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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6 - 2부 2권 ㅣ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 (마로니에북스) 6
박경리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2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토지 6권』은 꽉 채워 온 동네 애정사다. 특히 마음 정한 서희의 강력한 액션, 거기에 폭발하는 길상의 액션이 엄청나다. 지금도 ‘처지’가 다른 남녀의 결합은 어렵기 그지없다, 신분제가 남았던 예전에는 어떠했을까. 갈등, 갈등 그리고 또 이도 저도 못하는 갈등. 길상의 내연녀 옥이네에게 찾아간 서희는 거기 두고 간 길상의 목도리를 보고 질투를 느끼고 돌아온다. 길상은 이에 만취해 “최서희가 잘났으면 얼마나 잘났어? 흥, 천하를 주름잡을 텐가? 어림도 없다!” 서희 앞에 막말을 쏟아내고 서희 역시 패악한다. 새로 사 온 목도리를 집어던지면서. “난, 난 길상이하고 도망갈 생각까지 했단 말이야. 다 버리고 달아나도 좋다는 생각을 했단 말이야.”
다음날 얼굴을 마주 볼 수 없는 두 사람, 다 끝난 줄 알았던 관계는 의외의 사건으로 확고해진다. 용정행 마차 사고, 이를 통해 길상은 “종신 종놈이 되어서라도 서희 곁에 있고 싶은 게 너 본심 아니었나? 안 그렇단 말이냐? 떠난다 떠난다 하면서 왜 못 떠나지?” 서희를 떠날 수 없는 자기 운명을 인정하고 그에게 일생을 걸기로 한다. 서희의 야망을 위한 것임을 다 알지만 서희가 뜻하는 대로.
‘사랑은 교통사고’라는 말이 여기서도 적용되는가, 벼락같은 사고 때문에 크게 다친 서희는 대신 원하는 것을 얻는다. 길상 역시 바라던 것을 얻는다. 순결하지 않아도 뜨겁게 열망했던 곳으로 간다. 천재지변조차 누군가를 위해 무엇인가를 한다. 이 잔인한 세상이 극한으로 칼을 휘두르다가도 한 번쯤은, 나를 위해 무언가를 해줄 수도 있다는 거다. 만신창이 사람의 생은 내일을 알 수 없어서 하루 더 살아볼 만하다. 마침 피투성이 마음이던 나는 이 사고에서 큰 위안을 얻었다. 또 다른 사고가 와도 나는, 죽지 않고 살아남을 것이다. 끝끝내 무엇인가를 얻고야 말 것이다.
"길상의 사랑이 범상한 남녀의 사랑일 수 없게 잘 조련되어온 것이었다 할지라도, 관음상(觀音像)을 향해 느끼듯이, 전혀 일방적이요 정밀한 그런 유의 사랑이었었다 할지라도, 어느 날 갑자기 그 대상이 이쪽으로 인하여 고통을 받게 된다 할 것 같으면 그것은 무상(無償)에서 보상으로 간주될 수 있는 일이요 상대의 고통이 고통으로 오되 희열이 따를 것이 거의 틀림이 없다. 그런데 길상은 왜 절망하는 것일까. 견디기 어려운 오뇌 속으로만 빠져들어 가고 있는 것일까. 더이상 접근할 수 없는 거리에서 이상현은 빙빙 돌다가 떠나고 말았다. 그들의 접근할 수 없었던 거리는 길상과 서희 사이의 거리이기도 하다. 서희의 대상으로서 상현은 사모(思慕)와 기혼자(旣婚者), 이 두 상극 선상(相剋線上)의 존재요 길상은 야망(野望)과 하인(下人), 그러나 이것은 반드시 상극된 것은 아니다. 야망은 불순물이다. 불순물은 혼합될 수 있는 것이다. 상현과 사이에 질러놓았던 지름목은 길상과 서희 사이에는 제거될 수 있는 것이며 그것을 드러내려는 서희의 모험을 길상은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서희가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다 해주고 싶다던 그러나 길상은 그것만은 용납할 수가 없다. 서희와의 거리는 절체절명의 것이다. 왜냐? 자존심 따위, 사내로서의 오기 따위 그런 것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사랑의 순결 때문이다. 순결을 지키고 싶은 때문이다. 대체로 길상의 심정은 이런 정도로 밝혀볼 수 있겠고 서희의 경우, 길상이 생각했던 것처럼 서희 역시 그렇게 믿고 있음이 틀림없다. 시초부터 야망의 수단이 아닌 길상과의 결합은 가능할 수 없었다. 적어도 길상과의 결합에 그것 이외 어떤 구실로 서희는 자신을 설득시킬 수 있었겠는가. 자식을 버리고 구천이를 따라간 생모를 생각해서라도, 그렇다면…… 서희의 보다 깊은 영혼 속에는 숙명적인 길상과의 애정이 잠을 자고 있었다 할 수는 없을까. 무시무시한 내적 투쟁은 과연 야망의 좌절에서만 빚어졌다 할 수 있을까. 강렬한 질투, 강렬한 패배감, 광적인 증오심―."
서희에게 거절당한 상현은 조선으로 돌아와 마음잡지 못하고 헤매고, 길상의 일편단심으로 간도행에 따르지 않은 봉순, 기생 기화를 만나러 간다. 별당아씨를 떠올리며 세상을 원망하는 환이는 진달래 화전 같은 사랑의 흔적을 떠올린다. 그는 윤씨부인이 남겨준 ‘혼수’ 땅문서를 독립운동자금으로 쓸 것이다. 조준구 때문에 목숨을 잃은 정한조의 아들 석이가 등장한다. 아비 없이 고생하던 그는 구원 같은 손을 붙잡고 의병 내에서 자기 자리를 잡는다.
『토지 6권』을 끝맺으며 깨달은 것, ‘Love is Everywhere’. 역시 세상은 사랑으로 가득 차 있다, 비록 모든 사랑이 따뜻하고 포근하지만은 않을지라도. 사랑의 속성은 본디 고통이다. 그걸 알아버렸다. 그래도 사랑은, 어떻게든 하게 될 수밖에 없다. 인간으로 살아간 이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