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생각해보니 열심히 했는데 결과가 좋지 않았을 때를 받아들이는 것을 두려워했던 겁쟁이였던 거죠. 시험 결과가 좋지 않을 것 같은 때에는 아예 손에서 공부를 놓아버렸고 시험 직전까지 만화책을 보고는 하나의 번호로 찍어버리곤 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나쁜 결과를 어렵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었거든요. 저 자신만 탓하면 그만일 뿐, 변하지 않는 상황이나 타인에 대한 원망이나 분노를 할 필요가 없으니까요.
나는 내가 남들처럼 괴롭지 않은 이유가 어쩌면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혹한의 눈보라 속에 미소를 지으며 죽음의 잠에 빠져들려는 조난자의 심정을 비로소 이해했다. 죽음은 평온하고 다정하며 삶은 견디기 힘든 고통으로 가득하다. 어느 쪽을 선택할 거냐고 할 때 스스로 고통에 몸을 맡기려는 짓은 얼마나 어리석고 우스꽝스러운가. 그 누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사람을 의지가 약한 패배자라고 손가락질하며 나무랄 수 있을까.
지금 난 내가 늘 원했던 그런 삶을 살고 있었다. 가족에게서 떨어져, 나를 잘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 대부분 내 이름조차 모르는 곳에서의 삶, 그래서 얼마간 내 마음 내키는대로 자유롭게 다닐 수 있는 그런 삶. 그런 상황이 되면 행복감, 희열, 소망이 성취되었다는 만족감 등이 찾아오리라 생각했지만 내 마음속에서는 그 어떤 것도 찾아볼 수 없었다. - P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