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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벌 - 상 ㅣ 열린책들 세계문학 1
도스또예프스끼 지음, 홍대화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평점 :
오늘도 뉴스난에는 어떤 악행을 저지른 범죄자에게 얼마의 형벌이 내렸다는 기사가 오르내린다. 세상에 사회란만큼 다종다양한 의견 개진이 가능한 댓글 창은 없을 것 같다. 생계형 범죄를 저지른 누군가에게 ○년 형을 내린 것은 과하다는 의견,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누군가에게 ○년 형을 내린 것이 부족하다는 의견, 심신 미약으로 약한 형을 준다는 것이 옳지 않다는 의견 등 수많은 네티즌의 해석이 난립한다.
한 사람의 목숨 값은 얼마일까. 이것을 끊어버린 인간에게 몇 년의 형벌이 적당한가? 이 목숨 값을 싸구려로 만든 방법은 얼마나 잔인한가. 목숨 값과 존엄 값 사이에서 ‘적당(的當)’이란 ‘합리(合理)’의 영역이다. 죄는 참혹하도록 복잡하나 벌의 기준이 되는 인간의 법은 단순하기 그지없어 법을 다루는 검사와 판사, 변호사들은 저마다의 합리로 이 죄의 양을 재단하고 수량화한다. 얼마큼의 벌을 주고 범죄자가 이를 감당해야 하는지를 고민한다.
자연스레 도스토옙스키의 역작 『죄와 벌』이 떠오른다. 그리하여 집어 든 이 책, 꼬박 이틀을 붙잡은 『죄와 벌』은 내게 ‘죄’의 영역을 합리화할 수 있는가, 인간의 몸과 마음을 가두는 ‘벌’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것이 아닌가 싶다. 사실 고민할 필요도 없이 답은 정해져 있다, 묻고 답하는 것은 그저 인간이기에. 인간이 어찌 선과 악을 수량화할 수 있는가? 죄를 짓는 것도 인간이고, 죄를 심판하는 것도 인간일 때 이는 답 없는 논쟁이 될 수밖에. 내가 보기에 사람은 그저 죄 안에서 살고 벌 안에서 산다. 그렇기에 늘 고통스럽다. 덜 고통스러우려 죄를 안 지으려 한다. 그저 그것뿐이다. 라스콜리니코프가 제아무리 굳게 세운 초인 사상을 가지고 있고, 인간 같지 않은, 이처럼 더럽고 하찮은 악인(惡人)을 ‘제거’한 것일 뿐이라 합리화해도 순간순간 더 끔찍해지는 것은 인간이 죄와 벌 안에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살아가면 살아갈수록 ‘합리’란 삶에서 겉돌기 일쑤란 것만 경험한다. 아무리 머리를 굴리고 또 굴려봐야 소용없어. 인간이 만든 모든 이성적인 사상과 합리적 이론은 언제든 그 선(線)을 경계로 무너져 버린다. 제아무리 그의 날카로운 사상과 완벽한 계획이, 게다가 겹치는 우연이 그를 보호한다 쳐도, 예상치 못한 선인(善人)의 살해가 발생했을 때의 균열은 그 모든 것을 무너뜨린다. 그 어떤 합리도 리자베따를 살해한 그의 행위를 위로할 수 없었다.
라스콜리니코프의 모습은 누가 뭐래도 분열 그 자체다. 확신을 가지고 사람을 죽이고도 안절부절못하며, 기껏 가지게 된 돈을 어려운 이를 위해 쓴다. 자신을 위해 헌신하는 동생 두냐를 비난하며 ‘그렇게 살지 말라’ 하고, 가족을 위해 몸과 영혼을 파는 소냐 앞에서 무너진다. 합리적 사상으로 살인을 저지른 엘리트의 흔들림은 전혀 합리적이지 않다.
그건 인간에게 ‘마음’이 있기 때문. 좀 우스운데 나는 왜 이현우 씨가 자기 필명을 ‘로쟈’라고 붙였는지 알 것 같더라. 똑똑하고 부족할 것 없는 모습이지만 막상 사회 구조 안에서 대단한 행동을 내비치지 못하는, 선과 악 사이에서 쉴 새 없이 흔들리고 번번이 변명하는 그런 복잡한 인간. 그렇기에 흔들리다 지친 순간, ‘날 받아줄 것 같은’ 소냐 앞에서 무너져내린 한 연약한 남자의 모습. 곧이어 감옥에 가기 싫다며 고개 흔드는 이기적인 인간의 모습이 어쩜 그리 현실적이면서 따뜻한지. 간신히 균형을 잡느라 정신 못 차리는 인간 라스콜리니코프는 최근 내가 경험한 가장 매력적인 소설 주인공이다. 세 번째 『죄와 벌』 독서에서 내 시선을 내내 잡아끈 건 라스콜리니코프의 우왕좌왕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이번에도 눈길을 끄는 건 소냐의 성녀 같은 사랑의 그릇. 하다못해 리자베따는 소냐의 친구가 아니었던가, 친구를 살해한 남자가 자신에게 매달릴 때 “당신을 절대로 버리지 않겠어요”라며 품는 사랑의 거대함은 몇 번을 읽어도 감동 그 자체다. 아주 오랫동안 소냐 같은 사랑을 할 수 있기를 바라 왔지만, 이제는 안다 그릇의 크기는 하늘이 내리는 것이라는걸. 나는 소냐를 바라보기는커녕 두냐를 꼭 닮은 인간이다. 난 안 된다는 걸 알지만 일단 이미테이션으로라도 사랑하기로 한다.
오랫동안 그에게는 낯설었던 감정이 파도처럼 그의 영혼에 스며들어, 순식간에 그의 마음을 적셨다. 그는 그 감정을 거부하지 않았다. 눈에서 눈물 두 방울이 흘러내려, 속눈썹에 맺혔다. “그럼, 나를 버리지 않는 거야, 소냐?” 그는 일말의 희망을 느끼며, 그녀를 바라보고 물었다.
“아니요, 아니에요. 절대로 언제까지나, 그 어느 곳에서도 버리지 않을 거예요!” 소냐는 부르짖었다. “당신을 따라가겠어요, 어디든 따라가겠어요! 오, 하느님…! 오, 나는 불행한 여자야…! 왜, 왜 난 당신을 좀 더 일찍 만나지 못했을까! 왜 당신은 좀 더 일찍 오지 않았어요? 오, 하느님!”
“이제 왔잖아.”
“지금에서야 오다니! 오, 이제 어떻게 하면 좋아…! 함께, 함께!”
그녀는 넋을 잃고, 똑같은 말을 반복하며 그를 안았다. “당신과 함께 감옥에 갈 거예요!”
인간다운 죄악과 신적인 사랑 가운데에서 도스토옙스키가 무엇을 더 말하고자 했을까, 이전에는 두 가지가 균형을 이루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번에는 좀 다르다. 도스토옙스키는 아무래도 좀 더 인간적인 ‘죄악’에 더 애정을 갖고 있지 않았을까. 그렇기에 생(生)에 끼어드는 비합리적인 빛은, 아니 기적은 더 놀라웁다. 인간의 삶은 이렇게나 알 수 없어 살아볼 만하다. 한 번쯤 끝까지 살아볼 만하다.
라스콜리니코프에게 일어난 균열 혹은 기적이 내게도 일어날지도 모른다. 꼭 소냐 아니라 무엇이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