캣피싱
나오미 크리처 지음, 신해경 옮김 / 허블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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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캣피싱. 정말 즐겁게 읽었다. 

영화 <서치>와 소설 <비하인드 도어>를 섞은 SF스릴러 소설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SF 스릴러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사실 가만히 들여다보면 대부분이 이미 상용화된 기술들이다. 로봇이 서빙하는 로봇 카페는 지금도 있고, 자율주행 자동차도 이미 도로를 달리고 있다. 드론 배송 역시 미국에선 이미 사용하고 있는 기술이다. 


이런 배경이 실제감을 더해주기 때문일까? 모 거대기업의 동의 없는 녹취 이슈를 포함해서, 소설 속의 내용들은 강한 현실감을 가진다.

가능할 법한 이야기. 큰 재미와 몰입감을 주면서도 동시에 마음 한 켠이 서늘하다. 


<캣피싱>은 재미도 재미지만 내용 안에 담긴 메세지와 설정들이 인상 깊었다. <캣피싱>은 청소년 소설이자 성장 소설이기도 하다. 원제인 'Catfishing on Catnet'은 캣넷에서의 온라인 낚시 정도의 뉘앙스를 가진다.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낚았다', '낚였다'라고 하는 상황과 유사하다. 온라인 소통이 주가 되는 전-중반부에서 채팅 화면을 그대로 표현한 형식은 상당히 신선하고 재미있었다.  


각 캐릭터들의 닉네임 또한 모두 의미가 있다. '올랜도'의 경우 버지니아 울프의 <올랜도>에서 따온 것으로 보이는데, 올랜도는 영생을 살며 남녀를 번갈아 사는 인물이다. 자신을 부를 때 성별이 고정된 지칭어를 사용하지 말아달라며 고민 중인 인물이 쓸 법한 닉네임이다.


속도감있고 재미있게 읽히면서도, 새로운 시도와 섬세한 설정이 어우러진 소설. 

아주 재미있게 읽었고, 많은 생각이 들었다. 즐거웠다.  



대개는 속도 제한을 풀기 위해서야. 인간은 대체로 고속도로 제한 속도를 5에서 15킬로미터 정도 초과해 운전하지만, 자율주행 자동차들은 프로그램 자체를 바꾸지 않으면 집요하게 규정을 지키거든. 온라인에 차를 탈옥시키는 절차가 올라와 있는데, 그대로 따라 하다 보면 차의 보안 시스템을 망치게 돼. 그 문제를 고치는 방법도 올라와 있지만 대체로 사람들은 차의 속도가 빨라지게 하는 부분만 읽고 따라 하더라고. - P284

"올랜도?"
"새로 들어온 애! 너희 학교에 다닌다던데?"
- P291

그 다툼을 상상해 본다. 집으로 오는 길에 본 소치 이모는 매우차분하고 현실적인 사람 같았다. 다른 사람들이 아무도 그 소프트웨어를 팔려고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을 모습이 그려진다. 하지만 그 싸움을 상상하면서 내가 주목하게 되는사람은 엄마다. 뒤로 물러나 앉아서 오고 가는 얘기들을 듣다가.대화의 결론에 상관없이 자신의 결정을 내리는 사람.
- P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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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쳐있고 괴상하며 오만하고 똑똑한 여자들 - 이해받지 못하는 고통, 여성 우울증
하미나 지음 / 동아시아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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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과거 세대의 고통의 영역이 현 세대의 것과 다르다면, 그것은 환경과 사회가 변화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다음 세대가 자신과 다르게 상대적으로 가벼워 보이는 것을 고통으로 느낀다면, 사실 과거 세대는 그것을 자랑스러워해야 한다. 괴로웠던 순간, 틀림없이 내 자식에게는 나와 같은 고통을 느끼지 않게 해주리라 결심했을 그들의 다짐이 성공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들의 눈에 젊은 세대들이 별 것 아닌 것으로 괴로워한다면, 질문은 '어째서 그들은 나약해졌는가'가 아니라 '어째서 고통은 근절되지 않는가'와 '그 다음 세대에게 닥칠 고통은 무엇이 될 것이며 그것를 줄이기 위해 현재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가 되어야 할 것이다. 

어쩌면 과거 세대의 '세상 좋아졌다'는 말에는 자신이 사회가 다른 고통을 느끼도록 기여했음을 알아달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타인에게 자신과 똑같은 괴로움을 느껴봤으면 좋겠다는 폭력적인 의도는 없으리라 믿는다. 

각 세대는 '고통의 크기'를 비교하려는 형태의 접근을 내려놓고 '고통을 느끼는 영역'에 대한 고찰을 시작해볼 필요가 있다. 
전쟁과 살육이라는 고통은 현 시대에도 완전히 사라지지는 못했지만, 그것을 전 생애 동안 경험하지 않은 시대적 집단이 존재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고통' 자체는 여전히 존재하며, 그것을 감각하는 괴로움 역시 실재한다. 

그것을 보다 덜 괴로운 방향으로 개선해 나가는 것.
그 방향에서 새롭게 생겨나는 고통들에 관해 관심을 가지는 것. 

그것이 보다 나은 세상으로 가기 위한 방향성이 아닌가 싶다. 현존하는 고통을 과거에는 없었으므로 '존재하지 않아야 할 것'으로 덮는 것이 아니라, 감각하지 못했던 것을 인지하는 기회로 받아들이는 것만이 우리가 품을 수 있는 희망이다.

 

   

 

 

나는 사람들이 고통과 공포, 그리고 혼란을 마주했을 때 그걸 어떤 방식으로 풀어내는지에 관심이 있다. 사람들이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과, 그에 따라 실제로 다르게 존재(재현이 아니라)하는 세계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들여다보고 싶다. - P49

고통을 해석하는 방식은 한 개인이 지닌 문화적·지적 자원에 따라 달라진다. 고통의 표현 역시 가족, 학교, 미디어 등 일상에서 마주하는 여러 개념이 작용한 결과이다. - P50

특정 사회에서 사람들이 호소하는 고통은 그 사회가 강요하는 정상성과 관련이 있다. 이들이 고통을 표현하고 해석하는 방식을 들여다보면, 사람들의 심적인 고통이 어떤 맥락에서 기인한 것인지를 탐구할 수 있다. 커 메이어는 ‘우울증‘이라는 진단 역시 아주 미국적인, 독특한 형태라고 말한다. - P55

"나는 지금 아프다고 말하는데 "아니야, 너는 아프지 않고 유별난 거야" 이렇게 말한 거니까요. 저는 정말 해서는 안 되는 말은 상대방이 느끼는 걸 부정하는 말이라고 생각해요." - P214

‘누가 제일 아픈 사람인가?‘로 논의가 흘러가선 안 된다. 고통을 비교하는 일은 불가능할뿐더러 해롭다. 끊임없이 피해의 연대기를 나열하게 된다. 모두가 피해자라고 목소리를 높이는 곳에선 어디로도 나아갈 수 없다. - P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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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양자컴퓨터
후루사와 아키라 지음, 채은미 옮김 / 동아시아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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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읽은 과학 도서는 대부분 양자역학을 언급하고 있었다. 

한때는 미치광이들의 학문이라 불리던 양자학이 이제는 '합리적'인 설명을 위한 필수적인 학문이 되어가고 있다. 


궁금은 하지만, 어려울 것 같아 선뜻 손이 가지 않았는가?

'이해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기 때문은 아닐까? 


<빛의 양자컴퓨터>는 일반인들이 읽고 이해할 수 있도록 쉽고 세심하게 설명해준다. 

직접 만들어 낼 수는 없어도 향유할 수는 있는 일반인의 입장에서 이런 교양 도서는 일류 쉐프의 가정식 같은 느낌이다.

한계선을 뚫고 지평을 넓히고 있는 연구자들의 생생함을 살리고, 그들의 연구 작업을 알기 쉽게 풀어서 반복해준다.

실험의 세세한 내용은 넘어가더라도 결과들은 아주 놀랍고, 흥미롭다. 즐겁게 읽어나가면 된다. 


복잡한 부분은 생략하고 말해보자면, '양자얽힘' 하나만으로도 이 책을 읽어볼 충분한 이유가 된다고 생각한다.


저자는 다른 양자 연구센터들과의 특화점으로 '실온 가능', '광속 가능' 등의 이유를 들어 빛을 이용하는 것의 장점을 주장한다. 

실제 저자의 주장처럼 풀어야 할 과제가 많으나, 치열한 세계적 경쟁 속에 상용화가 가시화되고 있다. 

대부분의 기술이 그러했듯이, 기술의 발표는 삶의 기준을 변화시킨다.


그렇다면, 미래의 수혜자로서 우리는 어떤 꿈을 꾸어야 하는가?

그리고 유니터리 변환은 가역 변환이기 때문에 우주는 원래의 하나의 양자로 돌아갈 수 있어야 한다. - P98

마치 과거를 바꾸고 있는 것처럼, 즉 인과율에 반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 P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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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드 - 기후 위기 시대, 제2의 전기 인프라 혁명이 온다
그레천 바크 지음, 김선교 외 옮김 / 동아시아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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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하는 말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라는 말이 있다. 

아무리 좋은 술도 더러운 잔에 따른다면 그 맛이 변질될 것이다. 

하물며 그 잔이 깨어져 새는 잔이라면 어떨까?


저자는 전기는 우리가 생각하는 어떤 것과도 다르며, 그것을 전달하는 인프라인 '그리드' 역시 흔히 연상하는 수도관 같은 개념이 아니라고 말한다. 하지만 직관적으로 받아들이기에 그만한 비유도 없는 것 같다.


우리는 전기가 없는 삶은 더 이상 상상할 수 없다. 

휴대폰 배터리가 10% 남짓 남았는데 충전할 방법이 없을 때 덜컥 불안해지는 것이 나만은 아닐 것이다.

온수, 가스 또는 하이라이트 불꽃, 냉장고, 휴대폰과 각종 전자기기 및 자동차까지 우리는 거의 모든 순간 전기를 소비하며 살고 있다. 그럼에도 실체로서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은 콘센트나 충전단자, 혹은 스위치 정도로만 겨우 존재가 인식될 뿐이다. 




요약


이 책은 2015년에 쓰여진 책이지만 21년의 지금 읽어도 전혀 시간의 공백이 느껴지지 않는다. 미국의 특수한 지역적 특성이나 세세한 수치들이 약간의 장벽이 될 수 있겠지만, 그런 부분을 과감히 흘려 읽는다 해도 저자의 핵심 메시지를 이해하는 데는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놀라운 부분들은 그 외부에 있다. 


그렇다면 '그리드'란 어떤 것인가?


먼저 1장에서 우리가 풍력 발전에 대해 가지고 있던 선입견을 뒤집으며 호기심을 자극한다. 더 효율이 좋고 발전량이 큰 풍력발전기를 쓸 수 없는 것은, 그것이 만들어낸 전력을 제대로 받아낼 수 있는 '그리드'가 준비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2장에서는 우리가 '전선' 또는 이제는 조금씩 드물어지고 있는 '전봇대' 정도로만 생각하는 전기의 길, '그리드'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것이 어떻게 생겨났고, 지금 어떤 상태인지에 대해서. 그러다보면 전기의 발견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밖에 없다. 


3장 인설의 법칙에서는 토마스 에디슨 밖에 떠올리지 못했던 내게 그것을 상용화하는 시스템을 갖추는 사업가 '인설'에 대해 설명해준다. 어째서 지금의 그리드가 그렇게 조각 조각 이어질 수밖에 없었는지, 그럼에도 거대 그리드가 중심을 차지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4장은 다소 복잡하게 느껴지겠지만 그만큼 충격적인 내용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조금 아쉬운 점은, 애초에 저자가 이 책의 독자층을 좀 더 확실히 했으면 좋았겠다는 점이다. 학술서라고 보기에는 들고 있는 예시나 농담 등이 대중적인데, 그렇다면 수치보다는 도표와 V=IR 정도의 가벼운 기본 수식을 통해 "왜!?" 그런 상황이 되는지에 대해 더 설명하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그러나 다루고 있는 내용은 무척 흥미로웠다.


리뷰 


예전에 읽었던 <경제 저격수의 고백>이 많이 생각나는 책이었다. 거대 다국적 회사들의 방식과 국가 간의 알력 및 경제적 이해 관계의 첨예한 대립도 그러했지만, 무엇보다 그 책의 저자였던 '존 퍼킨스'가 은퇴 후 에너지 사업에 뛰어들었던 것이 자꾸만 떠올랐다. 


<그리드>의 저자는 전기를 아껴쓰자거나, 불편을 감수하자고 말하지 않는다.

현재와 같은 소비를 유지하되 보다 '안전하고'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자는 것이다.

(더 많이 만들어 더 많이 소비하자!!고는 하지 않았다)

 

역자들이 역자 후기에서도 한국의 상황과 잘 비교하여 설명해주었지만, 한 때 우리나라도 세금 지원 혜택 등으로 태양광 패널 설치가 유행이었던 적이 있다. (현재는 아파트의 경우 미관 및 낙하 위험성 등으로 주민 합의가 필요하다고 한다.) 


당연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자원의 공급이 실상 얼마나 쉽게 끊어질 수 있는지, 그때 대체재들이 준비되어 있지 않은 경우 현대인이 얼마나 무력한지에 대한 부분을 읽으며 떨었다. 한국의 환경상 미국처럼 개인용 발전기를 준비하는 것은 어렵겠지만, 점점 소형화되고 상용화되고 있는 휴대용 태양광 패널 등은 몇 년 안에 구매할지도 모르겠다. (초와 라이터 몇 개 정도는 준비해두는 것도 좋지 않을까?)


하지만 저자는 이렇게 조금씩 발전의 형태가 다양해질 경우에도, 개인이 생산한 전기 역시 실사용을 위해서는 전력 회사의 전선망을 이용할 수 밖에 없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리고 전기의 생산자로서 얻을 수 있었던 이익마저 줄어들고 있는 '유틸리티'가 '그리드'의 개보수의 유일한 관리자가 된다는 것이 과연 합리적인지에 대해 묻는다. 또한 스스로 생산할 수 없는 '그리드' 의존자들은 점차 증가할 그 비용을 감당해야 할 것이라고도 경고한다. 매우 인상 깊은 부분들이었다. 


또 한 가지, 스마트 그리드가 사용자에게서 얻어낼 수 있는 정보의 양을 생각하면 다소 우려스럽지만, 그 편리함과 유용성에 대해서는 상상 이상이었다. 확실히 볼더에서의 사례처럼 '유틸리티'가 지나치게 과한 결정권을 갖는 것은 무리가 있으나 정전이 일어나기 전에 실시간으로 수요를 계산하고 대기 전력으로 전환해 브라운 아웃을 예방할 수 있다는 것은 괜찮은 방안이다. 그에 더해 테슬라 등의 대형 모바일(움직이는) 배터리들이 사람들의 전기 사용이 많은 시간에는 일종의 마이크로 그리드 역할을 수행해주고, 요구량이 줄어드는-그래서 '유틸리티' 측에서는 더 저렴하게 전기를 공급할 수 있는- 시간대에 충전함으로써 모두의 이익을 추구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전망은 정말 매력적이었다. 그를 위해 넘어야 할 산은 많겠지만, 이미 전기가 '공유재'의 성격으로 인식되고 있다면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라 본다. 특히나 무선 전달 기술이 보다 원거리를 받쳐주게 된다면 말이다.


전기는 그 어떤 것도 닮지 않았다. 전기는 고체도, 액체도, 기체도 아니다. 빛이나 열과도 아주 다르다. 바람이나 파도처럼 움직이지도 않는다. 우리가 아는 것 중에서 전기와 닮은 것을 굳이 꼽자면, 중력 정도일 것이다. 말하자면, 전기는 일종의 힘이다. - P73

변덕스러운 이 지역의 바람이 완전히 멈추면, 이 거대한 장치로 공기 중에서 수확한 전자들은 사라져 버린다. 그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그리드는 균형을 이뤄야 하기 때문이다. 소비는 언제나 생산과 일치해야 한다. 전기를 나중에 사용하려고 저장할 수 있는 실질적인 수단은 없다. 만일 전력이 지금 당장, 어디서든, 어떤 방법으로든 만들어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이를 사용할 수 없다. - P45

이들은 전기신호 패턴으로 실험대상 가구에서 <라이온 킹The Lion King>을 보고 있는지, 아니면 <슈렉 2 Shrek 2>를 보고 있는지 판별할 수 있었다. - P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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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어가 내려온다
오정연 지음 / 허블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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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하는 말


같은 모어를 가진 사람의 문장에서 몇 번이고 혀 끝에 다시 굴려보고 싶은 아름다움을 느낄 때가 있다.

바짝 다가앉아 들여다보려 하면 부서져 버릴 것 같은 섬세한 반짝임을 느낀다. 

내가 제대로 읽어냈다고 자신할 수는 없지만, 밑줄 긋는 문장들이 겹치는 것을 보면 사람마다 다르다고는 하지만 또 같기도 한 모양이다. 빼어나게 좋은 것은 누가 봐도 좋다던가. 조금은 다른 길을 돌아온 사람의 글은 더 다채롭게 반짝이는 것 같다.

 

모든 단편이 좋았고, 또 몇몇은 어디서 나온 글인지 알 것만 같아 가까웠다.

보다 많은 이들이 읽어보았으면 좋겠다.



리뷰 


마지막 로그


내가 나의 마지막을 결정한다는 것은 수동적인 결말이 아닌 능동적인 결말을 맞겠다는 의미일까?

결정을 내리는 순간의 나와 실행을 받아들이는 순간의 나는 어느 쪽이 더 '본질'에 가까운가?

이제 알츠하이머는 낯설기만 한 질환이 아니다. 그 외에도 내가 나를 잃어가는 순간들을 받아들이며 견뎌내는 것과 멈출 지점을 선택하는 것, 그 어느 사이에서 우리는 존엄을 찾는다. 


이번 단편집을 위해 원고를 수정하며 '나는 사실 온전한 자신으로 살 수 있는 권리를 말하고 싶었음을 깨달았다'라는 작가의 말처럼, '우아하게 삶을 종료할 선택권'이라는 생사결정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원하는 나'로 존재하는 문제로 바라보고 싶다. 그리고 '실제의 나'라는 것은 무엇이며 '본질적인 나'는 무엇인가라는 문제는 각자 자신의 삶 속에서 풀어가야 할 것이다. 

다만 한 가지 덧붙이고 싶었던 것은, 규정을 받아들이는 것 역시도 선택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스스로가 그것을 이해하고 선택하기만 한다면.


+) Bump of Chicken의 <꽃의 이름>을 들어보고 싶다면 Bump of Chicken의 <Hananona>를 찾아 들으시면 된다. 

"이 시점에서 인생을 종료하고 모든 기록을 폐기하겠다는 A17-13님의 결정은 매우 아름다워 보입니다." 
 
단어가 내려온다


한 사람은 반드시 하나의 단어를 받게 되는 세상.

그것은 그 사람의 본질이 될 수도 있고, 삶의 지향점이 될 수도 있고, 숙원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위에서부터 내려받는 어떤 것이라는 개념은 신성과 떼어내 바라보기 어렵다. 특정 종교의 관점에서 보자면 달란트 같은 것이 될 수 있을 것이고, 또 다른 관점에서 보자면 존재의 이름-진명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사회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아직 어린 나이에 결정하라고 강요받는 성적, 진로와 같은 낙인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고 거쳐야만 하는 입문 과정, 성인식이라 볼 수도 있겠다. 


어떤 것을 어떤 단어로 받더라도 삶은 살아진다. 늦기도 하고 빠르기도 하지만 타인에게는 알리지 않은 채로 살 수 있다. 스스로도 잊고 살 수도 있다. 하지만 한 개인의 삶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무관한 것 또한 아닐 것이다. 


말레이-폴리네시아가 언급되는 점과 언어의 변화를 다루는 묘사에서 바로 피지어와 피진이 연상된다. 아마도 작가는 화성의 2세대와 3세대의 언어는 크레올이 되었음을 말하고 싶었을 것이고, 그것이 환경의 변화가 언어에 미치는 당연한 영향력이라고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 설정 속에서 '내려오는 단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듣거나 말하지 못하는 자들도 단어를 받는다는 점, 그럼에도 받는 단어들의 분포가 변화한다는 점을 이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단어가 내려온다>, <미지의 우주>, <행성사파리> 등에서 언급되는 화성에서의 이주민의 삶을 살펴보면 어쩔 수 없이 작가가 미국 유학 경험이 있음과 현재 싱가포르에 거주 중이라는 점을 연결해서 생각해보게 된다. 의도했건 하지 않았건, 글은 쓰는 자를 반영할 수밖에 없다. 

"나의 모든 것을 너에게 준다는 의미로 이들은 서약 대신 서로의 귀에 자신의 단어를 속삭여주었다."




"나의 모든 것을 너에게 준다는 의미로 이들은 서약 대신 서로의 귀에 자신의 단어를 속삭여주었다." - P61

"이 시점에서 인생을 종료하고 모든 기록을 폐기하겠다는 A17-13님의 결정은 매우 아름다워 보입니다." - P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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