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단어가 내려온다
오정연 지음 / 허블 / 2021년 6월
평점 :
시작하는 말
같은 모어를 가진 사람의 문장에서 몇 번이고 혀 끝에 다시 굴려보고 싶은 아름다움을 느낄 때가 있다.
바짝 다가앉아 들여다보려 하면 부서져 버릴 것 같은 섬세한 반짝임을 느낀다.
내가 제대로 읽어냈다고 자신할 수는 없지만, 밑줄 긋는 문장들이 겹치는 것을 보면 사람마다 다르다고는 하지만 또 같기도 한 모양이다. 빼어나게 좋은 것은 누가 봐도 좋다던가. 조금은 다른 길을 돌아온 사람의 글은 더 다채롭게 반짝이는 것 같다.
모든 단편이 좋았고, 또 몇몇은 어디서 나온 글인지 알 것만 같아 가까웠다.
보다 많은 이들이 읽어보았으면 좋겠다.
리뷰
마지막 로그
내가 나의 마지막을 결정한다는 것은 수동적인 결말이 아닌 능동적인 결말을 맞겠다는 의미일까?
결정을 내리는 순간의 나와 실행을 받아들이는 순간의 나는 어느 쪽이 더 '본질'에 가까운가?
이제 알츠하이머는 낯설기만 한 질환이 아니다. 그 외에도 내가 나를 잃어가는 순간들을 받아들이며 견뎌내는 것과 멈출 지점을 선택하는 것, 그 어느 사이에서 우리는 존엄을 찾는다.
이번 단편집을 위해 원고를 수정하며 '나는 사실 온전한 자신으로 살 수 있는 권리를 말하고 싶었음을 깨달았다'라는 작가의 말처럼, '우아하게 삶을 종료할 선택권'이라는 생사결정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원하는 나'로 존재하는 문제로 바라보고 싶다. 그리고 '실제의 나'라는 것은 무엇이며 '본질적인 나'는 무엇인가라는 문제는 각자 자신의 삶 속에서 풀어가야 할 것이다.
다만 한 가지 덧붙이고 싶었던 것은, 규정을 받아들이는 것 역시도 선택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스스로가 그것을 이해하고 선택하기만 한다면.
+) Bump of Chicken의 <꽃의 이름>을 들어보고 싶다면 Bump of Chicken의 <Hananona>를 찾아 들으시면 된다.
"이 시점에서 인생을 종료하고 모든 기록을 폐기하겠다는 A17-13님의 결정은 매우 아름다워 보입니다."
단어가 내려온다
한 사람은 반드시 하나의 단어를 받게 되는 세상.
그것은 그 사람의 본질이 될 수도 있고, 삶의 지향점이 될 수도 있고, 숙원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위에서부터 내려받는 어떤 것이라는 개념은 신성과 떼어내 바라보기 어렵다. 특정 종교의 관점에서 보자면 달란트 같은 것이 될 수 있을 것이고, 또 다른 관점에서 보자면 존재의 이름-진명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사회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아직 어린 나이에 결정하라고 강요받는 성적, 진로와 같은 낙인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고 거쳐야만 하는 입문 과정, 성인식이라 볼 수도 있겠다.
어떤 것을 어떤 단어로 받더라도 삶은 살아진다. 늦기도 하고 빠르기도 하지만 타인에게는 알리지 않은 채로 살 수 있다. 스스로도 잊고 살 수도 있다. 하지만 한 개인의 삶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무관한 것 또한 아닐 것이다.
말레이-폴리네시아가 언급되는 점과 언어의 변화를 다루는 묘사에서 바로 피지어와 피진이 연상된다. 아마도 작가는 화성의 2세대와 3세대의 언어는 크레올이 되었음을 말하고 싶었을 것이고, 그것이 환경의 변화가 언어에 미치는 당연한 영향력이라고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 설정 속에서 '내려오는 단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듣거나 말하지 못하는 자들도 단어를 받는다는 점, 그럼에도 받는 단어들의 분포가 변화한다는 점을 이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단어가 내려온다>, <미지의 우주>, <행성사파리> 등에서 언급되는 화성에서의 이주민의 삶을 살펴보면 어쩔 수 없이 작가가 미국 유학 경험이 있음과 현재 싱가포르에 거주 중이라는 점을 연결해서 생각해보게 된다. 의도했건 하지 않았건, 글은 쓰는 자를 반영할 수밖에 없다.
"나의 모든 것을 너에게 준다는 의미로 이들은 서약 대신 서로의 귀에 자신의 단어를 속삭여주었다."
"나의 모든 것을 너에게 준다는 의미로 이들은 서약 대신 서로의 귀에 자신의 단어를 속삭여주었다." - P61
"이 시점에서 인생을 종료하고 모든 기록을 폐기하겠다는 A17-13님의 결정은 매우 아름다워 보입니다." - P4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