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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입] Symphony For Improvisers [RVG Edition]
돈 체리 (Don Cherry) 연주 / Blue Note / 2005년 1월
평점 :
품절

방을 가득 채우고도 모자랄 정도로 옷이 많은 사람이 가끔씩 이런 말을 한다고 한다.
"입을 옷이 없네."
충분히 이해가 가는 말이다. 종자기네 집도 명반으로 가득하지만, 가끔씩은 들을 음반이 없는 것이다. 특히나 스타일이 비슷비슷한 음반을 좋아라 하며 듣다 보면 어느 순간 정말로 들을 만한 음반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비슷비슷한 스타일의 옷을 줄기차게 입다 보면 싫증이 나는 것처럼, 매일같이 그 나물에 그 반찬만 먹다 보면 입맛이 질리는 것처럼, 그런 것이다. 이럴 때는 장르에 변화를 줘 보기도 하는데, 그것도 한두 번이지. 그래서 지금까지 듣던 음악과는 근본적으로 그 궤를 달리 하는 진보적인 음반에 시선이 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프리재즈가 좋아진 것이다.
철 모르던 시절에는 "저런 음악이 도대체 뭐가 좋다고 듣는 거지?" 라며 콧방귀 뀌던 프리재즈가 아니던가. 그 시절에는 "프리재즈가 역시 좋구나!" 라며 얼씨구를 읊어대는 이를 보면, 자기도 속으로는 별로면서 지적 허영을 과시하려는 목적의 소행을 일삼는 자로 여겨서 용의선상에 올려 놓곤 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안다. 그러니 그들에게 이렇게 말할 수밖에.
"당신들의 무죄가 입증되었소. 그러니 집에 가서 프리재즈 들어도 좋아."
붓에 물감을 묻혀서 화폭에 뿌리거나 물감 묻은 붓을 던져서 그림을 그린다면 얼마나 그림 그리기 쉬울까. 이런 방식이라면 대충 해도 그림이 뚝딱 완성될 것만 같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이런 방식으로 명작을 완성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추상 표현주의 미술가 잭슨 폴락Paul Jackson Pollock은 '액션 페인팅' 기법을 발견했다. 즉, 바닥에 펼쳐진 캔버스 위에 물감을 뿌리고 흘리고 끼얹는 방식으로 그림을 그린 것이다. 잭슨 폴락은 이러한 기법으로 묘사된 결과물 뿐만 아니라, 작품을 제작하는 행위와 그 과정에서도 예술적 가치를 찾으려고 했다. 그의 그림은 만들어진 후의 결과물 뿐 아니라 만들어지는 과정 속에서 우연성이 함께 녹아들어가 있는 작품이기 때문에 그리는 과정이 매우 중요한 것이다. 말하자면, 그에게는 그림 그리는 과정 자체도 예술이었던 것이다.

추상 미술을 닮은 프리재즈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최소한의 약속을 바탕으로 즉흥연주를 극대화한 프리재즈도 명연을 이루기란 쉽지 않다. 내 맘 대로 아무렇게나 연주하는 것이 즉흥연주가 아니다. 순간 순간의 감성을 즉흥적으로 제대로 풀어내야 하기 때문에 어려운 것이다. 또한 연주하는 과정 자체가 작곡하는 과정인 것이다. 말하자면, 연주하는 동시에 작곡하는 것이다. 때문에 프리재즈에서도 연주하는 과정 그 자체에 예술적 가치가 숨어 있는 것이다. 어찌 보면, 잭슨 폴락의 그림이 오넷 콜맨의 앨범 『Free Jazz』 표지에 실린 것은 우연이 아닌 것이다.
프리재즈는 기존의 재즈보다 즉흥성이 더욱 강조되었기에 우연성의 개입이 더욱 확대되었다. 따라서 열린 구조를 가진 보다 자유로운 표현의 재즈가 가능하게 되었다. 반면, 우연성의 증가로 인해 예측 불가한 결과의 완성도는 장담할 수 없게 된다. 더욱이 연주자의 인원이 많아질수록 그 정도는 더해진다. 이러한 이유로 프리재즈에서는 상대적으로 명반이 그리 많지 않다.
연주자 상호 간에 기본적인 약속만을 정한 상태에서 즉흥연주를 펼친다. 상대의 반응에 즉흥적으로 반응하면서 훌륭한 앙상블을 이루고 멋진 연주를 완성한다. 도대체 이게 쉬운 일인가?
탄탄한 기본기는 말할 것도 없고, 순간의 기지와 순발력, 음에 대한 고도의 집중력이 없고서는 불가능할 것이다. 연주자는 즉흥연주로 인해 우연성이 증가한 상태에서 앞으로 어떤 상황이 전개될지 모르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찰나의 영감은 하나의 축복인 것이다. 떠오른 영감은 직관력을 발휘하게 해서 우연성의 안개를 헤쳐 나갈 수 있게 하는 나침반 구실을 한다. 이러한 축복이 명연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하지만 축복은 아무 때나, 심지어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돈 체리의 『Symphony For Improvisers』.
이 음반은 분명, 축복 받은 음반이다. 자유로운 연주 속에 열정이 가득하다. 들끓는 에너지의 열기가 느껴진다. 선택 받은 즉흥연주자들이 약속된 곳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약속된 그곳에서 축복의 음악이 젖과 꿀처럼 흐른다.
이 음반은 또한, 기적을 일으켰다. 게으름에 귀찮음증이 더해진 오늘 같은 휴일에, 종자기를 이불 속에서 일으켜서 책상 앞에 앉게 만든 것이다. 이는 앉은뱅이가 벌떡 일어선 기적과 같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오늘처럼 비오는 날 빗소리와 함께 듣는 이 음악은 분명 기적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