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은 지옥이다
비프케 로렌츠 지음, 서유리 옮김 / 고요한숨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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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타인은 지옥이다 심각하기 그지없는 사르트르의 말을 제목으로 빌려온 이 책은 지옥을 겪은 한 여자의 이야기다. 최근 내 마음이 지옥이라 못 견딜 것 같아, 현실을 잊을 뭔가를 붙들고 싶었다. 특별한 사건은 없다. 언제나 똑같은 일상 안에 내 마음만 지옥을 왔다간다. 첫 장을 열자마자 강력한 사건 한 방, 그리고 이어지는 여자의 과거와 현재. 그녀가 겪은 지옥은 강박증이라는 정신 장애를 불러일으키고, 이로 인해 여자는 사건으로 빠져들어간다


강박증은 얄궂게도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대상을 향해 나타나기에 여자는 소스라친다. 마음이 아픈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그들은 뒷걸음친다. 그들을 상처입힐까봐 너무나 겁내기 때문. 사람에게 사랑하는 것이 생기면 그건 곧 약점이 된다. 피투성이 상태로 눈을 뜬 여자는 절규한다. 두려움은 바로 그녀 손으로 현실이 되었다. 여자는 고통에 몸부림치며 삶을 간신히 디뎌간다. 
 
내가 아는 한, 우울증은 세상을 정확하게 보게 한다. 그 병의 속성 때문에 회복 과정에서 그들은 어김없이 성장한다. 자기가 원하던 요소가 아니더라도, 어떤 요소가 탁월해진다. 주인공 마리가 겪은 강박증 역시 그런 요소를 포함하고 있지 않을까. 자기를 의심하고 몇 번이고 의심하는 과정 가운데 복잡한 상황은 명확해진다. 자신과 세계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사건을 해결해 가는 열쇠는 그녀 안에 있었다. 
 
소설은 끝났지만 이 다음은 쓰여 있지 않다. 나는 안다, 이 사건이 해결되어도 그녀는 내내 아프고 고통스러울 것이다. 연약한 마음으로 오래 견뎌야만 한다. 사람들은 사건 이후에는 관심이 없다. 글은 쉽고 내용전개도 유려해 순식간에 막바지까지 읽어버렸지만 허무했다. 이 소설은 해피 엔딩일지도 모르지만 그녀의 인생에는 엔딩이 멀었다. 그걸 알아서 좀 힘겨웠다. 미스터리 소설의 소재가 되기 딱 좋을 만큼, 마음이 아픈 사람들이 내게는 더 아파온다. 
 

첨언) 미스터리 장르가 인기를 끌고 있다, SNS에 가득한 카드뉴스 덕분. 일단 클릭만 하면 이 책을 읽지 않고는 못 견딜 만큼 탁월한 콘텐츠 디자이너의 실력에 찬사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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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어른스러운 산책 - 교토라서 특별한 바람 같은 이야기들
한수희 지음 / 마루비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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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느린 시간을 보냈던 때가 언제였던가, 2004년 봄 말레시이사 페낭섬에서 머물렀던 때다일의 끈을 끊고학업의 끈을 끊고의무의 끈을 끊었으며 가늘고 굵은 여러 인연의 끈도 끊었다고 생각했다아주 작은 돈으로 생계를 유지하며굳이 일하지 않아도 지낼 수 있었던 시간지금 생각해 보면 내겐 유일한 여행이 아니었던가 싶다무엇을 보러배우러사진을 찍으러자료를 구하러 다니는 노력이 없었던그냥 시간을 흘려보내도 괜찮았던 시간과 공간인

 
아주 어른스러운 산책을 읽으며 마음이 조여 왔다나는 그렇게 살고 있지 못하기 때문서울이라는 도시가 시간에 쫓기는 분위기를 가져서가 아니다나는 어느 나라 어느 도시에 가도 여유롭게 산책하지 못한다대체 어디서부터 망가진 걸까이 글의 주인공 한수희는 매년 누군가와 함께 교토에 간다. ‘굳이 괜찮은 인간처럼 보이지 않아도 좋을’ 친구와 걸으면서 수다를 떨고지치면 조용히 시간을 보낸다그리고 살짝 고개를 돌려 정말 좋다그렇지?”라 마주보며 웃는다아아내게는 언제던가 그런 순간이
 
사실 그게 꼭 교토가 아니어도 된다지금 내가 서 있는 이 공간에서 순간을 누릴 때누군가를 찾아갈 때 나는 여행을 한다내가 순간을 멈추고 내가 그에게 전화를 걸고 그를 찾아가면 된다그 간단한 걸 못 해서 우리는 숨이 가쁘고 정신을 못 차리며 내내 외롭다
 
글은 처음부터 끝까지 부침 없이물 흐르듯이 흘러간다튀는 구석도 없고 파인 구석도 없다글을 따라 교토의(?) 시간 줄이 흐른다읽는 이는 이 글을 타고 조용히 함께 흘러간다주인공은 교토의 사진과 교토의 이야기를 씨줄과 날줄처럼 엮었지만읽는 이에게 이 사진들은 본인이 살고 있는 장소와 거기 얽힌 에피소드로 읽히리라사람 사는 곳은 일본이든 서울이든 사람의 이야기를 담고 있기에
 
어른스러운’ 이라는 단어는 밀도가 다르다단단하다뜨겁지는 않아도 차갑지 않다. ‘딱 적당한 상태가 어른스러움이 아닐까 나는 생각한다아주 어른스러운 산책의 저자는 이것을 잘 알아간 사람이 아닐까그 도구가 그녀에게 여행이었을 뿐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담백하다자극적인 에피소드를 기대한다면 이 책을 건드리지 말 것다만 사람이 얼마나 담백해질 수 있는지그걸 엿보고 싶다면 괜찮은 에세이다느리고 고요한 시간언젠가는 다시 만날 수 있겠지내가 어른스러운’ 어른이 된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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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의 연인
김현경 지음 / 책읽는오두막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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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좋아하지만 김수영을 좋아하지는 않는다사람들이 김수영 김수영 하는 것도 이해한다시알못 내게도 그의 시 정신은 가히 강인하고 혁명적이었으니까그러나 그는 가슴이 뜨거워서 버거운 인간이다. 나랑은 먼 인간이다. 내게 김수영은 처음부터 끝까지 기이한 인간이었다다른 인간과 어울려살면 안 되는사랑을 하면 할수록 상대에게 상처를 주는 인간굳이 화가와 비교하자면 빈센트 반 고흐나 뭉크’ 같다고나 할까그러나 그들과 김수영이 다른 것이 딱 하나 있다김수영에게는 그를 전적으로 감당했던 아내가 있었다는 것단 한 사람의 존재 덕분에 김수영은 죽기 전날까지 아내와 새벽 세 시까지 충일한 시간을 보내고다음 날 마음에 아쉬움 없이 세상을 뜰 수 있었다는 것그는 명실공히 설움의 시인적어도 그에게 사랑을 못 받은 데 대한 서러움과 아쉬움은 없었을 거다
 
김수영의 연인』 김현경 여사는 첫 장에 나는 시인의 아내다라는 이름을 붙였다그녀가 얼마나 그 호칭을 자랑스럽게 여겼는지 알 수 있다. 2장은 내가 읽은 김수영의 시이후로 이어지는 내용들은 대개 김수영 시를 선정한 후 관련된 에피소드를 첨부한 것으로이 시를 쓸 때 김수영이 어떤 상태였는지를 알려 준다그리고 무엇보다… 그는 힘든 사람이었다는걸. 정말 김현경이 아니었으면 그 어떤 여자도 받아주지 않았을 거라는걸. 
 
나는 김현경 여사도 김수영과 비슷한 부류의 인간이었다고 생각한다김수영이 워낙 똘기를 감추지 못하니 상대적으로 자기 똘기를 남편을 다독이는 데 사용했을 뿐그래서 오직 그 여자만이 그 남자를 감당할 수 있었다고 믿는다보통 여자가 그게 가능했을 수 없다일 년도 못 견디고 도망쳤다는 데 십만 원 건다
 
김현경은 김수영의 모든 기행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그의 시 세계를 이해하는 방향으로 사랑한다그 행동들을 모두 아름답다고 한다그럼에도 이 행동을 제3자의 입장에서 바라볼 때아무리 좋게 봐 주려도 김수영의 삶은 아름답다 말 못 하겠다. 무엇보다 길거리에서 뜬금없이 아내를 마구 때렸던 것 (나는 강신주의 해석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에게 어떤 설움이 있었을지 모르나 육체적 힘의 차이가 있는 남녀 간에 그건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그 어떤 이유로라도
 
김수영은 위대한 시인이었으나 남자로서는 참으로 이기적이다아무리 생각해도 그는 상위 0.00000000000000001% 나쁜 남자다그런데 그가 한 여자에게 받아들여졌다니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기적이건 뭐건 희한한 사건이다첨언하자면 김현경 여사도 희한한 사람이 맞다온 동네 문인들이 다 그녀의 사랑을 얻고자 매달렸으니 알 수 없는 일이다사람과 사람의 화학 작용은 알 수 없는 일이다그러니 내게도 세상에 이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걸 잊지 말 것, 0.000000001% 어쨌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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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빌리의 노래 - 위기의 가정과 문화에 대한 회고
J. D. 밴스 지음, 김보람 옮김 / 흐름출판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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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의 1973년작 도둑맞은 가난에는 가진 것이 가난 하나밖에 없는 여공 가 화자로 나온다아버지는 사업 실패로, 어머니는 체면으로 모든 걸 날려먹고 민폐만 끼치다 나중에는 연탄가스로 자살까지 한다외로운 는 어쩌다 지질한 남자 상훈을 만나 생활비를 줄이려 같이 산다그녀의 사랑도 가난다운 모양새다. ‘상훈은 알뜰한 에게 세상 못난 남자다호탕한 줄 돈을 아끼는 법을 모른다. 그러다 어느 날 홀연 사라진다. 떠나간 남자를 아파할 틈도 없이 생활에 몰두하던 어느 날, ‘상훈은 번쩍번쩍한 대학생 차림으로 를 찾아와 자기 정체를 밝힌다그는 그저 가난을 구경했을 뿐이란걸. ‘는 절망한다부자들은 가난마저 욕심낸다고가난까지 그들의 삶을 치장할 에피소드로 쓰다니가난마저 빼앗긴 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단 말이다가난마저 각을 떠 간 피 흘리는 빈곤이다
 
힐빌리의 노래를 덮는 순간 박완서의 단편이 떠오른 건 분명 그렇다가난을 경험하지 못한 이들이 상상하는 가난 해결 정책이 전혀 효과가 없다는 것 때문물론 힐빌리에서의 정책자들이 상훈의 가난 장난처럼 악랄하지는 않다그러나 가난이라는 건 이해하거나 분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절망해야만 알 수 있다는 걸 모른다는 데에선 동일하다
 
힐빌리는 누구인가, J. D. 밴스는 말한다나는 백인이긴 하나북동부에 거주하는 미국의 주류 지배 계급의 와스프는 아니다나는 스코틀랜드계 아일랜드인의 핏줄을 타고난 데다 대학 교육을 받지 못한 수백만 백인 노동 계층의 자손이다우리에게 가난은 가풍이나 다름없다우리 조상들은 대개 남부의 노예 경제시대에 날품팔이부터 시작하여 소작농과 광부를 거쳐 최근에는 기계공이나 육체노동자로 살았다미국인들은 이런 부류의 사람을 힐빌리레드넥, 화이트 트레시라고 부르지만나는 이들을 이웃친구가족이라고 부른다.” 쉽게 말해 힐빌리는 사회문화혜택을 받지 못하는 백인 최저소득 계층이다열심히 산다고 살지만 효율 없이 고생만 하고 그나마도 사회복지의 사각지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힐빌리로 태어난 J. D. 밴스는 그들이 어떤 생활을 하고 생각을 하고 살아가는지 감정의 동요 없이 담백하게 적어내려간다
 
책은 크게 1내 인생의 뿌리힐빌리에 관하여와 2힐빌리의 이방인그러나 벗어날 수 없는 그늘로 구성된다. 1부와 2부의 결은 매우 다른데전편은 불운한 밴스의 가족과 그 사이에서의 성장과정후편은 그에게 다가온 운을 붙잡아 나아가는 과정에서 그가 얻은 인사이트즉 힐빌리 문화를 어떻게 바라보고 접근해야 하는지에 대한 물음과 이에 대한 문제 제기다처음부터 끝까지 J. D. 밴스는 자기 성공담을 이야기하지 않는다자기가 어쩌다 운이 좋았음을 이야기한다그는 더 노력하라고 하지 않는다마음이 망가지고 문화가 절단된 이에게 바른 방향의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민간 세계에서 부하직원은 업무 시간만 지나면 상사의 간섭을 받지 않는다그러나 해병 상관은 내가 일을 잘하고 있는지만 확인하는 게 아니라방을 깨끗하게 치웠는지머리를 단정하게 깎았는지제복을 다림질했는지까지 확인했다. (중략내게 해병대는 통솔력이란 부하들을 쥐 잡듯 잡음으로써가 아니라 그들의 존경을 받음으로써 생긴다는 사실과내가 어떻게 해야 그런 존경을 받을 수 있는지를 가르쳐준 곳이다그리고 각기 다른 인종과 사회계층 출신의 남녀가 한 팀을 이루어 가족과 같은 유대를 맺고 작업할 수 있다는 것을 일깨워준 곳이다. (중략내가 처절하게 실패할 수 있는 첫 번째 기회를 주면서 어떻게든 그 기회를 잡도록 하고실패했을 때에는 어떻게 해서든 두 번째 기회를 준 곳이 해병대였다. (중략능력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능력은 당연히 큰 도움이 된다그러나 노력 부족을 능력 부족으로 착각해서 스스로의 가치를 떨어뜨리며 살아왔다는 사실을 깨닫는 건 굉장히 중요하다이것이 사람들이 내게 백인 노동 계층의 어떤 점을 가장 변화시키고 싶으냐고 물을 때마다내가 자신의 결정이 중요하지 않다고 느끼는 마음이라고 대답하는 까닭이다해병대는 외과 의사가 종양을 도려내듯 내게서 그런 마음을 도려냈다
 
J. D. 밴스에게 최초의 기회는 해병대에 간 것이었다집에서 학습된 무기력을 배웠다면 해병대에서 학습된 의지를 습득했다” 나는 그의 해병대’ 서술에서 굉장한 감화를 받았다아무래도 직업 때문인 것 같다세상의 의견과 좀 다를지 모르지만 나는 요즘 학교에서 가장 우선해야 하는 건 창의성보다는 인내라고 생각한다최소한의 인내 없이는 창의성의 재료로 사용할 최소한의 지식조차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무엇보다 인내 부족은 노력할 기회를 박탈한다. 그뿐만 아니라 기본적인 배려를 무시하게 한다마음과 몸 모든 면에서 치명적인 결함을 만드는 것이다밴스는 해병대에서 처음으로 제대로 된 제련을 받는다적절한 사회적 행동과 예의범절을 배운다알지 못했던 경제적 힌트와 사회적 자본올바른 충고를 경험한다이전에는 얻지 못했던 것들이다이런 과정 안에서 자기 효능감을 발견한다자신도 타인을 보호할 수 있고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존재라는걸. 자신도 아이비리그에 진학할 수 있고 로스쿨에 갈 수 있다는 걸 배운다’. 이를 가능하게 한 건 새로이 얻은 가느다란그리고 점점 촘촘해지는 사회적 자본이었다
 
밴스는 아직도 아프다고 한다과거의 습관과 생각의 패턴이 돌발 사건을 일으킬 때마다 이를 통제하려고 주의한다고 한다이를 이해하고 기다려 주는 아내와 가족 덕분에 나은 삶을 살고 있다고 기뻐한다. 그러나 담담한 서술 가운데에서도 스멀스멀 올라오는 불안은 감출 수 없다. 가난이 남긴 상처는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평생을 지배한다나는 단언할 수도 있다

그동안 힐빌리들은 자기의 언어가 없었다힐빌리를 상상하는 이들이 힐빌리를 이야기하고 있었을 뿐힐빌리의 노래가 이러한 반향을 가져온 이유는 드디어 그들이 자기 언어로 이야기하기 시작했기 때문이 아닐까우리 역시 마찬가지다내 곁의 누가 입을 열지 못하고 있는가마땅히 귀를 열고 들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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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4 - 1부 4권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 (마로니에북스) 4
박경리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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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삶은 평화로운 적이 드물다앞서 윤씨 부인과 봉순네 등 서희의 방패가 되어주던 어른들이 호열자로 사망하자서희의 재종인 조준구가 최 참판 댁을 접수한다최 참판 댁은 조 참판 댁으로 불릴 정도로 과거의 영광을 잃고조준구는 무참하도록 악행을 저지른다그는 이미 망해버린 나라에서 친일파로서 자기 자리를 잘 잡는다절대 악이다그 누구도 그에게서 호의를 기대할 수 없다어느 날 수동이조차 사망하자 서희는 막다른 데 몰린다조준구가 자기 아들과 결혼시켜 그녀를 허수아비 만들려는 계략을 세우나 버티기가 힘들다봉순이와 길상이로는 무리다조금 컸다 해도 역부족이다봉순과 길상은 서로 끌리는 마음을 어찌할 줄 모르나무엇을 우선순위로 두어야 할지 모른다이 감정이 너무나 강력해서자기 마음을 어찌해야 할지도 모르는 게 사랑과의 첫 만남이다
 
김훈장과 윤보이용은 의병을 일으킨다길상이도 이에 함께 한다조준구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이들은 산으로 도망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생겼다아무리 고민해도 방법이 없다여기를 떠나는 것밖에는그들은 간도행을 결심한다서희와 가족들을 설득하고자 한다
 
월선이는 생사를 모르는 용이를 애달피 기다린다임이네는 남편 용이가 어찌 되었든 제 살 길 찾기에 바쁘다오히려 월선이를 이용해 배불리 먹고살려 한다용이의 아들 홍이는 월선이보고 간도댁옴마라고부른다용이를 닮은 홍이 손을 쥐어보며 월선이는 애틋함을 느낀다내 연적의 아이인데도 내가 사랑한 남자의 아이이기에 그런 애정을 느끼는가나는 월선의 마음이 조금 두려웠다감히 범접할 수 없는 큰마음이기에 그랬다
 
이자 다시는 떨어지지 말자.”
.”
꿈결처럼 잠꼬대처럼 대답한다
이대로 죽어부맀이믄 싶다.”
눈물에 흠뻑 젖은 얼굴을 부비며 용이는 이 세상 모든 것을 잊은 듯풍랑의 바다에서 항구로 찾아온 듯 격렬하고 평화스럽게 희열하며 몸을 불태운다이윽고 사내는 재[속에 묻혀 들어가고 여자는 불안을 안고 일어서려 한다
임자.” 
빠져나가려는 몸을 끌어당긴다. “많이 야빘구나.”
늙어부맀소.”
늙으믄 우떻노우리 함께 늙는데.” 
 
용이와 월선은 재회한다월선이 그렇게 큰마음을 지닐 수 있었던 건전적으로 사랑받았던 경험 때문이며마지막까지 사랑받았다는 확신이 아니었을까이 답 없는 두 사람은 계속 한심한 사랑 노래를 부른다반란이 들켜 목숨이 위태하고 당장 간도로 도망가야 하는 상황에서도 사람의 온기는 절대적인 거다사람은 그렇게 위태한 존재다
 
봉순아.”
…….”
우리 거기 가믄 호혼인하자어떡허든지 무사하게 진주로 가야 한다!”
…….”
내 맹세하라믄 하하지.” 
그러나 봉순이는 뛰기 시작했다
봉순아!” 
부르다가 풀이 죽어서 뒤돌아보았을 때 용이는 강가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용이 떠난 뒤 봉순이는 길상을 만나지 않았다월선을 사이에 두고 연락을 취했을 뿐길상은 여러 번 월선을 통해 봉순이를 만나려 했으나 허사였다백주에 나다닐 수 없는 처지였기 때문에 월선의 집을 낮에 다녀가는 봉순을 만날 도리가 없었다설마 한 번쯤 와주겠지 하는 기대 때문에 기회를 놓치기도 했었다
 
봉순이는 길상을 못내 외면한다마음과 마음이 끝까지 마주할 수 없을 때가 있다서로의 마음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는이건 머리로가 아니라 혼으로써 아는 운명 때문이 아닐까사람의 마음이 아무리 정확해도 운명이 허락하지 않으면 생의 갈 길은 못 간다그건 알 수 없는 힘이다오해처럼 보여도 그건 정확한 힘이다. 지금 당장은 확신하지 못하지만 길상의 마음은 봉순에게 100퍼센트가 아니었으니. 봉순이도 길상이도 그리할 수밖에 없는 거였다고 생각한다조금 살아본 모두가 알지 않는가세상에는 얼마나 이러한 엇갈림이 많단 말인가
 
천질인지 혹은 다만 병적 체구 탓인지 병수는 감수성이 빨랐다직감은 정확했고 본능적으로 상대방의 특질을 파악한다단순히 선악의 기준에서 파악한다기보다 사람들 성격의 빛깔이랄까 분위기랄까의식한 것은 절대 아니지만 지극히 탐미적인 요소를 띤 느낌 같은 것이라 할까시원찮은 선생이었으나 이초시한테 소학(小學)을 배우고 통감(通鑑)을 떼고 사서(四書)를 배우면서 도덕률에 의한 가치를인간 행위의 존엄성을 헤아리는 의지를 지각하게 된다실로 병수는 조상이 남겼을 가풍에 접한 일이 없었고 부모의 훈도를 받은 일이 없었으며 스승의 인격을 느낀 바도 없었으나 옛날 성현의 글그 행간 행간에 배어난 위대한 사상을 가르치는 사람의 의도를 훨씬 넘어서 흡수하고 깨달으며 비약하고 상승해갔다물론 십오 세라는 나이의 한도에서 우수했었다는 얘기다이러한 자질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조석으로 함께 기거하는 이초시도 병수 내부에 형성되어가는 과정을 엿보지 못했고 부모 역시 그러했다관심이 없었다는 것도 이유겠으나 그들은 모두 어느 면으로서든지 범속한 인물들이었으니까
 
나는 사람이 날 때부터 종류가 정해진다고 믿는다그렇게 살 수 있는 사람과 그렇게 살 수 없는 사람이 있다그리고 나는 그렇게 살 수 없는 사람의 종족이다병수는 몸이 부자유했지만 감각은 탁월했다그도 나처럼 사람을 색과 분위기로 읽는 사람이다무어라 정확히 분류할 수 없지만 수용과 비수용으로 감각하는 인간 종족그들의 삶은 둔하지 못해 편치 않다병수 역시 고단한 생을 살아가리라그는 고단한 몸을 넘어서 큰 그릇을 열어 살아가리라범속한 인물들은 그런 인간들을 결코 이해할 수 없다아니 결코 알아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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