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 이야기..

 제목.. 참 잘 지었단 생각이 든다.

 처음 제목을 봤을땐. 음.. 애플파일까?? 하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고.. 그 담에 혹시 파이는 3.14를 생각하기도 했지만..

극한으로 끌고 갈 수 있는 데까지 끌고가서 시작된 이야기.

오히려 로빈슨 크루소를 부러워하게 만든 이야기

맨 앞의 작가노트에서 아직도 이 이야기가 실화를 바탕으로 한 것일까라는 생각에서 헤어날 수 없다.

그렇다면, 오히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소설이라고 크게 광고했을 것 같은데. 내가 그런 광고를 보지 못했던 것인지 아니면 그게 사실이 아닌 것인지..

글쎄.. 그렇다면 이 이야기가 "실화"를 바탕으로 한 것이라는 '사실'이 중요한 것일까??

결국 내가 이 부분에 이렇게 계속 집착한다면. '파이'가 얘기했던 대로 '어떤 이야기가 더 괜찮을까요?'라는 질문에 대한 내 대답이 되겠지.

파이가 알고 있던 사람들의 마음. 이게 더 나을까? 저게 더 나을까?

사람들이 원하는 사실. 그렇다면 그 사실이 진실이 될까?

사실과 진실을 원한다고 말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진실로 원하는 것은 뭘까?

파이는 그들에게 자신의 사실을 진실로 말했지만. 사람들은 그에게 사람들이 원하는 진실을 사실대로 말해주길 원한다.

내가 이 작품을 처음부터 끝까지 붙잡고 읽지 않고, 처음부분은 계속 띄엄 띄엄 읽어서 아무래도 좀 감흥이 떨어진 것 같다.

특히 후반부를 몰아서 끝까지 읽고나니 그런 생각이 더 절실해진다.

현재와 과거가 계속 섞여있는 초반부에 어쩌면 많은 단서가 숨어있었는데도 그 부분을 대강 흘려보내고 보니. 만약 그러지 않았으면 좀 더 강한 느낌을 받았을 텐데 그런 인상을 놓쳐버린 것 같아서 아쉽다.

파이 이야기는 아주 처음 들어본 이야기는 아닌 것 같다. 예전에 고등학교에 다닐때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다. 단 상황은 좀 달랐지만. 이렇게 표류하는 구명보트와 뗏목에서가 아닌 무인도에서였지만.

그게 뭐 그리 큰 차이겠냐고?? 그렇지 않다고 본다. 굉장히 큰 차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이렇게 발로 딛고 다닐 수 있는 땅과 이 끝을 알 수 없는 바다 한 가운데 떠 있다는 것. 그 공포의 차이를 어떻게 감히 내가 말할 수 있을까??기껏 수영장에서 물장구 치는게 전부인데. 육지에서 한겨울 밤바다를 쳐다보면서도 공포를 느꼈는데. 말그대로 상상도 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다.

그것도 이제 갓 16살 소년이. 맹수 중의 맹수라는 호랑이와 같이..

이 작품의 매력은 추호도 의심케 하지 않는 감정이입이라고 생각된다.

그렇게 몰입하거나 열중해서 특별히 감흥하면서 읽기 시작하지도 않았는데도 계속된 전개에서 나도 모르게 그저 파이의 이야기에 그대로 빠져들었다.

비록 내가 완전히 파이가 될 수는 없었지만. 파이의 상황을 추호도 의심치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그렇게 끝까지 살기위해 노력하고, 투쟁하고.

좀 말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되는 이상한 식인섬을 보면서도 당연히 내 지식범위를 벗어나는 생태계는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그대로 넘어갔다.

그리고 마지막... 일본인들과 파이와의 대화에서 드디어 내가 그 예전에 들었던 이야기와  이들의 대화에서 유사함을 발견하게 됐다.

물론 내가 예전에 들었던 그 이야기가 정확히 기억나진 않는다. 그 가장 큰 이유중에 한 가지는 아마 내가 받았던 나름의 충격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 이야기는 알고보니 심리테스트의 한 종류였는데. 파이와 비슷하게 (단,, 바다표류는 아니다.이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이 바로 이 바다표류라고 생각한다.  이외 대부분의 이야기는 항해중 난파.. 그리고 그로 인한 무인도..최소한 발딛고 있을 수 있음은 허용해주었다. 하지만. 파이는 말그대로 발딛고 제대로 서있을 수도 없는 상황이다. 아무리 물을 좋아하거나, 바다를 좋아한다고 하더라도 그건.. 그 바다에서 자유롭게 다시 뭍으로 나갈 수 있음을 전제로 할 것이다. ) 무인도에 여러 동물과 같이 조난을 당했을 때.. 결국.. 한 마리씩 세상과 하직하게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면 어떤 동물부터 이 세상과 작별케 할거냐??는 질문이었다.

그 동물들 중에 기억나는 동물이 대강.. 호랑이(아님 사자) ,아마 또 원숭이, 말?? 아마 그랬던 것 같다. 더 있었던 것 같기도 한데.. 앞의 호랑이(사자) 와 소는 정확하다.. 그리고 그 뒤는 좀... 기억이 가물가물...

내가 이렇게 가장 강하게 기억하는 두 마리.. 호랑이가 아마 자기 자신이고, 소는 부모였던 것 같다. 그리고 그외 동물들이 아마 형제 자매.. 친구.. 등이였지 싶은데...

난,, 호랑이가 자기 자신일거라는 생각을 해보지 못했다. 전혀.. 오히려 '호랑이

=맹수'라는 공식에 완전 사로잡혀서 가장 먼저 내 주위에서 없애야 오히려 내가 더 안전할거라고 생각했다.

그 때 다소 당황스럽고, 또 충격적이기도 했던 것 같다. 결국,, 내가 나 자신을 가장 먼저 버려버리는 상황이 돼 버렸으니.. 어이 없기도 하고,, 아무리 그냥 단순한 심리테스트라고 했지만.. 그다지 좋은 기분이 아니었던게 사실이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그 이야기를 대강 기억하고 있는 것 같다. 아주 맘에 들었다면 완전히 기억하고 있고, 또 내가 여러번 써보았으니 기억에 강하게 남겠지만. 지 찝집한 기분이 강했기에 이렇게 완전하지 못한 기억으로 남아있는 것 같다.

그리고 이렇게 이 작품을 읽었는데... 내 둔감함에 발전이란 없는것 같다. 어떻게 그 때나 지금이나 이렇게 또 똑같이 그대로 빨려 들어가버리는 걸까??

이 작품을 읽으면서도 난 추호도 의심치 않았다. 아무리 파이가 동물원에서 자라났다란 장치가 있었고, 그가 인도인이라는 아주 작은 옷걸이가 있었지만.. 거기에 그대로 빨려 들어가버리기만 할까??

파이는 어쩌면 이미 알고 있었던 걸까?

사람들이 원하는 이야기를

그들이 원하는 이야기를 충분히 할 수 있었고, 그대로 했는지도 모르겠다.

이미 파이는 그들에게 물었다. '이 이야기는 어떠세요? 이게 더 나을까요??'

사람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사실을 진실이라고 생각하려고만 하는걸까?

내가 원하는 사실만이 진실일까?

그렇다면 왜 그들은 진실규명이라는 문제에 또 그렇게 매달리는걸까?

결국엔 그들이 원하는 사실을 원하면서.

생존의 절대적 문제에서 그 어느 누가 다른 사람을 평가할 수 있을까? 비난할 수 있을까?

파이는 자신의 사실을 견딜 수 있을까? 자신의 진실을 이겨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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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유명한 '상실의 시대'를 이제야 읽게 됐다.

 그 이유는 분명히 알지 못하겠지만. 내게 이상한 버릇이 한가지 있다.

 내가 이미 읽었거나, 혹은 현재 읽고 있거나 등의 이미 내가 선택하지 않은 상태에서 아주 많이 유명하거나, 많은 사람들이 이미 다 본 뒤 그 칭찬을 아끼지 않는 작품은 이상스럽게도 잘 선택하지 않게 된다. 물론 이런 경우는 거의 대부분 현재의 베스트셀러나, 스테디셀러등을 말한다. 세계명작이나 고전은 당연 여기에 포함되지는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어찌 보면 좀 웃긴 일이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고전만큼 유명하고 인구에 회자되는 작품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그 분명한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물론 알고는 싶지만 좀체로 그 답이 나오지 않는다.

상실의 시대도 바로 그런 작품 중의 하나이다. 하도 많은 사람들이 이 작품을 언급하기에 오히려 좀 짜증이 나기도 했다.

대체 얼마나 그렇게 대단하기에 그렇게도 많은 사람들이 칭찬에 칭찬.. 물론 이건 내가 여기 저기에서 본 경우이다. 거의 비판보다는 칭찬이 더 많았던 것 같다.

결정적으로 이번에 확실히 한 번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은 아마 어느 신문기사에서였던 것 같은데. 이미 현재 우리나라의 많은 작가들이 무라카미 하루키의 영향을 받고 있다는 기사에서 좀 자극을 받은 것 같다.

그렇다면 물론 내가 현재 우리나라의 젊은 작가들의 작품을 많이 접했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분명 내가 읽었던, 그리고 현재 또 앞으로 읽게될 작품에 이미 그 영향은 투영됐을 수 있는데. 그저 무조건 받아들이기 보다는 과연 그 실체가 어떤 것인지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느껴보고 싶었다.

이미 들었듯이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에서 음악을 빼놓을 수 없다더니, 아닌게 아니라 원제가 이미 '비틀즈의 노르웨이 숲'이란 노래에서 나왔고, (난, 전혀 그 노래를 모른다. 확실히 이 작품을 보면서 여기서 인용된 거의 대부분의 노래를 모르다 보니.. 물론 제목은 모르더라도 들으면 알 수 있을 수도 있겠지만. 이 책을 읽을땐 그냥 책만 봤기에 .. 확실히 감이 떨어진단 생각이 많이 들었다. 어디선가 이 작품에 인용된 노래만 모은 앨범이 있다고 했던 것 같기도 했는데.. 찾을 수 있을까?? 찾고 싶다.. 그리고 듣고 싶다..) 또한 다른 인용된 많은 다른 노래들도 잘 모르다 보니, 보다 깊은 이해는 좀 어렵지 않나 싶기도 했다. 결국 알고 싶은 맘이 왕창왕창 생겼다.

배경이 1969년인데. 어째 지금 우리의 모습을 그대로 담아내고 있을까??

작가의 역량이라는 부분을 언급할때  "현재성"만큼 그 의미를 배가시키는 것도 없지 않나 싶다.

많은 고전문학에서 지금 우리가 감흥을 느낄 수 있음이 바로 그 과거의 모습이 현재 "내"모습을 그리고 있음에 있지 않을까??

1969년 동경의 와타나베에서 2005년 서울의 내가 배회하고 있는 듯하다.

아직 채 20이 되지 않은 와타나베와 이제 막 20이 된 나오꼬와 그리고 미도리, 레이꼬 여사..

와타나베는 자신의 치열하지 않은 삶을 그냥 받아들인다고 하는 것 같지만. 지그의 내겐 아니 아직 채 20이 되지 않았던 과거의 나 그리고 이제는 이를 훌쩍 넘어버린 현재의 나는 그만큼의 치열함이라도 살고 싶다.

비록 과거의 내가 그들만큼 아니 그들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면서 전혀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았었지만, 지금이라도 더 늦기 전에 생각하고 고민하고 겪어나가야 하는데. 지금 현재의 나는 여전히 그대로 아무런 것도 아닌 단순한 무위의 삶을 살고 있다. 무위도식(방금 확인하기 위해 사전을 찾았다..-- 하는 일 없이 놀고 먹음-- 현재의 바로 나..)하면서도 전혀 죄의식없이.. 어떻게 이렇게 아무렇게 살고 있을 수 있을까?? 이젠 이런 놀람도 아무렇지도 않게 된 것만 같다.

이렇게 살면 당연히 안되는건데.. 내가 이렇게 나 자신이 싫은데도 아무런 생각없이 살고 있다.

절친한 친구의 죽음 이후 와타나베는 자신을 열지 않는다. 다가가지도 않고, 다가오게도 하지 않는다. 이미 그에게 인간이란 친구란 이제는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다고 스스로 정의내리고 그대로 행동한다.

그렇다고 스스로를 굳이 감춘다거나, 속으로 자기 자신 속으로만 파고드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절친한 친구의 상실에서 그는 자신의 인생의 문을 닫기 시작한 것 같다.

열정과 활동력만이 과연 삶의 진정한 가치이고 그대로 행동해야만 하는 최상의 것일까?? 마치 모든 인간에게 당연히 요구되는 행동규범일까??

꼭 그렇다고만은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누구나 즐길 권리가 있듯이 즐기지 않을 권리 또한 있고, 활발한 활동만이 즐거움이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렇다고 와타나베가 냉소적이라던가 굳이 더 회의적이라고는 보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있는 그대로의 사실과 삶을 더 확실히 가감없이 보고자 하는것이 아닐까

현재의 자신에 대해 정확히 파악하고, 그 범위에서 더도 덜도 나가지 않으면서 넘치는 열정이나 넘치는 욕망이 아닌 어느 정도의 방종과 일탈 그리고 또한 성실함을 그냥 자신에게 필요한 정도에서 사용하고 있다.

그것이 자신의 삶의 무게라면 그걸 굳이 피하려고도 그렇다고 떨쳐내기 위해 처절한 사투를 벌인다고도 생각지 않는다.

그렇다면 나오꼬는?

그녀는 자신의 삶의 무게를 결국엔 견디지 못한 것일까?

자살이란 인생의 패배일까??

자신의 마지막 생을 조절한 그들이 패배자일까? 혹 승자일까??

이렇게 단순한 패배와 승리라는 양극단으로 나눌 수 없음은 당연하겠다. 어느 누가 나 자신도 아닌 다른 사람의 인생의 선택을 단순히 평가할 수 있을까?

어쩌면 나 자신도 모르는 내 삶을 다른 사람이 단순히 판단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흔히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라고들 말한다. 나 역시도 바로 그런 많은 대다수 중 하나이지만. 그렇게 말하면서도 다른 내 맘의 한편에서 "그렇게 말해선 안되는거야"라는 또 다른 작은 목소리가 들리지만, 그럼에도 전자의 목소리가 더 큰 것 또한 사실이다.

비록 어렸지만, 이미 자신의 또 다른 한부분이었던 연인을 잃은 그녀에게 자신의 삶을 살라고 요구할 수는 없는 것 같다. 이미 그녀에게 단순한 연인관계를 넘어선 그녀의 일부를 그렇게 급작스럽게 더군다나 사고등이 아닌 자살이란 형태의 상실을 이겨낸다는게 쉽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아무런 외부 요인 없이 무위도식하는 나 자신도 하루에도 수십번을 이 말도 안되는 내부에서 이래저래 싸우고 투쟁하고 이렇게도 했다 저래도 했다 말도 안되게 혼란스러운데. 혼자서도 그렇게 알 수 없고, 판단할 수 없고, 결론 내리지 못해서 혼란스러운데. 비록 자신의 다른 일부분이라도 이미 내가 아닌 기즈키의 자살로 인한 혼돈과 혼란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자살"은 그 자체의 어두움으로 이미 동쪽 나라 서쪽나라 오랜 옛 나라, 그리고 현재의 우리에게 있어서 그 위력을 떨치고 있다. 단순히 정의할 수도 그 가치를 평가하기에도 두려운 그 힘을 갈수록 오히려 더 강화시키고 있다.

오히려 나오꼬는 그녀에게 일생에 단 한 번뿐이었던 "환희의 절정"에서 그 혼란의 정점을 맞게 된 것 같다. 그 이유에 대해 스스로 찾으려 했고 온전히 밝혔는지 나로서는 잘 알지 못하겠지만, 마지막을 스스로 정리했다.

스스로의 사랑을 찾고 그 사랑에 대해 표현하고 자신의 사랑을 바라는 미도리는 가장 밝은 인물이면서도 측은함을 역시 감출 수 없는 인물이기도 한 것 같다.

어쩌면 자신만을 사랑해달라고, 나만 사랑하고, 내가 원하는 것만을 해달라고 조르는 그녀의 외침이 더 가여워보이는 것은 다행히 그러한 가엽음에만 그치지 않고, 그 밝음으로 전이됨이 좋아보이는 인물이다.

마지막에 와타나베에게 말하는 "당신, 지금 어디 있어요?" 이 말은 그래도 상실의 시대에서 다시금 잡게 되는 희망의 끈이 아닐까??

많은 상실끝에도 여전히 남아있는 희망의 끈.

그 끈을 우리는 그래도 잡고 싶어하지 않는 것이겠는가.

'그래 그렇고 그런 인생. 이렇게 끝인거야'라고 자조하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끈"의 끄트머리라도 잡고 싶은게 우리 아닐까??

그 "끈"을 내게 내밀어 주길 바라지 않겠는가.

누구나 상처받기 쉬고, 넘어지기 쉽지만 그래도 다시 일어나고 그 상처를 치료하는게 바로 우리아닐까??

레이꼬 여사는 나오꼬의 자살에서 자신의 인생의 문을 다시 열기 시작한다.

두렵고 외롭고 힘들지만. 더 이상 뒤로 물러서지 않는다.

잔잔하지 않은 일들을 아주 잔잔하게 느끼도록 만든 작품이란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생각할수록 큰 물결을 부담없이 받아들이도록 주욱~~ 밀어주는 느낌이랄까?!

그 큰 물결을 그렇게 잘 헤쳐나온 인물들에게는 비견할 수도 없는 생각없는 나 스스로에게 어찔해질 정도이지만, 그럼에도 어쩌겠는가.. 그 유명한 말인.. 삶은 그래도 지속되는 것을 ...

바로, 현재의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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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운 신부 전집.. 예전부터 읽고 싶었던 책인데. 이제야.. 그리고 그 결과는 만족..^^

 이런걸 아마도 흐뭇한 만족이라고 해야할까??

 흐뭇한 만족이라는 약간은 채워지지 못함이 있는 표현을 쓴 이유는 이 책을 내 손에 완전 쥐지 못했기 때문이다.

도서관에서 대출해서 봤는데.. 오호~~!! 갖고 싶다...

이런 열망을 갖게 하는 책을 종종 도서관에서 무심결에 지나가다 발견해낸다는 사실이 기쁘면서도 서운하기도 하다.

처음부터 내 손에 잡은 책이길 더욱 갈망하게 되기 때문인데. 이 역시도 어쩌면 단순한 소유욕에 따른 결과일까?? 내가 소유하지 못함이기에 더 원하고, 더 좋아하게 되는걸까??

 브라운 신부 전집 1권 결백--은 이건 "단순한 추리소설이 아니구나!"하는 생각을 연신하면서 보게된 책이다.

밑줄 쫙~~~을 왕창 왕창 하고 싶은 맘을 꾹꾹~~ 누르면서,, "와,, 대단하다.."란 말을 대신 내뱉는 걸로 만족해야했으니.

갖고 싶은 맘은 더 커만 간다..

인간 심리에 대한 정확한 묘사와 표현은 내 가슴을 그대로 관통시키며, 그 표현을 그대로 갖다가 내 머리와 심장에 각인시켜, 완전히 내 것으로 하고싶은 맘이 사라지지 않게 만들었다.

어찌보면, 그렇게 특별한 추리가 있는 것도 아닌 듯하고, 특별한 트릭이 있는 것도 아닌 듯한데. 그 평범한 듯함에서 (그야말로 진부한 표현을 쓸 수 밖에 없는 현재의 나로서는) '삶의 진리'가 그대로 묻어나온다.

단순한 설교나 교훈일 수도 있을 수 있는 그런 내용을 따분하거나, 고리타분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그야말로 가슴을 적시는 언어로 나를 매혹시키고 있다.

굉장히 유명한 작품임에도 제대로 이 소설을 읽어본 적이 없었던 나는 (어떻게 추리소설을 좋아한다면서도 여지껏 이렇게 몰랐을 수가 있을까??!! 그 게으름과 행동하지 않는 떠벌림에 나 스스로 진저리가 나버렸다) 이제야 찾아낸 보석에 흐뭇함과 내 게으름과 입발린 빈수레에 짜증이 울컥 치밀었다.

마치 나를 앞에 두고, 브라운 신부가 내게 모두 얘기하고 있다는 생각을 안할 수 없었고,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이렇게 머릿속만 굴리지 말고, 지금 내가 받은 내가 생각한 이 모든 걸 그대로 행동으로 옮기려고 애쓰고, 또 실천하자는 생각을 계속하게 됐다.

짧은 단편이지만, 벌써 말했듯, 특별하지 않은 이야기 전개같은데, 핵심을 잡고, 펼쳐지는 이야기의 매력이 브라운 신부 이야기라고 생각된다.

남은 다른 작품들에 대한 기대 만발.. 만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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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까지 생각지 않았던 결말..

그렇다고 아주 충격적이지만은 않은 결말이었지만, 역시나 예상치 못했던 결말이었다. 그래서 다시 첫 장을 들척이게 만들기도 했지만,

처음 시작부분을 매끄럽지 못하게 읽기 시작하면서, "왜 이렇게 처음 부분이 잘 읽히지 않을까?"하는 물음을 이어나가고, 어느 정도. 주인공인 테디와 처크가 섬에 도착할 즈음에야 자연스레 이어질 수 있었다.

그리고 다 읽고 나서, 처음 부분을 다시 보니, 이제는 너무도 매끄럽게 읽히기 시작하고.

요즘 책을 읽으면서 자꾸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하는 것으로 보건데.. 아무래도 내가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는 것 같다.

뭐, 그렇다고 본래 그렇게 뛰어난 두뇌회전은 아니었지만, 요즘처럼 이렇게 덜 돌아가지만은 않았던 것 같은데..

역시 가장 중요한 시점문제인 것 같다.

누구의 시점에서 어느 시점에서 어느 곳의 시점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완전 달라지는 사실의 모습.

그렇다면 그 모두가 과연 진실일까? 혹은 그 모두가 진실이 아닐까?

같은 사실을 여러가지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았을때의 결론은??

테디의 사실은 처크에게는 진실이 아니다.

그리고, 처크의 사실은 테디에게 진실이 아니다.

분명한 사실이 진실이 아닌 것이 되는 것.

그렇다면 테디의 정신이상은 진실일까?

이 책의 결론은 처크의 사실을 진실이라 말한다.

테디가 끝까지 자신의 파트너라 생각하고 끝까지 믿고, 찾으려 구하려 애썼던 처크는 사실 테디의 진실을 가장 강력히 부정한 의사였다. 오히려 테디가 믿지 않으려 했고, 오히려 테디를 함정에 빠뜨렸다고 믿었던 콜리가 마지막까지 테디를 구하기 위해 애썼던 마지막 지지자였음이 밝혀진다.

난, 마지막 부분에가서까지도 혹 지금 이 부분도 반전의 마지막 전환점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고, 그대로 밀고 나갔다.

결국엔 내가 원했던 반전은 없었지만. 오히려 이 소설에서 그 마지막 반전이 결론이었지만.

생각해보면, 곳곳에서 이의 흔적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그리고 주인공 스스로 그러한 흔적을 직접 이야기하고 있었고. 그 부분에 갸우뚱하면서도 결국엔 자신이 원하는 결론으로 매듭짓고 있을 뿐이었다. 나 역시 그러한 주인공의 시선에 그대로 안주해서 내달린것이였고...

결국, 인간은 자신이 원하는 바대로 사실을 바라보는 것일까?

그렇기에 사실이 진실일 수도 있고, 그 반대일 수도 있는 것인걸까??

내가 원하는 사실이 내게는 진실이지만, 그것이 바로 사실왜곡이 되고 있는 것이라니...

내게는 진실인 사실이 완벽한 왜곡이 될 수 있음을 또 한번 새길 수 있었다.

사실 그대로는 어떤한 굴곡없이 그대로 볼 수 있는 힘이 내게 가장 필요한데. 나 역시도 테디의 퇴행을 거듭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테디는 결국 콜리의 바램을 이루지 못한채, 처크의 예상대로 다시금 퇴행하고 만다.

물론, 처음부분의 처크의 회상으로 미뤄보건데. 어쩌면 처크도 테디의 퇴행을 바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당시의 처크 역시도 젊었기에 테디의 퇴행을 오히려 당연하다고 받아들인 거였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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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상 생각하는 일이지만, 신문 서평, 신간소개 등을 읽지 않고, 바로 처음 책을 선택해서 읽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대개의 경우는 이미 어느 정도의 정보를 알고 있는 채로 읽기 시작하는데. 특히나 추리소설등의 경우는 그다지 좋지 않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이 소설도 이미 신간소개에서 "마지막 반전이 있습니다."라는 말을 이미 봐버렸고, 자연스레 처음 읽기 시작하면서부터 이미 그 반전을 생각하면서 읽게 된다.

그래,, "게임의 시작은 '사쿠마 슌스케'야.. 하지만,, 당근.. 반전이 있다잖아.. 그럼,, 진짜 게임의 시작은 누가 시작한걸까?? 아니.. 지금 이게 게임이 시작된건가?? 그래.. '주리' .. 분명 뭔가가 있어.. 석연치 않아.. 주리의 아버지'가쓰라기 가쓰토시'.. 그가 그냥 이렇게 게임을 당하고 있진 않을거야..."라는 생각을 처음부터 계속하면서 읽게 된다.

그러면서, 결국은 하나 하나의 모든 행동들에 의심을 갖게 되고, 그대로 글 속으로 빠져들지는 못했던 것 같다. 이 소설은 유괴범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이미 나는 이들 셋을 모두 다 보면서, 계속 딴생각만 하고 있으니..

그렇다고 재미없게 읽은 건 아니다. 이런 유괴범 이야기는 굉장히 오랜만에 읽었던 것 같고, 예전.. 셜록홈즈에서 읽은게 거의 전부 였던 것 같으니, 소재의 참신함이 좋았다. 게다가 단순 유괴가 아닌, 유괴게임이니 말이다.

한 번에 끝까지 다 읽었으니. 꽤 재미있었다. 물론, 도서관에서 읽었기에 그랬을 수도 있지만..

꽤 정교하게 짜여진 듯하면서도 부분 부분.. "아하,, 이 부분 걸리네.."하는 생각이 저절로 (아니, 어쩌면 이미 내가 마지막 반전이 있다는 걸 알고 있기에 그랬을 수도 있겠지만.. 아마 그 부분이 좀 큰 것 같다. ) 드는 곳이 계속 이어지긴 했다.

마지막에 밝혀지듯.. 주리의 갑작스런 친구와의 통화부분.. 그리고 그걸 삭제하기 위해 갔던 곳에서의 기다리던 사쿠마의 자동차 훼손 부분.. 특히,, 이 부분.. 물론, 지금까지 가장 중요한 부분은 주리의 노출을 완전히 막는게 .. 아니, 사쿠마에게 있어서는 최대한 주리의 노출을 막는게 목적이었지만,, 그래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좀 느슨하게 생각했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그렇게 자기 자신을 완전 노출시킨 일에서 사쿠마가 너무 대수롭지 않게 넘어간 부분은 좀 걸렸다.

그리고 이어지는 주리와의 정사 부분도.. 완벽한 증거가 남는 일을 그렇게 해버리다니..

물론, 당연히 그럴 수도 있는 거 아냐?? 라고 반문할 수도 있지만.

내가 이렇게 딱히 꼬집는 이유는 우리의 주인공 '사쿠마 슌스케'의 인물됨됨이를 생각했을데.. 너무 허술하게 넘어갔기 때문이다.

첫 장면부터 시작된 '사쿠마'에 대한 묘사에서 그가 그냥 그렇고 그런 인물이 아님은 너무도 명명백백하다. 스스로도 자신의 철두철미를 얘기하고 있고, 특히나 맘에 들었던 부분은 그가 '시간낭비'를 극도로 싫어한단 점이다. (나도, 항상 '시간낭비'하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이렇게 완전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시간을 버려버리고만 있기에.. 그 부분만큼은 진짜 맘에 들었다. ) 더군다나, 항상 모든 일에 대해 이미 먼저 계산하고, 결과를 미리 예견하고, 현재 자신의 행동을 컨트롤하는 '사쿠마'에게  내가 지적한 부분은 너무도 허술하고, 오히려 말이 안된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그리고, 역시나 결국엔 그 부분들이 이 소설의 결과를 뒷받침해주고 있고,, 아,, 그리고 또 한 부분.. 사쿠마가 주리의 사진을 찍는 부분도.. 완전 김샜다. 결국, 그 사진을 쓰게 될거라는걸 완전 광고하는 효과가 극부상됐기에 말이다.

결국, 내가 이 소설에 마지막 반전이 있단 걸 전혀 몰랐다면.. 정말 그대로 제목만 보고, 쓰~~윽~~! 골라서 그냥 읽기 시작했다면, 이런 부분들에서 이렇게까지 잡고 늘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내가 추리소설 읽을 때. 거의 암 생각 없이 그냥 그대로 읽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 소설은 처음부터 따져가면서 읽었던 것 같다.

읽는 내내 '가쓰라기'가 경찰을 부르지는 않았을 것이라는걸 알겠고, 괜시리 '사쿠마' 혼자서 북치고 장구치고 있는거네.. 하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물론, 결과적으로 보면, 오히려 이 소설의 재미는 바로 그 부분이겠지만.

철저히 '가쓰라기'의 생각대로 '사쿠마'가 움직여줬으니 말이다. 물론, 말의 어폐가 있는 지도 모르겠지만....

오히려 내가 가장 재밌다고 생각한 것은 역시 이 소설의 원제이기도 한 '사쿠마의 게임 이름인 - 청춘의 가면-'이다.

오호... 결국 누구나 가면을 쓰고 있는 것이 아닐까?

가면을 쓰고 있는게 나쁜 것이 아니라, 그 가면을 제대로 쓰지 못하는게 무능한 것일까??

왠지 지금의 나로서는 후자에 손을 들 수 밖에 없다.

"사람은 자신의 얼굴에 책임져야 한다."

이 말을 믿고 있다. 믿는 만큼 참 어려운 일이라고도 역시 생각한다.

과연 지금 내 얼굴에 내가 책임질 수 있을까?? 아니, 책임지고 싶지 않은게 속맘이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니까.

이러니 저러니 해도 가장 맘에 안드는 부분은 마지막 사쿠마의 히든카드다..

으.. 그 부분은 글쎄 뭐라고 해야할까.. 단순한 실망이라기 보다는 그래.. 결국 그거겠지.. 하는 맘을 완전 그대로 반영해버렸으니..

오히려 정말이지 아무런 정보없이 이 이야기를 읽었다면 훨씬 더 잼나게 봤을 것 같다는 생각이 불끈 불끈 솟아난다.

역시 그만큼의 노력이 필요한건데.. 자꾸만 게을러지고 귀찮아지다보니. 그냥 서평이나 신간소개에 자꾸만 더 기웃거려지고 있는게 현재의 나이고 보니.. 앞으로도 이런 기분을 더 많이 갖게 될 지도 모르겠다..

그야말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싫다.. 싫다.. 하면서도,

그 싫은 짓을 반복 재생산해내고 있으니 말이다.

그것도 자기 스스로가..

현재 내 가장 큰 문제이자. 꼬리를 문 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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