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의 눈물 - 서경식의 독서 편력과 영혼의 성장기
서경식 지음, 이목 옮김 / 돌베개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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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인터넷서점에서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서경식의 책이 새로 나온 것이다. 나는 이미 <나의 서양미술순례>(창작과비평사, 박이엽 옮김)에서 서경식의 간명하고 소박한 질그릇 같은 글에 굉장히 매료되었었다. <나의 서양미술순례>는 한참 미술 관련 인문서를 읽어 내던 작년 여름, 어느 서점에서 내 손에 걸렸던 것인데, 그림에 대한 지식과 별도로, 나는 작가의 미문에 훨씬 더 마음이 갔다. 미문이라지만, 결코 화려하거나 유려하지 않다. 정갈하고 깔끔한 문장. 그런 문장에 거짓이란 끼어들 수 없는 것이었다.

주문을 마친 며칠 뒤, 택배가 배달되었다. 여러 가지 책과 함께 배달되었으나 내 관심은 오직 서경식의 새 책 <소년의 눈물>(돌베개, 이목 옮김)에만 가 있었다. 그러나 포장을 뜯고는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상했던 것과 달리 책은 하드커버 장정에 굉장히 파격적인 디자인이었다. 내지는 고급스런 코트지였고, 쪽번호는 모두 안쪽으로 달아 두어 읽기가 몹시 불편했다. 이 책에는 일본의 저자와 책들이 많이 소개되어 있어, 장마다 뒤쪽에 따로 주를 달아놓았다. 따라서 본문을 읽으면서 번번히 주석을 찾아보아야 했는데, 안에 달린 쪽번호 때문에 중간중간 맥을 놓치기 일쑤였다. 작가를 직접 찾아 가서 찍었다는 책들도 너무 작게 배치해 놓아 책 안에서 큰 역할을 하지 못했다. 책을 살피는 데 좀 보수적인 편이기도 하지만, 하여튼 이 책의 꼴은 참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무엇보다 소박하고 나직한 저자의 목소리와는 너무 딴판인 디자인과 장정이 혼자서 잘난척하는 양 보였다.

어쨌든.. 마음에 안 드는 책꼴을 만지작거리며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읽어 내려갔다. '서경식의 독서 편력과 영혼의 성장기'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저자가 어릴 적부터 책벌레였다는 사실, 그리고 70년대 유학생간첩단 사건으로 오랜 수형 생활을 한 서승, 서준식(이는 우리가 알고 있는 인권운동사랑방 대표이다.)의 동생이라는 저자의 가정사를 이미 전작을 통해 알고 있던 터라 더욱 흥미가 돋았다.

이 책 역시 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여전히 아름답고 반듯한 문장들이다. 무엇보다 서경식 글의 장점은 예술 작품을 이야기하되 결코 자신의 삶을 빠뜨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미술 작품을 이야기하건, 문학 작품을 이야기하건. <나의 서양미술 순례>에서도 작가는 언뜻 아무 상관이 없어보이는 서양의 중세 미술 작품에 동양인인데다가 한국 국적 일본인으로 살아가는 자신의 처지를 너무나도 처연히 몰입시켰다. 나는 내심 이 책에서 문학 작품에는 자신의 삶을 어떤 방식으로 병치시킬지 무척이나 궁금했던 것이다.
그는 유년시절을 거쳐 사춘기를 넘어 청년기에 이르기까지 거쳤던 책들을 장을 나누어 서술한다. 한 장에는 책 한권의 이야기가 담기는데, 사실 책과 관련된 이야기는 전체에서 얼마되지 않는 양이다. 대부분은 그의 이야기이다. 그의 가족, 그의 형제, 그리고 그의 생활. 그러나 그것이 책과 전혀 관련없는 것은 아니다. 책에서 주는 메시지를 작가 스스로 소화하고 그것을 잘 개어 독자들에게 친절히 전해 준다.

어렸을 때 읽은 책들을 나열할 때 나 역시 약간 흥분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목록에는 내가 읽었던 책들도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두리틀 선생님의 이야기>(내가 읽은 책은 <돌리틀 선생님 이야기>이다.) <안데르센 동화집> <그림동화선>(내 기억으론 <그림 형제 이야기>) <십오 소년 표류기> <하늘을 나는 교실>!
그 외에도 열을 지어 생각이 나기 시작했다. <엘리스의 이상한 여행> <닐스의 이상한 모험> <소공자> <소공녀> <로빈슨 크루소의 모험> <작은 아씨들>...
이것은 모두 계몽사에서 나온 소년소녀세계명작이라는 전집에 들어있던 작품들이었다. 당시 엄마는 서점에 가서 책을 골라주기보다 집집마다 다니며 전집류를 팔았던 외판원을 통해 책을 구입하곤 했다. 계몽사의 소년소녀세계명작 외에도 역시 계몽사의 <성경이야기 시리즈>(5권), 삼성당의 세계위인전집(50권)도 그렇게 구매하게 되었다.
이 전집들은 초등학교 생활의 가장 큰 낙이었다. 기억으론, 각 전집을 세 번 이상 반복해서 읽었던 것 같다.

...독서에 열중할 때면, 나는 식사 중에도 무릎 위에 책을 펼쳐놓고는 '밥을 먹으며' 책을 읽었다. 이때 어머니는 "밥을 먹든지 책을 읽든지 한 가지만 하려무나' 하고 가볍게 꾸지람하시면서도, 내가 종알종알 책의 내용을 재잘거리기라도 하면 재미있다는 듯 말벗이 되어 주셨다...(42쪽)

이 대목을 읽다가 나도 옛날 생각이 나서 웃었다. 나도 그랬으니까. 엄마들은 다 비슷한가 보다. 늘 그렇게 꾸지람하면서도 책 읽는 모습을 싫어하지 않으셨다.

요즘은 어린이문학 전집에 대한 말이 많지만, 나는 사실 전집을 그리 나쁘게 보는 편은 아니다. 내가 이미 전집을 통해 책을 만났고, 그때 읽었던 책들이, 어떤 측면에서는, 그만한 나이에 가질 수 있는 통찰력을 키워줬다고 생각한다. 목록이 서양편향이며, 영웅중심이며 하는 비판들이 사실은 양날의 칼이다. 훌륭한 문학은 늘 인생에 눈물도 희망도 함께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 역시 전집의 희생되었다고 할 수 있다. 전집으로 풍부한 '독서인생'을 살았던 나는 그 이후 중학생이 된 이후로 스스로 책을 살 수가 없었다. 전집으로 구매할 수 있는 책 중에는 중학생을 대상으로 한 것이 없었고, 더군다나 중학생은 '독서'가 아닌 '공부'를 해야 할 '학생'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두 번째 이유는 핑계에 불과하다. 문제는, 전집으로 책을 읽던 나는 서점이라는 공간과 책을 선택적으로 구매한다는 구매 행위에 대한 경험이 전무했다는 점이다. 나는 도대체 어디서 책을 사야 할지, 어떤 책을 골라야 할지 몰랐다. (물론 서점에서 책을 판다는 사실 자체를 몰랐다는 말은 아니다. --;;)
무경험은 무지를 낳았고 무지는 다시 무경험을 낳았다. 나는 '순수하게'(참고서나 문제집을 사기 위해서가 아닌) 책을 사기 위해 몇 번이나 어렵사리 서점에 들어갔지만 결국 빈손으로 나오곤 했다.

그리고 나는 고3 수능을 마치고 나서야 다시 '순수한 책 구매자'가 될 수 있었다. 내 손에는 조정래의 <태백산맥 1>이 들려 있었다. 그리고 그 책은 내 인생의 각도를 약 30도 정도 돌려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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