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도 시체가 되살아나는 세계. 그곳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난다면 그 사건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야마구치 마사야의 실질적인 장편 데뷔작이자, 일본 미스터리 역사를 통틀어 지고지순한 걸작으로 꼽히는 <살아 있는 시체의 죽음>입니다.
야마구치 마사야山口雅也는 와세다 대학교 재학 시절(기타무라 가오루, 누쿠이 도쿠로 라인이군요. ㅎㅎ)부터 미스터리 평론가로서 이름을 떨쳤습니다. <살아 있는 시체의 죽음>으로 1989년에 데뷔했으며 <일본 살인 사건>으로 제48회 일본추리작가협회상을 수상한 바 있죠. 야마구치 마사야의 특징이라면 첫째 수수께끼 풀이 위주의 본격 미스터리를 테마로 하고 있는 것. 둘째 현실에서 발생하는 이상 상황을 엄밀한 논리로 재단하는 것. 셋째 번역투를 고의로 살려 공간적 배경을 일본이 아닌 다른 곳으로 삼는 것. 마지막으로 박학다식한 면모입니다. 데뷔작 <살아 있는 시체의 죽음>은 작가의 모든 특징이 고루 나타난 작품이라 할 수 있지요.
원고지 2,000매는 가볍게 넘길 듯한, 645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작품이지만 줄거리를 간략하게 소개하자면, 무대는 미국 동북부 작은 마을 툼스빌입니다. 마을의 이름처럼 유서 깊은 발리콘 가가 운영하는 장례회사로 이름난 곳입니다. 은퇴하고(운영은 첫째 아들 존이 맡고 있지요) 곧 죽음을 앞둔 발리콘 가의 수장 스마일리는 유언장을 발표하게 되는데요. 덕분에 마을을 떠난 펑크족 그린(스마일리의 손자죠)도 마을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리고 곳곳에서 죽은 시체가 되살아나는 불가사의한 현상이 일어납니다. 하지만 핑크색 영구차를 타고 돌아온 그린은 스마일리가 먹을 초콜릿을 우연히 먹고 죽게 됩니다. 그리고 발리콘 가 사람들을 대상으로 연속적인 죽음이 발생하죠. 그린은 곧 되살아나서; 자신의 죽음을 감추고 탐정 역할을 시작합니다.
사실, 죽은 이가 살아난다면 사건 자체의 의미는 완전히 무가 됩니다. 야마구치 마사야는 이런 설정의 의외성을 추리소설의 규칙 안으로 끌어들이고 위풍당당하게 본격 미스터리를 전개해 나갑니다. 이건 정말 놀라운 발상, 말 그대로 코페르니쿠스적인 대전환입니다. 1989년이라는 시간을 생각한다면 더욱더 가치가 더해지죠. <다아시 경 시리즈>처럼 일종의 병행세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규칙 하나를 완전히 창조해낸 것입니다. 그는 동서고금을 넘나드는 방대한 지식을 통해 ‘시체가 살아난다’라는 규칙을 개연성의 세계에 밀어 넣습니다. <살아 있는 시체>는 이 새롭게 생성된 규칙에 대한 일종의 룰북의 역할도 하고 있는 것이지요. 작품 분량이 늘어나는 것은 뭐 당연합니다.
자, 그러면 왜 시체가 살아나는 설정을 굳이 선택한 것인가, 라는 질문이 있을 수 있겠지요. 이 대답은 노리즈키 린타로의 해설에 비교적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그는 ‘살아나는 시체’라는 소재를 ‘추리소설의 메타 레벨의 규칙’이라는 용어를 통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글이 좀 난해한 편이기 때문에(노리즈키 린타로는 상당히 집요한 이론주의자입니다;)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추리소설의 기저에는 현실 세계의 금기(죽음과 시체)를 위반하고자하는 욕망이 있고 야마구치 마사야는 그 욕망을 ‘살아나는 시체’를 통해서 현실화시켰다는 것이죠.
<살아 있는 시체의 죽음>이 본격 추리소설의 이정표로 자리하고 있는 것은 단순히 죽고 살아나는 등장인물이 사건에 미스터리 성격을 더하고 있기 때문은 아닙니다. 꽉 조인 추리소설의 장르적 규칙을 멋지게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규칙 밖의 방법이 아니라 규칙 내부에서 감행한 도전입니다. 야마구치 마사야는 철저하게 ‘추리소설’이라는 장르에 천착해 이 성공을 이뤄냈습니다. 조금 다르지만 ‘실재와 인식’이라는 테마로 추리소설의 외연을 확장시키는 교고쿠 나쓰히코의 작품도 이런 견지에서 살펴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한마디로 이론가가 추리소설이라는 장르에 바치는 최대의 헌신이라 할 만한 작품입니다. 단순히 소설적인 즐거움을 넘어선 깊이를 느껴보실 분에게 적극 추천합니다.
덧: -그나저나 야마구치 마사야의 유머 감각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더군요. 작품의 주인공은 그린이 아니라 트레이시 경감이라고 하고 싶군요; 현학적 요소를 싹 제거한다면 신나게 읽을 수 있을 만한 작품입니다.
-미야베 미유키의 <화차>와 엎치락뒤치락한다는 흥미진진한 얘기가 역자의 글에 있었는데요. <화차>의 경우 추리소설의 사회적 역할을 가장 충실하게 수행한 작품일 것입니다. 반면 <살아 있는 시체의 죽음>은 장르 자체에 대한 고찰이 가장 완벽하게 이뤄진 작품이구요. 추리소설의 두 방향성을 대표하는 작품들이라 할 수 있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