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감정변화를 쉽게 드러내지 않는 나로서는...그런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방 한쪽 구석 모서리끝에 웅크리고 앉아서 소리없이 우는 것이다...

제대로 된 예배를 드리지 못한 게 5년이 되어간다.
새삼스러운 일도 아닌데 왜 이제와서 자꾸만 무너져내리는지...내 한계를 확인하는 이 시점에서, 돌이키지 않으면 안 되는 바로 지금, 나는 그저 웅크리고 울 뿐이다.

몽골에서, 사랑스런 첫아기가 태어남과 동시에 난 아기와 함께 예배실에서 쫓겨나야했다. 아무도 우리를 쫓아내는 사람은 없었지만, 나는 아기의 울음소리 때문에 우리에게로 모이던 시선에서 도망쳐 나와야 했다. 우리는 매주 닫혀진 예배실 문 밖에서 서성거렸다.
육아의 책임은 부모 모두에게 있는 것이라고 하면서, 아니 오히려 육아문제는 아빠 개인의 문제인양 모든 것을 다 하는 이이도 주일날만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에게는 늘 어떠한 형태로든지 예배를 돕는 일이 주어졌다.
아기가 걷기 시작하면서는 예배실을 뛰어다닌다는 이유로 우리는 몽골의 영하30도의 추위에도 불구하고 눈 속에 발을 묻으며 동동거려야 했다. 허름하고 조그만 몽골의 천막교회엔 사랑스런 내 아이가 뛰어다닐 곳이 없었다.

그러한 몇 년이 지난 지금은 캐나다의 한적한 시골교회에서 사랑스런 둘째아기를 안고 예배실 구석에 있는 골방에서 서성거린다. 아무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겨우 목사님의 입이 벌어졌다 다물어졌다 하는 모습만 조그만 유리창으로 볼 수 있을 뿐이다.
매주 나는 예배실 의자에 앉아보지도 못하고 곧바로 골방으로 직행한다. 어쩌다 드물게 사랑스런 아기가 잠이 들게 되면 숨을 죽이고 조심스럽게 골방을 빠져나와 예배실 의자에 앉는 데 성공할 때가 있다. 그때는 내 심장 뛰는 소리가 왜그렇게도 큰지 심장이 잠시만 멈춰주었으면 좋겠다.
예배실 의자에 앉아서 나는 계속 운다. 뭐가 그렇게도 감격스럽고 벅차고 흥분되는 것인지, 나는 그저 예배실 왼쪽끝의 어둑한 곳에 내 자리로 비워져 있는 이 의자가 있다는 것이 고마울 뿐이다.

우리 교회는 그리 크지 않은 한인교회다. 모임이 거의 없다. 성경공부도 없고 조모임도 없다. 다들 타국에서 매주마다 동포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 만족하는 것 같다. 다행히 금요기도회와 한 달에 한 번 하는 구역예배가 있는데, 방학동안(6,7,8월)은 없었기 때문에 9월이 되어서야 우리는 처음으로 참석 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도, 곤히 자는 사랑스런 두 아이들 때문에 금요기도회는 이이랑 교대해서 격주로 참석하고 구역예배는 둘 다 한 아이씩 책임지느라 성도들의 교제에 깊이 관여하는 것이 어렵다.
또한 기도회나 성도들의 교제도 내가 알고 있는 것과 참 많이 다르다. 금요기도회는 마치 성경공부처럼, 찬양 한두곡이 끝나면 목사님과 성경연구를 하고 옆에 앉은 성도와 짝을 지어 짧게 기도하고 마친다. 주어진 시간은 8시 30분부터 10시까지다. 모두 1시간 30분 안에 다 마치고 교회 건물을 잠궈야 하기 때문에 모두 집으로 돌아간다. 돌아오는 길에 나는 몇 번씩 신호를 놓친다. 운전대를 잡고서 앞차 너머로 멀리 보이는 투명한 별을 멍하니 바라보는 습관이 생겼다. 통곡하지 못한 채 응어리로 남아있는 기도가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러다 교통 사고를 내게 될지도 모른단 생각이 든다.
우리 교회 성도들은 거의 초신자이거나 한국에서 교회를 거의 나가지 않던 교인들이다. 이곳에 와서 동포들과 만날 수 있는 유일한 모임이 한인교회이기 때문에 교회를 출석한다. 그러니 성도들의 교제도 여느 넌크리스챤의 모임과 크게 다르지 않다. 식사 전에 기도를 하는 것 외엔...

결국, 나는 누구에게도 나의 성령충만을 위해 기대를 가질 수 없다.
내 영성의 한계를 확인하는 이 시점에서, 돌이키지 않으면 안 되는 지금, 나는 뼈에 사무치도록 외롭고 그립다.
동역자로서 이이가 나를 도울 수 있는 것은 기도 외엔 아무것도 없다. 이이가 매주,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와 성경공부, 찬양, 금요기도회, 특강, 깊이 있는 성도들의 교제 등을 대신할 수는 결코 없다.

난 참 나쁜 사람이란 생각이 든다.
나는 마르다의 그 수고의 기쁨을 잘 모른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밑에서 말씀을 들으며 행복해 했던 것만 알 뿐이다.
예수님은 마리아와 마르다를 모두 칭찬하셨지만, 난 자꾸 나쁘다는 생각이 든다.

매주 골방에서 아기를 안고서, 왜 빨리 자라주지 않느냐고 숨막혀하는 내가 너무나 나쁜 사람이란 생각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나쁜 사람은 소리내어 울 수도 없다.
얼굴을 들고 울 수도 없다.
편한 자세로 누워서 울 수도 없다.

그래서 나는 방 한쪽 구석 모서리끝에 웅크리고 앉아서 소리없이 운다.

-2003년 10월 14일 일기에서-


지난 일주일간 내 바닥난 영성과 말씀의 허기짐을 채우기위해 1초도 쉬지않고 버둥거렸다. 정신을 가다듬고, 내가 해결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분했다. 또 주위에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것과 기적이 일어나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는 것을 구분했다. 그 결과, 내 소중한 동역자들로부터의 격려와 기도로 하나님은 내게 지혜를 주셨다.

이번주부터 이곳에서 Q.T.를 다시 시작했다.
119편....말씀에 대한 나의 목마름이며 나의 고백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한시도 놓치지 않고 내게 개입하셨고 인도하셨다.

말씀에 대한 나의 목마름이 계속되는 한,
또다시 내가 바닥에 웅크리게 될지라도, 목마름을 느낀다면, 죽을 듯한 허기를 느낄 수 있다면, 난 아직 살아 있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짧은 시간동안 급하게 준비하느라 미흡한 점이 많았지만 그래도 (적어도 내겐) 귀한 시간이었다.
한 가지 아쉬움이 있다면 1박 수련회를 하고자 했던 취지를 성취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취지는......교사와 학생들, 교사와 교사들, 전도사님과 학생들, 전도사님과 교사들 간에 더 깊은 신뢰와 하나됨을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막상 함께 해야할 몇 명의 교사가 참석하지 못했고, 전도사님도 함께 할 수 없는 상황이어서...... 우리는 다른 방향을 잡아야 했다.

다른 방향은.....아이들 안에 내재돼 있는 크리스챤적인 우정과 기독교 문화(놀이, 음악 등)를 소개하는 것, 그리고 교회에서의 교사적 본분을 자각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것도 시간적 제약(새벽 2시부터 5시까지 약 3시간)때문에 완벽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렇다면 뭐가 (적어도 내게) 귀한 것이었는가.....
1. 교회에서 찬양과 기도로 한해의 시작과 마무리를 할 수 있었다는 것.
대부분의 아이들은 학교친구들과 약속이 있었다. 어디서 무엇을 하며 놀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찬양을 하거나 기도를 하진 않았을 것이다. 자의든 타의든 간에 그 약속들을 취소하고 교회에서 찬양과 기도로 한해의 시작과 마무리를 하나님께 아뢸 수 있었다는 것이다.
2. 재미있고 신나게 찬양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
서로를 보며 율동을 하는 것에서, 서로의 어색한 동작과 각 개인의 기발한 창의력에 웃지않을 수 없었다. 적극적인 친구들의 큰 동작에 용기를 얻어 수줍게 손을 움직이던 몇몇의아이들이 얼마나 예쁘던지....찬양하는 내내 우리 모두는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3. 자기 주변의 친구들에 대해 점검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는 것.
중고등부 아이들에게 있어서 친구란, 현재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다. 생활의 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이 친구들이 미치는 영향을 점검해 보면서 크리스챤으로서의 우정이란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기회를 가졌다. 과연 나는 어떤 친구가 되어야 하는지, 또 어떤 친구를 사귀어야 하는지를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무슨 일을 시작하는 것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시작' 그 자체라고 생각한다.
누가 협조해 줄 것인가, 누가 좋아할 것인가, 시간이 있는가, 돈이 있는가, 장소가 있는가.....우리가 고민해야할 것은 이런 것들이 아니라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일을 결정하고 시작하는 일이다. 왜냐하면, 이 일들이 진행되는 동안에 우리 모두는 자의든 타의든 기도하게 될 것이
고 그러면 결국 일하시는 분은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어제는 다른 교회에서 주관한 선교보고 세미나에 다녀왔습니다.
선교사님은 북한에서 6년째 치과의사로 봉사하시면서 선교사역을 하고 계신 분인데, 정말 그 분의 말처럼, 북한은 선교의 문이 이미 열려 있더군요.

"복음이 닫힌 곳은 이 지구상 그 어느 곳도 없다. 제발 북한을 통일 이후에 개척해야할 곳이라고 내버려두지 마라. 북한은 이미 열린 곳이다......"

모든 선교사님이 그러해야겠지만 특히 북한으로 파송될 선교사님은 정말 '뱀같이 지혜로와야'하겠다는 것도 절실히 느꼈답니다.

북한 외에, 그리스도인이 됨과 동시에 죽음을 각오해야하는 지역이 또 한 곳 있습니다.
바로 모슬렘 지역입니다. 요즘은 (10월 24일부터 11월 26일까지) 이 모슬렘들의 영적전쟁기인 라마단 기간입니다. 하루종일 금식하면서 그들의 신에게 기도를 하지요. 이에 안타까움을 못이기는 전 세계의 기독교인들은 특히 이 기간에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영적인 시험과 고난이 심해지기도 하고 기도 가운데 성령을 받기도 한답니다.
참으로 어깨가 무거워지는 기간입니다.

모든 전쟁이 그렇듯이, 전쟁이란 상처와 죽음을 맞아야만 한다는 점에서 마음이 무척 아픕니다. 내가 죽지 않으면 적이 죽어야만 하지요... 그러나 이 영적전쟁에서는 적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마땅히 죽어야할 적을 기필코 살려내려고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느끼게 되어 더욱 뼈속이 아려옵니다.

불현듯, 파키스탄에서 만났던, 맨발의 5섯살짜리 개구장이 아이가 생각납니다.  그때도 라마단 기간이었지요. 일제히 울리는 사이렌소리에, 신나게 내 옆을 뛰어다니다가 그자리에 멈춰 차가운 바닥에 무릎을 꿇더군요. 무슨 기도를 했을까요...
나는 종종 그 아이의 새까만 발이 생각납니다.
신발을 볼 때마다, 내아이의 신발을 살 때마다 나는 그 발이 자꾸만 떠오릅니다.

잠시 멈춰, 방 한쪽 옆에 아무렇게나 던져 놓은 내아이의 덧신을 끌어안아 봅니다.   맨발의 그 아이가 그들의 신에게 기도하는 중에, 그들의 우상이 아니라, 진정으로 살아계셔서 역사하시는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을 만나게 되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참으로 그렇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세상에서 사람만큼 귀중한 것은 없는 것 같습니다.
어떤 작가는 나무가 사람보다 낫다고 하는데...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죽을 죄를 지은 악독한 사람일지라도, 사람이라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귀한 존재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았다는 것을 결코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최대한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을 존중하려고 애를 씁니다만....그게 마음처럼 쉽지가 않습니다. 특히 그 사람이 무례하거나 내게 상처를 줄 때는 더욱 그것이 어렵습니다. 사람이란...하면서...사람에 대한 환멸이....사람에 대한 서운함이...그러다가... 나도 사람인데........그러면서 웃습니다.

때로는 마음이 환해지는 사람을 만나기도 합니다.
며칠전...한 귀한 사람이, 금요예배가 기다려진다면서 자신이 이렇게 변할 줄은 정말 몰랐다고 간증을 하더군요....내게 조용히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을 이야기 하던 그 사람의 눈이 얼마나 곱던지....
이래서 나는 사람이 참 좋습니다.

중요한 것은 율법이니 규칙이니 예의니 능력이니 하는 것들보다 '사람' 그 자체인 것 같습니다.
오늘따라 아름다운 사람이 참 그립습니다..... ^_^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아버지가 있어도 없느니만 못한 이들에게, 가시고기는 지독한 미움을 받게 될게다...

아버지란 과연 어떤 존재인가?...가시고기와 같은 아버지는 어떻게 해서 만들어지는 것인가? 내 아이들에게 이와 같은 아버지를 만들어주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아니, 가능함을 거론하기 이전에 아버지란 것은 사회가 만들어낸 호칭에 불과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즉 이러한 아버지가 존재한다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사람이 아버지가 됐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는 말이다. 세상엔 가지각색의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고 그 속에 사랑하는 이를 위해 죽어줄 수 있는 이가 몇 있는 것이다. 그 중에 어떤 이는 아버지가 될 것이고, 또 몇은 어머니가, 자식이, 남편이, 아내가 되어 대신 죽는다. 지금도 어디선가 이렇게 죽어나가고 있을게다. 세상은 이들을 마치 신으로부터 선택받은 특별한 인종으로 취급하는데, 실은 우리 자신이 바로 이러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이것을 깨우칠 때에 비로소 우리는 사랑을 보게 될 것이다.

진정한 사랑은 내가 죽으므로서 완성되는 것이기에...오늘도 나는 너를 위해 죽음을 준비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