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지 3 - 1부 3권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 (마로니에북스) 3
박경리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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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여자와 죽음과 병, 3권을 덮는 순간 떠오른 네 개의 단어다여기서의 은 호열자로 나타난 전염병마이기도 하지만 사랑의 병이기도 하다. 2권말에서도 그랬지만 3권에서도 이 병으로 수많은 사람의 목숨이 죽어나간다. 호열자는 지금의 콜레라다. 호열자 때문에 윤씨부인까지 사망하고 어린 최서희의 위치가 위태위태한다. 조준구는 최서희에게 자기 아들을 억지로 장가보내려 한다. 봉순이도 길상이도 서희도 많이 자랐다고 하지만 어른들을 상대하기는 역부족이다. 최참판 댁 사람들과 동네 농민들은 안팎으로 불안해 한다. 흉흉함은 죽음이 더할수록 깊어간다. 죽어서 어이없이 세상을 뜬 사람들도 많지만 살아 있어도 살아 있는 게 아닌 사람들도 여기 어찌나 많은가
 
어쩌면 귀녀의 생애가 끝나는 날 강포수의 생애도 끝나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함께 죽으리라는 뜻이 아니다귀녀의 죽음은 어떤 형태로든 지금까지의 강포수 인생과는 같을 수 없는다른 것으로 변할 것이라는 뜻이다지금 강포수는 귀녀와 더불어 있다옥중과 옥 밖의손이 닿을 수 없는 엄연한 법의 거리요 지척이면서 가장 먼 그들서로가 서로를 보고 느낄 뿐이지만 그러나 강포수는 일찍이 귀녀가 이같이 자신 가까이 있는 것을 느낀 적이 없다가랑잎 더미 위에 쓰러뜨렸을 적에도 귀녀는 강포수에게 멀고 먼 존재였었다강포수를 좋아하건 싫어하건 그것은 이제 아무것도 아니었다저주받은 악녀이건 축복받은 선녀이건 그것도 강포수하고는 관계가 없었다다만 거기 그 여자가 있다는 것과 그 여자를 위해 서러워해줄 단 한 사람으로서 자기가 있다는 것그것뿐이었다
 
욕망의 화신과도 같은 여자의 죽음은 상상 외로 충격적이다예정된 죽음이었다그러나 어떤 사람은 예정된 시간 가운데 사랑의 기회를 잡는다사악한 여자를 사랑하던 강포수란 남자볼품없는 이 남자의 마음 안에 사랑이 가득할 줄을 이전까지 그 누구도 몰랐다강포수가 이런 지고지순한 액션을 취할 거라고는 나 역시 생각지 못했다
 
강포수.”
머라꼬.” 
강포수는 흠씬 놀라며 물러섰다
.” 
귀녀는 여전히 창살 밖으로 손을 내밀어 놓고 있었다강포수는 겁을 내어 떨면서 조그마한 귀녀의 손을 잡아본다조그마한 손손아귀 속에서 바스러질 것 같은 손이다
많이 여빘고나.”
강포수의 손은 쇠가죽 겉소.” 
부드럽고 낮은 목소리였다
이거 배고플 긴데.” 
다시 꾸러미를 디밀려 하는데 이번에는 귀녀 쪽에서 강포수의 손을 거머잡았다
강포수내 잘못했소.”
알았이믄 됐다.”
내 그간 행패를 부리고 한 거는 후회스럽아서 그그랬소포전 쪼고 당신하고 살 것을강포수 아아낙이 되어 자식 낳고 살 것을으으흐흐…….”
밖에 나온 강포수는 담벼락에 머리를 처박고 짐승같이 울었다하늘에는 별이 깜박이고 있었다북두칠성이 뚜렷하게 나타나서 깜박이고 있었다오월 중순이 지나서 귀녀는 옥 속에서 아들을 낳았다그리고 여자는 세상을 원망하지 않고 죽었다강포수는 귀녀가 낳은 핏덩이를 안고 사라졌다그를 아는 사람 앞에 그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그를 보았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그의 소식을 아는 사람도 없었다
 
귀녀는 죽음을 앞두고 변한다. ‘세상을 원망하지 않고 죽었다.’는 게 그 증거다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 게 내 오랜 신념이다그래서 어떤 사건 앞에서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라고 누군가에게 충고하며사람 너무 믿는 게 아니라며 나 자신을 책망한다그러나 내가 이 신념을 양보하는 건 단 하나의 조건 앞에서다사람은 죽음을 앞둘 때 분명 변한다귀녀가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 앞에서 진실한 사랑을 만났을 때마녀 같은 여자도 순수한 영혼으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어쩌면 사랑이 가장 빛날 때는 죽음 앞에서그러니 우리가 사랑으로 돌격해야 하는 대상은 죽음처럼 살고 있는 사람이 아닐까사랑은 거기에서야 진실로 사랑다울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용이는 사람이 달라졌다월선이 떠난 뒤 변한 것과 정반대의 상태로 달라졌다뻔뻔스러워졌고 어딘지 모르게 추해진 것같이 보였다묶어두었던 주문(呪文)의 사슬이 끊어진 듯 용이는 두 여자를 번갈아가며 가까이했다임이네를 한 번 범한 뒤 강청댁에도 남자의 기능이 가능해졌던 것이다그는 그런 행위에서 자식을 소망하지는 않았다임이네로부터 임신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오히려 어리둥절했고 다음은 무감동의 상태로 돌아갔다임이네가 마을 여자들로부터 폭행을 당하던 그때 잠시 동안 임이네가 자기 자식을 가졌다는 것을 실감했을 뿐이며 삽짝을 나서면서부터 감동을 잃었다그 대신 정력은 그칠 줄 모르는 듯 두 여자에게 쏟아졌고 날로 황음(荒淫)해갔으며 거의 광적으로 되어갔지만 그는 여자 둘을 증오하고 멸시했다너희들이 짐승이지 사람이냐고 욕설을 퍼붓는가 하면 나도 짐승이지 사람은 아니라 하면서 헛웃음을 웃곤 했다그러면서도 여전히 아편쟁이처럼 육체에 탐닉하는 용이는 아무 쓸모 없는 놀량패가 되어갔다
 
사랑을 잃은 용이는 완전히 망가진다누군가는 용이가 여자들 사이에서 중심을 못 잡는 나쁜 남자라는 이야기를 하겠지만 나는 글쎄용이가 이해된다그가 저지른 일은 자포자기한 사람이 취할 수 있는 자연스러운 행동 중 하나가 아닐까용이가 잘했다거나 두둔하는 게 아니다잘못했지만 다 포기한 인간을 저럴 수도 있다는 거다그리고 남자와 여자의 일은 남녀의 문제뿐 아니라 성욕과 성욕과의 문제이기도 한다는 걸 다시금 느꼈다강청댁에게는 기능하지 않던 기능이 뜬금없이 임이네에게 기능했다는 게 그 충돌을 증거한다남자와 여자와의 관계는 역시 조건으로 되는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차라리 용이와 임이네처럼 저지르는 게 자연스럽지조건이 맞는다고 억지로 맺어놓는 게 아니란 말이다차라리 전자가 덜 모욕적이다결국 용이의 세 여자 중에서 가장 비참한 건 조건으로 맺어둔 강청댁이 아니었던가
 
고마운 척눈물겨운 척할 수 있는 교활한 지혜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그러나 넘쳐흐르는 생명력조금만 땅이 걸고 짓밟지만 않으면 무섭게 자라나는 잡풀 같은 생명력은 교활한 지혜를 위해 여유를 주지 않았다 할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마을 사람들 눈에 그가 거들먹거리는 것같이 보였다는 것은 윤씨부인이 도와준다거나 먹고 입는 것이 자기네들과 같아졌다는 시샘 때문에 그렇기도 하려니와 그 무성한 생명력에 압도당하는 것 같은 느낌에서 더욱 그렇게 보여졌는지도 모를 일이다더욱이 아낙들은 옛날로 돌아간 그 미모에 약이 올랐을 것이다이제 임이네한테서는 찌든 궁기를 찾아볼 수 없었다놀랄 만한 회복이었다
 
책을 읽어갈수록 임이네의 원시적 본능에 놀라게 된다그녀는 배부르고 등 따신 것이 제일인 여자다남편을 잃은 슬픔도 남편이 지은 죄의 두려움도 입에 뭘 넣는 문제 앞에선 곧 수그러든다임이네가 무엇인가(남편 문제)에 대해 고민하는 내용은 1권부터 3권까지 중에서 아주 조금밖에 안 나온다그녀는 먹고살기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치마를 걷어올릴 수 있는 여자고 거지꼴을 하고 구걸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는 여자다그러나 이 생명력은 얼마나 강인한가여자는 순식간에 뽀얀 생기 어린 얼굴로 돌아온다게다가 1번 연적(?)이던 본처까지 호열자로 죽는다이건 무슨… 임이네를 위한 맞춤 시나리오 같다게다가 용이가 그리 바라던 아들을 낳아버렸다귀녀와 다른 모양새지만 생명력이 이 모든 것을 이끌어가는가갑자기 신사상 종교에서 늘 말하는 긍정의 힘’, ‘생생하게 꿈꾸면 이루어진다가 생각난다내 삶이 이다지도 팍팍한 건 생에의 의지도 기대도 없어서인가
 
알고 보니께 영감 얻어간 기이 아니고 그 강원도 삼장사라는 남자는 월선이 애비 동생이라누마. 그러니께 그 삼촌 내외를 따라서 간도로 갔다던가거기 가서 멋을 했는지 그거사 모르지마는 거기 가믄 돈 번다 하더마하기사 우리겉이 쭈그렁박 늙은것이 간다믄 돈을 벌 긴지 그거는 모르겄소만.” 
주막에 건달패들이 모여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그들의 얘기도 월선에 관한 것이었다월선의 재물이 얼마쯤 되겠느냐는 것이었고 누가 그 여자를 낚느냐는 얘기였다
돈 좋지월선이 시세가 날로 올라가누만. 무당이고 백정이고 소용없는 기라옛날 그 손에서 술잔 받아묵던 장돌뱅이들이 이자는 장에서 월선이를 만나믄 굽신굽신어느 대가댁 마님을 대하는 것맨치로그러니 우찌 사람들이 돈을 보고 환장을 안 하겄노.” 
 
월선이는 도무지 옛날의 월선이 같지가 않았다그때보다 늙기는 했으나 아름다워졌으며 도방(도시여자같이 옷맵시가 고왔다그러나 그런 변화 때문에 옛날 같지 않다는 것은 아니었다윤보는 월선이 아닌 월선이 허깨비를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월선이가 평사리로 돌아온다그것도 큰돈을 벌어서여자 팔자는 뒤웅박 팔자라 남편에 달렸다지만 그것도 안 되면 돈을 버는 방법도 있다여자 팔자가 돈에도 좌우된다월선이에게 술을 따르라던 남자들이 이제 월선이에게 굽신거리며 마음을 얻으려 든다예나 지금이나 여자의 인생은 사랑에 있어서 녹록지 않다예전에는 사랑하는 남자와 이어지려면 부모의 검열을 거쳐야 했다부모들의 조건을 맞추지 못하면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고다행히 첫 검열을 통과하더라도 다음 의무를 또 통과해야 했으며아이를 갖지 못하면 다른 데서 아무렇지도 않게 아이를 들였다돈 한 푼 쓰려 해도 남편과 시부모의 눈치를 봐야 했다기댈 남자도 없어 돈이라도 악착같이 벌었더니 내가 아닌 돈을 원하는 게 눈에 뻔히 보인다돈을 번 월선이는 도시 여자처럼 세련되어졌지만 허깨비처럼 살고 있다여전히 사랑은 갖지 못해 허무하다
 
아들 낳고 사는 사람을 내내가 만내믄 머할 것고. ’ 주먹을 쥐고 자기 가슴을 쥐어박으며 월선이는 집을 향해 달음박질을 쳤다. ‘생각이 있이믄 날 찾아오겄지. ’ 그러나 그것은 절망에 가까운 기대였다
 
용이는 눈을 들어 나무 위를 올려다본다바람이 지나간다나뭇가지가 흔들리고 월선의 흰 명주 수건이 나부낀다. ‘그리 험한 꼴을 당했이믄서도 사람우 맴이란우찌 이리 끝이 없는 길까. ’ 다시 부끄러움을 느낀다
 
월선이는 벌떡 일어섰다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던 것이다의아스럽게 용이 쳐다본다. ‘아아내가 무신 소용고. 법으로 만낸 사람이 제일이고 이자는 자식 낳아준 사람이 제일 아니가. ’ 도로 주질러 앉는다용이처럼 둑길에 눈을 보낸다. ‘그런 생각하믄 벌 받는다. 지난가슬에 죽었이믄 이리 서로 만나볼 수 있었겄나. 내 박복을 한탄하지 누굴 원망하겄노. 이렇게 살라는 팔자라믄……. ’ 눈은 다시 용이 버선으로 옮겨졌다햇볕이 좀 두터워졌는가 한결 밝은 햇살이 버선등에 기어오르고 있었다
 
월선은 절망하고 또 절망하지만 기대를 버리지 못한다어리석어도 떨어질 수 없는 마음미련하고 또 미련하다사람들은 너무나 쉽게 그들을 손가락질하고 욕한다그러나 어떠한가사람이 다 그런 거지어리석어도 집착이어도 그것도 사랑이다두 사람이 서로의 마음을 질기도록 겹쳐왔다면 나빠도 어리석어도 부질없어도 그건 사랑이다용이가 저지른 일을 알고도 여전히 용이를 잊을 수 없다면 그건 깊은 사랑이다어쩌겠는가용이도 월선이도 이렇게 끝까지 갈 것이다두 번의 기회는 없다용이는 단 한 번의 기회를 날려버렸으니두 사람은 방법이 없다마음밖에는 방법이 없다
 
와 생깄는고 싶더마는 니라도 없었이믄 내가 우찌 살았겄노. 임 보듯이 니를 보고…… 보고 접을 때 니를 보고…….” 아비라던 그 사내의 죽음을 안 것은 그로부터 삼 년 후의 일이었다어미의 주량이 늘고 더러 바람도 피우는 세월 속에서그러나 여전히. “와 생깄는고 싶더마는 니라도 없었이믄 내가 우찌 살았겄노. 임 보듯이 니를 보고보고 접을 때 니를 보고 우찌 그리 애빌 닮았는고.” 그런 말을 했었다. ‘어매 맘 알겄소임 보듯이 니를 보고보고 접을 때 니를 보고…… 임이네 낳은 아이는 그이를 닮았이까. ’ 
 
명리학에서 육해살 인연이라는 게 있다사람과 사람 사이위기의 순간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결정적 인연을 이야기하는데무거운 지게를 지탱하는 받침대를 비유한다누구에게나 삶은 무겁다그러나 이 무거운 삶에 또 다른 무게가 될지언정 마음을 잠시 잠깐 걸 수 있는 존재는 삶을 지탱하는 결정적 이유가 된다월선이는 아이를 갖고 싶다월선엄마가 그녀에게 이야기한 너라도 없었으면 내가 어떻게 살았겠니라는 말은 지금도 유효하다그 말은 사람에게 마음 걸 무엇이 그렇게나 필요하다는 거다사람은 의미 없이 살 수 없는 존재다전적으로 이해한다아이 하나 있는 친구들이 진심으로 부럽다하루하루 아이가 커나갈 때내가 사랑했던 그 사람을 꼭 닮은 생명체가 살아 숨 쉴 때내 사랑은 살아 숨 쉬고 나날이 자라나는 것이다내 사랑은 죽어가지 않는 것이다내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게 그들의 눈에는 무엇인가 보인다내 삶은 하나도 달라지지 않고 똑같은데 그들의 삶은 매일 변화한다부모는 아이에게 기대어 산다
 
야속한 사람옛날에는 어무니가 기시서 그랬고 법으루 만낸 사램이 있어서 그랬고 지지금은 자식 낳아준 사램이 있어서 그렇고끝까지 남남이고나. 원망하는 거는 아니지마는 그이는 나를 남으로 치부하는 거만은 틀림이 없이니께야속하고 그그렇지마는 내 이녁 맘 알기사 알거마는. 그래도 야속하지. ’ 
 
야속하다는 건 사랑한다는 것월선과 용이는 이 세상에서 아무래도 안되는 인연이다그래도 나는 토지에서 월선이가 가장 행복한 여자가 아닌가 싶다아파도 끝까지 사랑을 품고, 사랑을 확인받으며 살아가므로사랑을 잊지 않고 살 수 있는 인간은 행복하다마음이 죽어가지 않는 인간은 행복하다그러므로 나는 상상한다. 월선이 역시 죽을 때 세상을 원망하지 않았을 거라고. 월선이 정도면 괜찮은 인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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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2 - 1부 2권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 (마로니에북스) 2
박경리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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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읽으면 읽을수록 모든 문학은 인간의 이야기라는 걸 깨닫게 된다이야기를 통해 인간의 속성은 드러난다인간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존재이며 선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한 수많은 단면들이 합하여 한 인간을 이룬다는 것이다우리는 이 인간에게 연민을 느끼고 정()을 주며끝내는 사랑하게 된다소설에서 익히는 인간은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인간과 너무나 닮았다이것이 우리가 문학에 빠져드는 이유우리는 소설을 통해 이미 알고 있었던미처 알지 못하던 인간성을 발견하게 된다
 
박경리는 토지의 등장인물 한 명 한 명을 살갑게 빚었다어느 구석을 읽어봐도 한 사람 한 사람의 사연을 허투루 보내지 않았다초반부에서는 용이의 기품이 특히 드러난다그 역시 최서희에게 매일 당하는 봉순이처럼 최치수에게 설움을 당하며 어린시절을 지냈다그를 달래던 어머니과 어린 시절 사망한 누이 서분의 이야기강청댁과 결혼하게 된 배경도최치수는 용이와 함께 자라며 그의 드높은 인간다움을 전적으로 깨닫게 된다사람의 신뢰(信賴)는 행동 하나하나로 설명하고 납득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신뢰는 오직 함께함에서 나온다시간을 통과해야 한다
 
용이는 나중에 월선이 머물던 주막의 지붕 이엉까지 갈아준다그녀의 집이 낡아가는 것이 마음이 아파서월선에게 옷을 입혀주는 것처럼그건 월선이 한시바삐 자신에게 돌아오기 바라는 주술이었는지도 모른다용이 같은 남자에게 끝까지 사랑받을 수 있다면 이 사랑이 아파도 세상을 얻은 것과 같으리라
 
사람이 존엄하다는 것을 용이 놈은 잘 알고 있지요그놈이 글을 배웠더라면 시인이 되었을 게고 말을 타고 창을 들었으면 앞장섰을 게고 부모 묘소에 벌초할 때마다 머리카락에까지 울음이 맺히고 여인을 보석으로 생각하는그렇지요복 많은 이 땅의 농부요.” 

사명감이라는 것도 식자깨나 배운 놈의 허울 좋은 겉옷이요헤치고 보면 크게 격차 나는 게 아니지사람의 존엄이란 능동에 있는 게 아니며 이치에 대한 피동에서 지켜져 나가는 게야.’‘학문이 진리를 찾는 것이기는 하되 반드시 진리가 이롭고 보탬이 되는 것은 아니네학문하는 태도 역시 이롭고 보탬이 된다는 생각이 앞선다면 장이 바치에 떨어지고 마는 법규격에 맞춰 틀에 끼울 것이 못 되지진리는 만인이 함께 가질 물건은 아니거든이 손 저 손 넘어가는 동안 쇠퇴되고 시체가 되고 썩어버리고 마른 허울만 남고 종국에는 얼토당토않게 본뜬 물건이 나타나서 만인을 호령하게 되는데 그것에 영합되면 학자는 학자가 아닌 동시 우중과 위정자들의 공범자가 될 수밖에 없지.’ 
 
윤씨부인 역시 말 못할 사연 있는 사람이다. “나를 용서하시오살아주어서 고맙소.” 이 한 마디로 늙은 여자의 눈에 늙은 남자는 소년 같은 미소와 부드럽고 가냘픈 몸집으로 변모한다나로서는 전혀 알 수 없다남자의 일방적인 관계였지만 자신이 낳은 아이의 아버지라는 것 때문에 마음이 이렇게 변화하는가이 남자 때문에 그녀에게 비밀이 생겼으며아들에게 못할 짓을 하게 된 것이다어머니와 최치수의 갈등도 나타난다최치수 역시 마음이 불일듯하다. ‘가 어디 있는지 어느 정도 확신이 섰다알지만 모르는 척 해야 하는지끝까지 캐물어 확인해야 하는지두 사람 사이에서는 푸른 칼과 칼이 맞닿는 것처럼’ 긴장으로 불꽃이 튄다살다 보면 이렇게 애매한 채로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 온다서로 알고 있지만 모르는 척 해야 옳다는 걸 두 사람 모두 안다그게 두 사람을 지키는 방법이다서로 아끼기 때문에 그래야 한다이 문제가 명확하게 드러나는 순간 이 소중한 거리는 깨어진다이 모자는 서로에게 끝까지 거리를 두었다누군가는 이 모자가 불행하다고 말할지 모르나나는 이것이 그들의 최선이었다고 믿는다도대체 그 누가 그 사람의 최선을 최선이 아니라 판단할 수 있는가사람의 세상은 그 어디에도 정답이 없다하동 평사리 하늘을 찌르는 윤씨부인과 최치수라 해도 뭘 어떻게 할 수 있었겠나그게 이 세상이 허무하도 두려우며 아프고 씁쓸한 이유다살기 싫은 이유다
 
신심이 없으면서 칠성이는 부처가 두려웠다촛불을 받으며 무수히 머리를 조아리는 귀녀의 옆모습은 처절하고 아름다웠다칠성이는 그 얼굴이 두려웠다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 같았고 달려들어 초를 넘어뜨리고 싶었다그러나 옴짝할 수 없다이윽고 귀녀는 나긋한 손을 들어 마치 바람에 날리는 꽃잎같이 촛불을 껐다칠성이 입에서 깊고 긴 숨결이 토해졌다

음란도 이 여자에게는 죄가 아니었다거짓도 이 여자에게는 죄가 아니었다살인도 이 여자에게는 죄가 아니었다오로지 소망을 들어달라는 다짐만이 간절했을 뿐이다신은 이 여자에게는 악도 선도 아니었다오로지 소망을 풀어줄 수 있는 능력영험이 있느냐 없느냐가 중한 일이었을 뿐이다.
 
한 여자의 욕망이 시커멓게 뜨거워서 눈에 띈다귀녀라는 여자최참판댁의 하녀인 그녀는 자기 처지를 미워하고 신분상승을 하려 불법을 저지른다부처님도 두렵지 않았다사랑도정조도 필요 없다이 여자를 이용해 자기 잇속을 챙기려는 남자들도 등장한다그녀를 이용하려고 했다가 나중에는 그녀에게 휘둘리지만 말이다
 
비단과 누더기를 구별하는 따위의 자존심야수 같은 강포수에의 허신과 인간쓰레기 같은 칠성이와의 동침을 거치면서 마지막까지 최치수에게 여자 대접을 받고자 하는 희망은 애정일까 허영일까 또는 집념일까악업(惡業)을 쌓기 위해 목욕재계하고 동자불 앞에서 도움의 기도를 올리던 귀녀모든 것은 밖에서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고귀함도 염원도 사랑도 밖에서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밖만 싱그러우면 마음속의 쓰레기는자기만이 아는 쓰레기에는 냄새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그래서 이 여자는 고독한 여자가 아니었던 것이다한밤중에 죽음을 생각해보는 여자도 아니었던 것이다부처님이 무섭지 않은 여자였던 것이다
 
욕망이 커지면 마력이 생기는지도 모른다귀녀는 마녀 같은 여자다놀랍게도 거기에 단 하나이런 (가치 없는여자를 지고지순하게 사랑하는 남자가 나타난다이거야말로 기적이다강포수는 스무 살이나 차이나는 어린 귀녀 때문에 애가 닳아 한다어울리지 않아도 그녀가 자기를 돌아보지 않아도 이 마음을 어째야 할지 몰라 가슴이 녹는다그는 그가 할 수 있는 일을 한다귀녀를 자기 사람으로 맞고 싶어 그녀의 주인 최치수에게 굽신굽신 충성을 다한다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메커니즘과 유효기간을 참 알 수 없다사랑은 하늘이 내리는 게 확실하다. (한숨
 
2권에서 드러나는 여성들은 참으로 하나하나 불행하다일찍 돌아간 용이의 동생부터 성희롱을 당하다가 자칫 죽은 것처럼 폭행을 당하는 봉순이사랑받지 못해 추하도록 발악하는 강청댁죄를 지은 남편 때문에 모든 것을 포기한 임이네와 함안댁까지상태 안좋은 남편을 보필하며 참고 참아가는 여자들은 그녀들의 삶이 도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시절이 있었던 것을 실감하게 한다그래서 그녀들은 더욱 남편의 애정에 집착하였나남편을 (더 멋진 사람으로포장하는 눈으로 바라보면서 버텨야 했었나 싶다
 
사는 건 정말 알 수 없다당장 내일 일을 모르는 나 역시 같은 한숨을 쉰다겨우 2권까지 읽었지만 인간의 생은 제각각 너무 설명할 수 없어 슬프다이 알 수 없음이 인간의 생을 설명하는 모든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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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가 되는 글쓰기 - 쓰기는 배움의 도구다
윌리엄 진서 지음, 서대경 옮김 / 유유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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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부가 되는 글쓰기』, 너무나 정직한 제목이다심지어 부제는 쓰기는 배움의 도구다정직하다는 것은 한편으로 사람을 혹하게 하는 거짓이 없다는 의미다슬프게도 이 못생긴 제목 때문에 나는 이 책을 오랫동안 읽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책을 읽으면서 황당했다. ‘뭐니, 너무 좋은 책이잖아.’ 
 
저자인 윌리엄 진서는 이 책이 범교과적 글쓰기(writing across the curriculum)’를 소재로 한다고 서문에서 밝힌다. 국어나 문학 수업혹은 작가를 목적으로 하는 글쓰기 기회뿐이 아니라어떤 목적으로 하는 학문이어도 글쓰기가 탁월한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거다왜냐모든 글쓰기는 생각의 부산물이기 때문이다그리고 이런 과정을 통해 글쓰기가 즐거운 활동임을글쓰기와 생각하기배움이 함께 맞물려가는 통합과정임을 알려주는 게 이 책의 처음과 끝이다그래서 그가 제시한 것은 다양한 학문 분야에서 탁월한 글쓰기 사례이를 읽어봄으로써 읽는 이는 나도 할 수 있지 않을까라며 글을 써보게 된다
 
나는 그런 글들을 찾아 나서는 작업즉 다양한 학문 영역에서 생산된 명료하고 뛰어난 글쓰기 사례를 수집해 한 권의 책에 담는 작업이 가능한지 고민했다지금까지 한 번도 글쓰기 주제로 생각해 보지 않은 자기 전공에 대해 글을 써야 하는 상황에 놓인 교사와 학생을 위한 안내서적어도 글쓰기와 배움의 과정에 뒤따르는 두려움을 상당 부분 해소해 줄 책이런 책은 또한 좋은 글을 쓰는 원리가 어떤 주제의 글에서든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사실을가령 화학 분야의 잘 쓰인 글은 미술사 분야의 잘 쓰인 글과 동일한 글쓰기 원리를 따른다는 사실을 증명해 줄 것이다
 
우리가 그간 생각했던 좋은 글쓰기와 실제 좋은 글쓰기는 다르다우리는 문학적 스테레오타입에 갇혀 그와 닮지 않은 내 글쓰기를 미워한다내 생각을 추론 과정에 따라 명료하게 풀어나갈 수 있다면 그 글쓰기는 좋은 글쓰기다아름다운 느낌을 주지 않아도 된다내가 이 학문을 사랑하는 마음으로내가 오랫동안 사유한 내용의 전후 관계를 신나게 쓴다면 그걸로 이 글은 좋은 글이 된다
 
화가 파울 클레는 일찍이 제자들에게 예술이란 직관의 날개를 단 정확성이라고 말한 바 있다나는 이 말이 좋은 글쓰기의 정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나는 창작 과정 중 찾아오는 별난 생각들에 기꺼이 놀랄 준비가 되어 있는 클레의 열린 태도를 좋아한다너무나 정확하여 차가워 보일 수 있는 그의 그림은 창작자의 유머와 난센스변덕을 통해 비로소 생기를 얻는다클레의 그림에서는 언제나 그림의 물질성을 뛰어넘는 인간애가 느껴진다특히 그의 그림이 담고 있는 모든 난센스가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 순간나는 한 화가뿐 아니라 한 인간과 연결되어 있다고 느낀다
 
책은 크게 1부와 2부로 나뉜다. 1부의 내용은 쓰기가 어떻게 배움의 도구가 되는지 그 필요성을 서술하고, 2부에는 범교과적 글쓰기의 실제, 구체적인 예시를  미술, 수학, 화학, 물리학 등 교과별로 충실하게 담았다. 

특히 7 미술과 미술가들》 챕터는 내게 절망과 격려를 함께 안겨주었다훌륭한 예시 글들을 읽다 보면 어쩜 이렇게 훌륭한 표현력을 담고 있는지 감탄하느라 책장을 넘기지 못했고내 아둔한 글줄이 기억나 부끄럽기 그지없었다. 미술 글쓰기는 시각적 가능성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쓰는 이가 얼마나 많은 것을 보여줄 수 있는지를 인지하고, 읽는 이가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도록 촉매 지식을 전달해야 한다. 지식과 도전의식을 얼마나 매력적으로 전달할 수 있을 것인가. 중요한 건 저자 자신의 성품, 기쁨, 매력이다. 
 
미술에 관한 글쓰기는 적어도 다음 두 가지 요건을 갖추어야 한다첫째독자가 그 글을 통해 보는 법을 배울 수 있어야 한다그림건축조각사진은 물론이고 우리가 일상 풍경에서 마주치는 온갖 시각적 요소들을 어떻게 보고 이해해야 하는지를 제시해야 하는 것이다둘째우리가 보고 있는 것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
 
시각적 이해는 대단히 다양한 차원에서 이루어진다이런 측면에서 시각적 이해는 기본적으로 언어적 이해와 다르지 않다론 레인저와 그의 충직한 동반자 톤토 사막 위에 나 있는 말발굽 자국을 보고 무법자들이 방금 이 길을 지나갔으며흰 털이 섞인 붉은 말 위에 기막히게 아름다운 금발 아가씨를 인질로 태웠고이 무법자들의 두목이 탄 말은 최근 편자를 갈았다고 결론 내릴 때 우리는 얼마간의 어지럽혀진 모래흙을 보고 그토록 많은 정보를 읽어 내는 그들의 능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하지만 론 레인저와 톤토가 피카소의 게르니카」 앞에 선다면 과연 그 그림에서 어떤 걸 읽어 낼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그림을 읽는 것은 또 다른 기술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활기 넘치는 문체사진처럼 명료한 이미지(가장자리가 솜털처럼 번져 있는 사출물크리스털처럼 투명한 화석)와 함께 내가 좋아하는 이 글의 특성은 바로 자신감이다이는 사진 작업의 창조적인 과정과 기술적인 과정을 모두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오랜 세월 지식을 쌓아 온 저자만이 보일 수 있는 당당함이다자기 견해를 토로하는 데 거침이 없고 단호하다여행 가이드 역할을 맡은 작가가 수줍음을 타서는 안 될 노릇이다우리는 카리스마 있는 가이드를 원한다훌륭한 음악 글쓰기가 좀 더 잘 들을 수 있도록 독자를 돕듯이훌륭한 미술 글쓰기는 좀 더 잘 볼 수 있도록 독자를 돕는다미술 글쓰기가 다루는 영역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만큼이나 넓다우리는 종종 눈앞에 직접 보여 주어야 무엇이 올바른지 이해한다
 
시각예술에 대한 글을 쓰고자 한다면 이런 언어 외적인 요소의 중요성을 기억하라미술 작품에는 거의 언제나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의 어떤 것이 있다예를 들어 기억과 상상력은 시각 정보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 글을 소개하는 이유는 단순히 작가가 탁월하기 때문만은 아니다우리 책이 전제하고 있는 한 가지 사실즉 과학과 인문학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잘 보여 주는 글이기 때문이다미술 관련 글이지만 뛰어난 과학 글쓰기라 할 만하다명료하고생생하고유려하고우리가 경험에 비추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구체적인 사례들에 기초한 글이다 

각자 자신이 지극히도 사랑하는 무언가가 있다. 사랑하는 것 없는 인간은 없다, 하나쯤은 있다. 고양이 한 마리만 키워도 내 새끼가 제일 이쁜 법, 온 동네 SNS에 사진과 글로 도배를 한다. 사랑하면 자랑하고 싶다. 글쓰기는 내가 제일 사랑하는 학문을 여기저기 예쁘게 알려주는 일이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학문을 공부하다 보면 쓰게 된다. 생각을 논리적으로 정리하는 과정에서 사랑은 깊어진다. 이를 명료하게 쓰다 보면 더 잘 알게 된다. 사랑하면 쓰게 된다. That's all. 이게 다다. 

뭐라도, 뭔가 하나라도 써야겠다, 더 사랑하기 위해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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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1 - 1부 1권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 (마로니에북스) 1
박경리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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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한 달에 한 번 도서모임을 함께하는 진숙은 토지를 매년 한 번씩 읽는다고 한다보통 봄바람이 불어오면 시작해 가을바람이 불어오면 마친다고아이 셋을 기르면서도 틈틈이 읽는 독서의 기쁨은 쏠쏠한데토지는 그 가운데 이야기의 즐거움을 매년 준다고 했다어린시절 동네 놀이터 인연으로 TV 드라마 토지의 아역 탤런트와 같이 놀았다연예인은 어려도 후광이 달랐다너덧 번 정도 만났을 뿐인데 뽀얀 얼굴과 새카만 눈동자가 너무 예뻐서 나는 주눅이 들었다귀티나는 얼굴이 오래 잊히지 않았다내게 토지가 특별히 기억에 남았다면 그것 때문일 것이다. ‘어린 최서희를 눈앞에서 보았던 경험
 
토지는 1987년 KBS에서, 2004년 SBS에서 TV드라마로 두 차례 방영되었다. (이재은은 87년작에선 어린 최서희로, 2004년에는 서희의 몸종 봉순으로 등장한다. 완전 토지배우!)굳이 열심히 찾아본 드라마는 아니지만 틈틈이 보았던 한복 입은 최수지와 김현주의 얼굴은 인상적이었고중간중간 누구와 누가 결혼했다 정도만 기억에 남았다언젠가는 읽어야지 읽어야지 했던 스무 권의 책재작년에 기회가 되어 Ebook으로 마로니에북스에서 토지』 전집을 구매하고도 영 들춰보기가 쉽지 않았다
 
이제는 더 늦출 수 없다고 생각했다새 Ebook리더기를 샀기 때문조심스레 토지』 1권을 펼쳐 그 안에 든 것들을 들여다본다물론 이 책을 읽는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재작년 작년 모두 토지』 몰입의 가장 큰 어려움은 1권에서도 헷갈리는 수많은 인물들이었으므로그렇다고 토지 인물사전을 먼저 훑어보기도 뭐하다인물과 인물의 구체적 성격을 파악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일단 읽으면서 흐름에 묻어가 보기로 한다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아름다운 것들진실이 손에 잡힐 것만 같았고 그것들을 위해 좀 더 일을 했으면 싶었다고뇌스러운 희망이었다글을 쓰지 않는 내 삶의 터전은 아무 곳에도 없었다목숨이 있는 이상 나는 또 글을 쓰지 않을 수 없었고보름 만에 퇴원한 그날부터 가슴에 붕대를 감은 채 토지의 원고를 썼던 것이다백 매를 쓰고 나서 악착스런 내 자신에 나는 무서움을 느꼈다어찌하여 빙벽(氷壁)에 걸린 자일처럼 내 삶은 이토록 팽팽해야만 하는가가중되는 망상(妄想)의 무게 때문에 내 등은 이토록 휘어들어야 하는가나는 주술(呪術)에 걸린 죄인인가내게서 삶과 문학은 밀착되어 떨어질 줄 모르는징그러운 쌍두아(雙頭兒)였더란 말인가달리 할 일도 있었으련만다른 길을 갈 수도 있었으련만……
 
진실이 머문 강물 저켠을 향해 한 치도 헤어나갈 수 없는 허수아비의 언어그럼에도 언어에 사로잡혀 빠져날 수 없는 것은 그것만이 강을 건널 가능성을 지닌 유일한 것이기 때문이라고나는 전율(戰慄없이 그 말을 되풀이할 수가 없다
(박경리토지』 자서(自序), 1973) 
 
개인적으로 1권에서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박경리(朴景利, 1926~2008)의 서문이라고 생각한다토지』 책의 실물한 권의 두께는 보통이 아니다이런 책을 스무 권이나 썼다니 피를 쏟고 뼈를 갈아넣었으리라는 것은 당연한 수순글쓰는 이는 천형(天刑)을 얻었다는 말도 이에 있겠다. 1973, 1993, 2002박경리의 서문은 한 줄 한줄 핏빛으로 아름다웠다나는 이 책을 읽을 것이다
 
토지 1권은 경남 하동의 평사리 마을몇 대째 지주인 최참판댁을 중심으로 펼쳐진다동학혁명은 실패로 끝나고 그 가운데 참판댁 역시 상처를 입는다어린 최서희를 중심으로 함께하는 어린이들그리고 어른들의 얽히고 설킨 관계성이것만 지루하지 않게 읽어도 1권의 독서는 성공이다가장 눈에 띄는 건 용이와 월선의 사랑이다현실에서 연결되지 않았지만 마음은 떨어지지 않는이것이 사랑이 아니라면 무엇으로 말해야 하는가이것을 손쉽게 이루어지지 않아(끝을 보지 않아끝나지 않는 집착이라고 말한다면 이 사랑이 너무나 싸구려가 아닌가싸구려라고 하기에 용이와 월선은 서로를 배려한다서로가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제일이다이루지 못해도 끝내 눈에 밟히는 사람그게 이 사랑의 힘이고 역량인 것 같다
 
얼굴을 바싹 들이대며 용이는 속삭이듯이 말했다
니는 내 목구멍에 걸린 까시다우찌 그리 못 살았노못 살고 와 돌아왔노.” 
하다가 용이는 울었다월선이는 비실비실 도망치려 했다매를 치켜든 아버지 앞에서 달아나려는 계집아이처럼울음을 죽이려고 이를 악무는 용이 이빨 사이에서 괴상한 소리가 났다그는 월선의 손목을 낚아챘다손목을 끌고 방으로 들어온 용이는 갓을 벗어던지고 등잔불을 불어 껐다그리고 나머지 한 손으로 여자의 나머지 한 손을 꼭 잡고 방바닥에 주질러 앉는다
어느 시 어느 때 니 생각 안 한 날이 없었다모두 다 내 죄다와 니는 원망이 없노!” 
끌어안아 여자 얼굴에 얼굴을 비벼댄다남녀의 눈물이 한 줄기가 되어 흘러내리고또한 그들의 몸도 하나가 되어 높이 높이 떠올라가서 영원히 풀어헤칠 수 없는 처절한 사랑의 의식을 올리는 것이었다
 
우찌 그리 못 살고 왔노용이가 그러데요우찌 그리 못 살고 왔겄소어매불쌍한 우리 어매팔자 치리 하고 살라 카더마는 내 신세가 어매 한세상맨치로 우찌 그리 똑같겄소짝도 없고 임자도 없고 어매 자식 어매 안 닮고 뉘 닮았겄느냐고 했더마는…… 너무 보고 접아서 왔소용이 사는 울타리라도 한분 보았이믄 싶어서 왔소어매날 미친년아기든년아 하겄지요나도 모르겄소보고 접아서 미치고 기들겄십디다*. 나도 모르겄소.’ 
 
용이하고 살 수 없다면 애꾸눈이건 절름발이이건 월선에게는 상관이 없었을 것이다누구를 따라가든지 그는 제 집 없는 뜨내기의 신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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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이충호 만화 삼국지 1 - 난세에 태어나다 황석영.이충호 만화 삼국지 1
황석영 지음, 이충호 그림, 김태관 각색 / 문학동네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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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정판 『만화 삼국지가 나왔다고 한다, 그것도 문학동네에서. 황석영의 글과 이충호의 그림이라는 이야기를 듣기도 전에 애니북스도 아니고 문학동네 타이틀을 달고 나왔다는 데 무작정 신뢰가 갔다. 만화 전문 임프린트도 있는데 문학 전문 출판사 이름으로 만화책을 냈다는 건 그만큼 개정판 퀄리티에 자신이 있다는 이야기다. 안 읽어볼 수가 없다.
 
새로이 만화 삼국지가 나왔다는 이야기가 들 때 요코야마 미쓰테루의 전략 삼국지가 떠오르는 건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다. 물론 일대일로 비교할 수는 없다. 이충호의 15 권짜리 전집과 요코야마 미쓰테루의 60권짜리 대작은 디테일의 차이가 없을 수 없기 때문에. 다만 한때 만화가를 꿈꾸었던 전공자로써, 중학생 눈높이를 나름 알고 있는 직업인으로써 몇 마디를 얹자면 이번 삼국지는 꽤 괜찮다.
 
무엇보다 컬러다, 그림이 시원시원하다. 그림에 강약이 있어 한눈에 쏙 들어온다. 황석영의 글은 만화로 연출할 때 재구성할 터라 잘 모르겠지만 이충호의 그림은 요즘 애들 취향에 꼭 맞다. 이미 소년 만화에서 안정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작가를 섭외해 친밀한 작화를 제공한다. 소년 만화에서 필수적으로 등장하는 인체 과장법이 부자연스럽지 않다. 미안하지만 미쓰테루의 그림은 부자연스러운 왜곡과 부적절한 인체 표현이 무척 많았던 기억이 있다. 게다가 잔인한 표현도 있었다는 걸 숨길 수 없겠다. (좋은 말로 하면 지나치게 디테일이 뛰어났다.) 배경 처리도 부자연스러운 데가 없다. 물론 컴퓨터 그래픽 페인팅 덕이겠지만 정확한 원근법이다. 필요할 때마다 중간중간 나오는 지도는 이해에 편리하다. 만화만의 장점이다. 그리고 15권이면 딱 알맞다. 너무 권수가 많지 않아서도 맘에 든다.
 
술술 넘어간 컬러풀한 만화 페이지도 만족스러웠지만 기대하지 않았던 권말 부록이 압권이었다. 연표와 인물 스토리로 정리한 삼국지 이야기. 역시 비주얼 차트는 중요하다. 레이아웃도 단정하고 가독성과 판독성도 뛰어나다. 좋은 말인지 나쁜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부록은 학습교재 같아서 공부하기에 딱 맞다. 이 말은 만화를 먼저 본 후, 정본 삼국지를 글로 읽기 적절하다는 말이다.
 
, 세상이 점점 좋아진다. 국민학생 때 누런 이문열 삼국지를 꾸역꾸역 읽었던 기억이 나는데, 지도며 인물관계며 머리에 남는 게 별로 없었다. 특히 지도. 인물은 자꾸 뒤섞였고. 근데 이 만화는 이미지로 먼저 뇌리에 도장 찍으니 짱짱맨이다. 요즘 애들은 얼마나 좋은가. 이런데도 책을 안 읽는단 말인가! 학생용이지만 정말 탐나는 만화 삼국지다. 그러니 얘들아 책좀 읽어라 책좀. 책 좀 읽어라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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