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머니스트 출간 전 연재 

《페미니스트 유토피아》 


3화 







미친년들



영화 <님포마니악> 스틸컷 (네이버 DB)



어쩌면 내가 남들과 유일하게 다른 점은 늘 석양에 더 많이 바랐다는 것인지도 모른다. 태양이 지평선에 닿는 순간 더 장엄한 색채들을…… 아마 그게 내 죄겠지.

-(샤를로트 갱스부르Charlotte Gainsbourg ),

님포마니악Nymphomaniac, 2013.




 어쩌면 나는 영화 마조히스트가 아닐까? 파티 때 식사를 마친 다음 내가 넷플릭스에서 고르는 영화들은 파괴적이고 우울하다 못해 영혼을 할퀴어 분위기를 죽이기로 유명하다. 어느 날 라스 폰 트리에Lars Von Trier도그빌Dogville로 그런 셀프 영화 채찍질을 한차례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나는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오면서 저절로 밀려든 흐릿한 생각과 감정의 홍수에서 미처 헤어나지 못한 상태로 차도에 내려섰다. 갑자기 찾아든 조증 탓에 교통량이나 속도, 방향에 몹시 무심한 상태였다. 그나마 수술실이나 최악의 경우 영안실이 아닌, 가장 가까운 정신병원으로 11일간 휴가를 떠날 수 있었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하리라.

 

 친구들은 매일 밤 얇은 병원 담요를 뒤집어쓴 채 벌벌 떨면서 꿍얼대는 신음과 통곡 소리의 합창을 들어야 하거나, 플라스틱 숟가락으로 퍽퍽한 닭 가슴살을 먹어야 하는 점심시간의 익살극이 언젠가 내 베스트셀러 회고록으로 재탄생할 거라고 장담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 시련에서 내가 얻은 것은 문학 대신 정치적이고 학술적인 깨달음이다.

 

 그때나 그 이후로나 내가 경험한 미국의정신보건 의료계는 대체로 가부장적이며 때때로 가학적이고 시대착오적인 시스템이었다. ‘히스테리또는 적어도 히스테리적이라는 말은 (“당신이 이렇게 히스테리적이면 퇴원 가능성을 말할 수 없습니다.”처럼) 내가 입원했을 때나 퇴원 뒤 외래 환자로 갔을 때나의사, 사회복지사, 치료사한테 자주 들었다. 수분이 부족하면 자궁이 제자리에서 벗어나 신체 곳곳을 아수라장으로 만든다(그래서 빅토리아 시대에는 물대포를 잘 쏘아 주면 고칠 수 있는 숙녀들의 병이라고 여겼다.)는 히포크라테스Hippocrates의 이론이든, 의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심신의 증상에 대한 프로이트Sigmund Freud의 분석이든, 히스테리는 수세기에 걸쳐 특정 성에 국한된 정신보건의 개념들을 담고 있다. 히스테리는 심지어 그것을 가리키는 단어가 존재하기 전부터 이미 진단서의 행간에 숨어 있었다. 무언의 진단. 간호사! 이봐! 누가 저, 자리에서 벗어난 자궁을 잡아!


(...)


 만약 모든 미친년이나 사이코괴짜만큼 가치를 인정받는다면 어떨까? 우리가 위에 묘사한 온건한 변화보다 멀리까지 우리의 지평을 펼친다면 세상이 어떻게 달라질까? 만약 표준의 한 계선을 넘어가는 마음의 상태들이 억눌리지 않고 키워진다면 어떨까? 평범하지 않은 정신적감정적 관점이 있는 사람들이 그래도받아들여지는 사회가 아니라 그래서오히려 더 가치 있는 일원으로 인정받는 사회가 이상적 페미니스트 사회의 핵심이다. 우리는 억압이 아닌 지지를 정신보건의 기본 원칙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틀림없이 페미니스트 유토피아의 문화는 평범하지 않은 정신 상태를 경험하는 사람들이 살아남는 데 그치지 않고 번영하는 문화일 것이다.


 정신건강 환자들의 자율성을 (특히 입원하는 경우) 박탈하는 것은 정신적으로 아픈개인이 환자로서만이 아니라 시민으로서도 의사 결정을 내릴 수 없다는 생각에서 나온다. 여자들은, ‘히스테리적이든 그렇지 않든, 특히 이런 식으로 권리를 박탈당할 위험에 처해 있다. 행복의 일반적인 기준에 순응하지 않는 정신 상태는 바람직하지 않고 수용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겨지는데, 왜냐하면 자본주의의 거대한 거짓말과 어긋나기 때문이다. 삶은 그저 개인적인 행복 추구 외에 아무것도 아니며 그 행복의 척도는 돈이라는 거짓말 말이다. 행복이 인간의 기본이라는 원칙에 동의하지 않는 마음 상태는 다 치료해야 할 질병으로 여겨진다. 현 상태의 부르주아에 부합하지 않는 모든 사람은, 기껏해야 사회의 해충이고 심하면 테러리스트인 것과 마찬가지다.

 

 지난 2002년에, 서독의 극좌파 테러리스트 단체인 적군파의 가장 유명한 일원이었던 전직 언론인 울리케 마인호프Ulrike Meinhof가 감옥에서 죽고 26년이나 지난 시점에 그녀의 뇌를 부검했다. 그녀에게 적군파의 테러에 가담한 죄를 물을 수 없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였다. 마인호프가 1962년에 수술을 받으면서 대뇌변연계가 손상되었고, 거기서 유발된 감정적 불균형이 테러를 초래한 원인이라는 것이었다. 개인의 이념과 뇌 손상의 관련 여부와 별도로, 이것은 정치적 여성을 중성화하려는 우리 사회의 욕망을 보여 준다. 여자가 기존 체제에 불만을 (특히 폭력적으로) 드러내면, 그것은 정치적 신념이 아니라 비이성이나 감정적 불안의 표현으로 무시당한다. 자궁이 돌아다니고 있다거나 뇌에 멍이 들었다는 식으로, 여자의 행동은 몸의 지배를 받는다고 여겨진다. 슬픔, 불만, 분노의 표현을 가치 있는 것으로 인정한다면 자본주의 사회의 구조를 몰아가고 정당화하는 바로 그 생각의 토대가 뒤흔들릴 것이다.

 

 대다수의 주류 사람들보다 고통과 황홀을 더 자주 느끼는 사람들은 페미니스트 유토피아를 상상하는 데 방해가 되지 않는다. 그들은 자원이다. 우울증을 동반하는 비판적인 마음 상태는 세상의 잘못된 점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그것은 특정한 조증과 관련된 민감성, 창의성, 에너지와 함께 예술적이고 정치적인 행위에 꼭 필요하다. 소중한 유토피아 사상가들을 잃지 않기 위해 우리는 불행을 억압하고 날카로운 열정을 무디게 만드는 체제인 자본주의적 가부장제와 그 오른팔인 의학을 폐기해야 한다. 영화 제작자인 파스빈더R. W. Fassbinder가 제대로 자각했듯이, 좌절을 못 느끼는 것은 위험한 안주로 이어질 수 있다.

 

어떤 이유도, 어떤 동기도, 어떤 절망도, 어떤 유토피아도 갖지 않은 사람이야말로 남들에게 가장 쉽게 이용당한다.”

 

 평범하지 않은 정신적감정적 상태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바꾸는 것은, 정신의학의 실천에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억압 때문에 침묵당한 모든 목소리를 해방하기 위해 내딛는 핵심적인 한 걸음이다. 우리가 자본주의적 가부장제를 떠받치는 핵심 원칙들 중 행복 또는 순응만이 가치 있는 마음 상태라는 원칙을 들어내고 나면, 체제는 흔들리기 시작하다 결국 무너질 것이다. 우리 세계를 다시 정의하려면 반드시 우리가 생각하는 정신 건강을 다시 정의해야 한다. 가부장제가 죄악시하며 규탄하는 것을 페미니스트 유토피아는 미덕으로 칭송한다. 절망을 드러내고, 소리 내어 불만을 토로하고, 대담하게 자유로운 상상력을 펼치고, 석양으로부터 더 많은 것을 원하는 것을 말이다.





테사 스미스Tessa Smith


테사 스미스는 독일 베를린에서 주로 활동한다. (2014-2015년 풀브라이트 장학금을 받는) 현재 작업은 독일의 시각예술과 영화에서 젠더와 관객 문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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