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예 -상
강병석 지음 / 태동출판사 / 200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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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에서 방영되는 `태조왕건'의 영향 때문이었는지 당시 궁예 신드롬이라는 말까지 생길 정도로 궁예라는 인물이 그 전성기를 맡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궁예'라는 인물에 그리고 그가 그토록 바라던 '미륵용화 세상' 에 매료 된 것은 TV드라마가 아닌 작년 가을에 접했던 <궁예>라는 역사 소설 때문이었다. 처음엔 단지 소설에 묘사됨 궁예의 인물됨에 빠져들었지만, 두 번째 그 책을 읽게 되었을 땐 소설 궁예에 나타난 '미륵용화 세상 사상'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소설의 시대적 배경이 되는 혼란스럽던 후 삼국만큼이나 여러 가지 사회적 문제로 혼란스러운 현 정세 때문에 이 미륵 사상에 관심이 가는 건지도 모를 일이다.

소설 궁예에서 말하는 미륵용화 세상은 한마디로 계급이 없는 사회를 지향한다고 할 수 있다. 즉, 핍박받는 자와 핍박하는 자가 없고, 굶주리고 헐벗은 자와 넘치게 가진 자가 따로 존재하지 않는 그런 세상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신라 말 진골 귀족들의 부패와 이에 따른 호족의 성장과 반발, 그리고 후 삼국의 건설이라는 역사적 사실에서 확인 할 수 있듯이 당대 사람들의 신세계에 대한 갈망을 집약적으로 나타내 준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선 상에서 소설 궁예에 나타난 미륵용화 세상사상의 긍적적인 면을 유추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소설궁예에 나타난 이 사상은 궁예가 옛 고구려 땅을 수북하여 진정한 의미의 삼한 통일을 꿈꾸는 그의 야망의 실현을 돕는다. 반란(?)을 꿈꾸는 자들에게 정신적인 지표 역할을 한 이 사상을 소설 곳곳에 제시함으로써 소설궁예의 전개를 매끄럽게 이끌어 나가고, 더 나아가 궁예의 승승장구에 필연성을 부여하여 읽는 이로 하여금 허구적 느낌을 감소시켜 주는 역할까지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소설 궁예의 결말 부분은 미륵용화 사상에 바탕 둔 글의 흐름에 반전을 꾀하고 있다. 궁예의 후 삼국 건설에 이은 고구려 땅 수북과 이를 통한 미륵용화 세상의 건설의 실패가 결국 미륵 사상 자체에 있었다는 반전을 통해 궁예의 최후를 제시한 것이다. 하지만 이 사상을 이용한 결말부분의 반전은 소설궁예의 전개에서 보여주었던 미륵사상 의한 자연스러운 전개에 비하여 그 타당성이 부족하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즉, 결말부분의 미륵사상의 이용은 오히려 부정적인 역할을 담당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미륵 사상에 내포된 평등사회 구현이 신세계를 갈망하던 백성들의 바램에는 부합하지만, 신세계 건설을 위해 고전분투 했던 여러 장군들의 이해 관계와는 다르다는 점은 쉽게 수긍이 된다. 하지만 미륵사상에 매료되어 궁예를 따르던 이들이 일순간 이 사상에 의하여 등을 돌리고(평등사상의로 인해 자신에게 돌아오지 못하는 이익에 대한 불만으로), 배반에 이른다는 설정은 성급한 글의 귀결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리고 그들의 배반에 의한 또 하나의 혁명(?)에 의한 궁예의 직접적 죽음이 아닌,
외부에 의한 죽음설정은 긴급하게 가져온 반전의 타당성 마저 잃게 하고 있다.    

이처럼 상, 중, 하 세 권으로 이루어진 소설 궁예는 미륵용화 세상 건설이라는 커다란 카테고리 안에서 그 네러티브에 타탕성을 부여하기도 하고, 빼앗기도 하면서 작품의 전개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결말 부의 이 미륵용화 세상 건설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이 궁예가 지향했던 신세계의 필연성을 인정하게하고, 궁예의 실패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이유는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미륵 사상이 신라 말과 후 삼국건설 시기에 백성들의 욕구를 대변해 낼 수 있는 다분히 바람직한 집약적 사상이라는 공감에서 비롯된 것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소설 궁예의 글의 전개를 위해 미륵사상을 채택하고, 글 곳곳에 이를 제시함은 결말의 미비함까지 용해시킬 수 있는 탁월한 선택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렇기 때문에 소설 궁예를 읽으면서 글 곳곳에 나타난 미륵 사상의 의미를 되새겨 보는 작업은 이 소설을 읽는 즐거움을 배가시켜 주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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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정체성 -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001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1
탁석산 지음 / 책세상 / 200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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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제가 누구예요?'  '나도 잘 몰러'

한때 유행했던 이동통신 광고 카피는 그 목적이 어쨌든 간에 지금 한국의 비틀거리는 정체성을 가장 잘 표현해 준다는 생각이 든다. 언제부터 그리고 왜 한국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자문하기 시작했을까? 중국을 세계의 중심으로 인식하고 살아온 변방국가 한국. 하지만 지금 우리는 전 세계에 노출되어있으며, 다른 나라와의 교류 없이는 생존하기 힘든 상황이다. 단순히 중국으로부터 문물을 받아들이던 시대는 지나갔고, 불과 100년 아니, 30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한국은 서구를 경험하고, 이에 따른 급격한 변화를 견뎌야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우리는 계속해서 다른 문명과의 충돌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진정으로 우리가 누구인지를 생각하여 일정한 기준을 정한 후에 서구를 접하는 그런 준비과정이 전혀 없었다는 데 큰 문제가 있다. '우리에게 과연 정체성이라는 것이 존재하기나 한 것일까?' 라는 회의적인 의문이 들 정도로 급격한 변화와 세계화라는 이름 하에 유입되는 문명들을 아무런 거리낌없이 그대로 수용하는 것에만 너무 급급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일정한 자기 정체성을 바탕에 두지 않았기 때문에 세계화 물결 속에서 우리가 겪어내야만 하는 어려움이 도처에 도사리게 된다. 즉, 준비 없는 수용이 낳은 결과들인 것이다. 우리 삶에 매우 절박하게 다가왔던 IMF의 원인을 지난날의 낡은 모델을 대신할 새로운 모델에 대한 사회적 합의 부재로 보는 것이 일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기존의 낡은 모델에 대한 성찰없이 새로운 모델을 도입하려하고, 이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적합한지 여부조차 가리지 않았던 우리의 정체성에 대한 관심 부재가 위기를 불러들인 근본 원인이다.

<한국의 정체성>은 한국의 정체성을 판단하는 과정에 대해, 그리고 정체성을 바탕으로 한 세계화를 위한 기준과 방법론에 대해 논하고 있다. 한국의 정체성에 대해 구체적인 개념 정의를 피한 것은 매우 유용했다. 즉, 직접적으로 한국의 정체성이 '무엇이다' 라고 설명하는 것보다 이러한 과정과 기준들을 제시하는 것 자체가 바람직한 한국의 정체성을 정립하는데 기여한다.  

그러나 정체성에 명확한 개념의 부재가 주는 긍정적인 측면을 고려하여도 여전히 <한국의 정체성>은 뭔가 찜찜하다. 책에 제시된 정체성 확립을 통한 세계화 혹은 세계화를 통한 정체성 확립의 과정과 기준들 자체가 한국의 정체성을 간과하기 쉬운 '구조' 를 갖는다는데 문제가 있다. 이는 비단 이 책에 한정된 문제가 아니라, 한국의 정체성을 고민하는 우리의 인식에도 뿌리 갚게 박혀있다. 즉, 비틀거리는 한국의 정체성을 고민하는 우리의 인식 자체가 이미 진정한 정체성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한다.

이는 우리가 인식하는 세계화의 의미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우리는 말로는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다' 라고 부르짖지만, 실상 우리가 세계화를 위해서 하는 일들은 이와 정 반대인 '세계적인 것이 한국적인 것이다'에 향해 있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가 추구하는 세계적인 것이 극히 미국적이라는 것에 문제의 심각성은 더해진다.

정체성 확립과 세계화의 동시실현을 위해 세계적인 보편성을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흔히 우리가 인식하는 세계적인 보편성이라는 것이 과연 진정한 세계적 보편성일까? 얼마나 다양한 국가의 의견과 경험을 수렴하고 합의하여 세계적인 보편성이 도출되었을까? 결국 세계적인 보편성은 영향력이 큰 미국적의 특수한 것 즉, 미국이 자신의 특수한 것을 보편화시키는 것에 성공했기 때문에 정의된 아니, 강요된 결과물이다. 우리는 왜 자신의 특수성을 세계적인 보편성으로 만드는 데 성공한 미국의 태도와 과정에 대해 고민하고, 우리의 특수성을 세
계적인 보편성으로 만드는데 노력하지 않는가? 이러한 노력의 중요성을 망각한 채, 너무나 미국적인 특수한 보편성에 부합하려는 노력에만 급급하다. '흉내내기'를 충실히 수행함으로써 중심부 쪽으로 조금 더 다가가려는 발상 자체가 잘못이다. 물론 이미 세계적인 흐름이 미국이라는 준거 틀에 의해 움직이는 지금, 가능하면 중심부(미국)로 다가가서 중심부 사람들(미국사람)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실질적으로 유리할 수 있음을 무시할 수 없다. 그렇지만 이러한 구조 속에서는 아무리 용을 써도 주변부는 절대로 중심부가 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매우 합리적으로 보이는 중심부의 기준은 어디까지나 중심부 안쪽의 얘기지 주변부에는 절대로 '공정' 하게 적용되지 않는다.

이러한 과정은 한국의 정체성 확립이라는 대명제를 실현을 위해 함께 진행되어야 할 세계화가 아니다. 흉내내기의 구조 속에서 얻은 이익은 우리의 진정한 정체성을 일정부분 포기하는데서 오는 단기적인 대가일 뿐이다. 이것이 바로 한국의 특수성 중 세계적인 보편성을 획득할 만한 것을 찾아 우리의 정체성을 확립해야지, 반대로 단기적인 달콤한 대가를 위해 가장 미국적인 것(세계적인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중에서 우리에게 있는 비슷한 요소를 찾아 이를 보다 더 미국에 가깝게 흉내내려고만 해서는 안되는 이유이고, <한국의 정체성>의 주장이 조금은 위험한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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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아, 춘아, 옥단춘아, 네 아버지 어디 갔니?
이윤기 외 대담 / 민음사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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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신문이나 월간지에서 아주 가끔 접하게 되는 대담을 제외하고 이런 형식의 대담집은 처음이다. 제복부터 범상치 않아 엄청난 흥미를 끌었던 이 책은 실로 엄청났다. 이 '엄청나다'는 것은 서로 상반된 두 가지 뜻을 담고 있다. 하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생각할 수 있었던 엄청나게 다양한 주제들이고 다른 하나는 소위 지식인이라고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루어지지 않은 엄청나게 실망스러운 대담. 즉, 서로의 이야기 듣기의 엄청난 실패이다.

형식상으로는 13가지 주제에 대해서 26명의 대담자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지만 이 책이 담아내고 있는 주제는 13가지에 그치지 않는다. 이것이 어찌보면 대담이라는 글이 아닌 말을 통해 하나의 주제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데서 오는 필연적인 혜택일지도 모르겠지만, 책을 읽는 동안 잠시도 열린 사고를 하지 않으면 안되게 하는 엄청난 장점을 지니는 것만은 사실이다. 알아간다는 것에 대한 즐거움을 충족시키는데는 일단 성공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인문학의 위기에 대한 심도있는 고찰을 다루었다는 책 광고가 그다지 허무하게만 들리지는 않는다. 이 책의 대담가운데 인문학의 위기에 대한 대담은 두어편에 불과하지만 이러한 열린 사고 즉, 개방적이고 총체적인 기본적 사고를 형성해주고 이를 끈임없이 요구하는 인문학의 필요성을 내포한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인문학의 거장이라고 불리시는 고대 김우창 교수님과 철학가 김상환씨의 대담 <오렌지 주스에 대한 명상>은 문학, 예술, 철학, 신화, 디지털, 책, 정치, 종교 등등 엄청난 경계들을 자유롭게 넘나들면서 이루어져 지식인(?)을 준비하는 대학생으로써 엄청난 반성을 하게 했고 그와 더불어 알아가야 하는 것들에 대한 엄청난 동기부여를 해주었다. 
 
하지만 내가 이 책에 기대했던 것은 이러한 주제의 다양함을 통한 인식의 폭의 확장에 있었다기보다는 <대담> 자체에 거는 기대였다. 글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때 필연적으로 아니, 글이라는 틀 자체에 의지한 나머지 발생하는 가식이나 자기 포장하기로부터 말을 통한 사고의 표현은 보다 자유로울 수 있을 것 같
았기 때문이다. 말을 통한 생각의 전달, 특히나 이러한 형식의 대담은 두 명이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가면서 자신의 생각에 도전도 받아보고 이를 통해 자신의 의견을 수정해보거나 의문을 제기해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의견을 눈앞의 상대에게 제대로 전달하기 위해서 소위 '지식인 그들만의 잔치'에서 벗어나 표현과 전달에 다른 양상을 띨 수 있을 거라 기대했다.  

하지만 말을 글처럼 표현하는 그들(?) 앞에서 이러한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졌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둘 사이에 대담 아니 대화조차 되지 않은 경우가 허다했다. 서로 자신의 분야에 대한 혹은 자신이 준비해온 것에 대해서만 아주 집요하게 이야기한다. 서로 이야기의 주고받기가 형식이 지나지 않은 것이다. 상대방의 이야기의 요점이 무엇이든지 간에 상대가 모르는 분야에 대해 어려운 이야기를 늘어놓기 일 수였다. 이것이 지면상 혹은 시간상의 이유로 편집된 것이기만을 간절히 바래본다. 정말로 이것이 우리사회를 이끌어갈 기본적인 인문지식의 선구자들의 대화의 모습이라면 참으로 암울하기 때문이다.

말이라는 가장 자유로운 표현 형식을 빌면서까지 대담자들이 엄청난 패거리 의식(스스로든 실재 패거리든)에 젖어 있다면 앞서 설명한 이 책이 주는 주제의 다양함에서 오는 열린 사고라는 장점은 단지, 사고의 다양함이 아니라 여러 명의 획일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들의 옹골찬 고집이 만들어낸 난무하는 허무한 말로 전락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독자뿐만 아니라 대담자 스스로도 열린 사고를 할 수 있도록 이러한 대담이 단지 지식인들의 자족적인 지적 유희(?)에 그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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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딴방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199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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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숙의 <외딴방>을 읽는 것은 한 편의 소설을 읽는다는 것과 사뭇 다른 느낌을 받게 된다. 그녀의 <외딴방>은 허구도 사실도 아닌 어떤 신비함이 내재되어 있다는 것뿐만 아니라 그녀의 외딴방으로 자신을 혹은 우리를 초대함으로써 방안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즉, '과거의 방에 대하여' 소설을 쓴 것이 아니라, '과거의 방에서' 소설을 쓰고 있는 것이다. 과거라는 공간에서 글을 씀으로서 그녀 스스로 혹은 독자가 얻는 효과는 실로 막대하다.


외딴방을 포함한 신경숙의 작품에서 찾을 수 있는 문학의 밑자리는 거센 도시화와 산업화의 밀물에 밀려 점차 쇠락과 소멸의 길을 걷고 있는 농촌 공동체의 다사롭고 넉넉한 품이다. 작가의 유년 시절의 체험과 긴밀하게 맞물린 그 공간은 성년시절 대도시의 번잡하고 이기적인 삶의 방식과 대비되어 한편으로 아련한 향수와 동경을, 다른 한편으로 애절한 정서적 울림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그녀의 유년의 농촌체험과 성년의 도시체험 사이에 어떤 단절 혹은 공백이 존재하고 있다.


 외딴방은 그러한 단절 혹은 공백을 연결해 주는 다리 역할을 충분히 수행한다. 비로소 우리는 신경숙이 그토록 드러내놓길 꺼려왔던, 그러나 언젠가는 기필코 말해야만 했던 유년과 성년 사이의 공백기간, 열 여섯에서 스무 살까지의 그 시간의 빈터 속으로 입장할 수 있게된다. 즉, 외딴방을 통해서야 우리는 신경숙 문학의 또 다른 시원, 그 아프고 잔인했던 시절, 열악한 환경 속에서 문학에의 꿈을 키워 나가던 소녀 신경숙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주인공은 16살부터 20살까지의 시간을 '외딴 방'에서 살면서도 자신의 방(자아)을 찾지 못한다. 외딴 방으로 걸어들어 간 건 열 여섯이었고 그곳에서 뛰어나온 건 열 아홉이었기 때문에 그 사 년의 삶을 침묵으로 묵살하여 화해하지 못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주인공(작가)는 과거로부터 걸어 나가 봐도, 현재로부터 걸어 들어가 봐도 늘 같은 장소에서 끊겼다. 열 다섯에서 갑자기 스무 살이 되거나 스물에서 갑자기 열 다섯이 되는 것이다. 이런 부재를 극복하기 위해 외딴방의 오류적 과거를 끄집어낸다. 그 시절과 이별을 고하기 위해 기다리는 장소 외딴방은 외려 언제부터인가 주인공에게 그리운 공간으로 숨쉬기 시작한다. 그 시절의 외딴방은 집에서 떨어져 나와 고립된 노동자가 되어 갔지만 언제나 가족들과 함께 할 수 있고, 책을 읽거나 집안 일을 할 수 있던 공간이었던 유일한 공간이었다. 이 방의 존재 자체가 현재는, 외면하고만 싶었던 과거의 고통과 비애는 한 단계 높은 차원으로 수렴하고, 잊고자 했던 과거의 한 순간은 기억의 응달에 박혀 있는 돌부리가 아니라 다시금 살려내야 할 값진 재보 역할을 하는 것이다. 더 이상 낡은 기억의 창고가 아니라 웅크린 희망을 깨워주는 현재 진행형인 꿈의 공간, 미래까지 존재할 과거의 상이 존재하는 곳이 바로 외딴방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 소설을 읽는 독자 역시 아련한 과거의 아픔을 스스로 회상하게 되고, 그러한 회상 자체가  과거로의 들어서기를 가능하게 한다. 그리고 이 소설을 읽어나가면서 자신의 신경숙과 같이 호흡하면서 지신의 과거를 아른한 아픔을 그리워하고 이러한 그리움의 정서를 바탕으로 현재의 자신과 미래의 자신을 재구성하게 된다. 신경숙의 <외딴방>은 이러한 의미에서 작가 스스로의 자아회복을 뛰어 넘어 소설을 읽은 독자 개인에게까지 스스로 전도된 아트라스 효과를 체험하게 실험의 장으로써의 역할까지 하고 있는 곳이라 생각된다.

우리가 신경숙의 아픈 <외땅방> 매료 될 수 밖에 없고, <외딴방>에서 희망을 느끼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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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보스 - 디지털 시대의 엘리트
데이비드 브룩스 지음, 형선호 옮김 / 동방미디어 / 200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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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T적인 생각이 대한 민국을 움직입니다.' 라는 테마로 집행되는 KT 광고를 보면 롤러 브레이드를 타고, 청바지를 입고 혼잡한 출근시간 자동차사이를 질주하는 젊은 사장과, 자동차안에서 서류를 들고 시계만 쳐다보는 중년을 모델로 하고 있다. 이전에 우리가 지니고 있던 사장이라는 이미지 - 어느 정도 배가 나온 안경을 낀 중년 신사, 혹은 검정색 수입차 안에서 비서의 보고를 듣는 남성-를 무너뜨리고 보다 진취적이고 효율적인 이미지를 강조하는 광고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이미지는 비단 광고에서 시청자의 눈길을 끌기 위해 사용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 사회가 이러한 창의성과 효율적이고 진취적인 사고를 요구하고 그것을 가치 있게 여기는 사회로 변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와 같은 광고뿐만 아니라 텔레비전 드라마나 유행하는 음악이나 패션, 급성장하는 산업 등과 같은 것 속에 녹아 있는 메시지를 관찰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사회가 변화함에 따라 탄생하는 새로운 문화, 새로운 가치관등을 하드웨어적인 사회 시스템 즉, 사회 제도나 법률의 변화보다 앞서 나열한 소프트웨어적 사회 시스템이 훨씬 더 빠르고 융통성있게 그리고 더욱, 광범위하고 다양하게 이를 수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 근대화시기에 나타난 사회의 변화를 우정국의 설립이나 철도 개설 등과 같은 변화를 통해서만 살펴보는 것보다 그 당시 변화의 중심에 서있던 화류계 여성들의 놀이 문화를 살펴보거나, 룸펜과 데카당과 같은 무기력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 지식인들 문화를 살펴보고 이를 통해 우리나라의 근대화를 이해하는 것이 훨씬 더 그 당시 변화하는 사회, 새롭게 등장했던 문화를 보다 투명하게 이해하는 길이 될 수 있다.

미국의 저널리스트 데이비드 브룩스의 <보보스> 역시 이러한 소프트웨어적 사회 시스템의 고찰을 통해 새로운 문화, 계층의 개념을 정립한 예라 할 수 있겠다. 그는 뉴욕 타임즈 웨딩 섹션 지면에 소개되는 커플들을 관찰함으로써 미국 사회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계층의 변화양상을 유추해 냈다. 이전의 부루즈아 계층에서 벗어나 보헤미아적인 성향을 띤 교육받은 계층, 즉 부르주아 보헤미안의 개념인 보보스라는 새로운 계층, 그리고 그들의 문화를 이해하도록 하고 있다.

물론 이와같은 소프트웨어적인 사회 시스템을 관찰하는 일만으로 사회의 변화와 새로운 문화 양상을 완벽하게 구현해 낼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작업과 함께 사회 제도나 범률 규칙들의 변화 양상 또한 어떻게 변화하는지 역시 함께 관찰되어야 한다. 앞서 언급한 데이비드의 보보스의 개념 역시 단지 웨딩섹센의 관찰에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이를 발판으로 하여 교육받은 계층이 등장할 수 있었던 시험제도, 교육제도의 변화를 관찰하였고, 보보스라 불릴 만한 사람들이 만들어낸 마을 구조와 사회시설의 변화 또한 관찰하였기 때문에 보보스의 개념이 새로운 문화, 계층으로서 더욱 힘을 얻게 되는 것이다.

한 사회시스템의 변화를 이해하고, 새롭게 부상하는 문화와 가치관을 보다 효과적이고 투명하게 이해하기 위해 수십수백년이 걸려 바뀌는 하드웨어적 사회 시스템 고찰만을 고집할 것이 아니라 데이비드와 같이 사회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소프트웨어적 사회 시스템에 대해 보다 민감하게 반응하고 이를 끈기를 가지고 관찰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시각을 지니고 급격하게 변화하는 사회를 바라볼 때 비로소 우리는 새롭게 부상하는 문화와 가치관에 대해 보다 융통적인 접근을 할 수 있고 보다 투명하게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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