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정체성 -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001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1
탁석산 지음 / 책세상 / 2000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아버지, 제가 누구예요?'  '나도 잘 몰러'

한때 유행했던 이동통신 광고 카피는 그 목적이 어쨌든 간에 지금 한국의 비틀거리는 정체성을 가장 잘 표현해 준다는 생각이 든다. 언제부터 그리고 왜 한국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자문하기 시작했을까? 중국을 세계의 중심으로 인식하고 살아온 변방국가 한국. 하지만 지금 우리는 전 세계에 노출되어있으며, 다른 나라와의 교류 없이는 생존하기 힘든 상황이다. 단순히 중국으로부터 문물을 받아들이던 시대는 지나갔고, 불과 100년 아니, 30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한국은 서구를 경험하고, 이에 따른 급격한 변화를 견뎌야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우리는 계속해서 다른 문명과의 충돌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진정으로 우리가 누구인지를 생각하여 일정한 기준을 정한 후에 서구를 접하는 그런 준비과정이 전혀 없었다는 데 큰 문제가 있다. '우리에게 과연 정체성이라는 것이 존재하기나 한 것일까?' 라는 회의적인 의문이 들 정도로 급격한 변화와 세계화라는 이름 하에 유입되는 문명들을 아무런 거리낌없이 그대로 수용하는 것에만 너무 급급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일정한 자기 정체성을 바탕에 두지 않았기 때문에 세계화 물결 속에서 우리가 겪어내야만 하는 어려움이 도처에 도사리게 된다. 즉, 준비 없는 수용이 낳은 결과들인 것이다. 우리 삶에 매우 절박하게 다가왔던 IMF의 원인을 지난날의 낡은 모델을 대신할 새로운 모델에 대한 사회적 합의 부재로 보는 것이 일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기존의 낡은 모델에 대한 성찰없이 새로운 모델을 도입하려하고, 이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적합한지 여부조차 가리지 않았던 우리의 정체성에 대한 관심 부재가 위기를 불러들인 근본 원인이다.

<한국의 정체성>은 한국의 정체성을 판단하는 과정에 대해, 그리고 정체성을 바탕으로 한 세계화를 위한 기준과 방법론에 대해 논하고 있다. 한국의 정체성에 대해 구체적인 개념 정의를 피한 것은 매우 유용했다. 즉, 직접적으로 한국의 정체성이 '무엇이다' 라고 설명하는 것보다 이러한 과정과 기준들을 제시하는 것 자체가 바람직한 한국의 정체성을 정립하는데 기여한다.  

그러나 정체성에 명확한 개념의 부재가 주는 긍정적인 측면을 고려하여도 여전히 <한국의 정체성>은 뭔가 찜찜하다. 책에 제시된 정체성 확립을 통한 세계화 혹은 세계화를 통한 정체성 확립의 과정과 기준들 자체가 한국의 정체성을 간과하기 쉬운 '구조' 를 갖는다는데 문제가 있다. 이는 비단 이 책에 한정된 문제가 아니라, 한국의 정체성을 고민하는 우리의 인식에도 뿌리 갚게 박혀있다. 즉, 비틀거리는 한국의 정체성을 고민하는 우리의 인식 자체가 이미 진정한 정체성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한다.

이는 우리가 인식하는 세계화의 의미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우리는 말로는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다' 라고 부르짖지만, 실상 우리가 세계화를 위해서 하는 일들은 이와 정 반대인 '세계적인 것이 한국적인 것이다'에 향해 있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가 추구하는 세계적인 것이 극히 미국적이라는 것에 문제의 심각성은 더해진다.

정체성 확립과 세계화의 동시실현을 위해 세계적인 보편성을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흔히 우리가 인식하는 세계적인 보편성이라는 것이 과연 진정한 세계적 보편성일까? 얼마나 다양한 국가의 의견과 경험을 수렴하고 합의하여 세계적인 보편성이 도출되었을까? 결국 세계적인 보편성은 영향력이 큰 미국적의 특수한 것 즉, 미국이 자신의 특수한 것을 보편화시키는 것에 성공했기 때문에 정의된 아니, 강요된 결과물이다. 우리는 왜 자신의 특수성을 세계적인 보편성으로 만드는 데 성공한 미국의 태도와 과정에 대해 고민하고, 우리의 특수성을 세
계적인 보편성으로 만드는데 노력하지 않는가? 이러한 노력의 중요성을 망각한 채, 너무나 미국적인 특수한 보편성에 부합하려는 노력에만 급급하다. '흉내내기'를 충실히 수행함으로써 중심부 쪽으로 조금 더 다가가려는 발상 자체가 잘못이다. 물론 이미 세계적인 흐름이 미국이라는 준거 틀에 의해 움직이는 지금, 가능하면 중심부(미국)로 다가가서 중심부 사람들(미국사람)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실질적으로 유리할 수 있음을 무시할 수 없다. 그렇지만 이러한 구조 속에서는 아무리 용을 써도 주변부는 절대로 중심부가 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매우 합리적으로 보이는 중심부의 기준은 어디까지나 중심부 안쪽의 얘기지 주변부에는 절대로 '공정' 하게 적용되지 않는다.

이러한 과정은 한국의 정체성 확립이라는 대명제를 실현을 위해 함께 진행되어야 할 세계화가 아니다. 흉내내기의 구조 속에서 얻은 이익은 우리의 진정한 정체성을 일정부분 포기하는데서 오는 단기적인 대가일 뿐이다. 이것이 바로 한국의 특수성 중 세계적인 보편성을 획득할 만한 것을 찾아 우리의 정체성을 확립해야지, 반대로 단기적인 달콤한 대가를 위해 가장 미국적인 것(세계적인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중에서 우리에게 있는 비슷한 요소를 찾아 이를 보다 더 미국에 가깝게 흉내내려고만 해서는 안되는 이유이고, <한국의 정체성>의 주장이 조금은 위험한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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