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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판근 프로젝트 - A Rhapsody in Cold Age
이판근 프로젝트 (Pangeun Lee Project) 연주 / 열린음악 / 2010년 10월
평점 :
절판

노인의 얼굴은 상상과 더불어 많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 이야기는 물론 옛날이야기이기도 하거니와, 나의 현재와 미래의 모습도 바라볼 수 있게 하는 이상한 힘이 있다.
사진 속 주인공은 한국 재즈의 살아 있는 전설이라 불리는 이판근 선생이다. 연주자이자 이론가이며, 200여 곡을 작곡한 작곡가이자 3000명 이상을 가르친 교육자이기도 한 이판근 선생은 척박한 현실에서도 묵묵히 재즈를 사랑하고 지켜온 존경받아 마땅한 분이시다.
한국 재즈 1세대의 삶을 살아오면서 고생도 많으셨다고 한다. 60~70년대에 팝과 락의 물결에 휩쓸려 재즈는 더이상 설 자리를 잃었고, 때문에 그 당시 대다수의 재즈 음악인은 다른 장르로 돌아서거나 해외로 건너갔다고 한다. 하지만 그런 혼란 속에서도 이판근 선생은 자신의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작은 문방구에서 나오는 수입과 레슨비로 버티면서 말이다. 더구나 1976년부터 살아온 서울 은평구 진관동 기자촌의 자택은 철거되었다고 한다. 도로 건설 때문이어서 보상도 제대로 못 받았다고 한다.
이것은 세속적 가치, 즉 돈과 명예를 추구한 삶이 아니었다. 자신의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목소리에 충실한 삶이었다.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자신이 좋아하고 하고 싶은 것에 평생 동안 열정을 받쳐 헌신한 거룩한 삶이었다.
"재즈의 정신은 진선미입니다. 진실하고 선하고 아름다운 음악이지요. 그래서 상업성에 굴복해서도 안 되고 현실과 타협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이판근 선생의 말씀이다. 다소 미스코리아스러운 발언이지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선, 한국 재즈 1세대의 어른으로서 재즈를 정의한 것이 눈에 띈다. 재즈는 진선미의 음악이라는 것. 즉 재즈는 진실하고 선하고 아름다운 순수 음악인 것이다. 재즈인으로서 재즈를 대중 음악과는 차별된 순수 음악이라고 의식한 것이 주목된다. 이러한 의식에 따라서 장사의 논리에 굴복하지 않고 현실과 타협하지 않은 올곧은 삶을 살아온 것이다.

이 음반을 알게 된 것은 'EBS 스페이스 공감' 때문이었다.
평소 공연 관람에 목말라 하던 종자기는 관람 신청을 마구잡이로 해댄 결과 운 좋게도 이 공연 신청이 당첨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2010년 12월 13일 월요일 저녁 7시 30분에 드디어 공연을 볼 수 있는 행운을 누리게 되었던 것이다. 관람 전에는 이판근이가 누구인지, 이판근 프로젝트는 뭐하는 프로젝트인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이 공연을 관람한 후에 한국 재즈를 다시 바라보게 되었다.
철 없던 예전에는 한국 재즈를 저평가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곽윤찬이 블루노트에 입성하고 나윤선과 배장은 등 좋은 음악인이 계속해서 등장하게 되면서 슬슬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던 중 드디어 이판근 프로젝트의 공연을 보게 된 것이다. 이 공연을 보면서 '한국 재즈가 이렇게 발전했구나!' 라는 감탄이 절로 나왔다.
이판근 프로젝트의 멤버는 다음과 같다.
손성제(테너 색소폰), 김성준(알토 색소폰), 오정수(기타), 남경윤(피아노), 김인영(베이스), 이도헌(드럼).
이판근 선생이 작곡한 곡을 바탕으로 젊은 재즈 음악인이 모여서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음반이 바로 'A Rhapsody In Cold Age'이다. 평론가 김현준 씨가 프로듀서를 맡았다고. 그런데 이판근 선생의 오리지널 곡이 음반으로 발표된 적이 없어서 원곡과 재해석 곡을 비교해 볼 수 없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어쨌든 이 음반을 듣고 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음반은 훌륭한 연주를 깨끗한 녹음으로 담아냈다. 녹음이 매우 잘 됐다. 그리고 평소에 국악과 재즈의 결합에 관심을 가진 이판근 선생의 곡을 잘 표현했다고 볼 수 있다. 잘 모르는 사람도 음악을 듣다 보면 어디선가 많이 듣던 가락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국악 음계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흑인 음악인 블루스가 재즈로 발전했듯, 판소리 같은 한국 음악에서도 새로운 재즈가 탄생할 수 있습니다." 이 얘기에서 이판근 선생이 지향하는 바를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아쉬운 점을 지적하라고 하면, 가격과 러닝 타임을 들겠다.
이 음반은 14,900원 정도에 판매된다. 소비자의 입장에서 보면, 국내에서 제작하고 발매한 음반 치고는 비싸다고 생각한다.
이 음반의 러닝 타임은 45분 7초이다. 시디 한 장에 80분 가량의 음악을 담을 수 있다. 그런데 LP 시절도 아닌 요즘 같은 시대에 시디로 음반을 발매하면서 최소 50분을 넘기지 못한다는 것은 성의 없음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다. 물론 러닝 타임이 길다고 좋은 음반은 아니다. 하지만 누구나 시디 한 장에 좋은 음악이 꽉꽉 담겨 있길 바랄 것이다. 개인적으로 60분 이상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러닝 타임도 짧은데 가격도 비싸다. 그럼에도 이 음반을 구매한 것이 후회스럽지 않다. 오히려 절판되기 전에 구입한 것이 다행스럽다. 그것은 이 음반에서 어떤 굉장한 힘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힘은 단순한 모방의 단계를 지나서 이제는 한국 재즈의 독창적인 정체성을 얘기하고 있다. "아! 우리도 이제는 오리지널 곡으로 채워진 훌륭한 재즈를 들을 수 있구나!" 라는 생각을 넘어서는 힘이다. 일청을 권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