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연금술사
파울로 코엘료 지음, 최정수 옮김 / 문학동네 / 2001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릴 적 알싸한 소주 냄새를 풍기며 늦게 들어오신 아빠가 나와 동생을 앞에 앉혀두고 했던 이야기들이 생각난다.

“어떤 사람이 되고 싶으냐?”
“......................”
“보통사람처럼 사는게 얼마나 힘든지 아냐?”
“.....................”
“세상은 이상하게도 보통 사람들의 상식이 통하지 않아, 보통사람의 상식으로 세상 을 살아 가자니 힘들다...보통사람들의 상식이 통하는 세상....”

단순히 홍어 삭은 냄새만큼이나 알싸했던 아빠에게서 풍겨 나오던 소주 냄새가 싫어서였을까? 늦은 밤까지 아빠의 퇴근을 기다렸던 것이 마냥 졸려서 였을까? 난 그때 아빠가 취기를 빌어 나와 동생에게 밖에 풀어놓을 수 없었던, 그런 당신의 억겁의 삶의 무게를 이해 할 수 없었던 것 같다.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는 나의 아비와 같은 보통 사람들, 그들이 믿었고, 지금도 믿고 있고, 앞으로도 변함없을 그들이 삶의 근거로 삶고 있는 상식들, 그런 일상 생활 속에 묻어나는 삶의 연금술이 갖는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해 준다. 특히 식민 경험과 전쟁이라는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은 납과 같았던 당신들의 삶과, 그들의 자식의 삶까지 오늘과 같은 풍요라는 금으로 바꾸어 놓은 우리 아비, 어미 세대, 그 아비의 아비, 어미의 어미 세대 사람들의 조금은 서글픈 그런 연금술말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이런 보통사람들의 삶의 연금술의 의미를 가끔은 하찮은 것, 당연한 것, 평가되거나 기록되지 않아도 되는 것 쯤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다. 납과 같았던 한국사회가 지금의 금과 같은(물론 지금의 금과 같은 사회가 순도 100%의 올곧은 모습은 아니라 할 지라도) 모습으로 바뀔 수 있었던 데에는 유능한 지도자의 경제성장 계획이나, 외국 자본의 도움, 몇몇 경영자들의 뛰어난 수완 등의 것 만으로 이루어 진 것이 아니다. 보이지 않은 곳에서 자신들만의 방법으로, 자신들의 상식이 통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그들의 삶의 연금술을 믿고 매진했던 보통 사람들의 노력이 무엇보다 큰 역할을 했지만 우리는 그런 보통사람들의 연금술쯤은 단지 세상을 살아가는 ‘작은 노하우’나 ‘서민성’ 등으로 대충 얼버무리기 일쑤다.

특히 <연금술사>에서 피라미드를 향해 그리고 연금술사를 만나기 위해서 사막을 건너는 동안 영국인과 주인공 산티아고의 모습을 묘사한 부분은 오늘날 우리 사회, 개개인들이 보통 사람들 각각의 삶의 연금술을 어떻게 평가하고 되새겨야 하는 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영국인이 책을 통해서 연금술의 의미를 알아가는 방법과 산티아고의 사막을 가르는 대상행렬을 지켜보는 일상의 방법은 사람들은 저마다 각각의 자기 방식으로 삶의 의미, 연금술을 배우고 있고, 중요한 것은 저 사람의 방식과 내 방식이 같을 수는 없지만 각각의 방법들 모두가 자아의 신화를 찾는 길로 통하고 있고 그것은 궁극적으로 우리 삶과 사회를 살찌우는 방식이라는 것, 그래서 서로 다르지만 각자의 길을 존경해야 한다고 작가는 말하고 있다. 자아의 신화를 찾는 방법이 책이어서 가치있는 것이 아니고 단지 대상 행렬 무리를 지켜보는 일상적인 행위여서 하찮은 것이 아닌 것이다.

개인의 삶을 끌어 앉고 있는 우리 사회를 납에서 금으로 변화시키는 힘이 보다 큰 힘에 의해 마음대로 재단되고 평가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안에 살고 있는 각각의 보통사람들의 자아의 신화, 삶의 연금술의 가치가 자유롭게 나름의 소리와 빛을 내고, 그 소리와 빛이 단지 공허한 메아리가 아니라 거대한 사막의 모래 바람과 같은 힘을 가지고 있음을 인정할 줄 아닌 우리 사회가 되길 바래 본다.
마크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달의 제단 - 개정판
심윤경 지음 / 문이당 / 2010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소설책을 읽을때 내겐 몇가지 버릇이 있다. 항상 소설 초반과 중반과 후반의 몇 장을 먼지 읽고 다시 처음부터 천천히 읽기를 시도 하는 것과 책머리를 훑어보다 액자식으로 쓰여진 소설임을 알게 되면 난 항상 띄엄띄엄 등장하는 액자 소설 먼저 읽는 버릇이다. 하나하나의 문장이 주는 감동과 묘사의 떨림들을 천천히 되새김질하기위해서 언제나 대강의 줄거리를 알고 시작해야 소설이 읽히는 이상한 버릇이다.

이번 달의 제단 역시 그랬다. 달의 제단을 읽는 동안 내내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을 닮았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사람의 아들에서 주인공이 새로 만든 성서의 역할을 달의 제단에서는 상룡이 해석해야하는 어간이 대신해 주고 있다. 그래서 책 곳곳에 등장하는 어간의 내용을 찾아서 연결시켜 먼저 읽고, 사실 책장을 다시 처음으로 되돌리는 것이 겁이 났다.

상룡의 고종 할미와 그녀의 할미의 편지 마지막이 자진이라는 것, 할미의 편지에 대한 그녀의 할미의 답장이 없다는 더 우울한 어간의 결말이 상룡과 정실이 그리고 17대 종손 할아버지의 관계 역시 자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수 밖에 없는 다소 습습하고 어둑어둑한 서글픈 운명의 고리를 감지했기 때문이었다.

역시나 딸을 낳은 고종할미가 자결의 방법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듯이, 상룡의 아비가 효종어머니의 옷고름에 한번의 눈길도 주지 않고 옛 연인을 그리다 자결했듯이, 상룡 또한 효경당을 지키는 종손의 무게를 오롯하게 감당할 수 없었다.

그러나 마지막 책장을 넘기는 시간이 되었을 쯤 전통을 지켜내야 하는 운명의 고리에서 한발짝도 벗어날 수 없는 다소 우울한 운명은 달의 제단이 다른 무엇인가를 말해 주지 위해 선택한 ‘돌아간 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달의 제단의 진정한 매력(?)은 종손의 무게, 전통과 현실의 괴리와 불협화음 속에 매몰되어 희생되어야 하는 것이 단지 남성의 문제로만 다루지 않는 다는 점이다. 어간의 주인공은 고종할미의 우울한 희생이 효경당어미니 혹은 상룡의 친어미인 마법의 초콜릿 가게 여주인으로 그리고 다시 부엌데기, 불구 정실의 몸으로 고스란히 전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들의 우울한 희생은 전통과 현실의 괴리나 불협화음이 가지고 오는 남성위주의 소음속에서 남성에 의해 아무렇지 않게 혹은 그녀들의 선택인 것으로 여겨지고 있음을 종가집에 몸을 묻고 살아가는 그녀들의 몸을 사용한(?) 남성들을 통해 그녀들의 몸의 목소리로 말해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순수하지 않은 출생과 전통을 할아버지에게 이젠 종교가 되어버린 전통을 계승해하는 상룡에게 지워진 무게 보다 정실의 몸이 들려주는 우울한 희생과 눈물섞인 아이의 발길질이 더 서글퍼지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스푸트니크의 연인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이정환 옮김 / 자유문학사 / 199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TO. 스밀레

안녕? 스밀레!
내일 아침 9시까지 출근 아닌 출근을 해야하는 나지만 스푸트니크의 연인에서 널 만나는 순간 그 책을 놓을 수가 없었어. 결국 밤을 새 너와 너의 연인과 친구 이야기 모두를 조심스럽게 훔쳐보았지.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해 본적이 있었나? 누군가에게 성을 느껴 본적이 있었나?’

네가 던진 이 질문을 접하는 순간 사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해버리더라. 그래서 어쩜 너에 관한 이야기를 놓을 수 없었을지 몰라. ‘나와 같은 고민을 하고 있는 사람이 여기 또 있구나, 이 사람은 어떻게 했을까? 내게도 답을 알려줘!’ 라는 심정으로 내 이야기를 그렇게 쫓아갔던 거야!


네가 소설 쓰기에 너의 모든 오감을 열어두었기에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하지도 누군가에서 성욕을 느낄 수도 없었다고 했지? 맞아, 대학교에 들어와 모든 세상이 달리 보이기 시작하고 이쪽과 저쪽에 있는 날 구분하기 힘들었을 때 내게 찾아온 첫 번째 연애를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어. 어느 한곳으로 나의 모든 감정과 느낌들, 생각들을 흘려보낼 수 없을 만큼 혼란스러웠던 그때 난 어쩜 진정으로 사랑해서가 아닌 의무적인 연애 시작했었던 것 같고(그 애가 알면 난 벌받을 거야, 그치? 아니, 어쩜 그 애도 나나 스밀레 너 같을지도 모르겠구나), 별 재미(?)를 느끼지 못했던 것 같아.(사실 그땐 죽고 못 살았지만! )

그런데 내 삶의 결과 내 사고의 무늬가 조금씩 또렷해질 무렵부터 너처럼 나도 누군가에게 사랑을 느끼지도, 연애에 대한 설레임도, 성욕이라는 것도 모두 사라져 버리더라.. 사랑이라는 감정이 얼마나 유쾌하고 따뜻한 것인지, 얼마나 기분 좋은 경험인지 알지만 네가 소설 쓰기에서 그런 사랑의 감정을 무엇보다 강력하게 느꼈듯이 어쩜 나도 다른 무엇에선가 다른 남성과의 사랑이 아닌 삶에 묻어나는 보다 강력한 사랑의 감정을 온통 정신이 팔려있었던 것 같아. ‘연애보다 그때 내를 강력하게 끌어당겼던, 나를 휘청거릴 만큼 강력하게 묶어두었던 것이 무엇이었나, 지금은 무엇인가?’ 를 곰곰이 생각해 봤어, 사실 마음 한구석이 서늘해지더라. 왜냐구? 조금 우습겠지만 그때 내게 연애보다 비록 소극적인 수준이었지만 노동운동이 더 우선이었고, 지금은 너와 조금은 다른 종류의 글읽기와 글쓰기가 나를 사로잡고 있는 듯해. 그리고 어느 순간 취업전선에 뛰어든 전사를 위한 준비물들이 날 휘돌아 감싸 버릴테지?

자신을 삼켜버릴 듯한 그런 강력한 감정들, 욕구들이 다른 이성에 대한 것이 아닐 수 있다는 것, 사실 너무나 상식적인 말이지만 사실 너처럼 이성에 대한 사랑없음, 성욕없음에 가끔 내가 비정상일까? 남, 녀간의 사랑이 필수 불가결한 것일까? 남성에게 떨림이나 성욕을 느끼지 못하는 내가 레즈비언일까? 뭐 그런 생각들로 지금도 혼란스러울 때가 많은게 사실이야. 하지만 너를 통해 그리고 너를 둘러싼 뮤와 당신의 남자 친구를 통해 사랑이라는 감정을 사람에 따라 서로 다른 곳으로 흘려보내고 소통할 수 있음을 다시 한번 생각할 수 있어서 몸은 조금 졸리지만 사실 마음만은 너무 개운하다!

그리고 네게 한가지 더! 사람에 따라 뮤처럼 이쪽과 저쪽을 공유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 그리고 굳이 그것을 모두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모두 가진 척하라고 강요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을 내게 가르쳐주어서 너무 고마워! 네가 이쪽에 있는 뮤에게 저쪽에 있는 뮤가 되어달라고 강요하지 않고 너 스스로 저쪽에 있는 뮤를 만나로 간 것을 보고(난 그리스에서의 너의 실종이 저쪽에 있는 뮤를 만나로 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맞지?)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되더라구. 직접 경험할 수 없는 상대방의 다른 모습까지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게 사실 삶에서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잖아. 이쪽에서 나와 이야기를 나누고, 눈을 마주치는 동안에도 상대의 일부분은 이미 저쪽으로 흘러 가버릴 수 도 있는데 우리는 항상 이쪽에 있는 모습이 상대의 전부일 것이라고 섣불리 단정짓거나, 저쪽에 있는 상대의 일부를 억지로 이쪽에 끌어 당겨올 것을 강요할 때가 많잖아. 내가 대하는 상대에게도 나를 상대로 생각하는 다른 많은 사람들도 말이야. 너를 보면서 나는 얼마나 진지하게 저쪽에 있는 완전히 다른 상대의 일부를 만나보았나? 하는 반성을 하게 되었지. 그리고 이쪽과 저쪽에 동시에 존재하는 상대에 대해 마음이 열려 있을 때 진정한 ‘관계’가 만들어진다는 생각도 다시금 하게 되었어.

첫 편지인데 너무 내 이야기만 줄줄이 늘어놓았군! 사실 네게 어떻게 저쪽에 있는 뮤를 만나로 갈 수 있었는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시 이쪽으로 돌아와 내 남자 친구와 지금 어떻게 지내는지 너무 너무 궁금하다, 스밀레! 네 애기가 꼭 내 애기 같아서 뒷 이야기가 사실 너무 궁금해!

조만간 새로운 네 이야기를 들을 수 있길 바라며...

추신

지금 네가 그 남자 친구와 사귀고 있다면 나도 곧 진정한 사랑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겠지? 그런데 만약 뮤와 사귄다면 나.. 어쩌냐? 대략 난감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칼의 노래 (1.2권 합본) - 우리 소설로의 초대 4 (양장본)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1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김훈의 칼의 노래는 지금까지 어릴 적 내가 읽었던, 그리고 지금 다른 아이의 어린 시절을 지배하고 있을, 그리고 그 아이의 아이에 어린 시절을 지배할 준비를 하고 있는 무수히 많은 다른 위인전들을 허무하게 만들어 버린다. 이 책들 속에 등장하는 위인은 충분히 소통할 수 있는 역사적 상상력을 통한 복원이 아니기에 언제나 본받고 따라야 할 위인이고 그래서 언제나 위인은 책 속의 위인에 그쳐버리는 까닭이다.

칼의 노래에서 복원해 낸 이순신은 ‘위인’이기도 하지만 삶과 죽임의 경계에서 치열하게 고민하는 나와 별반 다르지 않는 한 ‘사람’이다. 이순신을 ‘위인’과 ‘사람’이라고 달리 느낄 수 있는 것은 이 책이 비단 소설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소설이라고 할 지라도 여타의 역사 소설들처럼 사건중심의 이야기 전개는 위인을 다시 위인으로만 상상하게 만들지만, 이 책이 주는 매력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순신이라는 사람과 읽는 사람의 소통, 이순신이라는 사람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개인적인 소통, 인간 이순신과 당시 그의 사람들, 그의 칼, 그의 적과의 소통 문제를 놓지 않고 치열하게 끌고 가는 힘에 있다.

이순신이 자신의 삶의 터전인 바다를 죽음의 터전으로 인식하고 번뇌에 사로잡혀 있는 심정을 묘사한 부분은 이순신 개인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미세한 감정의 떨림을 표현해 냈고 이는 읽는 독자로 하여금 삶과 죽음이라는 이중성을 지닌 삶의 과정에서 언제나 작아질 수 밖에 없는 나와 똑같은 인간 이순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만든다.

그 삶과 죽음이라는 이중성을 띤 바다 위에서 나와 적에 대한 정의 또한 이중적일 수 밖에 없기에 나와 적은 서로의 존재를 통해서만 정의된다는 묘사를 통해서 개인의 존재가치가 스스로에 의해서 규정될 때보다 타인에 의해서 혹은 타인과의 비교를 통해서 규정될 때가 더 많은 우리의 삶의 모습을 일축한다. 이 과정에서 적이 죽어 가는 것인지 내가 죽어 가는 것인지 모호해지는 이순신의 혼란은 스스로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주어진 상황들 때문에, 맡겨진 책임들 때문에 살아지고 있는 것인지 그 경계가 모호해지는 우리의 삶의 모순을 응축해 놓았다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바다와 칼과 피를 통해 죽음에 대한 냄새를 느끼고, 여진을 젓국 냄새로 기억하거나 죽은 아들의 입 속 냄새를 추억하는 부분, 자신의 칼에서 징징징하는 울음소리 노래 소리를 동시에 느끼는 이순신의 모습에서 위인하면 떠오르는 날카롭고 예리한 판단, 이성에 기초한 사고가 지배적일 것이라는 우리의 편견으로부터 이순신을 구원하며 이성보다는 감성의 흐름에 따라 살아가는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은 그와 충분히 소통할 수 있게 만든다. 이는 위인이라는 명예 때문에 이순신을 내 삶과 동떨어진 ‘먼 사람’에서 내 안의 사람 혹인 나의 또 다른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사람으로 소통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책을 읽는 동안 내내 이러한 인간 이순신의 감성과 소통하는 쾌감을 맛 볼 수 있기에 ‘위인’에서 한 ‘사람’으로 그를 내 삶 더 가까운 곳에 두고 지낼 수 있을 것 같다. 어릴 적 읽었던 위인전 속의 영웅으로 그로 칠해버리는 것이 아니라 같은 감성을 공유한 한 사람으로 내 삶에 물들이면서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미디어의 이해 현대사상의 모험 8
마샬 맥루한 지음, 김성기 & 이한우 옮김 / 민음사 / 2002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마샬 맥루한의 미디어의 이해의 중심 명제인 "미디어가 메시지다"에 대하여 동의하는 부분과, 반대하는 부분을 나누어 설명하는 식으로 이 책에 대한 서평을 대신하겠습니다.
 
제가 동의하는 부분은 '모든 테크놀로지가 점차로 전혀 새로운 인간 환경을 창조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환경의 틀 즉, 새로운 미디어나 매체, 테크놀로지의 변화로 새로운 환경을 인식하게 된다는 의미인 것 같습니다. 1차환경의 내용의 변함이 없이, 1차 내용이 고스란히 2차적의 새로운 미디어 안으로 들어가게 되어도 우리는 그것 자체를 새로운 환경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1차 환경이 하나의 메시지가 되는 것이지요. 그 변화로 인지된 2차 환경이 3차 환경의 틀 안으로 들어가면 2차 환경자체가 또 하나의 메시지 역할을 하게되고 다시 새로운 3차 환경이 탄생하는 것이구요. 즉, 새로운 형태의 환경은 그 이전의 환경을 하위 개념화하게 된다는 거죠. 맥루한의 미디어 자체가 메시지라는 것의 의미는 이런 식으로 해석해 보면 충분히 수긍이 됩니다. 소리에서 영상으로의 엄청난 매체 도입(변화)이 인류에게 엄청난 환경의 변화로 인식된 것만 보더라도 미디어 자체가 하나의 메시지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으니까요. 더 구체적으로 우리가 동일한 광고(동일한 메세지)를 텔레비젼에서 통해 영상과 소리로
접할 때와 라디오를 통해 소리로만 접할 때의 차이를 생각해 보면 미디어 자체가 하나의 메시지로서 어떻게 그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충분한 역사적 체험에 의해 수긍이 되는 그의 이론도 큰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테크놀로지와 직결되는 미디어 자체가 그 내용인 메시지보다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매체, 미디어 자체의 효과를 무시 할 수는 없지만 그의 이론과 같이 미디어 자체만의 절대적 영향력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텔레비전을 예로 들어봅시다. 그의 이론대로라면 텔레비전이 정해진 어떤 특정한(고유의) 영향력을 행사하도록 되어있고, 그 안의 메시지가 어떠하든지 정해진 방향대로 수용자에게 인지된다는 것이됩니다. 즉, 어떤 프로그램이든지 텔레비전이라는 매체에 담기면 시청자에게 그 매체 자체의 힘에 의해 매체적 특성을 띈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텔레비전을 볼 때 다른 프로그램들에게서 동일한 영향력을 받지 않습니다. 텔레비전을 통해 메시지를 접한다고 텔레비전이라는 매체에 의해 제공되는 된다고 해도 절대적인 영향력만이 작용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내용에 따라 그것이 주는 영향은 판이하게 달라집니다. 비약인 것 같지만 우리가 sbs와 ebs를 동일한 환경(단지 같은 텔레비전이다는..)으로만 인식하지는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