쿼런틴 행복한책읽기 SF 총서 4
그렉 이건 지음, 김상훈 옮김 / 행복한책읽기 / 2003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나의 경우 <쿼런틴>은 주인공이나 등장인물들에게는 별로 감정이입이 되지 않으면서도 플롯의 진행이나 논리적인 귀결 자체에 심하게 몰입하여 읽었던 작품이다. 이 작품은 양자역학을 소재로 했다기보다는 주제로 삼았다고 하는 편이 맞을 것이다. 정말 많은 분량을 양자역학 그리고 여기에 작가의 상상력으로 덧붙인 내용을 기술하는데 할애하고 있다. 주인공은 양자역학적인 체험을 겪고 근본적으로 양자역학적일 수밖에 없는 고민으로 갈등한다. 이에 정신이 팔린 나머지, 나는 2부부터는 주인공과 인류의 미래는 될대로 되라 하는 심정이 되어 마치 흥미로운 과학적 가설을 읽듯 했다. 사실 나는 소설적인 측면에 대해서는 할말이 별로 없고 얼마나 잘 쓴 '문학'인지도 모르겠다.

직관을 쓸모없게 만들어버리는 양자역학의 기묘한 실험결과들은 수많은 논쟁과 다양한 해석을 낳았는데, 그 중에 현재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는 코펜하겐 해석은 관측대상이 가질 수 있는 물리량을 통계적으로 기술하는 것으로 만족한다. 관측하는 순간 파동함수의 수축에 의해 수많은 가능성 가운데 하나가 확률에 따라 임의 선택될 뿐이라고 설명한다. 무작위적이고 비결정론적인 속성이 자연의 본질이라는 가정을 받아들인다면, 실제로 얻은 실험결과가 하필 '왜' 그렇게 되었어야 하는에 대한 설명을 바라는건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여기까지는 좋다. 그런데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물음은 '관측'이라는 것을 도대체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관찰자 또는 실험장치를 관측대상과 함께 묶어놓고 보면 이것도 하나의 물리계(외부에서 관측하기 전에는 수축하지 않은)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관찰자는 어떻게 관측대상과 엄밀하게 구분되는가. 실제로, measurement problem이라고 불리는 이 문제는 오늘날도 코펜하겐 해석을 공격하는 논쟁거리 중의 하나라고 알고 있다.(여기까지는 이미 알려진 과학 이론이다.)

여기에 착안하여 작가는 대담하게 '파동함수의 수축을 일으키는 것은 바로 인간의 뇌'라고 가정한다. 이 가정이 함축하는 바는 상당히 많다. 인류가 '우주적 대학살'의 주범이었으며, 버블이 태양계를 둘러싼 것도 이를 저지하려는 자들이 둘러친 장벽이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사실이 '발견된' 2060년대는 뇌의 뉴런 연결상태를 재배치하여 뇌기능을 조작하는 mod가 실용화된 시대이므로, 파동함수의 수축 시점을 마음대로 조절하고 수축 전에 각 고유 상태의 개연성을 임의로 조작할 수 있는 mod를 만들어 신이나 다름없는 초월적 능력을 얻기 위한 시도가 이루어진다.

'고유상태를 임의로 선택할 수 있다'는 설정은 지나친 비약으로 보인다. 그러한 존재는 '맥스웰의 도깨비'나 마찬가지로 열역학 제2법칙을 위반하게 될테니까. (등장인물의 입을 통해 '너무 오랫동안 확산상태를 유지하면 예측불능의 파국 상태를 가져올 수 있다'고 설명하는데, 그 결과 전체 계의 엔트로피는 어쨌든 증가된다는 식으로 이 난점을 피하려 한 것 같다.) 모든 사건을 조작할 수 있고 심지어 과거의 사건을 돌이키기까지 하는 능력은 너무하다 싶었지만, 다행히 슈퍼맨놀이로 전락시키지 않고 쿨한(?) 결말을 선택한 것은 맘에 들었다.

아무려면 어떠랴! 나는 상상의 세계에서 충분히 '확산과 수축'을 반복하면서 숨가쁜 사고실험을 즐길 수 있었다. 평소에 관심이 많았던 인간의 자유의지, 의식, 인지 이런 주제에 대해 다른 관점에서 생각할 기회를 얻은 것도 수확이다. 하나 아쉬운 점이라면 1부에서 2060년대까지의 세계상을 흥미롭게 묘사하면서 박진감있게 전개되던 스토리가 중반부부터는 주인공의 심리묘사와 독백, 양자역학 이론으로 뒤덮이면서 너무 다른 분위기로 바뀌어버렸다는 것이다. 양자역학에 대한 설명이나 주인공의 심리 묘사는 했던 말을 반복하는 경우가 너무 많아서 지겨웠다. 이걸 압축하고 1부와 같은 톤으로 이야기를 풍부하게 끌고 갔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무겁고 난해하지만 차근차근 곱씹는 맛이 있는 멋진 소설을 만나 기쁘다. 번역이 결코 쉽지 않았을 이런 작품을 우리말로 엮어 소개해준 출판사에게도 감사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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