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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치타임 - 내 인생의 점심시간
이성표 지음 / 컬처그라퍼 / 2009년 10월
평점 :
절판
일본 드라마 <런치의 여왕>을 보면 주인공(다케우치 유코)이 런치, 그러니까 점심에 대해서 어떠한 생각과 태도를 갖고 있는 여성인지 잘 알 수 있다. 벌써 5-6년은 족히 된 거 같은데 이 드라마를 보기 전까진 개인적으로 점심에 대해서 강력한 자기 기준 같은 건 없었던 거 같다. 그냥 아무데서나, 이것 저것 때우기가 내 컨셉이었다. 맛이 없으면 없는대로 있으면 있는대로 그냥 일상 속에 쳇바퀴처럼 반복되는 소일에 불과했다. 그런데 이 드라마는 내가 미처 몰랐던 점심 식사의 '완전 소중함'을 일깨워줬다. 난 이 드라마로 각성한 셈이다. ^^
그 후 점심을 신중하게 선택하기 시작했다. 물론 맛있게 먹기 시작했고 더불어 일상의 작은 즐거움과 활력이 솟아났다. 점심은 나에게 그런 힘을 줬던 것이다.(뭐 그렇다고 음식에 대해서 까탈스러워졌단 얘기는 아님. 단지 가끔은 맛있는 데미그라스 소스의 오므라이스를 애타게 찾아 다니긴 한다. ^^a)
아, 점심. 사실 점심이란 말은 點心 즉, 마음에 점 하나 찍는 다는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중국에서 옛날에는 하루 세끼를 온전히 먹었다기 보다는 아침과 저녁 사이에 간단히 끼니를 떼웠다고 해서 생긴 말이란다. 재밌는 건 딤섬(點心)이란 중국 요리의 한자가 보시다시피 '점심'으로 읽힌다는 점. 아, 이렇게 작은 만두 하나로 마음의 점을 찍었구나!
어쨌든 현대인들은 점심을 먹으면서 고된 하루를 견뎌낸다.(사실은 소주) 출근하느라 아침을 거르는 바쁜 직장인들은 전날의 과음과 피로를 아침 해장이 아니라 점심으로 푼다. 또한 아침을 허겁지겁 빵으로 때운 사람들은 반드시 점심으로 만회한다. 뿐만아니라 점심 시간은 휴식 시간이기도 하다. 당일 부과된 공식적인 1시간의 휴식 시간이다. 이 천금 같은 점심 시간을 통해 일하는 사람들은 하루치 밧데리를 충전한다.
한국 일러스트레이션계의 거성. 이성표 작가는 각종 매체로부터 의뢰받은 일러스트레이션. 그러니까 클라이언트잡을 오랫동안 충실히 그것도 대단히 완성도있게 수행해온 사람이자 후학을 양성하는 선생님이기도 하다. 뭔가 자유롭지만 기품이 있으며 재밌있지만 사색이 있는 그림으로 국내는 물론 국제 무대에서도 인기가 높다. 이러한 이성표 작가의 책이 나왔다. 글은 물론 사진과 그림까지 모두 온전히 이분의 것이다. 모두에서 언급했던 점심에 대한 서설이 길었던 이유가 바로 이성표 작가의 책 제목이 [런치 타임_내 인생의 점심시간]이기 때문이다.
" 점심 시간은 힘을 내는 시간이다.
편안하게 밥 먹는 시간
풀밭에 보자기를 깔고 도시락을 풀어먹으며 노닥거리는 시간.
재스퍼는 나에게 그런 시간이었다."
(책 본문 인용)
일을 위해 작업실에 갇혀 살았던 20여년 동안의 피로를 풀고 인생의 점심 시간을 갖기 위해 모든 것을 훌훌 털고 가족과 함께 캐나다 오지 마을 재스퍼에서의 생활담을 책으로 엮은 것이다. 얼핏보면 성공한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여유가 아닌가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막상 책장을 넘기면 얘기가 달라진다. 이 분은 인생을 치열하게 살아오신 분이고 게다가 캐나다에서의 생활에서 또 다른 치열한 도전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단, 이번에는 치열함의 중심에 나와 내 가족이 있는게 다를 뿐이다.
사십대를 훌쩍 넘긴 나이에 그것도 공부로 아이들이 바빠질 때, 그렇다고 생활고에 대한 보장이 없는 상태에서 기득권을 버리고 훌쩍 떠날 수 있는 것은 용기다. 이 분은 남들이 노후를 위해서 투자하는 산술적 재테크 대신에 자연속에서 자신을 위한 [심]心/沈/尋테크를 한 것이다. 내면속의 자신과의 대화, 자녀들과의 속깊은 대화, 부인과의 진심어린 대화, 대자연과의 대화..이러한 대화를 통해 살아온 인생을 되돌아보고 앞으로 살아갈 나날들에 대한 영성적 성찰이 돋보이는 책이다. 단지 책장을 넘기다가 나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하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
회화가 소설이라면 일러스트레이션은 시였다. 예전엔 몰랐다. 이 책을 읽고 배웠다. 그 정도로 이 책은 詩心이 가득하다. 절제된 문장과 여백을 채우는 사진은 그 어떤 시보다 나와 가족 그리고 주변을 돌아보게 만든다. 게다가 재밌기까지 하다.(그림이라는 재능도 부러운 데 글까지 잘쓰시다니 좀 너무하시긴 하다.)욕망을 절제하는 수도사같은 분위기가 나같은 범인들에겐 부담을 줄 수있다는 부작용이 있긴 하지만 뭔가 자기 성찰적인 이성표 선생님의 글은 울림의 주파수가 남다르다.
나의 로망도 40대 안식년이었다. 그런데 이성표 선생님과는 약간 다른 안식년을 꿈꿨다. 와이프와 교대로 각자 안식년을 갖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인생에서는 일도 힘든 과목이지만 결혼과 육아도 좀 센 과목들이다. 대입의 국영수라 할 수 있는 인생의 국영수 즉 일,결혼,육아로 지친 지금까지의 인생에서 혼자만의 멋진 런치 타임을 갖는 것이다. 그리고 가족이 다시 모여 즐거운 디너타임을 갖는 것이다. 멋지지 않은가! 자, 그렇다면 누구부터 갈까? 간다면 어디로 가지? 필란드, 캐나다, 뉴질랜드, 홋카이도? 가서 집은 어쩌고? 생활비는? 아이는 어쩌고? 다시 돌아오면 뭘하고?....으이구!!!
그냥 우선은 이성표선생님께 존경을 보낼 따름입니다.
추신: 참, 점심이 늦었다고 고민하시는 분들께 한마디.
점심 좀 늦게 드시면 어떻습니까? 대신 더 맛있는 거 드시고 힘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