다그가 수집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가 그들을 단 한 사람으로 만들고 있다이야기는 살아 숨 쉰다. 이야기가 그 사람을 그답게 한다그 사람의 이야기를 존중해야 한다. 늘 삼가 조심해야 한다. 저 사람의 마음에 어떻게 가닿을지, 저 사람의 삶을 어떻게 존경할지. 성심을 다해도 폐가 될 수도, 지극히 무례할 수 있다. 그의 이야기가 내게 왔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그가 내게 특별한 사람이 될지도 모른다

()은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조약돌 같다어디에나 있어 하찮은단 하나뿐인 파편우리는 기본적으로 홀로 살아간다깨어지고 또 깨어지는 고통은 그 누구도 함께 겪을 수 없다그저 옆에 가까이 있어줄 뿐그때 생은 한계를 느끼기도 하지만 놀라움을 경험한다그의 세계가 내게 닿았을 때 열리는 또 다른 세계나도 아니고 너도 아닌 공간과 감각이 열린다타인과의 접촉은 기본적으로 고통이나사람과 맞닿을 수 있음의 기쁨이 이렇게 찬란하다는 건 무엇일까생의 메커니즘은 혼란이다그러니 아무래도 외톨이는 가득 행복하기 어렵다맞닿을 수 없어서언제나 2프로 부족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잘한 단편이기 때문에 자신이 생각하는 올바름을 기술할 권리가 있다그것은 어딘가 기도와도 닮아 있다그 올바름이 가닿을 수 있는지 없는지는 스스로 결정할 수 없다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병 속에 종잇조각을 넣고 마개를 막아 바다로 흘려보내는 것뿐이다그것이 어디의 누구에게 닿을지아니면 누구에게도 닿지 않을지는 스스로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는 일이다.” 너무나 많은 것이 우연으로운으로 결정된다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 무력하나그저 살아가는 것밖에 할 수가 없지만 어쩌면나의 무의미한 인생이 누군가에게는 의미가 될지도 모른다
 
살아가다 보면 한두 번쯤도박을 걸어야 할 순간이 온다아주 가끔이성적으로는 가늠할 수 없는 순간이이번이 마지막 기회인 것 같은 느낌이 온몸을 전율한다아주 드물다한 번은 붙잡았고 몇 번은 놓쳐버렸다지금 생각해도 전 생애를 걸어야 했던 순간그때의 떨림이 눈앞을 흐린다

단언컨대 그 순간은 누군가가 내 삶을 아름답다” 말해주었을 때였다살면서 그런 순간은 아주 희귀하게 온다그리고 그 순간이 일생을 지탱한다살아야 할 한순간을 붙잡아야 한다순간은 영원이 되고반짝이는 단 한순간 우리는그것으로도 짧은 생을 영원히 살아갈 수 있다
 
다시 누군가가 내 삶에 닿는다면그리고 아름답다” 말해 준다면이 생의 단편으로 모든 것이 뒤바뀔지도 모른다기시 마사히코가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러 전하고자 한 마음은 이와 같지 않았을까모든 생의 단편은 이토록 간절하다. 

전 세계에서는 아무 일도 아닌 것 같은 아무 일이 늘 일어나고 있다. 그것은 모조리 우리 눈앞에 있으며, 언제라도 볼 수 있다. 이것 자체가 내 마음을 꽉 붙잡고 놓아 주지 않는다. 단편적인 서사를 하나하나 읽는 것은 고통스럽기도 하지만, 그 ‘방대함’ 앞에서 언제나 압도당한다. (중략) 그렇기 때문에 ‘누구에게도 숨겨 놓지 않았지만, 누구의 눈에도 보이지 않는’ 서사는 아름답다. 철저하게 세속적이고, 철저하게 고독하며, 철저하게 방대한 훌륭한 서사는 하나하나의 서사가 무의미함으로써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이다.

어떤 강렬한 체험을 남에게 전하고자 할 때, 우리는 이야기 자체가 된다. 이야기가 우리에게 빙의하여 자기 자신을 이야기하게 만든다. 우리는 그때 이야기의 매개 또는 그릇이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중략) 이야기는 살아 있기 때문에 잘라 내면 피가 난다. 이야기를 도중에 갑자기 중단당한 그의 침묵은 끊긴 이야기가 지르는 조용한 비명이었다.

우리는 우리 인생에 꽉 묶여 있다. 우리는 자신의 인생을 처음부터 선택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무언가 아주 불합리하고 복잡한 사정에 의해, 어느 특정한 시대의 특정한 장소에서 태어나, 다양한 ‘불충분함’을 떠안은 ‘나’라는 것에 갇혀, 평생을 살 수밖에 없다. 우리가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 인생이란 것은 종종 퍽이나 쓰라리다.

우리가 갖고 있는 행복의 이미지는, 때로, 다양한 형태로, 그것을 얻을 수 없는 사람들에게 폭력이 된다. (중략) 그리고 거기에서 빗겨 나는 사람, 또는 ‘빗겨 났다고 여겨지는 사람’은 자기가 잘못한 것이 없더라도 더 이상 행복해질 수 없는 것처럼 느낀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데도 ‘귀여워’, ‘잘생겼어’, ‘축하해’, ‘참 잘했다’, 그리고 ‘사랑해’ 같은 말을 듣는다는 것은, 우리와 가장 멀리 떨어진, 그리고 우리에게 가장 중요하고 덧없는 꿈이다. 그리고 동시에 그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줄 때가 있다. 그러므로 나는 정말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다.

반복하지만 타인과의 접촉은 기본적으로 고통이다. 그러나 가끔은 그것이 매우 마음 편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진정으로 신기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우리 인생은 몇 번이나 기술한 것처럼,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단지 시간만 흘러가는 듯한, 그런 인생이다. 우리 대다수는 배신당한 인생을 살고 있다. 우리 자신이라는 것은 태반이 ‘이럴 리 없었던’ 자신이다.

그렇다면 ‘천재’가 많이 태어나는 사회란 어떤 사회일까? 그것은 자신의 인생을 내던지는 일이 터무니없이 많이 일어나는 사회다. (중략) 따라서 인생을 버리고 무언가에 도박을 거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속에서 ‘천재’가 나올 확률은 높아진다. (중략) 패배하면 아무것도 손에 넣지 못하는 것이 인생이다. 만약 우리가 자신의 인생을 버렸는데도 아무것도 될 수 없었을 때, 단 한 사람의 ‘천재’를 낳기 위해 그 일이 필요했다는 말을 듣는다 해도, 도저히 이해하거나 납득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언제나 내 머리 한구석을 차지하는 생각이 있다. 우리의 무의미한 인생이 자기는 전혀 알 수 없는 어딘가 멀고 높은 곳에서, 누군가에게 의미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우리는 자잘한 단편이기 때문에 자신이 생각하는 올바름을 기술할 ‘권리’가 있다. 그것은 어딘가 ‘기도’와도 닮아 있다. 그 올바름이 가닿을 수 있는지 없는지는 스스로 결정할 수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병 속에 종잇조각을 넣고 마개를 막아 바다로 흘려보내는 것뿐이다. 그것이 어디의 누구에게 닿을지, 아니면 누구에게도 닿지 않을지는 스스로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는 일이다.

우리는 우리의 언어나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올바름이나 좋은 것, 아름다운 것이 제발 누군가에게 가닿기를 기원한다. 사회가 그것을 들어줄지 어떨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사회를 향해 언어를 계속 던지는 수밖에 없다. 그것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또는 적어도 그것만큼은 할 수 있다.

누구라도 비슷하다고 생각하지만, 내 인격도 타인의 몇몇 인격을 모방해서 합성한 것이다.
그것에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나 ‘세계에 단 하나밖에 없는 것’ 따위는 어디에도 없다. 단지 정말로 작은 조각 같은 단편적인 것이, 단지 맥락도 없이 흩어져 있을 따름이다.
이것도 또 많은 사람이 생각하고 있을 테지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나 자신’ 같은 듣기 좋은 말을 들었을 때 반사적으로 혐오감을 느낀다. 왜 그러냐 하면, 원래 자기 자신이라는 것이 참으로 별 볼일 없고, 대단치 않고, 아무 특별한 가치가 없다는 것을, 이미 지나간 인생 속에서 진절머리 날 만큼 깨달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아무런 특별한 가치가 없는 자기 자신이라는 것과 지속적으로 씨름하며 살아가야 한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자신이라는 아름다운 말을 노래하는 노래는 됐고, ‘시시한 자신과 어떻게든 맞붙어 타협해야 하지, 그것이 인생이야’ 하는 노래가 있다면, 꼭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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