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3년 세기의 여름
플로리안 일리스 지음, 한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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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을 앞둔 시절은 아름답다절정(絶頂)을 구가하고 있기 때문이다가장 대표적인 그때가 유럽의 19세기말흔히 그 시기를 벨 에포크(Belle Époque)’라고 부른다이 시절을 살던 이들은 몰랐다얼마 지나지 않아 1914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야 만다는 걸참혹을 보았을 때 절망처럼 사라져 간 아름다운 시절을 독일 예술사가 플로리안 일리스(Florian Illies)가 책 한 권에 담았다1913년 세기의 여름은 벨 에포크처럼 아름답기 그지없다
 
지금부터 백여 년 전, 1913년은 그야말로 모든 예술이 하나하나 꽃핀 시기다문학음악미술건축사진패션… 그 어떤 것도 빠지지 않는다내가 오랫동안 사랑해 온 예술가들과 미처 몰랐던 예술가들이 각각의 챕터 안에서 자기 존재감을 밝힌다어찌 생각하면 너무 당연한 구성이다. 1월부터 차곡차곡 12월이라니마치 1913년 누군가의 월간 다이어리를 보는 것처럼이 다이어리는 일별로 구분하지 않은 커다란 백지다그는 여기저기에 예인(藝人)들의 이야기를 적는다가끔은 정갈하게가끔은 휘갈겨서앞서거니 뒤서거니 그들의 이야기는 얼키고 설켜 기묘한 분위기를 만든다이 책의 광고 중에 마술적 리얼리즘 소설의 한 장면을 읽는 것 같다,”는 카피가 제격이다이 책의 노고는 그야말로 자료 수집에 있다플로리안 일리스는 3년에 걸쳐 자료를 수집해 이 글을 썼다고 한다사실 구성은 어이없게도 너무 상식적이다왜 이런 생각을 그간 해내지 못했을까어찌 보면 너무나 순차적인데역시 창의력은 관찰력이라는 걸 실감한다
 
2014년 이 책을 소개받아 처음 읽을 때는 술술 읽었다이 예인들의 뒷이야기 수다를 듣는 기분으로 벨 에포크의 분위기를 경험했다두 번째 읽을 때는 페이지마다 등장하는 미술가와 음악가문학가정치가의 이름에 각기 다른 색으로 포스트잇을 붙이며 읽어나갔다세 번째 읽을 때는 기억할 만한 사건에 포스트잇을 붙였다세 번을 읽고 나니 어느 정도 흐름이 잡혔다이 시기는 모더니즘의 종말에 다다른 시기다예민한 인간들로 가득한 예술 분야가 특히 그랬다정치적으로는 제국주의와 민족주의가 패악을 부렸다날씨는 작열(灼熱그 자체다어디 폭발하지 않으면 안 될 분위기였다. ‘절정(絶頂)’이었다는 이야기다
 
개인적으로는 독일 표현주의의 다리파와 청기사파 이야기마르셀 푸르스트와 토마스 만의 주변 이야기가 기억에 남았다저자가 많은 분량을 할애했기도 하지만 내 관심사가 그곳에 있기도 했다마침 얼마 전 토마스 만의 토니오 크뢰거베네치아에서의 죽음을 읽었기에 타이밍이 또다시 좋았다매 달마다 뜬금없이 나오는 모나리자이야기도 긴장 풀기에 좋았다나는 정치 영역에 꽤 무지한데히틀러와 스탈린 이야기는 기대하지 않았다이 책에는 300명이 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온다고 하는데그 모든 사람들은 각자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었다. 2018년 서울에 사는 내가 그러하듯이1913세기의 여름』 역시 인간의 이야기이다삶의 핵심은 어디에나 인간이므로.
 
역시 나는 수다쟁이를 좋아한다그것도 내가 좋아하는 이야기를 청산유수(靑山流水)로 해 주는 사람을아니 책을이 책을 읽으면서 의외로 내가 인간의 이야기를 좋아한다는 걸 깨달아 놀랐다그동안 야사를 읽어본 적이 거의 없었는데예술가들의 뒷이야기 투성이인 1913년의 다이어리는 참으로 매력적이다벨 에포크는 이다지도 매력적인 인간으로 가득했다나는 얼마큼 매력있는 인간인가내가 아는 누가 이렇게 매력적인가매력은 매력으로 네트워크한다그러니 아름다운 시절은 언제든 다시 올 수 있다매력있는 사람과 사람이 만날 때하나 둘셋 넷 만날 때 우리는 아름다운 시절을 다시금 만들고 있다

설령 아름다운 시절이 몰락해도 괜찮다. 몰락 이후에는 또다른 시작이 있으니, 예를 들면 20세기 같은 그런 것. 아름다운 시절을 겪었다면 몰락조차도 그저 아름다울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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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위한 철학수업 - 자유를 위한 작은 용기 문학동네 우리 시대의 명강의 5
이진경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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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책이 안 들어와서 괴로웠다글은 줄줄 읽는데 몸과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단기기억은 장기기억으로 들어가지 못한다김수영 전집이 겉돌았다매년 잊어버리고 또 외우는 그 여름의 끝도 이전만큼의 감동이 없다어쩌면 좋아주홍 표지의 책을 두 번이나 읽었는데도 가슴이 움직이지 않아서 절망했다나는 반응하지 않는 건가내 마음은 이다지도 망가진 건가
 
독서대에 책을 세우고 노트북을 열었다찬찬히 써 내려갔다. 손글씨 필사는 상상으로도 감당할 수 없으니자판의 속도대로 생각의 속도를 늦춘다내가 그은 밑줄은 정말 각 꼭지들의 핵심이었는데나는 분명 열심히 읽었는데글줄이 그냥 나를 스쳐간 것 같다붙잡고 싶다어떻게든 붙잡아야 한다말도 안 된다이렇게 마음 없이 사는 건 너무나 부끄럽다
 
내 세상에 은 무엇인가내게 상처 준 적이 없는 유일한 존재다어떤 순간에도 책은 나와 함께 있었다그럼 그중에 ‘철학 책’은 무엇인가처음 읽은 철학 인문서를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처음 읽은 철학 책은 기억한다소크라테스의 변명생각의 폭을 넓혀준이제 철학 책도 읽을 수 있다는 자신감의 첫 씨를 심은 책이다그럼 나는 철학을 알고 있는가삶을 위한 철학수업 띠지에는 철학이 우리 삶을 구원하리라"라는 말이 쓰였다글쎄이건 아무리 봐도 허풍이 아닌가삶을 온전히 구원할 수 있는 건 어디에도 없다심지어 나 자신조차도 그렇게 못한다다만 철학은나를 도울 수 있을 뿐이다. “한번 살아 보라고 용기를 제안할 뿐이다이 책의 핵심은 그렇다처음부터 끝까지 용기
 
삶을 위한 철학수업』 최고의 장점은 쉽다는 것이 천민자본주의 사회에서 돈 없고 백 없는 한 사람으로 살아가면서 누구나 겪을 수 있는 대면 과제들을 선정했다는 것어려운 철학자의 이름이나 이론도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조금 철학 썰을 풀어본다고 해 봐야이름도 낯익은 칸트니체스피노자 정도다. 대중의 사랑을 받아온 영화, 애니메이션 등을 적극 활용하여 이해를 돕는다. 사건-사고, 헝그리 정신-궁상, 강자-약자, 소시민과 난쟁이, 자존심-자긍심 등의 섬세한 단어 선택은 섬세한 사고로 인도한다. 그뿐인가, 자신의 과거도 술술 풀어낸다주로 고통의 문제다감옥에 들어가야만 했던 순간과 차가운 벽을 마주하며 절망한 순간, 5년간 마음을 쏟은 공동체가 해체되었던 순간과 원망아내를 독일에 유학 보내고 외가에 아들을 맡겨놓았던 아이의 쓸쓸한 순간과 선물 같은 순간을 이야기한다독자가 저자를 사랑하는 순간은 언제인가저자가 자기의 이야기를 허영 없이 풀어낼 때다, ‘망한’ 이야기를 솔직하게 털어놓을 때 독자는 저자에게 공감을 느끼고 그의 겸손함을 사랑하게 된다
 
사람은 매일 삶을 외줄타기 한다. ‘을 지키기가 어렵다자칫하면 휘청거리고 쓰러진다위태한 순간을 간신히 붙잡아 다시 선에 올라탄다자신 없는 삶에 머뭇거리며 다시 올라타는 것이 용기다하루 더 살아가겠다는 용기비루해 보이는 삶도 내가 품어 따뜻하게 하겠다는 의지가 내 삶에 대한 긍지다완전히 망가져서 희망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순간에도 마음을 그냥 내버리지 않는 것그것이 나의 용기이며 긍지였다그리고 이것이 나의 철학이다이 책을 한 번 더 붙잡은 건 저자가 이야기하는 용기였다고 생각한다
 
철학은 공부하는 것이 아니다철학은 살아내는 것이다철학의 궁극적 목표는 자유그러나 여기에는 피 흘리는 것을 전제로 한다대가를 치르는 자유는 편치 않다안정이 없다그러나 철학하며 사는 사람은 종래 자유에 다가간다오랜 시간이 걸릴지라도 결국에는 다가간다철학은 그리할 수밖에 없는 길이므로자유로 끌고가는 학문이므로우리는 철학이 어렵다는 편견에 갇혀 철학 하며 살 엄두를 못 낸다그러나 단언컨대 우리 모두는 각자의 철학대로 살고 있다이 철학이 어떠한 빛을 내는지어떠한 강도를 가졌는지어디 앞에 용기를 주는지는 다르다나는 내가 살아가고 있는앞으로 내내 붙들고 살아갈 내 철학을 믿는다
 
만신창이 몸과 마음으로 살아가는 내가그래도 철학하고자 하는 것연약한 내 철학을 버리지 않는 것이 감각은 아무도 모른다이런 부끄러움을 간신히간신히 견디며 뭐라도 허우적거리는 것이것이 내 삶의 필로-비오스임을 나는 믿는다나는 나를 믿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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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6 - 2부 2권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 (마로니에북스) 6
박경리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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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6권은 꽉 채워 온 동네 애정사다. 특히 마음 정한 서희의 강력한 액션거기에 폭발하는 길상의 액션이 엄청나다지금도 처지가 다른 남녀의 결합은 어렵기 그지없다신분제가 남았던 예전에는 어떠했을까갈등갈등 그리고 또 이도 저도 못하는 갈등길상의 내연녀 옥이네에게 찾아간 서희는 거기 두고 간 길상의 목도리를 보고 질투를 느끼고 돌아온다길상은 이에 만취해 최서희가 잘났으면 얼마나 잘났어천하를 주름잡을 텐가어림도 없다!” 서희 앞에 막말을 쏟아내고 서희 역시 패악한다새로 사 온 목도리를 집어던지면서난 길상이하고 도망갈 생각까지 했단 말이야다 버리고 달아나도 좋다는 생각을 했단 말이야.” 
 
다음날 얼굴을 마주 볼 수 없는 두 사람다 끝난 줄 알았던 관계는 의외의 사건으로 확고해진다용정행 마차 사고이를 통해 길상은 종신 종놈이 되어서라도 서희 곁에 있고 싶은 게 너 본심 아니었나안 그렇단 말이냐떠난다 떠난다 하면서 왜 못 떠나지?” 서희를 떠날 수 없는 자기 운명을 인정하고 그에게 일생을 걸기로 한다서희의 야망을 위한 것임을 다 알지만 서희가 뜻하는 대로
 
사랑은 교통사고라는 말이 여기서도 적용되는가벼락같은 사고 때문에 크게 다친 서희는 대신 원하는 것을 얻는다길상 역시 바라던 것을 얻는다순결하지 않아도 뜨겁게 열망했던 곳으로 간다천재지변조차 누군가를 위해 무엇인가를 한다이 잔인한 세상이 극한으로 칼을 휘두르다가도 한 번쯤은나를 위해 무언가를 해줄 수도 있다는 거다만신창이 사람의 생은 내일을 알 수 없어서 하루 더 살아볼 만하다마침 피투성이 마음이던 나는 이 사고에서 큰 위안을 얻었다또 다른 사고가 와도 나는죽지 않고 살아남을 것이다끝끝내 무엇인가를 얻고야 말 것이다
 
"길상의 사랑이 범상한 남녀의 사랑일 수 없게 잘 조련되어온 것이었다 할지라도관음상(觀音像)을 향해 느끼듯이전혀 일방적이요 정밀한 그런 유의 사랑이었었다 할지라도어느 날 갑자기 그 대상이 이쪽으로 인하여 고통을 받게 된다 할 것 같으면 그것은 무상(無償)에서 보상으로 간주될 수 있는 일이요 상대의 고통이 고통으로 오되 희열이 따를 것이 거의 틀림이 없다그런데 길상은 왜 절망하는 것일까견디기 어려운 오뇌 속으로만 빠져들어 가고 있는 것일까더이상 접근할 수 없는 거리에서 이상현은 빙빙 돌다가 떠나고 말았다그들의 접근할 수 없었던 거리는 길상과 서희 사이의 거리이기도 하다서희의 대상으로서 상현은 사모(思慕)와 기혼자(旣婚者), 이 두 상극 선상(相剋線上)의 존재요 길상은 야망(野望)과 하인(下人), 그러나 이것은 반드시 상극된 것은 아니다야망은 불순물이다불순물은 혼합될 수 있는 것이다상현과 사이에 질러놓았던 지름목은 길상과 서희 사이에는 제거될 수 있는 것이며 그것을 드러내려는 서희의 모험을 길상은 잘 알고 있는 것이다서희가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다 해주고 싶다던 그러나 길상은 그것만은 용납할 수가 없다서희와의 거리는 절체절명의 것이다왜냐자존심 따위사내로서의 오기 따위 그런 것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사랑의 순결 때문이다순결을 지키고 싶은 때문이다대체로 길상의 심정은 이런 정도로 밝혀볼 수 있겠고 서희의 경우길상이 생각했던 것처럼 서희 역시 그렇게 믿고 있음이 틀림없다시초부터 야망의 수단이 아닌 길상과의 결합은 가능할 수 없었다적어도 길상과의 결합에 그것 이외 어떤 구실로 서희는 자신을 설득시킬 수 있었겠는가자식을 버리고 구천이를 따라간 생모를 생각해서라도그렇다면…… 서희의 보다 깊은 영혼 속에는 숙명적인 길상과의 애정이 잠을 자고 있었다 할 수는 없을까무시무시한 내적 투쟁은 과연 야망의 좌절에서만 빚어졌다 할 수 있을까강렬한 질투강렬한 패배감광적인 증오심." 
 
서희에게 거절당한 상현은 조선으로 돌아와 마음잡지 못하고 헤매고길상의 일편단심으로 간도행에 따르지 않은 봉순기생 기화를 만나러 간다별당아씨를 떠올리며 세상을 원망하는 환이는 진달래 화전 같은 사랑의 흔적을 떠올린다그는 윤씨부인이 남겨준 혼수’ 땅문서를 독립운동자금으로 쓸 것이다조준구 때문에 목숨을 잃은 정한조의 아들 석이가 등장한다아비 없이 고생하던 그는 구원 같은 손을 붙잡고 의병 내에서 자기 자리를 잡는다.
 
토지 6을 끝맺으며 깨달은 것, ‘Love is Everywhere’. 역시 세상은 사랑으로 가득 차 있다, 비록 모든 사랑이 따뜻하고 포근하지만은 않을지라도사랑의 속성은 본디 고통이다그걸 알아버렸다그래도 사랑은, 어떻게든 하게 될 수밖에 없다. 인간으로 살아간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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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5 - 2부 1권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 (마로니에북스) 5
박경리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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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도에서의 삶토지 2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하동 평사리 사람들은 용정에서 삶을 다시 일군다눈에 띄는 건 열아홉의 서희다. 1부에서 철없는 모습도 보이던 위엄있는 소녀는 사라지고어느덧 불편할 만큼의 위엄을 지닌 성인이 되었다이제 여자라 불러도 부족하지 않을 만큼의그러니 서희의 속내애정사가 등장하며 나는 당황할 수밖에서희는 사모해 온 상현에게 큰 상처를 주고길상은 봉순에의 그리움과 서희에의 숭배 안에서 절망하며 과부 옥이네와 살림을 차린다
 
지위와 미모위엄으로 자기를 싸맨 여자들은 어떻게 사랑하는가대개 그들은 애정운이 없다대상에 있어서도 환경과 타이밍에 있어서도. 물론 자기에게 진실하지 않아서의 이유도 있다, 꽤 크다. 이상현과 서희의 속내가 드러날 때 얼마나 놀랐는지이상현에게 의남매를 제의하며 길상을 언급할 때 또 얼마나 놀랐는지아무리 생각해도 참 못됐다상현에게 솔직한 사랑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괴롭히고 굴복하게 하기 위한 꾀라니이건 비참해도 너무나 비참하다상현 뿐 아니라 서희에게도모두에게 비참하다
 
이상현을 생각할 때면 서희 마음에는 분통이 치솟는다불이 난 뒤 집을 짓고 새 집으로 이사를 하고그런데도 상현은 그동안 여전히 모습을 나타내지 않는 것이다서희는 옹졸한 위인 같으니라구 하며 마음속으로 경멸을 했으나 무시하는 마음은 잠시였고 매일 투지에 가득 차서 상현을 기다리는 것이었다자존심을 빡빡 긁어놓은 사내나타나기만 하면 내가 받은 상처의 열 배 스무 배로 갚아주리니서희의 기다림은 순전히 그 보복을 위한 정열로써 지탱되어 있었다때로는 자기 처지가 그러하니 애써 피하는 거라고 자위를 해보기도 했으나 그런 이해심보다 노상 앞질러 달아나는 것은 자기 위주의 철저한 이기심이었다
 
서희는 자신이 결심한 대로 처신할 것을 믿어 의심한 일이 없다상현과의 애정의 갈등에 있어서도 어떤 결과를 가져 올 것이냐그 해답은 이미 작성된 바이었고 수정할 생각은 없는 것이다그 점에 있어서도 서희는 자기 결단에 의심을 품은 일이 없다설사 상현이 이성을 잃고 결사적으로 나온다 하더라도 서희는 결코 그와는 인연을 맺지 않을 것이다그것은 땅 속에 뿌리를 박은 바위만큼 움직일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럼에도 서희는 자제심을 잃지 않고 자기와 마찬가지로 뻗대어보는 상현이 괘씸한 것이다
 
나는 그대를 그리워하고 그대도 나를 사랑하고 있다우리가 혼인을 못하는 이유는 그대에게 있고 내게 있는 게 아니다하니 그 보상은 그대가 치러야 하지 않겠는가어찌 나와 같이 겨루려 하는가서희의 생각은 바로 그것이었다굳게 지키는 성이라 하여 어찌 창을 들고 한번 휘둘러보려 하지도 않느냐휘둘러보지 못하고 멀찌감치 서서 아리송한 태도만 취하는 상현이 노여운 것이다휘두르고 달려드는 창을 서희는 분질러버림으로써 애정을 확인하고 상대에게 상처를 남겨놓고 끝장을 내고 싶은 것이다서희는 그러한 자신의 욕망을 깊은 애정으로 믿고 있었다
 
최서희를 스칼렛 오하라에 빗댄 곽아람 작가의 비유가 떠오른다역시 짝 있는 남자를 오랫동안 사랑한 스칼렛그녀 역시 애슐리를 평생 바라보고 싶었던 것이었을지도 모른다아주 가까이곁에서의남매가 되어서라도 그 사람을 끝까지 지켜보고 싶은 마음을 어떻게 비난하겠는가표현은 잔인했지만 그래도 나는최서희가 그렇게까지자기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정도로 상현을 사랑했다고 믿고 싶다
 
어느 물체를 만졌을 때 확실히 손에 잡혀지는 감촉만큼 서희는 자신의 직감을 언제나 신봉한다내 직감이 한 번이나 빗나간 일이 있었던가틀림없이 길상에게 무슨 변화가 일고 있는 게야틀림없이 
 
그럴 리가 있나그럴 리 없지. ’ 권위의 깃털을 온통 세우고 공작새처럼 화려한 우월감과 표범처럼 표독스런 자부심을 환기시키며 발목이 묶인 길상을 눈앞에 보기 위해 서희는 신앙 같은 자신의 직감에서 떨어져 나가려고 맹렬히 닻줄을 감아올린다그럴 리가 있나그럴 리 없지아암 그건 이 더위에서 온 망상이니라망상이구말구네가 나를 떠나 어딜 간단 말이냐너의 이십칠 년의 세월은 나를 위해 있었던 거구 내가 세상에 나온 십구 년의 세월을 너는 내게 충성했었다더위에서 온 망상이야이부사댁 서방님이 떠난 후 내 마음이 허해진 탓이 아니겠느냐
 

서희에게 길상은 무엇일까집착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뜨겁고 사랑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권위적이다토지의 스포일러는 너무나 다양하고 각각 유명해 앞으로 두 사람이 결혼하는 것은 예정된 일이런 마음으로 정녕 결혼생활이 가능할까서희가 바라는 건 끝까지 길상이 자신에게 헌신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었을까계속 아가씨와 머슴처럼 살아갈 수 있는. ‘당연히’ 자신에게 모든 것을 바칠 수 있는물론 우리나라 최초의 여자 의사 박에스더 역시 자신보다 신분이 낮은 박에녹과 결혼했다자신을 여자로 제한하지 않는 삶을 위해서그러나 미국 유학 내내 에스더를 위해 헌신한 박에녹이 죽자 그녀가 얼마나 큰 후회를 했었던가그런데 지금 최서희의 의도는 아무리 봐도 사랑스럽지 않다
 
수많은 여자들이 그렇게 남자를 선택한다여자는 자기를 안 좋아해도 나를 좋아해주는 사람이랑 결혼해야 해내가 더 좋아하는 사람과 결혼하면 후회해.” 너무 일반화된 통념이라 어찌 반박하기도 어렵다물론 이 순간 NOW, 지극히 현실적이다그러나 아무리 이상이라 하여도 우리가 꿈꾸는 결혼은 같은 눈높이를 가진 이와의 마주봄이 아니던가길상은 속내를 쏟아낸다의리가 아니란 말입니다상전에 대한나를 길러 준 데 대한 의리가 아니라 그 말입니다서희애기씨는 보물입니다연꽃이지요.” 이런 길상을 선택할 수 있는’ 서희의 처지가 부러워야 하는 걸까
 
금녀의 전신이 와들와들 떤다무서움 때문이 아니다환희다날아갈 듯금녀는 무슨 말을 해야 한다 생각했으나 혀가 굳어버렸는지 말이 나오지 않는다그러나 아무래도 좋았다대체 당신네들은 뉘시오하고 물어볼 필요가 없는 것이다여인숙을 빠져나와 어두운 거리로 나왔을 때 금녀는 하늘의 별들을 우러러본다비로소 마음속으로. ‘하나님 감사합니다하나님 감사합니다!’ 가는 곳이 도둑의 소굴이든 악마가 살고 있는 곳이든다만 김두수를 떠나가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금녀는 정체 모를 두 사나이가 불가사의한 힘을 지닌 신비스런 존재로 여겨진다. ‘하나님 감사합니다하나님 감사합니다!’ 
 
희망을 가진다는 것은 인간에게 있어 얼마나 큰 약점인가절망에서의 탈출 뒤에 온 희열이란 또 얼마나 서글픈 찰나인가희망이 일렁이는 금녀 가슴에는 뜻하지 않았던 조바심이 아프게 저 바다의 파도가 방천을 치듯 쉴 새 없이 밀려오고 있는 것이다빼앗길 그 아무것도 없는 사람에겐 불안이 없다지금 금녀가 가져보는 앞으로의 자기 운명에 대한 기대와 흥미가 과연 희망적인 것인지 그 어떤 실마리도 잡아보지 못한 채 방향도 알지 못한 채 악몽 속에 허덕여온 여자는 희망 그 자체를 겁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금녀에게는 절망 그 자체가 삶이었었는지 모른다순간 불꽃 튀기듯 뻗치어온 절망과의 대결그 긴박한 찰나 찰나가 삶의 증거였었는지도 모른다확실히 서러움이나 근심이나 불안은 절망의 덫으로부터 빠져나온 순간부터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른다바다를 바라보고 앉은 금녀는 목구멍까지 꾸역꾸역 치밀어오르는 오열을 참고 있는 것이다.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어떻게 살아야 해어디로 가야 하는 걸까?’ 
 
5권의 말미에 눈에 띄는 건 금녀라는 뉴 페이스절망에서 희망을 찾아내는 이 여자의 생명력이 놀랍기 그지없다이는 임이네가 표출하는 악랄한 생명력과는 너무나 다르다대체 이 차이는 무엇인가생명을 믿는 것과 돈을 숭배하는 것그 차이일까임이네는 나날이 거인이 되어간다월선이의 이해는 어디까지인가임이네의 뻔뻔스러움은 어디까지인지 끝이 없다용이는 대체 어디 가 있는가현재 스코어 용이는 토지』 찌질한 주인공 1위다토지 인물사전이 출간될만큼 수없는 등장인물만큼 그들의 대화는 차지고 생각할 거리는 많고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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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현존에는 분명 그가 말한 위안이 존재했다. 그런데도. 그런 밤이 있었다. 사람에게 기대고 싶은 밤. 나를 오해하고 조롱하고 비난하고 이용할지도 모를, 그리하여 나를 낙담하게 하고 상처 입힐 수 있는 사람이라는 피조물에게 나의 마음을 열어 보여주고 싶은 밤이 있었다. 사람에게 이야기해서만 구할 수 있는 마음이 존재하는지도 모른다고 나의 신에게 조용히 털어놓았던 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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