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딴방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1999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신경숙의 <외딴방>을 읽는 것은 한 편의 소설을 읽는다는 것과 사뭇 다른 느낌을 받게 된다. 그녀의 <외딴방>은 허구도 사실도 아닌 어떤 신비함이 내재되어 있다는 것뿐만 아니라 그녀의 외딴방으로 자신을 혹은 우리를 초대함으로써 방안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즉, '과거의 방에 대하여' 소설을 쓴 것이 아니라, '과거의 방에서' 소설을 쓰고 있는 것이다. 과거라는 공간에서 글을 씀으로서 그녀 스스로 혹은 독자가 얻는 효과는 실로 막대하다.


외딴방을 포함한 신경숙의 작품에서 찾을 수 있는 문학의 밑자리는 거센 도시화와 산업화의 밀물에 밀려 점차 쇠락과 소멸의 길을 걷고 있는 농촌 공동체의 다사롭고 넉넉한 품이다. 작가의 유년 시절의 체험과 긴밀하게 맞물린 그 공간은 성년시절 대도시의 번잡하고 이기적인 삶의 방식과 대비되어 한편으로 아련한 향수와 동경을, 다른 한편으로 애절한 정서적 울림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그녀의 유년의 농촌체험과 성년의 도시체험 사이에 어떤 단절 혹은 공백이 존재하고 있다.


 외딴방은 그러한 단절 혹은 공백을 연결해 주는 다리 역할을 충분히 수행한다. 비로소 우리는 신경숙이 그토록 드러내놓길 꺼려왔던, 그러나 언젠가는 기필코 말해야만 했던 유년과 성년 사이의 공백기간, 열 여섯에서 스무 살까지의 그 시간의 빈터 속으로 입장할 수 있게된다. 즉, 외딴방을 통해서야 우리는 신경숙 문학의 또 다른 시원, 그 아프고 잔인했던 시절, 열악한 환경 속에서 문학에의 꿈을 키워 나가던 소녀 신경숙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주인공은 16살부터 20살까지의 시간을 '외딴 방'에서 살면서도 자신의 방(자아)을 찾지 못한다. 외딴 방으로 걸어들어 간 건 열 여섯이었고 그곳에서 뛰어나온 건 열 아홉이었기 때문에 그 사 년의 삶을 침묵으로 묵살하여 화해하지 못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주인공(작가)는 과거로부터 걸어 나가 봐도, 현재로부터 걸어 들어가 봐도 늘 같은 장소에서 끊겼다. 열 다섯에서 갑자기 스무 살이 되거나 스물에서 갑자기 열 다섯이 되는 것이다. 이런 부재를 극복하기 위해 외딴방의 오류적 과거를 끄집어낸다. 그 시절과 이별을 고하기 위해 기다리는 장소 외딴방은 외려 언제부터인가 주인공에게 그리운 공간으로 숨쉬기 시작한다. 그 시절의 외딴방은 집에서 떨어져 나와 고립된 노동자가 되어 갔지만 언제나 가족들과 함께 할 수 있고, 책을 읽거나 집안 일을 할 수 있던 공간이었던 유일한 공간이었다. 이 방의 존재 자체가 현재는, 외면하고만 싶었던 과거의 고통과 비애는 한 단계 높은 차원으로 수렴하고, 잊고자 했던 과거의 한 순간은 기억의 응달에 박혀 있는 돌부리가 아니라 다시금 살려내야 할 값진 재보 역할을 하는 것이다. 더 이상 낡은 기억의 창고가 아니라 웅크린 희망을 깨워주는 현재 진행형인 꿈의 공간, 미래까지 존재할 과거의 상이 존재하는 곳이 바로 외딴방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 소설을 읽는 독자 역시 아련한 과거의 아픔을 스스로 회상하게 되고, 그러한 회상 자체가  과거로의 들어서기를 가능하게 한다. 그리고 이 소설을 읽어나가면서 자신의 신경숙과 같이 호흡하면서 지신의 과거를 아른한 아픔을 그리워하고 이러한 그리움의 정서를 바탕으로 현재의 자신과 미래의 자신을 재구성하게 된다. 신경숙의 <외딴방>은 이러한 의미에서 작가 스스로의 자아회복을 뛰어 넘어 소설을 읽은 독자 개인에게까지 스스로 전도된 아트라스 효과를 체험하게 실험의 장으로써의 역할까지 하고 있는 곳이라 생각된다.

우리가 신경숙의 아픈 <외땅방> 매료 될 수 밖에 없고, <외딴방>에서 희망을 느끼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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