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육관의 살인 - 제22회 아유카와 데쓰야 상 수상작 우라조메 덴마 시리즈
아오사키 유고 지음, 이연승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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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환영합니다. 헤이세이의 엘러리 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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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소설 - 그 기원과 매혹
김용언 지음 / 강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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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범죄소설, 그 기원과 매혹>은 논문 형식의 저작이다. 초록이 있기 때문에 개요를 파악하기에는 어렵지 않았지만, 형식상 문헌 조사나 이론적 배경이 선행돼야 하기 때문에, 결코 나같은 조악한 독자가 수월하게 읽을 만한 텍스트는 아니었다.

저자는 영국의 19세기 ‘추리소설’과 미국의 20세기 ‘하드보일드 소설’을 ‘범죄소설’로 통칭하고 그 둘의 생성과 원리를 한데 엮을 만한 이론을 도출해낸다. 그것은 범죄소설과 엔트로피의 유비 관계이다. 저자는 이러한 가설을 위해 각각의 사회를 라이프니츠의 ‘모나드’로 설정하고, ‘맥스웰의 도깨비’라는 개념을 탐정에 대입함으로써 풀어나간다. 이 과감하고도 신선한 가설을 위해 저자는 일반적인 역사는 물론, 사상사, 자연사, 경제사 등의 역사의 세세한 갈래를 세밀하게 파헤친다. 

저자가 말하는 ‘범죄소설’의 사회적 속성 즉, 도시 문학으로서의 성격은 그리 낯선 개념은 아니다. 선행된 연구도 있었고 많은 작품을 읽은 독자라면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할 수 있는 면이다. 하지만 단순히 말하는 것과 이론적 배경에서 증명하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는 법. <범죄소설, 그 기원과 매혹>은 그 거대한 간극을 엄밀하게 보여준다. 게다가 열역학법칙을 통한 범죄소설의 해석은 무척이나 흥미진진하다(‘유레카’라고 외치는 저자의 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하지만 아쉬운 점도 있다. 일단 ‘범죄소설’(나는 ‘미스터리’라고 칭한다)의 형태가 명확하지 않다. 생성과 원리를 설명하는 데 다소 치우쳐 있기 때문에 ‘범죄소설’이 무엇이고 어떻게 ‘장르’로서 존재하는지 분명하게 와 닿지 않는다. 연구자에 따라 ‘범죄소설’의 정의는 차이가 있고 그 기원도 다르다. 또 사례로 든 개별 작품이 너무 적다. ‘셜록 홈스 시리즈’와 대실 해밋, 레이먼드 챈들러의 작품들이 그 시대의 모더니티와 범죄소설의 역학 관계를 드러내는 가장 일반적인 작품이겠지만, 그것들이 모두를 설명하기에는 다소 부족하다고 생각된다. 

이외 독자 수용론적인 입장, 심리적인 측면에 대한 설명이 거의 없었다. 뭐, 이건 ‘미스터리는 욕망의 발현’이라고 생각해왔기 때문에 순수한 개인적인 욕심이다. 마지막으로 몇몇 작품의 결말이 너무나 쉽게 노출돼 있다는 점. 목표로 한 독자가 다르기 때문이고 가설을 전개해나감에 있어 필연적인 일이겠지만,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아쉽다고 느낀 부분은 내가 이해하지 못한 부분일 가능성이 크다. 이런 엄격한 글을 읽고 평하기에 나는 매우 부족하다.

사실, 이 텍스트를 읽으면서 가장 감동했던 건 앞으로 되돌아가 이 부분을 다시 읽을 때였다. 

“하지만 여기서 제시하는 다소 많은 정보들의 융단 폭격 속에서 나름대로 질서의 흔적을 찾아낼 수 있다면, 범죄소설을 백안시하고 진부한 비난만 되풀이하는 외부의 시선을 받아칠 수 있는 최소한의 근거를 마련할 수 있지 않을까.”

좋아하는 것에 대한 최선의 행위는,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이다. 그 의미들이 모여 어떤 가치를 만들어낼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선善이다.

저자는 ‘범죄소설’에 의미를 부여했다. 그것은 좋아하기 때문이다. 


http://www.howmystery.com/zeroboard/zboard.php?id=c3&no=4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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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뜬금없지만, 1930년대의 딕슨 카는 멋진 나날을 보내고 있지 않았을까요? 일단 파리 유학을 끝냈고 아름다운 부인과 결혼을 했습니다. 그리고 영국에서 살기 시작했죠. 새로운 필명을 고안했던 걸로 보아 출판사와도 얘기가 잘 되었을 테고, 추리소설 사에 길이 남을 기디온 펠 박사와 헨리 메리베일 경이라는 두 캐릭터도 이때 창조했습니다. 그리고 후세까지 언급되는 딕슨 카의 걸작들은 모두 이 시기에 출간됐습니다. <세 개의 관> <아라비안 나이트 살인> <구부러진 경첩> <유다의 창> <화형법정> 등등등.
<유다의 창>은 처칠을 닮은 헨리 메리베일 경이 등장하는 스물두 권 중 한 권입니다. 1938년 작으로 카터 딕슨 명의로 발표됐으며, 딕슨 카의 가장 뛰어난 작품이라는 평을 얻고 있습니다. 밀실을 다룬 추리소설 중에서는 독보적인 존재로 추앙(?)받고 있죠. 하지만 그 명성만큼 어쩔 수 없이 당해야 했던 아픔들도 있었습니다. 여러 책에서 이 작품의 트릭을 무심코 혹은 당당히 공개하곤 했죠. 그래서인지 <유다의 창>의 트릭은 웬만한 독자에게 꽤 익숙한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작품의 줄거리를 간단하게 소개하자면, 딱히 흠잡을 곳 없는 제임스 캐플런 앤스웰은 사랑에 빠져 있습니다. 미래의 장인이 될 에이버리 흄의 허락을 받고자 초대를 받고 그의 집에 방문하게 되죠. 그런데 분위기는 좀 묘합니다. 아무튼 앤스웰은 예비 장인이 권한 위스키를 냉큼 마시는데, 곧 정신을 잃게 됩니다; 깨어난 그 앞에 놓여 있는 건 예비 장인의 시체. 장인의 심장을 꿰뚫고 있는 건 벽에 걸린 화살이었죠. 화살에는 앤스웰의 선명한 지문이 남겨져 있습니다. 틈 없고 흠 없는 문과 창은 단단하게 안에서 잠귄 상태였죠.
헨리 메리베일 경은 왕실 고문 변호사 직을 수락하고 앤스웰의 변호에 나섭니다. 그리고 이 불가능한 범죄를 해체하기 시작하죠.

먼저 제목을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는 대치할 우리말을 찾기가 어려울 것 같네요. ‘Judas Window'의 사전적 어의는 'an aperture or glass pane that permits safe or surreptitious observation through a door or wall'입니다. 안전을 확인하거나 은밀하게 엿보기 위한, 문이나 벽에 달린, 구멍이나 유리창 정도로 해석될 것 같은데요. 보통 현관문에 달린 아이홀과는 또 다른 의미입니다. 다른 출처를 확인해 보면 교도소 감방 문에 달린, 안에서는 밖을 볼 수 없고 밖에서만 안을 확인할 수 있는 사각형 창을 말한다고 하는데요. 이게 사실 국내에서는 보기 드물기 때문에 그렇게 잘 와 닿지는 않습니다; (음 그래서 비슷한 이미지를 찾아봤답니다)
‘유다의 창’이란 제목에서 바로 연상할 수 있는 형태가 국내 독자들에게는 없습니다. 오히려 보통명사의 측면보다는 ‘유다’라는 단어가 갖는 상징성이 먼저 떠오르는 것이 당연합니다. 덕분에 제목은 은은한 서정성(?)을 갖게 됐는데요. 물론 이 또한 딕슨 카가 의도하는 바이긴 하겠으나,  ‘Judas Window’라는 단어는 작품 전체를 관통하고 있기 때문에, 이 점을 좀 세밀하게 짚지 않을 수밖에 없었네요.

보다 쉽게 이해를 하기 위해 작품 속 한 부분에서 ‘유다의 창->우유투입구’로 바꿔 보았습니다.

우유투입구’는 좀 불길한 느낌이 드는 말이었다. 딱 하나의 관념으로 잡히지 않고 여러 가지 상상을 불러일으켰다. 예를 들면 누군가 어둠 속에서 창 안을 몰래 훔쳐보는 장면이라든지…….
“하지만 젠장, 그게 모두 사실이라면 말이 안 되잖아요! 창문이 있든 없든 간에, 그…… 창이라는 게 건축가가 간과하고 넘어간 뭔가 특별한 그 방의 특색이 아니라면…….”
내가 말하자 경은 고개를 저었다.
“그것도 아니야. 바로 그게 이 사건이 재미있는 부분이지. 그 방에는 여느 방하고 다른 점이 조금도 없다네. 자네도 아마 자네 방에 우유투입구를 가지고 있을 테고 심지어 이 방에도 우유투입구는 있어. 물론 형사 법원의 법정에도 우유투입구는 있네.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아차리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점이지.”

음 이거 괜한 짓인가요?;;;; 아무튼 저런 느낌이라는 것이죠;


자; <유다의 창>은 밀실을 다룬 미스터리이자, 법정 미스터리이기도 합니다. 정의의 여신상이 보우하는 올드 베일리(영국 런던에 위치한 중앙 형사 재판소)에서 불가능 범죄를 두고 벌어지는 건곤일척(?)의 공방전은 이 소설의 압권이죠. 바킨 판사와 배심원 그리고 스톰 경과 메리베일 경이 그리는 사각형은 팽팽한 긴장감을 자아냅니다. 공방의 기술들은 무척 현실적이고, <유다의 창>은 법정 미스터리가 가져야 할 모든 미덕을 황홀하게 보여줍니다. 메리베일 경은 날카롭게 불가능 범죄의 가능성을 파헤치고 능글맞게 검찰 측을 농락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유다의 창을 열어젖히고 사건의 진상을 폭로하는 것이죠.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고, 추리소설의 트릭은 이미 만들어질 만큼 만들어졌고 쓰일 만큼 쓰였으며 응용될 만큼 응용됐습니다. 읽는 방법으로 사각이 만들어진다거나, 사유와 인식을 의심해야할 만큼 놀라운 일들이 당연한 듯 일어나는 곳이 바로 추리소설의 세계입니다. <유다의 창>의 트릭은 경천동지할 만한 요즘 트릭에 비하면 매우 볼품없습니다. 마치 태초의 트릭인 듯 원초적인 모습이죠.
하지만 문제는 트릭이 아닙니다. 그것을 제시하는 방법과 드러내는 기술 그리고 집중시키는 힘이 중요한 것이죠. <유다의 창>은 이 지점에서 거의 완벽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건의 형태를 보여주는 전지적 시점의 프롤로그, 켄 블레이크와 헨리 메리베일 경이라는 추리소설 특유의 관찰자 시점으로 이어지는 법정 장면, 간단한 트릭을 완결성 있게 만들어주는 사라진 증거, 알리바이표로 분석한 사건의 전모, 범인을 보여주는 방식, 에필로그의 여운. 모두 너무나도 감탄스럽습니다. 진정한 마스터의 마스터피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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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도 시체가 되살아나는 세계. 그곳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난다면 그 사건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야마구치 마사야의 실질적인 장편 데뷔작이자, 일본 미스터리 역사를 통틀어 지고지순한 걸작으로 꼽히는 <살아 있는 시체의 죽음>입니다.

야마구치 마사야山口雅也는 와세다 대학교 재학 시절(기타무라 가오루, 누쿠이 도쿠로 라인이군요. ㅎㅎ)부터 미스터리 평론가로서 이름을 떨쳤습니다. <살아 있는 시체의 죽음>으로 1989년에 데뷔했으며 <일본 살인 사건>으로 제48회 일본추리작가협회상을 수상한 바 있죠. 야마구치 마사야의 특징이라면 첫째 수수께끼 풀이 위주의 본격 미스터리를 테마로 하고 있는 것. 둘째 현실에서 발생하는 이상 상황을 엄밀한 논리로 재단하는 것. 셋째 번역투를 고의로 살려 공간적 배경을 일본이 아닌 다른 곳으로 삼는 것. 마지막으로 박학다식한 면모입니다. 데뷔작 <살아 있는 시체의 죽음>은 작가의 모든 특징이 고루 나타난 작품이라 할 수 있지요.

원고지 2,000매는 가볍게 넘길 듯한, 645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작품이지만 줄거리를 간략하게 소개하자면, 무대는 미국 동북부 작은 마을 툼스빌입니다. 마을의 이름처럼 유서 깊은 발리콘 가가 운영하는 장례회사로 이름난 곳입니다. 은퇴하고(운영은 첫째 아들 존이 맡고 있지요) 곧 죽음을 앞둔 발리콘 가의 수장 스마일리는 유언장을 발표하게 되는데요. 덕분에 마을을 떠난 펑크족 그린(스마일리의 손자죠)도 마을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리고 곳곳에서 죽은 시체가 되살아나는 불가사의한 현상이 일어납니다. 하지만 핑크색 영구차를 타고 돌아온 그린은 스마일리가 먹을 초콜릿을 우연히 먹고 죽게 됩니다. 그리고 발리콘 가 사람들을 대상으로 연속적인 죽음이 발생하죠. 그린은 곧 되살아나서; 자신의 죽음을 감추고 탐정 역할을 시작합니다.

사실, 죽은 이가 살아난다면 사건 자체의 의미는 완전히 무가 됩니다. 야마구치 마사야는 이런 설정의 의외성을 추리소설의 규칙 안으로 끌어들이고 위풍당당하게 본격 미스터리를 전개해 나갑니다. 이건 정말 놀라운 발상, 말 그대로 코페르니쿠스적인 대전환입니다. 1989년이라는 시간을 생각한다면 더욱더 가치가 더해지죠. <다아시 경 시리즈>처럼 일종의 병행세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규칙 하나를 완전히 창조해낸 것입니다. 그는 동서고금을 넘나드는 방대한 지식을 통해 ‘시체가 살아난다’라는 규칙을 개연성의 세계에 밀어 넣습니다. <살아 있는 시체>는 이 새롭게 생성된 규칙에 대한 일종의 룰북의 역할도 하고 있는 것이지요. 작품 분량이 늘어나는 것은 뭐 당연합니다.

자, 그러면 왜 시체가 살아나는 설정을 굳이 선택한 것인가, 라는 질문이 있을 수 있겠지요. 이 대답은 노리즈키 린타로의 해설에 비교적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그는 ‘살아나는 시체’라는 소재를 ‘추리소설의 메타 레벨의 규칙’이라는 용어를 통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글이 좀 난해한 편이기 때문에(노리즈키 린타로는 상당히 집요한 이론주의자입니다;)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추리소설의 기저에는 현실 세계의 금기(죽음과 시체)를 위반하고자하는 욕망이 있고 야마구치 마사야는 그 욕망을 ‘살아나는 시체’를 통해서 현실화시켰다는 것이죠.

<살아 있는 시체의 죽음>이 본격 추리소설의 이정표로 자리하고 있는 것은 단순히 죽고 살아나는 등장인물이 사건에 미스터리 성격을 더하고 있기 때문은 아닙니다. 꽉 조인 추리소설의 장르적 규칙을 멋지게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규칙 밖의 방법이 아니라 규칙 내부에서 감행한 도전입니다. 야마구치 마사야는 철저하게 ‘추리소설’이라는 장르에 천착해 이 성공을 이뤄냈습니다. 조금 다르지만 ‘실재와 인식’이라는 테마로 추리소설의 외연을 확장시키는 교고쿠 나쓰히코의 작품도 이런 견지에서 살펴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한마디로 이론가가 추리소설이라는 장르에 바치는 최대의 헌신이라 할 만한 작품입니다. 단순히 소설적인 즐거움을 넘어선 깊이를 느껴보실 분에게 적극 추천합니다.

덧: -그나저나 야마구치 마사야의 유머 감각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더군요. 작품의 주인공은 그린이 아니라 트레이시 경감이라고 하고 싶군요; 현학적 요소를 싹 제거한다면 신나게 읽을 수 있을 만한 작품입니다.

-미야베 미유키의 <화차>와 엎치락뒤치락한다는 흥미진진한 얘기가 역자의 글에 있었는데요. <화차>의 경우 추리소설의 사회적 역할을 가장 충실하게 수행한 작품일 것입니다. 반면 <살아 있는 시체의 죽음>은 장르 자체에 대한 고찰이 가장 완벽하게 이뤄진 작품이구요. 추리소설의 두 방향성을 대표하는 작품들이라 할 수 있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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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한 책이죠. 작품이 국내에 처음 나왔을 때 책의 홍보문구가 너무 대단해서 거짓인 줄 알았고, <The girl with the Dragon Tattoo>라는 제목으로 미국에서 나왔을 때 같은 작품인줄 몰랐습니다. 3부작이고 전혀 낯선 언어권인 스웨덴 작품인 데다가 전 세계에서 다른 언어로 약간의 시차를 두고 우후죽순으로 출간돼 좀처럼 감을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일단 1권을 늦게나마 읽게 되니 어느 정도 줄거리를 세울 수 있겠네요. 아무튼, 일본보다 우리나라가 출간이 빨랐던 드문 케이스의 책입니다. 일본 판은 영어 판본을 기준으로 해서 출간됐고 우리나라는 프랑스어와 독어 판본으로 출간됐으니까요. 출판사에 의하면 세계 14번째, 아시아에서 첫 번째로 출간됐다고 하네요.
미국 아마존, 일본 아마존 모두 2009년 베스트 도서로 선정됐고(프랑스야 뭐 1 2 3위를 이 책 세 권이 동시에 기록했으니 당연히 올랐겠죠) 1편의 경우 2009년 영화로도 제작됐습니다. 폭풍처럼 세계를 휩쓴 이 작품은 우리나라에서 좀 고초를 겪었어요. 이유는 모두들 표지 때문이라고 했죠. 1권의 표지는 전면 수정됐고 전 두 판본을 가지고 있네요.

사실, 1권의 표지의 일러스트는 프랑스 표지에서 따온 건데요. 프랑스 표지를 보면 그리 나쁘지 않아요. 3부작 전체를 보면 일관성이 느껴지는 데다 품위도 있어요. 사실 원서 표지를 보면 알 수 있듯 저 그림의 형태 자체는 타원형이고 가로가 다소 짧은 판형에 분명하고 명확하게 콘셉트가 잡혀 있습니다. 또 배경색과 무척 잘 어울리는 그림이죠.

국내 판은 그림 위치 자체가 위로 올라간 데다가 배경을 유리 깨듯 깨는 실수를 저질렀고 게다가 무리한 금박 제목과 액자 틀을 둘러서 모호하고 산만하게 변화시켰습니다. 게다가 그림을 180도 반전시켜 시선 방향도 바꿔 버렸죠. 새롭게 출간된 1권은 영문 폰트를 추가해 시리즈 도서임을 강조했고 판형에 맞게 타원형을 원형으로 바꿨습니다. 시선도 제대로 돌아왔고요. 또 지저분해 보이는 많은 요소를 정리했습니다. 그래도 신국판은 좀 아쉬워요. 그건 그렇고.

이 책이 작품의 질에 비해 국내 팬들에게 어필하지 못한 것은 정보의 모호함이었다고 생각해요. 자 많이는 팔렸다는데 당최 무슨 책인지 감을 잡을 수 없는 겁니다. 스릴러인가? 미스터리인가? 판타지인가? 게다가 대하 추리소설이라니.. 저 우울해 보이는 여자 아이의 일대기인가? 성장소설인가? 이처럼 책의 정체성을 콕 찔러주지 못한 실수가 가장 컸다고 생각됩니다.

뭐 이건 다 지난 얘기고. 대략 줄거리를 간략하게 소개하면.. 주인공은 미카엘 블롬크비스트라는 시사 월간지 <밀레니엄>의 기자에요. 저자 소개를 보면 바로 알 수 있겠지만 스티그 라르손 자신이 반영된 일종의 페르소나겠지요. 그는 부패한 재벌에 대한 폭로기사 덕에 고소를 당해서 멋지게 패소했습니다. 돈도 내고 감옥도 가야해요. 헌데 이런 처지의 그에게 묘한 제의가 들어오게 됩니다. 스웨덴의 재벌 반예르 가의 총수 헨리크 반예르가 자신의 손녀의 행방을 추적해달라고 부탁한 것이죠. 만약 손녀가 어떻게 됐는지(죽었는지, 살았는지, 어디 있는지, 잘렸는지, 묻혔는지;)만 알려준다면 거액의 보상금 뿐 아니라 미카엘을 감옥으로 넣어버린 부패 재벌의 약점도 알려주겠다는 거였죠. 38년 전에 일어난 손녀의 증발은 완벽히 폐쇄된 한 섬에서 일어난 일이었어요. 헨리크 반예르는 그야말로 섬 전체를 이 잡듯 뒤졌지만 결코 그녀를 찾아내지 못했죠. 그는 여생을 손녀의 행방을 추적하는데 전부 바쳤고 마지막으로 미카엘에게 희망을 걸어보기로 작정한거죠.
정의롭기에 변변치 않은 잡지 <밀레니엄>이 휘청할 정도로 위기에 몰린 미카엘은 돈과 명예 모두를 위해 그 제의를 받아들입니다.
한편;; 한 보안경비업체의 비밀 조사요원이자 독특한 인물 리스베르 살란데르는 모종의 의뢰를 받고 미카엘의 뒷조사를 시작합니다. 뭐 나중에는 이 둘이 손녀의 실종 사건에 얽힌 반예르 가의 비밀과 또 엄청난 사건의 진실마저 알아낸다는 이야기입니다.

스티그 라르손은 독립 언론사의 강직한 기자였어요. 작품 속 미카엘의 행보는 그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 그런지 이 작품 속에는 스웨덴 사회와 정치, 경제, 역사에 대한 고찰이 많이 포함돼 있습니다. 게다가 또 사건도 매우 복잡하고 등장인물도 헤아릴 수 없이 많답니다. 미카엘의 추적은 반예르 가의 연대기를 재구성하는 일이니까요. 언뜻 봐도 잘 읽힐 것 같지 않은 작품인데, 결론은 전혀 아닙니다.

이 독특한 이야기는 전 세계로 번역될 만큼 잘 인식되는 보편성을 지니고 있어요. 그리고 그 보편성을 만들어낸 것은 스티그 라르손의 글이라고 생각됩니다. 사실 글은 쓰면 는다고 가정할 때 누가 가장 글을 잘 쓸까, 라고 생각하면 그건 기자에요. 작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작가는 개성을 추구하는 반면 기자는 객관적이고 이해되기 쉬운 글을 쓰려고 노력하죠. 게다가 매일매일 그 글을 대중에게 검증받습니다. 1급 범죄 기자 마이클 코넬리를 생각해 보세요; 정말 잘 씁니다. 스티그 라르손은 장면 전환과 교차 편집 그리고 화자를 달리해 이 복잡한 내용을 잘도 이끌어 나갑니다. 여러 가지 장치를 통해 캐릭터를 묘사하고 완급을 조절하는 기술이 참으로 탁월합니다.

<밀레니엄 1>은 추리소설의 성격에 가깝긴 하나 명확한 추리소설의 범주에서는 다소 벗어나 있어요. 사건 자체가 밀실이긴 하나 해결 직전까지의 정보로는 독자가 사건을 해결할 수가 없어요. 미카엘을 졸졸졸 따라다녀야 하죠. 게다가 리스베르의 능력은 다소 초인적입니다. 이런 면에서 보면 스릴러라고 해야 함이 옳겠네요. 사실, ‘대하 추리소설’이라는 문구를 보고 좀 의아해서 장르적 특성을 유심히 살펴봤거든요. 하지만 <밀레니엄 1>을 다 읽으면 아 뭔가 남았구나, 라는 생각이 듭니다. 내용뿐 아니라 부제만 봐도 작가가 거대 서사를 그리고 있다는 느낌이 있거든요. ‘사라진 손녀’나 ‘밀레니엄의 복수’가 부제는 아닌 것이죠; 2, 3권을 읽어 내려가면 그 실체가 점점 잡힐 것이라고 생각되네요.

‘스웨덴의 소설’이라는 낯선 느낌처럼, <밀레니엄>은 정말 독특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하지만 일단 책장을 넘기면 이국적인 낯설음 보다는 대중소설의 즐거움을 먼저 느낄 수 있을 거예요. 장르 소설의 범주를 넘는다는 몇몇 평은 결코 과장된 말이 아닌 것 같습니다. 다소 복잡해 보였거나 표지에 움찔한 독자분이라면 걱정 말고 읽어보셔요. 저도 비슷했는데 한 권 읽고는 바로 다음 권을 찾아 들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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