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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예 -상
강병석 지음 / 태동출판사 / 2000년 4월
평점 :
절판
TV에서 방영되는 `태조왕건'의 영향 때문이었는지 당시 궁예 신드롬이라는 말까지 생길 정도로 궁예라는 인물이 그 전성기를 맡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궁예'라는 인물에 그리고 그가 그토록 바라던 '미륵용화 세상' 에 매료 된 것은 TV드라마가 아닌 작년 가을에 접했던 <궁예>라는 역사 소설 때문이었다. 처음엔 단지 소설에 묘사됨 궁예의 인물됨에 빠져들었지만, 두 번째 그 책을 읽게 되었을 땐 소설 궁예에 나타난 '미륵용화 세상 사상'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소설의 시대적 배경이 되는 혼란스럽던 후 삼국만큼이나 여러 가지 사회적 문제로 혼란스러운 현 정세 때문에 이 미륵 사상에 관심이 가는 건지도 모를 일이다.
소설 궁예에서 말하는 미륵용화 세상은 한마디로 계급이 없는 사회를 지향한다고 할 수 있다. 즉, 핍박받는 자와 핍박하는 자가 없고, 굶주리고 헐벗은 자와 넘치게 가진 자가 따로 존재하지 않는 그런 세상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신라 말 진골 귀족들의 부패와 이에 따른 호족의 성장과 반발, 그리고 후 삼국의 건설이라는 역사적 사실에서 확인 할 수 있듯이 당대 사람들의 신세계에 대한 갈망을 집약적으로 나타내 준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선 상에서 소설 궁예에 나타난 미륵용화 세상사상의 긍적적인 면을 유추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소설궁예에 나타난 이 사상은 궁예가 옛 고구려 땅을 수북하여 진정한 의미의 삼한 통일을 꿈꾸는 그의 야망의 실현을 돕는다. 반란(?)을 꿈꾸는 자들에게 정신적인 지표 역할을 한 이 사상을 소설 곳곳에 제시함으로써 소설궁예의 전개를 매끄럽게 이끌어 나가고, 더 나아가 궁예의 승승장구에 필연성을 부여하여 읽는 이로 하여금 허구적 느낌을 감소시켜 주는 역할까지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소설 궁예의 결말 부분은 미륵용화 사상에 바탕 둔 글의 흐름에 반전을 꾀하고 있다. 궁예의 후 삼국 건설에 이은 고구려 땅 수북과 이를 통한 미륵용화 세상의 건설의 실패가 결국 미륵 사상 자체에 있었다는 반전을 통해 궁예의 최후를 제시한 것이다. 하지만 이 사상을 이용한 결말부분의 반전은 소설궁예의 전개에서 보여주었던 미륵사상 의한 자연스러운 전개에 비하여 그 타당성이 부족하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즉, 결말부분의 미륵사상의 이용은 오히려 부정적인 역할을 담당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미륵 사상에 내포된 평등사회 구현이 신세계를 갈망하던 백성들의 바램에는 부합하지만, 신세계 건설을 위해 고전분투 했던 여러 장군들의 이해 관계와는 다르다는 점은 쉽게 수긍이 된다. 하지만 미륵사상에 매료되어 궁예를 따르던 이들이 일순간 이 사상에 의하여 등을 돌리고(평등사상의로 인해 자신에게 돌아오지 못하는 이익에 대한 불만으로), 배반에 이른다는 설정은 성급한 글의 귀결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리고 그들의 배반에 의한 또 하나의 혁명(?)에 의한 궁예의 직접적 죽음이 아닌,
외부에 의한 죽음설정은 긴급하게 가져온 반전의 타당성 마저 잃게 하고 있다.
이처럼 상, 중, 하 세 권으로 이루어진 소설 궁예는 미륵용화 세상 건설이라는 커다란 카테고리 안에서 그 네러티브에 타탕성을 부여하기도 하고, 빼앗기도 하면서 작품의 전개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결말 부의 이 미륵용화 세상 건설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이 궁예가 지향했던 신세계의 필연성을 인정하게하고, 궁예의 실패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이유는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미륵 사상이 신라 말과 후 삼국건설 시기에 백성들의 욕구를 대변해 낼 수 있는 다분히 바람직한 집약적 사상이라는 공감에서 비롯된 것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소설 궁예의 글의 전개를 위해 미륵사상을 채택하고, 글 곳곳에 이를 제시함은 결말의 미비함까지 용해시킬 수 있는 탁월한 선택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렇기 때문에 소설 궁예를 읽으면서 글 곳곳에 나타난 미륵 사상의 의미를 되새겨 보는 작업은 이 소설을 읽는 즐거움을 배가시켜 주리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