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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어른스러운 산책 - 교토라서 특별한 바람 같은 이야기들
한수희 지음 / 마루비 / 2018년 7월
평점 :
마지막으로 느린 시간을 보냈던 때가 언제였던가, 2004년 봄 말레시이사 페낭섬에서 머물렀던 때다. 일의 끈을 끊고, 학업의 끈을 끊고, 의무의 끈을 끊었으며 가늘고 굵은 여러 인연의 끈도 끊었다고 생각했다. 아주 작은 돈으로 생계를 유지하며, 굳이 일하지 않아도 지낼 수 있었던 시간. 지금 생각해 보면 내겐 유일한 여행이 아니었던가 싶다. 무엇을 보러, 배우러, 사진을 찍으러, 자료를 구하러 다니는 노력이 없었던. 그냥 시간을 흘려보내도 괜찮았던 시간과 공간인.
『아주 어른스러운 산책』을 읽으며 마음이 조여 왔다. 나는 그렇게 살고 있지 못하기 때문. 서울이라는 도시가 시간에 쫓기는 분위기를 가져서가 아니다. 나는 어느 나라 어느 도시에 가도 여유롭게 산책하지 못한다. 대체 어디서부터 망가진 걸까. 이 글의 주인공 한수희는 매년 누군가와 함께 교토에 간다. ‘굳이 괜찮은 인간처럼 보이지 않아도 좋을’ 친구와 걸으면서 수다를 떨고, 지치면 조용히 시간을 보낸다. 그리고 살짝 고개를 돌려 “정말 좋다, 그렇지?”라 마주보며 웃는다. 아아, 내게는 언제던가 그런 순간이. 사실 그게 꼭 교토가 아니어도 된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공간에서 순간을 누릴 때, 누군가를 찾아갈 때 나는 여행을 한다. 내가 순간을 멈추고 내가 그에게 전화를 걸고 그를 찾아가면 된다. 그 간단한 걸 못 해서 우리는 숨이 가쁘고 정신을 못 차리며 내내 외롭다. 글은 처음부터 끝까지 부침 없이, 물 흐르듯이 흘러간다. 튀는 구석도 없고 파인 구석도 없다. 글을 따라 교토의(?) 시간 줄이 흐른다. 읽는 이는 이 글을 타고 조용히 함께 흘러간다. 주인공은 교토의 사진과 교토의 이야기를 씨줄과 날줄처럼 엮었지만, 읽는 이에게 이 사진들은 본인이 살고 있는 장소와 거기 얽힌 에피소드로 읽히리라. 사람 사는 곳은 일본이든 서울이든 사람의 이야기를 담고 있기에. ‘어른스러운’ 이라는 단어는 밀도가 다르다. 단단하다. 뜨겁지는 않아도 차갑지 않다. ‘딱 적당한 상태’가 어른스러움이 아닐까 나는 생각한다. 『아주 어른스러운 산책』의 저자는 이것을 잘 알아간 사람이 아닐까. 그 도구가 그녀에게 여행이었을 뿐.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담백하다. 자극적인 에피소드를 기대한다면 이 책을 건드리지 말 것. 다만 사람이 얼마나 담백해질 수 있는지, 그걸 엿보고 싶다면 괜찮은 에세이다. 느리고 고요한 시간, 언젠가는 다시 만날 수 있겠지. 내가 ‘어른스러운’ 어른이 된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