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목과 담쟁이
최현숙 글.그림 / 시와동화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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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을 선물 받으면 참 행복하다. 최현숙 작가의 <고목과 담쟁이>는 그냥 행복한 정도가 아니라 울적했던 내 마음에 반짝 뜬 샛별과 같아서 폴짝폴짝 뛰며 웃는 큰 기쁨이다.

그간 내 마음은 구름 낀 하늘에 어둠이 밀려오는 것과 같았다. 동화작가가 되기를 꿈꾸고 2년 째 신춘문예에 도전했는데 올 해는 정말 되겠지 하고 낸 작품이 낙방하고 말았다. 안방 바닥에 나뒹구는 소주병은 아이 둘이 목격한 엄마의 절망이었다. 아이들이 자는 여러 날 밤 혼자 소주를 마시고 취해서 상을 치우지도 않은 채로 잠들어버리곤 했던 것이다. 철 든 중학교 2학년 큰아들은 늦은 아침상을 차려서 나를 깨웠다. 아침에도 취기가 가시지 않아 아이들 앞에서 주정을 했다.

“아! 엄마는 뭐가 문제일까? 글 쓰는 재능이 없나?”

아빠를 닮아 가슴이 따뜻한 아들의 위로는 이랬다.

“엄마가 글을 못쓰는 게 아니고 심사위원이 좋아하는 뭔가가 있을 거야, 엄마는 그 뭔가를 찾아야 해.”

“그걸 어떻게 찾냐?”

“공부를 해야 찾지.”

“미친, 그러니까 내 실력이 모자란다는 거잖아.”

“아! 내 말이 그 말이 아니고! 아무튼 한 번 더 해봐, 세 판은 해봐야지.”

“세 판에 결정이 나면 좋게? 엄마는 안 될 것 같아.”

“아! 그래도 해봐, 중학교도 3년 다니고 고등학교도 3년 다녀.”

공부는 그럭저럭 하지만 입이 살아있는 착한 아들을 봐서라도 힘을 내야 하는데 도무지 일어날 수가 없었다. 방바닥과 껌 붙이고 누워서 ‘글 쓰는 재능은 하늘이 내리는 건가? 난 왜 선택받지 못했을까? 글 쓰는 거 아니면 난 뭘 하지? 뭘 해야 하지?’ 하고 생각이 드니 눈물이 주룩주룩 흘러 베개를 적시곤 했다. 애꿎은 주님을 탓하며 성탄 미사에도 가지 않았다. 저에게 왜 꿈을 가지게 하셨나이까,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살게 하시지.

연휴가 끝나고도 힘이 나지 않아서 나를 일으켜 세워줄 밧줄이 뭐가 있을까 생각해보니 존경하는 신부님이 떠올랐다. 남편을 앞세워 연말 인사도 드릴 겸 찾아뵈었다. 신부님은 남편을 더 반가워하셨지만 내가 신춘문예에 떨어져서 왔다고, 답을 빨리 듣고 가겠다는 자세로 급하게 말씀을 드렸다.

“왜 떨어진 것 같아요?”

“공부가 부족해서겠지요.”

“공부가 아니라 동심이 부족한 게 아니고?”

“동심이요? 그것도 부족했겠지요.”

“공부는 부족해도 되는데 동심은 충만해야지. 얼마 전에 읽은 동화는 지뢰랑 사슴이랑 대화를 해요. 동심이 있으니 그런 동화를 쓸 수 있지. 또 읽은 동화는 성탄 미사를 봐야 하는데 이브날 밤에 구유에 계시던 아기 예수님이 사라졌어. 어디 계신가 봤더니 동네 아이가 세발자전거에 예수님을 앉히고 동네 한 바퀴 구경시켜주고 있는 거야. 아이는 그렇게 기도를 했대. 세발자전거 갖게 해주시면 아기 예수님도 태워드릴게요. 주님이 이 기도를 엄마 아빠를 통해 들어 주셨으니 아이는 아기 예수님과 약속을 지켜야지. 동심은 이런 거야. 동화를 한자로 풀면 어떻게 되나?”

“아이 동자, 말씀 화자이지요.”

“나는 동화를 아이 화 되는 거라 보거든. 내가 강론을 할 때도 동심이 필요해요.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특히 동심을 좋아하시지. 그분들한테 내가 공부를 많이 했으니 존재니 뭐니 철학적 용어를 쓰면 하나도 반응이 없는데 그걸 다 풀어서 아이들도 알아듣기 쉽게 말하면 그나마 나를 한번 빤히 쳐다봐 주셔. 무릎을 꿇고 아이들에게 눈높이를 맞춰 봐요. 그런데 나는 할머니 할아버지들께도 동심을 많이 들려드려야 할 것 같아. 옛날 생각나게 하는 것 말이야.”

동심, 그날 이후 주욱 동심에 대해 생각했다. 그래, 내 시선과 고집을 내려놓고 쓰자. 무언가를 주려 하지 말고 아이가 되어 쓰자. 아니, 아이 마음을 가져 보자. 더 읽고 더 비워야 했다.

몸을 씻고 청소를 하고 책을 읽다가 새해가 되어 보게 된 <고목과 담쟁이>. 아! 신부님 말씀이 여기 있구나. 할머니 할아버지들도 좋아하는 동심.

고목이 되어 아무도 보아주지 않는 큰 나무에게 숲을 떠돌던 어린 새싹 담쟁이가 찾아 왔다. 담쟁이는 자라면서 고목을 타고 올라갔다. 고목에게 아름다운 단풍 옷을 입힌 담쟁이를 보고 감동하여 발걸음을 뗄 수 없었던 작가의 모습이 상상 되었다. 그림에 더 따뜻한 마음이 보였다. 색연필로 쓱싹쓱싹 그린 그림, 꾸미지 않은 솜씨, 동심이 있었다.

작가는 ‘조심스럽게 사랑을 표현하시는 어르신들, 어린이와 어르신을 위해 쓰게 된 이야기’ 라고 했지만 나는 담쟁이의 동심이 더 많이 보였다. 고목도 피어나게 하는 동심은 세상 그 어느 것에도 깃들고 어우러지는 것이다.

어른의 지혜와 아이의 동심이 만나면 이렇게 이루어진다. 성령과도 같은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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