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한 책이죠. 작품이 국내에 처음 나왔을 때 책의 홍보문구가 너무 대단해서 거짓인 줄 알았고, <The girl with the Dragon Tattoo>라는 제목으로 미국에서 나왔을 때 같은 작품인줄 몰랐습니다. 3부작이고 전혀 낯선 언어권인 스웨덴 작품인 데다가 전 세계에서 다른 언어로 약간의 시차를 두고 우후죽순으로 출간돼 좀처럼 감을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일단 1권을 늦게나마 읽게 되니 어느 정도 줄거리를 세울 수 있겠네요. 아무튼, 일본보다 우리나라가 출간이 빨랐던 드문 케이스의 책입니다. 일본 판은 영어 판본을 기준으로 해서 출간됐고 우리나라는 프랑스어와 독어 판본으로 출간됐으니까요. 출판사에 의하면 세계 14번째, 아시아에서 첫 번째로 출간됐다고 하네요.
미국 아마존, 일본 아마존 모두 2009년 베스트 도서로 선정됐고(프랑스야 뭐 1 2 3위를 이 책 세 권이 동시에 기록했으니 당연히 올랐겠죠) 1편의 경우 2009년 영화로도 제작됐습니다. 폭풍처럼 세계를 휩쓴 이 작품은 우리나라에서 좀 고초를 겪었어요. 이유는 모두들 표지 때문이라고 했죠. 1권의 표지는 전면 수정됐고 전 두 판본을 가지고 있네요.
사실, 1권의 표지의 일러스트는 프랑스 표지에서 따온 건데요. 프랑스 표지를 보면 그리 나쁘지 않아요. 3부작 전체를 보면 일관성이 느껴지는 데다 품위도 있어요. 사실 원서 표지를 보면 알 수 있듯 저 그림의 형태 자체는 타원형이고 가로가 다소 짧은 판형에 분명하고 명확하게 콘셉트가 잡혀 있습니다. 또 배경색과 무척 잘 어울리는 그림이죠.
국내 판은 그림 위치 자체가 위로 올라간 데다가 배경을 유리 깨듯 깨는 실수를 저질렀고 게다가 무리한 금박 제목과 액자 틀을 둘러서 모호하고 산만하게 변화시켰습니다. 게다가 그림을 180도 반전시켜 시선 방향도 바꿔 버렸죠. 새롭게 출간된 1권은 영문 폰트를 추가해 시리즈 도서임을 강조했고 판형에 맞게 타원형을 원형으로 바꿨습니다. 시선도 제대로 돌아왔고요. 또 지저분해 보이는 많은 요소를 정리했습니다. 그래도 신국판은 좀 아쉬워요. 그건 그렇고.
이 책이 작품의 질에 비해 국내 팬들에게 어필하지 못한 것은 정보의 모호함이었다고 생각해요. 자 많이는 팔렸다는데 당최 무슨 책인지 감을 잡을 수 없는 겁니다. 스릴러인가? 미스터리인가? 판타지인가? 게다가 대하 추리소설이라니.. 저 우울해 보이는 여자 아이의 일대기인가? 성장소설인가? 이처럼 책의 정체성을 콕 찔러주지 못한 실수가 가장 컸다고 생각됩니다.
뭐 이건 다 지난 얘기고. 대략 줄거리를 간략하게 소개하면.. 주인공은 미카엘 블롬크비스트라는 시사 월간지 <밀레니엄>의 기자에요. 저자 소개를 보면 바로 알 수 있겠지만 스티그 라르손 자신이 반영된 일종의 페르소나겠지요. 그는 부패한 재벌에 대한 폭로기사 덕에 고소를 당해서 멋지게 패소했습니다. 돈도 내고 감옥도 가야해요. 헌데 이런 처지의 그에게 묘한 제의가 들어오게 됩니다. 스웨덴의 재벌 반예르 가의 총수 헨리크 반예르가 자신의 손녀의 행방을 추적해달라고 부탁한 것이죠. 만약 손녀가 어떻게 됐는지(죽었는지, 살았는지, 어디 있는지, 잘렸는지, 묻혔는지;)만 알려준다면 거액의 보상금 뿐 아니라 미카엘을 감옥으로 넣어버린 부패 재벌의 약점도 알려주겠다는 거였죠. 38년 전에 일어난 손녀의 증발은 완벽히 폐쇄된 한 섬에서 일어난 일이었어요. 헨리크 반예르는 그야말로 섬 전체를 이 잡듯 뒤졌지만 결코 그녀를 찾아내지 못했죠. 그는 여생을 손녀의 행방을 추적하는데 전부 바쳤고 마지막으로 미카엘에게 희망을 걸어보기로 작정한거죠.
정의롭기에 변변치 않은 잡지 <밀레니엄>이 휘청할 정도로 위기에 몰린 미카엘은 돈과 명예 모두를 위해 그 제의를 받아들입니다.
한편;; 한 보안경비업체의 비밀 조사요원이자 독특한 인물 리스베르 살란데르는 모종의 의뢰를 받고 미카엘의 뒷조사를 시작합니다. 뭐 나중에는 이 둘이 손녀의 실종 사건에 얽힌 반예르 가의 비밀과 또 엄청난 사건의 진실마저 알아낸다는 이야기입니다.
스티그 라르손은 독립 언론사의 강직한 기자였어요. 작품 속 미카엘의 행보는 그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 그런지 이 작품 속에는 스웨덴 사회와 정치, 경제, 역사에 대한 고찰이 많이 포함돼 있습니다. 게다가 또 사건도 매우 복잡하고 등장인물도 헤아릴 수 없이 많답니다. 미카엘의 추적은 반예르 가의 연대기를 재구성하는 일이니까요. 언뜻 봐도 잘 읽힐 것 같지 않은 작품인데, 결론은 전혀 아닙니다.
이 독특한 이야기는 전 세계로 번역될 만큼 잘 인식되는 보편성을 지니고 있어요. 그리고 그 보편성을 만들어낸 것은 스티그 라르손의 글이라고 생각됩니다. 사실 글은 쓰면 는다고 가정할 때 누가 가장 글을 잘 쓸까, 라고 생각하면 그건 기자에요. 작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작가는 개성을 추구하는 반면 기자는 객관적이고 이해되기 쉬운 글을 쓰려고 노력하죠. 게다가 매일매일 그 글을 대중에게 검증받습니다. 1급 범죄 기자 마이클 코넬리를 생각해 보세요; 정말 잘 씁니다. 스티그 라르손은 장면 전환과 교차 편집 그리고 화자를 달리해 이 복잡한 내용을 잘도 이끌어 나갑니다. 여러 가지 장치를 통해 캐릭터를 묘사하고 완급을 조절하는 기술이 참으로 탁월합니다.
<밀레니엄 1>은 추리소설의 성격에 가깝긴 하나 명확한 추리소설의 범주에서는 다소 벗어나 있어요. 사건 자체가 밀실이긴 하나 해결 직전까지의 정보로는 독자가 사건을 해결할 수가 없어요. 미카엘을 졸졸졸 따라다녀야 하죠. 게다가 리스베르의 능력은 다소 초인적입니다. 이런 면에서 보면 스릴러라고 해야 함이 옳겠네요. 사실, ‘대하 추리소설’이라는 문구를 보고 좀 의아해서 장르적 특성을 유심히 살펴봤거든요. 하지만 <밀레니엄 1>을 다 읽으면 아 뭔가 남았구나, 라는 생각이 듭니다. 내용뿐 아니라 부제만 봐도 작가가 거대 서사를 그리고 있다는 느낌이 있거든요. ‘사라진 손녀’나 ‘밀레니엄의 복수’가 부제는 아닌 것이죠; 2, 3권을 읽어 내려가면 그 실체가 점점 잡힐 것이라고 생각되네요.
‘스웨덴의 소설’이라는 낯선 느낌처럼, <밀레니엄>은 정말 독특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하지만 일단 책장을 넘기면 이국적인 낯설음 보다는 대중소설의 즐거움을 먼저 느낄 수 있을 거예요. 장르 소설의 범주를 넘는다는 몇몇 평은 결코 과장된 말이 아닌 것 같습니다. 다소 복잡해 보였거나 표지에 움찔한 독자분이라면 걱정 말고 읽어보셔요. 저도 비슷했는데 한 권 읽고는 바로 다음 권을 찾아 들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