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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위한 철학수업 - 자유를 위한 작은 용기 ㅣ 문학동네 우리 시대의 명강의 5
이진경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11월
평점 :
한동안 책이 안 들어와서 괴로웠다. 글은 줄줄 읽는데 몸과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 단기기억은 장기기억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김수영 전집』이 겉돌았다. 매년 잊어버리고 또 외우는 『그 여름의 끝』도 이전만큼의 감동이 없다. 어쩌면 좋아? 주홍 표지의 책을 두 번이나 읽었는데도 가슴이 움직이지 않아서 절망했다. 나는 반응하지 않는 건가? 내 마음은 이다지도 망가진 건가?
독서대에 책을 세우고 노트북을 열었다. 찬찬히 써 내려갔다. 손글씨 필사는 상상으로도 감당할 수 없으니, 자판의 속도대로 생각의 속도를 늦춘다. 내가 그은 밑줄은 정말 각 꼭지들의 핵심이었는데. 나는 분명 열심히 읽었는데, 글줄이 그냥 나를 스쳐간 것 같다. 붙잡고 싶다. 어떻게든 붙잡아야 한다, 말도 안 된다. 이렇게 마음 없이 사는 건 너무나 부끄럽다.
내 세상에 ‘책’은 무엇인가? 내게 상처 준 적이 없는 유일한 존재다. 어떤 순간에도 책은 나와 함께 있었다. 그럼 그중에 ‘철학 책’은 무엇인가? 처음 읽은 철학 인문서를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처음 읽은 철학 책은 기억한다. 『소크라테스의 변명』, 생각의 폭을 넓혀준, 이제 철학 책도 읽을 수 있다는 자신감의 첫 씨를 심은 책이다. 그럼 나는 철학을 알고 있는가? 『삶을 위한 철학수업』 띠지에는 “철학이 우리 삶을 구원하리라"라는 말이 쓰였다. 글쎄, 이건 아무리 봐도 허풍이 아닌가. 삶을 온전히 구원할 수 있는 건 어디에도 없다. 심지어 나 자신조차도 그렇게 못한다. 다만 철학은, 나를 도울 수 있을 뿐이다. “한번 살아 보라”고 용기를 제안할 뿐이다. 이 책의 핵심은 그렇다, 처음부터 끝까지 ‘용기’다.
『삶을 위한 철학수업』 최고의 장점은 쉽다는 것. 이 천민자본주의 사회에서 돈 없고 백 없는 한 사람으로 살아가면서 누구나 겪을 수 있는 대면 과제들을 선정했다는 것. 어려운 철학자의 이름이나 이론도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조금 철학 썰을 풀어본다고 해 봐야, 이름도 낯익은 칸트, 니체, 스피노자 정도다. 대중의 사랑을 받아온 영화, 애니메이션 등을 적극 활용하여 이해를 돕는다. 사건-사고, 헝그리 정신-궁상, 강자-약자, 소시민과 난쟁이, 자존심-자긍심 등의 섬세한 단어 선택은 섬세한 사고로 인도한다. 그뿐인가, 자신의 과거도 술술 풀어낸다. 주로 고통의 문제다. 감옥에 들어가야만 했던 순간과 차가운 벽을 마주하며 절망한 순간, 5년간 마음을 쏟은 공동체가 해체되었던 순간과 원망, 아내를 독일에 유학 보내고 외가에 아들을 맡겨놓았던 아이의 쓸쓸한 순간과 선물 같은 순간을 이야기한다. 독자가 저자를 사랑하는 순간은 언제인가, 저자가 자기의 이야기를 허영 없이 풀어낼 때다, ‘망한’ 이야기를 솔직하게 털어놓을 때 독자는 저자에게 공감을 느끼고 그의 겸손함을 사랑하게 된다.
사람은 매일 삶을 외줄타기 한다. ‘선’을 지키기가 어렵다. 자칫하면 휘청거리고 쓰러진다. 위태한 순간을 간신히 붙잡아 다시 선에 올라탄다. 자신 없는 삶에 머뭇거리며 다시 올라타는 것이 용기다. 하루 더 살아가겠다는 용기, 비루해 보이는 삶도 내가 품어 따뜻하게 하겠다는 의지가 내 삶에 대한 긍지다. 완전히 망가져서 희망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순간에도 마음을 그냥 내버리지 않는 것, 그것이 나의 용기이며 긍지였다. 그리고 이것이 나의 철학이다. 이 책을 한 번 더 붙잡은 건 저자가 이야기하는 ‘용기’였다고 생각한다.
철학은 ‘공부’하는 것이 아니다. 철학은 ‘살아’내는 것이다. 철학의 궁극적 목표는 ‘자유’다. 그러나 여기에는 피 흘리는 것을 전제로 한다. 대가를 치르는 자유는 편치 않다. 안정이 없다. 그러나 철학하며 사는 사람은 종래 자유에 다가간다. 오랜 시간이 걸릴지라도 결국에는 다가간다. 철학은 그리할 수밖에 없는 길이므로. 자유로 끌고가는 학문이므로. 우리는 철학이 어렵다는 편견에 갇혀 철학 하며 살 엄두를 못 낸다. 그러나 단언컨대 우리 모두는 각자의 철학대로 살고 있다. 이 철학이 어떠한 빛을 내는지, 어떠한 강도를 가졌는지, 어디 앞에 용기를 주는지는 다르다. 나는 내가 살아가고 있는, 앞으로 내내 붙들고 살아갈 내 철학을 믿는다.
만신창이 몸과 마음으로 살아가는 내가, 그래도 철학하고자 하는 것. 연약한 내 철학을 버리지 않는 것. 이 감각은 아무도 모른다. 이런 부끄러움을 간신히, 간신히 견디며 뭐라도 허우적거리는 것, 이것이 내 삶의 ‘필로-비오스’임을 나는 믿는다. 나는 나를 믿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