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머니스트 출간 전 연재 

《페미니스트 유토피아》 


6화 

 

 

 

 

 

강간 문화가 사라진 미래에서 알립니다

 

 

내용 21세기 미국의 강간 문화를 발굴한 역사학자와의 대담 발췌

문서 분류 기밀

 

 

 

 음, 처음에 우리가 느낀 것은 혼란뿐이었습니다. 혼란 자체였죠. 그 돌림병의 규모를 다룬 고대 정부의 보고서에서 통계를 접했는데, 그 수치가 분명히 충격적이었어도 피부로 와 닿지는 않았거든요.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미국 여성은 다섯 명 중 한 명꼴로 강간당한다.” 알았어, 어이쿠. 그렇지만 우리는 그게 무슨 뜻인지 몰랐어요. 정말 몰랐죠. 그러다 곧 그 말의 뜻을 알게 됐습니다. 현대 언어에는 없는 ‘강간’이라는 단어가 확실히 우리한테 낯설죠. 형사법전과 안내서 들을 읽고 나서 그 단어를 이해했지만, 그 의미는 여전히 놀랄 만큼 빈약해요. “강제 삽입.” 이게 도대체 어떤 모양이지? “합의 없는 섹스.” 말도 안 돼. “성폭행.” 섹스가 어떻게 폭행의 도구야? “성폭력.” 말 자체가 모순이잖아. 이 말은 끔찍하다기보다 그냥 상상이 안 됐어요.

 

 

 

 

  생존자들의 설명과 시각적 묘사를 접하면서 윤곽이 잡히더군요. 그냥 폭력이라면 당연히 이해할 수 있었지요. 힘, 강제, 공포도요. 어차피 지금 우리 문화도 유토피아는 아니잖아요. 우리는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공포를 느꼈어요. 그래도 난감함은 통 없어지지 않더라고요. 우리가 이해할 수 없었던 건 침묵과 수치심이에요. 그 끔찍한 일이 그렇게 자주 일어났다는데, 그 이야기를 하는 생존자들은 왜 그렇게 적을까?

 

 

  우리의 질문은 단순했어요. “왜?” 기본적인 질문인데도 답을 찾기가 너무 어렵더군요. 강간이 잘못인 건 맞는데 왠지 이해할 수 있다는, 심지어 어쩔 수 없다는 가정이 깔려 있던 것 같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포자기적인 태도가 흔했죠. 게다가 “어떻게 하면 강간을 피할 수 있는가” 하는 요령이 넘쳤고, 술 마시고 취하지 않는 법이니 강간 호루라기니 데이트 강간 약물을 감지하는 매니큐어까지 있었어요. 그런가 하면 자포자기에 맞서는 ‘페미니스트’들도 있었어요. “그렇지만 좀 봐 봐, 꼭 이럴 필요는 없어. 우리가 바꾸려고 하면 바꿀 수 있어.”라고 하면서 강간범과 주변인의 책임을 부각하고 ‘합의 교육’의 필요성을 외쳤죠. 어쨌든 실제로 정확히 누가 왜 타인을 강간하고 싶어 하는지를 알려 주는 단서는 거의 찾을 수 없더군요.

 

 

  이 문화를 이해하려면 얼마나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한가를 깨달은 순간이 기억납니다. ‘합의는 섹시하다’고 외치는 사회운동가들의 캠페인을 발견했을 때였어요. 그들은 순전히 선의에서 그런 표어를 담은 포스터와 티셔츠 들을 내세웠어요. 하지만 그 모든 것을 이해해 보려고 한창 머리를 쥐어뜯던 참에 갑자기 울음이 터질 것 같은 기분이 들더라고요. 저는 합의가 조금도 섹시하다고 느껴지지 않았어요. 요즘 ‘합의’ 같은 단어는 법전에나 쓰잖아요. 안 그래요? ‘섹시함’과는 까마득히 떨어져 있는 단어죠. 그리고 당시에도 그건 똑같이 진리였다는 게 중요합니다. ‘합의’는 공식성과 같은 함의를 지니죠. 우리가 아는 한 이 단어가 사적 인간관계의 영역에서 쓰인 경우는 섹스가 유일했어요. 그리고 오늘날처럼 그 말은 허가를 뜻했어요. 그 이상은 전혀 아니죠. 이런 포스터들에는 남자들더러 파트너에게 “당신, 이거 괜찮아요”라고 물어보라고 써 있어요. 아시겠어요? 상상이 되냐는 말입니다.

 

 

 아니, 당연히 상상이 안 되겠죠. 왜냐하면 요즘 기준은 합의가 아니라 욕망이니까. 그리고 욕망은 숨기려야 숨길 수가 없어요. 말하고 요구하고 애걸하는 게 욕망이니까. 물어봐야 하는 상황이라면 욕망은 아마 거기 없을 겁니다. 말이 안 되는 소리지만, 이 사람들이 도대체 실제로 섹스를 해 본 적이나 있나 싶더라고요. 저 지금 진지합니다! (웃음) 무슨 사소한 애로 사항도 아니고, 섹스가 그냥 ‘괜찮고’ 말고 할 문제가 아니라는 걸 어떻게 모를 수가 있지? 하찮지만 당장급하게 필요한 뭔가를 빌려 달라고 부탁하는 느낌이잖아요. 칫솔이라도 빌리듯. 바로 그 순간, 그 생각이 머리를 탁 쳤죠. 고대인들이 이런 캠페인을, 하고많은 표어 중에서도 하필이면 합의를 외치는 캠페인을 했다면, 아, 그들의 섹스 문화 전반에 우리가 지금까지 깨달은 것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들이 있었구나.

 

 

 

 

 

 

 그래서 우리는 풍덩 뛰어들었어요. 고대인들의 성적 관념을 형성하는 데 기여한 모든 것을 연구했습니다. 공식 성교육 프로그램부터 영화, TV 프로그램, 대중가요, 포르노, 광고는 물론이고 그들이 온갖 데서 흡수하는 비공식적 메시지들까지 다요. 소셜 미디어 사이트를 발굴하고, 페이스북 글타래를 샅샅이 뜯어보고, 며칠씩 유튜브의 개미굴에 빠져 헤매기도 했어요. 그래서 작업을 거는 게 뭔지, 자빠뜨리는 게 뭔지 알아냈어요. 박는 것과 박히는 것도 알아냈죠. 걸레랑 선수의 이중 잣대에 관해서도 알아냈어요. 처녀성은 잃지만 총각 딱지는 뗀다는 것, 섹스가 흔히 제로섬 게임이 된다는 것, ‘걸레’라는 딱지를 피하려면 따라야 하는 규칙이 있다는 것도 알아냈고요. 이 모든 정보를 부지런히 분류하면서 말 그대로 계산 프로그램으로 총합을 구하려던 우리는 그게 불공정한 게임임을 알게 됐어요. 수치에 관해 알게 됐지요. 여자들한테 ‘섹시함’을 요구하고는 섹시하다는 이유로 그들을 경멸하는 이상한 모순의 문화에 관해, 알아낼 수 있는 건 다 알아냈어요.

 

 

 그 문화가 섹스에 대한 묘사로 흠뻑 젖어 있으면서도 막상 실제 섹스에 관한 이야기는 몹시 불편해한다는 것, 성 해방을 찬양하면서도 두려워한다는 것, 섹스라는 게 뭔지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까지요. 제 말은, 보고서를 읽었으니 아시겠죠. 아주 매혹적인 내용이에요. 마지막에 우리는 몇 가지 결론을, 끔찍하게 건조하고 학술적인 결론을 내렸어요. “여자들은 갈수록 높아지는 성적 주체성을 누렸어도 여전히 성적 문지기 구실을 하는 것이 당연시되었다. 남자들의 성은 생래적으로 포식자의 것으로 여겨졌고, 여자들은 자신의 성이 (젠더 불평등과 성을 둘러싼 수치심의 복잡한 상호작용을 통해) 남자의 성을 자극하거나 자극하지 않도록 알아서 관리해야 하는 책임을 맡았다.” 이런 기조였지요. 우리가 옳았을까요?

 

 

그건 아무도 모르죠. 저는 21세기의 성 문화 이야기를 마무리할 때마다, 그게 모든 면에서 우리 문화와 정반대라는 것만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고 해요. 그리고 우리 연구에서 제가 얻어 가는 제일 큰 교훈은 그때가 아니라 지금 살아서 정말 고맙다는 거라고요. (웃음) 이 말은 반만 농담이에요. 우리는 오늘날 문화가 정확히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고, 정확히 어떻게 바뀌었는지도 몰라요. 아마 영영 모르겠죠. 대충돌로 사라진 수천 년의 역사 중 복구된 건 21세기 초의 짧은 시기에 대한 기록뿐이니까요. 그래도 우리는 결국 그 문화가 아주 급격히 변형되어 강간이 당시에 정상이었던 것만큼이나 오늘날에는 생각도 할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의 산 증거죠. 심지어 이미 고대에 그 변화가 시작되는 조짐을 발견할 수 있어요.

 

 

우리가 그 보고서를 대중에게는 공개하지 않기를 권한 건 그래야 옳기 때문입니다. 고대인들의 말을 빌리자면, 어떤 생각들은 ‘역사의 잿더미’ 속에 남아 있는 것이 최선이니까요.

 

 

그것이 얼마나 철저했는가를 보면 놀랍습니다. 그냥 그 단어를 보세요. ‘섹스’라는 말이 과학적 맥락에서는 지금도 여전히 쓰이지만, 그것을 가리키는 우리의 구어는 21세기의 ‘공감’과 ‘열락’이 어원이죠. 고대어로 옮기자면 ‘다른 사람이 느끼는 쾌락을 느끼는 것’이라는 뜻이에요. 고대인들이 이 말을 이해하려면 골치깨나 아플걸요! 그들은 섹스의 진정한 면모를 드러내는 말보다는 섹스를 모호하게 미화한 단어를 더 좋아한 것 같아요.

 

 

그러니 쾌락을 대놓고 인정하는 것이 아마 그들을 당혹스럽게 했겠죠. 그리고 개인의 쾌락이 실제로 섹스 상대에게 달렸다는 개념, 그게 섹스의 정의에 내재한다는 개념, 음, 이건 그들에게 가장 깊이 뿌리내린 성에 관한 가정들과는 정반대죠. 우리한테는 기괴하게 들리지만, 그들은 사회적 제약을 진정으로 벗어나면 이기적이고 착취적인 것이 성의 본모습이라고 믿었나 봅니다.

 

 

 

(...)

 

 

마야 듀슨베리Maya Dusenbery

 

 

마야 듀슨베리Maya Dusenbery는〈페미니스팅Feministing〉의 편집장이다. 조지아 주 애틀랜타에 살며 섹스에 관해 글을 쓰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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