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 1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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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나온 작품이지만 나로서는 처음 읽은 베르베르 작품이다. '뇌'를 읽은 다음 흥미가 생겨 '아버지들의 아버지', '개미', '지식의 백과사전', '나무' 등을 읽었다.

이 책은 확실히 대중적으로 어필할 만한 통속적인 재미를 갖고 있다. 또 비록 기상천외할 정도는 아니지만 자유로운 상상력에 기반을 둔 작품을 쓰려고 하는 노력도 좋게 보인다. 꽤 괜찮은 시작에 비해 뒤로 갈수록 힘이 빠지긴 하지만.

그러나, 만약 내가 '뇌'만 읽었다든가 이게 그의 첫 작품이었다면 후한 점수를 주었을 것 같지만 그러지 못하는게 아쉽다. 특히, '뇌'가 근작이었음을 감안할 때 베르베르의 한계가 여실히 보인다고 할까.. 늘 똑같은 형식과 구성, 그저그런 인물묘사, 조금도 변화 없이 똑같은 형태로 써먹고 또 써먹는 주제의식(가능성의 나무니 최소폭력의 길이니 하는 것 등등), 감칠맛이 부족한 대사, 너무 지식과 주제의식을 부자연스럽게 주입하는 듯한 태도.. 그런 것들이 좀 지겹다. 마지막 마무리가 제대로 안되는 것도 특징이다.

냉정하게 평가하자면 '뇌' 같은 경우 과학소설로 보기에는 필립 딕, 어슐러 르 귄 외에 수많은 뛰어난 작가들에 한참 못 미치고 일반 문학으로 보기에도 (늘 평론가들이 지적하듯이) 많이 부족하다.

그의 작품들은 갈수록 '첫번은 후딱 재밌게 읽지만 두번 집어들게 되진 않는' 책들이 되어가는것 같다. 가지고 있는 아이디어에 비해 많은 작품을 내는 건 아닌가 생각도 해 보게 된다. 10년 넘게 구상하고 퇴고했다는 '개미'만큼 아니 그보다 더 괜찮은 작품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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쿼런틴 행복한책읽기 SF 총서 4
그렉 이건 지음, 김상훈 옮김 / 행복한책읽기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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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경우 <쿼런틴>은 주인공이나 등장인물들에게는 별로 감정이입이 되지 않으면서도 플롯의 진행이나 논리적인 귀결 자체에 심하게 몰입하여 읽었던 작품이다. 이 작품은 양자역학을 소재로 했다기보다는 주제로 삼았다고 하는 편이 맞을 것이다. 정말 많은 분량을 양자역학 그리고 여기에 작가의 상상력으로 덧붙인 내용을 기술하는데 할애하고 있다. 주인공은 양자역학적인 체험을 겪고 근본적으로 양자역학적일 수밖에 없는 고민으로 갈등한다. 이에 정신이 팔린 나머지, 나는 2부부터는 주인공과 인류의 미래는 될대로 되라 하는 심정이 되어 마치 흥미로운 과학적 가설을 읽듯 했다. 사실 나는 소설적인 측면에 대해서는 할말이 별로 없고 얼마나 잘 쓴 '문학'인지도 모르겠다.

직관을 쓸모없게 만들어버리는 양자역학의 기묘한 실험결과들은 수많은 논쟁과 다양한 해석을 낳았는데, 그 중에 현재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는 코펜하겐 해석은 관측대상이 가질 수 있는 물리량을 통계적으로 기술하는 것으로 만족한다. 관측하는 순간 파동함수의 수축에 의해 수많은 가능성 가운데 하나가 확률에 따라 임의 선택될 뿐이라고 설명한다. 무작위적이고 비결정론적인 속성이 자연의 본질이라는 가정을 받아들인다면, 실제로 얻은 실험결과가 하필 '왜' 그렇게 되었어야 하는에 대한 설명을 바라는건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여기까지는 좋다. 그런데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물음은 '관측'이라는 것을 도대체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관찰자 또는 실험장치를 관측대상과 함께 묶어놓고 보면 이것도 하나의 물리계(외부에서 관측하기 전에는 수축하지 않은)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관찰자는 어떻게 관측대상과 엄밀하게 구분되는가. 실제로, measurement problem이라고 불리는 이 문제는 오늘날도 코펜하겐 해석을 공격하는 논쟁거리 중의 하나라고 알고 있다.(여기까지는 이미 알려진 과학 이론이다.)

여기에 착안하여 작가는 대담하게 '파동함수의 수축을 일으키는 것은 바로 인간의 뇌'라고 가정한다. 이 가정이 함축하는 바는 상당히 많다. 인류가 '우주적 대학살'의 주범이었으며, 버블이 태양계를 둘러싼 것도 이를 저지하려는 자들이 둘러친 장벽이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사실이 '발견된' 2060년대는 뇌의 뉴런 연결상태를 재배치하여 뇌기능을 조작하는 mod가 실용화된 시대이므로, 파동함수의 수축 시점을 마음대로 조절하고 수축 전에 각 고유 상태의 개연성을 임의로 조작할 수 있는 mod를 만들어 신이나 다름없는 초월적 능력을 얻기 위한 시도가 이루어진다.

'고유상태를 임의로 선택할 수 있다'는 설정은 지나친 비약으로 보인다. 그러한 존재는 '맥스웰의 도깨비'나 마찬가지로 열역학 제2법칙을 위반하게 될테니까. (등장인물의 입을 통해 '너무 오랫동안 확산상태를 유지하면 예측불능의 파국 상태를 가져올 수 있다'고 설명하는데, 그 결과 전체 계의 엔트로피는 어쨌든 증가된다는 식으로 이 난점을 피하려 한 것 같다.) 모든 사건을 조작할 수 있고 심지어 과거의 사건을 돌이키기까지 하는 능력은 너무하다 싶었지만, 다행히 슈퍼맨놀이로 전락시키지 않고 쿨한(?) 결말을 선택한 것은 맘에 들었다.

아무려면 어떠랴! 나는 상상의 세계에서 충분히 '확산과 수축'을 반복하면서 숨가쁜 사고실험을 즐길 수 있었다. 평소에 관심이 많았던 인간의 자유의지, 의식, 인지 이런 주제에 대해 다른 관점에서 생각할 기회를 얻은 것도 수확이다. 하나 아쉬운 점이라면 1부에서 2060년대까지의 세계상을 흥미롭게 묘사하면서 박진감있게 전개되던 스토리가 중반부부터는 주인공의 심리묘사와 독백, 양자역학 이론으로 뒤덮이면서 너무 다른 분위기로 바뀌어버렸다는 것이다. 양자역학에 대한 설명이나 주인공의 심리 묘사는 했던 말을 반복하는 경우가 너무 많아서 지겨웠다. 이걸 압축하고 1부와 같은 톤으로 이야기를 풍부하게 끌고 갔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무겁고 난해하지만 차근차근 곱씹는 맛이 있는 멋진 소설을 만나 기쁘다. 번역이 결코 쉽지 않았을 이런 작품을 우리말로 엮어 소개해준 출판사에게도 감사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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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 컴퓨터 - 21세기 과학혁명 살림지식총서 36
이순칠 지음 / 살림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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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양자컴퓨터에 대한 내용을 수식 단 한 개도 쓰지 않고 그림을 5개 넘게 쓰지 않으며 설명하는 세계 유일의 소개서일 것이다. 이 책은 양자컴퓨터뿐 아니라 심지어 양자암호통신 그리고 양자역학을 응용한 순간이동까지 비록 간단하게나마 언급하고 있다. 그런데 이 얇은 책은 100페이지도 되지 않는다. 가히 수박 겉핥기도 아니고 겉 스치기라 할 만하다. 사실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왜냐면 양자정보공학을 물리학 전공자가 아닌 사람에게 제대로 설명하는 것은 어차피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책을 '고전물리학에만 (완전하게는 아니라도) 의존하는 현재의 컴퓨터기술이 한계에 봉착한다면 그 다음은 어떻게 될까'라는 지적호기심을 가진 분들에게 권하고 싶다. 양자컴퓨터가 어떻게 해서 현대의 최첨단 암호기술을 간단히 무력화시킬 수 있는지, 양자암호기술은 (양자역학의 근본 토대가 틀렸다고 판명되지 않는 한) 어떻게 절대로 깨지지 않는 암호체계를 구성할 수 있는지, 또 양자정보기술은 얼마나 빨리 실현되고 어떤 한계를 가질 것인지 등의 물음에 대한 답을 볼 수 있을 것이다.(저자가 실제로 양자컴퓨터 구현을 연구하는 KAIST 교수이기 때문에, 짧지만 신뢰할만한 답일 거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질문들과 답은 무척이나 어렵고 거창해 보이지만, 적어도 이 책의 내용만 이해하는건 별로 어렵지 않다. 양자역학에 나오는 세 가지 원리 - 중첩(superposition), 얽힘(entanglement), 그리고 물리용어로 '붕괴'가 맞는지 모르겠지만 관측에 의해 중첩된 가능성 중 하나로 완전히 결정되는 것 - 를 쉬운 설명으로 소개한 다음, 이 세가지만으로 양자정보기술이 어떻게 실현가능한지를 순수하게 논리만 가지고 설명한다. 그러니까 복잡한 수식이나 물리 지식 같은 것은 거의 필요하지 않다.

저자가 물리학교수니까 글재주가 부족하지 않을까 싶겠지만, 그 생각은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 상당히 재치있고 유머러스한 글솜씨에 종종 웃음을 터뜨리며 읽기도 했으니까. 다음과 같은 문단이 기억에 남는다. (문자 그대로 따온 것은 아님)

... 양자역학 같이 어려운 것을 이해하고 있다는 자부심 때문인지 물리학자들은 겉보기와 달리 매우 자부심이 강하다. 어떤 사람이 겸손하다면, 그는 물리학자가 아니라고 보면 된다. 심지어 독설을 즐기고 오만한 어떤 물리학자는 이렇게 말했다. '양자역학을 이해하고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는, 양자역학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과 원숭이와의 차이보다도 더 크다. 양자역학을 이해 못하는 사람은 금붕어나 다름 없다고 보면 된다.' 여기까지 읽은 당신은 이제 기억력이 3초라는 금붕어 소리를 듣지 않아도 되니까 다행이다. 참고로 내가 나의 아내를 금붕어 수준으로부터 구제하는데 13년이나 걸렸다. ...

나는 이 책 덕분에 한시간만에 금붕어 수준에서 벗어난 것에 감사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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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문이 터지는 일본어 첫걸음
반노신지, 박세리, 김지민 지음 / 넥서스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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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장점이라면 역시 아주 재밌고 쉽다는 거겠죠. 매 챕터마다 여기서 배울 문장을 써먹는 만화가 하나씩 있고(진부하지 않고 정말 웃기고 황당한 만화들..^^) 올칼라 편집에다 군더더기 없이 간결하게 설명 덕분에 전혀 부담없이 빨리빨리 익힐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전 짧은 챕터를 여러개(한 30개쯤) 나열한 구성의 책을 좋아하거든요.

일본어실력이 아직도 보잘것 없는 터라 이렇게 말하긴 뭐하지만, 이 책은 초보자용 교재 중에서도 특히 내용이 쉬운 것 같습니다.(즉 이 책 내용만 마스터한 사람보다는 높은 수준까지 다룬 다른 책을 마스터한 사람이 더 아는게 많겠죠.) 하지만어차피 시작하는 교재라면 1부터 10까지 다루고 있든 1부터 20까지 다루고 있든 별 문제가 안된다고 봅니다. 이 책 하나로 일본어 끝낼게 아니니까요. 다른 언어라는 장벽을 느끼지 않고 쉽게 공부할 수 있는 책이 제일 좋은게 아닐까요.

부록에 대해서 얘기하자면, 잘 만든 펜맨쉽(알파벳 연습하는 공책)이 있는데 세심한 배려는 고맙지만 어차피 본책 앞머리의 내용과 겹치기 때문에 그냥 생략하고 가격을 낮추는게 더 좋았을 것도 같네요. 테이프와 함께 CD를 제공한 것도 가격상승요인이 되었을 것 같아서.. 요즘 추세에 맞게 CD만 제공하는게 좋지 않았을까 싶습니다.(저는 MP3로 변환해놓고 씁니다만.. 출판사 웹사이트에서 MP3를 다운받게 해도 좋을듯) 참 그리고 작고 간편한 JPT 4급 단어장도 있습니다.

'일본어 첫걸음' 류의 책들을 검색해 보시면 아시겠지만, 이 책만 좀 유별나고 나머지 책들은 (크기, 구성, 내용 등등) 다 비슷비슷합니다. 여러모로 세심하게 준비한 흔적이 보이는 이 책을 적극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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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니아를 위한 세계 미스터리 걸작선
아서 코난 도일 외 지음, 정영목, 정태원 옮겨엮음 / 도솔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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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들은 미스테리/추리물의 백미는 단편에 있다고 말한다. 간결하고도 빠른 전개와 숨돌릴 틈을 주지 않는 서스펜스, 그리고 마지막 결말(반전)을 제대로 맛볼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가지 덧붙이자면 아무리 나에게 맞지 않는 작품이라도 지루하게 오래 읽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랄까? ^^ 그러나 단편은 매우 많은데다가 상대적으로 장편물에 비해 대중적으로 덜 알려져 있어서 찾아 읽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작품을 잘못 고르더라도 위험이 덜한 '가격에 비해 많이 양 많은' 책이랍시고 무턱대고 주문했다.

책을 받아보기 전까지는 이렇게 두껍고 빵빵한 책인줄 몰랐다. 그런데 보기보다 페이지수도 많았고(900쪽쯤..) 무려 44편이나 되는 단편들이 실려 있었다. 그런데 그 많은 단편들이 모두 재미있다! 개중에 더 낫거나 못한 것들도 있지만, 그건 오직 나의 개인적인 취향에 따른 차이를 넘지 않는다고 본다. 한 편도 빼놓지 않고 상당히 만족스러운 수준 이상이다.

고전스타일의 탐정추리물도 물론 있고, 평범한 주인공이 사건을 해결하는 스타일, 또는 정신이상 범죄자의 수기 형식, 그리고 추리가 아닌 순수 미스터리물까지 다 골고루 망라되어 있어서 정말 다양한 맛을 느낄 수 있다. 작가들 중 상당수는 내가 잘 모르고 있었는데 작품이 너무 맘에 들었고, 찾아보니 이미 추리문학계에서는 잘 알려진 작가들인 경우도 많았다.(스탠리 엘린, 도널드 웨스트레이크, 도로시 세이어스 등) 암튼 처음 먹어보는 낯선 음식들까지도 직접 먹어보니 모두 맛있는 그런 뷔페 식당에 다녀온 느낌이다. ^^

이 책을 사기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 한가지 이유가 더 있다. 난 요즘 어릴 때 읽다가 손을 놓았던 추리물을 다시 열심히 보려고 생각중인데, 어릴 때 막연히 알았던 몇몇 거장들(크리스티, 퀸, 딕슨 카, 체스터튼 등) 말고도 훌륭한 작가들이 너무 많은 나머지 누구의 작품이 괜찮은지 알 길이 없다는 것이었다. 장편을 구해다 보긴 많고.. 그런데 이 책 한 권으로 수많은 다른 훌륭한 작가들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 어떤 작가가 나에게 맞을지도 가늠할 수 있게 되었다.(작품 뒤에 있는 옮긴이의 간단한 촌평에 작가의 대표작이 언급되어 있는 경우도 있음) 추리작가들의 카탈로그를 하나 덤으로 얻은 기분이다.

단점이라면 구판의 2권을 합치고 하드커버로 만들어서 책이 좀 무겁다는 것.. 그래서 누워서 볼때 팔이 아프다는 것. 그것 빼고는 대만족이다. 제목은 '마니아를 위한..' 이지만 누구나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거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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