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에 아홉은 재미있었다는 주변의 말에 기대감을 가지고 읽기 시작한지라, 마음 한켠엔 야릇한 반감같은 것이 미리 출동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흠..시작부터 심상치 않다. 보여지는 나와 바라보는 나로 자신을 나누어 상처와 조롱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법을 익혔다는 작가의 말이 청승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왠지 자신의 냉소적인 자세를 과시한다는 느낌이랄까. 아니면 자신의 불리한 조건을 계속해서 푸념함으로써 자기도 모르게 투정을 부리고 있는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었다. 화자가 비웃듯 이야기하는 주변인들의 다양한 생활사와 그들의 같잖은 행동들은 너무도 내 자신과 내 주위의 이야기와 닮아있어 슬며시 화가 치밀기까지 했다. 호밀밭의 파수꾼의 홀든이 이런 사람들과 저런 행동들을 보았다면 대놓고 구역질을 하여 자신의 혐오감을 드러내고 마음껏 우울해 하였을텐데..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로서는 그런 반응이 더 반가울 뿐이다. 화자는 그마저도 하지 않고 내부에 꽁꽁 숨어있으면서 그들을 관찰한다...흠... 하지만 은작가의 이야기 솜씨를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 책을 거의 다 읽어갈 무렵에는 그녀가 하려는 이야기에 어느정도 공감하게 되었고 책 속의 화자 또한 하나의 약한 인간일 뿐이라는 데 생각이 미치게 되었으니까. 이 성장소설은 열두살 짜리 여자애만의 것은 아닌듯 싶다. 마음에 많이 와닿는 이모라는 캐릭터 또한 책 한 권이 끝날 동안 많은 성장을 함으로써 또다른 재미를 주고 있다. 이르든 조금 늦든 사람들이 세상의 가식과 환멸을 알아가는 것은 언제고 일어나는 일일 뿐이다.나 자신 또한 누가 보더라도 사회에 잘 적응하는 사람으로 보이지만 실제로 일탈만을 꿈꾸고 냉소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으며 세상으로 부터 나를 지키기 위해 한 발짝 떨어져 연기하는 나를 내세울 때가 많음을 알기에 이 소설이 더욱 측은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자신의 삶에 냉소적인 사람이 삶에 더 충실하며, 자신의 삶에 집착할 수록 불평과 불만으로만 삶을 허비한다'는 대목에서 나는 의아해진다. 나자신의 삶이 불평과 불만으로 가득차 있고, 항상 어디론가 도망부터 치려는 것은 내가 내 삶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인걸까? 삶이란 본디 의미가 없고 허망한 것이란 걸 알고 있다고 늘 생각했는데...그게 아니었단 말일까? 그런지도 모르겠다. 내가 좋아하는 불교만화 시리즈-돼지가 주인공으로 나오는-에서 부처의 말씀중에 '나 자신'에 대해 진정으로 알게 되면 그 귀착지는 바로 일상으로 돌아오는 것이라는 말씀이 생각난다. 나 자신과 인생의 의미에 대한 귀중한 비밀을 알게 된 후에 과연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 더 도망가고 싶지 않고? 라는 의문을 가졌던 나는 비슷한(?) 이야기에 다시 한 번 고개를 갸웃한다.삶에 충실한 건 잠시 쉬고만 싶은 나에게 또 하나의 생각거리를 남겨주는 책이다.
내가 중학생이었던 때였나..엔데의 책을 하나 읽었다. 예쁜 삽화와 끊임없는 상상력...충격을 받았고 감동을 받았다..세상에 이렇게 재미있는 책이 있다니. 어른이 되고나서 가끔 그 책이 다시 읽고 싶어졌지만 제목이 도대체가 기억이 나질 않아 가슴을, 아니 머리를 쥐어뜯곤 했다.알라딘에서 이 책을 발견했을 때의 그 기쁨이란! 다만 예전에 내가 봤던 그 책과는 분명 제목이 달랐다. 글씨크기도, 그림도 모두가 달랐다...거기다 또렷하게 적혀있는 '어린이문학'이란 글씨. 늦둥이 막내동생에게 선물한단 핑계로 구입해서 다시 한번 감격의 순간을 맞이하기로 했다. 하지만 예전 그 책의 맛은 덜나는 것은 나이 든 나의 탓일까, 아동용 입맛으로 번역된 문체탓일까?여튼...대단하다, 이 책은. 멀리 떨어질수록 크게 보이는 겉보기 거인의 이야기, 영원히 메아리가 계속되는 계곡 이야기 - 이 부분에선 정말 숨을 죽이고 읽게 된다 - , 손바닥만큼 작은 사람까지도 자신의 기저귀를 빠는 족속들의 이야기.. 어떡하면 이런 이야기들이 머리에서 마구 솟아나는 걸까? 놀랍고도 놀랍다.예전만큼의 맛은 덜해졌지만, 판타지를 사랑하게 만든 첫 작품을 다시 만나 잠시나마 행복했다. 아이가 있는 집에선 부모와 아이가 함께 읽을 책으로 꼭 추천하고 싶다.
2개의 단편만 읽은 후 책꽂이에 일년이상 그냥 꽂아두었던 책이다. 재미있단 평도 많고, 작가에 대한 칭찬도 많았지만 왠지 내겐 빨리 읽히질 않는 책이었다. 책꽂이를 정리하다가 덜 읽고 팽겨쳐둔 책한테 괜시리 미안한 마음에 황만근이 뭐랬더라..하며 다시 펼쳐든 책.아하~이제야 전에 왜 책이 빨이 읽히질 않았는지 알겠더라. 성석제의 작품을 처음 접하는데다, 늘 하나부터 열까지 떠먹여주듯 자상한 소설들만 보다가 -하긴 소설은 별로 읽지도 않지만 - 이렇게 이야기가 빠르고 내 앞에 내던지듯 보여주기만 하는 글을 보았으니 그 첫숟갈이 미끈하게 넘어갔을 리 없다. 그러나 이젠 웬걸. 책 중반부로 갈수록 작가의 호흡을 쫓아가고 있는 나를 발견했고, 급기야 지하철에서 내릴 곳을 지나쳐 버리는 지경에 이르렀다.책을 덮을 때 쯤엔 '으흠..이쯤이면 황만근이 뭐랬는지 다시봐도 되겠는걸?'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앞의 단편을 읽어보니 전에 알지 못했던 재미가 있다... 이것이 작가에, 문체에 길들여지는 것인가? 흠..그러고 보니 또 궁금한 것이 있다. 읽다보니 이 책에 나온 단편엔 '여자'들이 모두 추상적인 존재로만 비춰지는 거 같다. 작가가 남자라서일까? 여주인공은 한명도 없이 모두 남자들 이야기인건 이해가 가지만, 여자 등장인물이 잘 나오지도 않을 뿐더러 나온다 해도 아스라한 어떤 '대상'일 뿐이다. 여자 등장인물과 소통하는 장면이 없다는걸 문득 깨닫고는 글이 쓸쓸하게 느껴졌다..고 말하면 너무 억지스러운 걸까?어쨌든 작가는 이야기꾼임에 틀림없고, 다음 페이지가 궁금했던 나는 즐거운 독자였다.
부분적으로는 좋은 교훈을 얻을 수 있겠지만,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너무도 작위적이란 느낌이고 또한 이 책의 궁극적인 목표(성공)에 실망한 작품이다.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6인+1천사의 메시지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다. 나약하게만 느껴지는 한 인간이 얼마나 강하고 지혜로울 수 있는지, 그리고 그 답은 모두 자신 안에 있음을 일깨워주는 좋은 내용이다. 특히 안네의 성숙함과 지혜로운 모습은 감동을 전해주었다.하지만, 그 좋은 방법과 지혜를 일러주면서 그것으로 이루어 내라는 것이 결국 명성과 부라는 것이 영 얼토당토하지 않아 앞뒤가 맞지 않는 느낌이 들었다. 잘 나가다 삼천포로 빠진다고나 할까? 중간중간 위인들이 언급하는 성공이라는 단어에 약간씩 의구심을 가질 무렵, 뒷부분의 폰더씨의 성공을 예견하는 장면에선 결국 그 결과의 형태가 금전적인 성공과 세인들의 존경으로 귀결되는 것을 보면서 내가 또다른 형태의 성공지침서를 읽었을 뿐이라는 생각에 배신감이 들었다. 몇몇 교훈들은 여지껏 봐온 성공지침서들과는 다른 맥락이기에 기대를 가져봤지만, 결국 돌고 돌아 같은 이야기를 하는 책에 불과할 뿐이었다.그렇게 다들 성공만 하려고 드는 와중에 그 많은 고통과 좌절이 세상을 채우고 있다는 것을 작가는 잊고 있나 보다. 7가지의 멋진 교훈을 가슴에 새기는 목적이 큰 빌딩의 주인이 된다거나, 누구나가 알아보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즉 어떤 댓가를 바라는 것이란 말인가? 물질적인 댓가가 돌아오지 않으면 아무런 효과가 없는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역시 미국적인 책이다..(미국작가 맞겠지?)는 생각이 들었다.또한 7개의 쪽지는 무슨 행동강령처럼 온통 다짐하는 말들로만 일관되어 있어 일곱명의 인물이 쓴 것이라곤 전혀 생각할 수 없다는 점이 우스웠다. 문체에 있어 안네와 링컨이 저렇게도 일관성이 있다니..쿠하핫. 꿈속에서 계시를 주신 분이 문체지도까지 하셨나?
하긴, 원작을 실제로 본적이 없으니 색상이 잘 살아있다고 말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하지만 이 책은 제목이 제목이니만큼 원본의 색상이 잘 살아나게끔 인쇄에 신경을 썼으리라 믿어 본다.클림트의 그림은 색상과 분위기에서 여성들의 눈길을 잡아당기는 매력이 있다. 하지만 그의 그림은 공간감이 없어 오래 보고 있다보면 무언가 답답함이 느껴졌었다. 이 책을 읽고 그가 배경과 인물의 경계를 흐림으로써 자신이 의도한 상징성을 획득하게 되었다는 설명에 그간의 의문이 풀리게 되어 고마웠다. 또 클림트에 관해선 황금양식에 해당하는 그림이 먼저 떠오르곤 했는데, 인상주의의 영향을 받은 그림들을 많이 접할 수 있어 좋았던거 같다. 그러나 클림트의 풍경화에 대한 설명은 너무 짧고 미흡해서 아쉬움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