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의 위스키 성지여행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이윤정 옮김, 무라카미 요오코 사진 / 문학사상사 / 2001년 5월
구판절판


만약 우리의 언어가 위스키라고 한다면, 이처럼 고생할 일은 없었을 것이다.
나는 잠자코 술잔을 내밀고 당신은 그걸 받아서 조용히 목 안으로 흘려 넘기기만 하면 된다. 너무도 심플하고, 너무도 친밀하고, 너무도 정확하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우리의 언어는 그저 언어일 뿐이고, 우리는 언어 이상도 언어 이하도 아닌 세상에 살고 있다. 우리는 세상의 온갖 일들을 술에 취하지 않은 맨 정신의 다른 무언가로 바꾸어놓고 이야기하고, 그 한정된 틀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예외적으로, 아주 드물게 주어지는 행복한 순간에 우리의 언어는 진짜로 위스키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우리는 -적어도 나는- 늘 그러한 순간을 꿈꾸며 살아간다. 만약 우리의 언어가 위스키라면, 하고. (머릿말 중에서)
-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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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주의한 사랑
배수아 지음 / 문학동네 / 1996년 12월
구판절판


남자아이가 찾아올까.
남자아이는 언젠가 한 번 나를 집까지 태워다준 일이 있었다. 오래 전 일이다.
집으로 들어오는 길은 어둡고 불빛 하나 없다.

아아, 나는 맥주를 하나 더 꺼내고 오이 피클을 씹었다.
나는 그 무엇인가가 미치게 그리운데, 그것이 무엇인가 알 수 없었다.
나는 현관문에 기대어 울었다.
남자아이는 찾아온 것이 아니라 전화를 했다.
나는 깊은 잠에 들었다가 깨어나서 전화를 받았다.
나는 아아, 너야, 하고 말했을 뿐이다.
-112쪽


나에 대해서 알게 되는 것은,
생의 어느 한 순간일 뿐이고
그것은 정말로 불현듯 찾아온다.

(2002년 3월)-1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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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그림자 1 잊힌 책들의 묘지 4부작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 지음, 정동섭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3월
구판절판


클라라를 증오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진정한 증오는 세월을 통해 배워지는 일종의 재능이니까.

다시는 그녀를 보지 않겠다고, 그녀의 이름을 두 번 다시 언급하거나 그녀 곁에서 잃어버린 시간을 추억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어찌 된 일인지, 평화로움이 느껴졌다.
집을 뛰쳐나오게 했던 분노가 이미 연기처럼 자취를 감춰버리고 사라졌다.
그러나 다음 날 새로운 분노로 다시 그곳에 돌아올 것이 두려웠다. 그날 밤 있었던 일의 파편들이 스스로의 무게에 의해 추락할 때, 질투와 부끄러움이 서서히 나를 소진시키는 것이 두려웠다.
-102쪽


그래, 난 누리아가, 비록 말은 않지만,
아직도 그자를 기억한다고 생각한다.
사실 그래서 난 결코 카락스를 용서하지 않을 작정이다.
너는 아직 젊어 모르겠지만, 난 이런 것들이 얼마나 아픈 일인지를 안단다.
... 카락스는 마음을 도둑질한 놈인데,
그놈은 내 딸의 마음을 무덤이나 지옥까지 가져가버린 거란다.

-119쪽

그는 그녀의 허리에 팔을 둘렀고, 그녀는 장난치며 그에게 뭔가를 소곤대는 듯했다.
따뜻하게 느껴지는 그 모습은 나로 하여금 미소 짓게 했다.
나는 그 한 쌍의 남녀에게 집중했다.
그들의 옷으로 보아 나는 그 사진이 적어도 25년이나 30년쯤 된 것임을 추측할 수 있었다.

그것은 나이를 얼마 먹지 않은 젊은이들의 시선에만 깃드는, 서로에 대한 약속으로 충만한 빛과 희망이 모습이었다.
-164쪽

"여자의 마음은 속임수를 쓰는 남자의 버릇없는 정신에 도전하는 섬세한 미로지.
만일 네가 진정으로 한 여자를 소유하고 싶다면, 그 여자처럼 생각해야 돼.
그리고 그녀의 영혼을 얻는 게 우선이지.
나머지 것들, 즉 사람으로 하여금 감각과 미덕을 잃게 하는 달콤하고 부드러운 포장은 보너스로 오는 거야."

-214쪽

"모르겠어."
그녀가 결국 중얼거렸다. "모르겠어."

"언젠가 누가 그랬어.
누군가를 사랑하는지 생각해보기 위해 가던 길을 멈춰선다면, 그땐 이미 그 사람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 거라고."
-282쪽

"이봐, 다니엘.
여자들이란, 이웃에 사는 메르세디타스처럼 대단한 예외도 있지만,
대부분은 우리보다 똑똑하단다.
아니면 적어도 자신들이 원하거나 원하지 않는 것에 대해선 자기 자신에게 솔직하지. 너나 세상 사람들에게 말하고 않고는 또 다른 문제야.
넌 지금 본성의 수수께끼에 직면해 있는 거란다.

여자란 바벨탑이자 미로지.
그녀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게 되면, 넌 지게 돼.
이 말을 기억하라구.
뜨거운 가슴과 차가운 정신, 사랑을 갈구하는 자의 코드지."
-306쪽

"수년 동안 너보다 나이 많은 여자를 사랑했었는데
그 때문에 가슴이 찢어질 정도로 아파했다는 말도 했어."

"그 모든 일에서 찢어진 거라곤 내 입술하고 자존심뿐이야."

-3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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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5-04-23 2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밌게 읽었는데..여기서 다시 보니 반갑네요..;;
즐거운 책읽기 하시기를 바랍니다^^

ryder 2005-04-24 15: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저도 완전히 몰두해서 읽어버렸지요.
멋진 책이었어요 :)
 
바람의 그림자 1 잊힌 책들의 묘지 4부작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 지음, 정동섭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3월
구판절판


"그때까지 내게 독서란 일종의 의무 사항이나 무엇을 위해서 내는지도 잘 모른 채 선생님이나 개인교사들에게 지불해야 하는 벌금이었지. 난 독서의 즐거움, 자기 영혼을 향해 열리는 문을 탐험하는 즐거움, 허구와 언어의 신비함에 자신을 내맡기는 즐거움, 아름다움과 상상력에 자신을 내맡기는 즐거움을 모르고 있었어. 내겐 이 모든 것이 그 소설과 함께 태어났지.

다니엘, 여자애와 키스해본 적 있니?"
내 소뇌가 흔들렸고 침이 톱밥처럼 변했다.

"그래, 넌 아직 어리니까. 하지만 바로 그 감동이야.
잊혀지지 않는 최초의 그 불꽃 말야.
이건 그림자의 세계야. 사람들은 그 마술을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니까."
-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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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 에어 납치사건
재스퍼 포드 지음, 송경아 옮김 / 북하우스 / 2003년 7월
평점 :
절판


 인류의 영원한 로망(?), 타임머신.

 영화 <백투더퓨처>에서는 과거로 돌아간 마이클 J. 폭스가, 자신의 부모가 예정대로(?) 사랑하도록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내용이 나온다. 아이러닉하게도 그는 그 사랑의 방해자인 동시에, 조력자이기도 하다.  


이 ‘비틀린 시간’의 묘한 뫼비우스 띠(?)는 이 소설에서도 무척 재미있는 역할을 해낸다.

 다소 지루한 감도 없잖은 초반부, 연방의 지명수배자 아케론 하데스를 놓치고 동료까지 잃어 망연자실한 여주인공 서즈데이 넥스트, 그 앞에 등장해 그녀를 새로운 운명으로 이끌고 가는 것은 다름아닌 미래에서 온 서즈데이 넥스트이다.

“서즈데이! 스윈든의 리테라텍 일을 맡아!”

 어딘가 낯익은 얼굴의 그녀가 미래의 자신이란 것을 깨달은 서즈데이는 망설임없이 자신의 고향이자 촌구석(?)인 스윈든으로 향하고, 이제부터 사건은 본격적으로, 흥미진진하게 전개된다.


 이 소설은 단적으로 말하자면, ‘어긋난 경계’에 대한 이야기이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또한 소설 속 주인공들(제인, 로체스터 등)과 실제 인물들(서즈데이 넥스트) 사이의 경계,

 즉, 허구와 현실 사이의 경계가 허물어지면서 일어나는 재미있는 사건들을 다루고 있다.

 어린 시절, 서즈데이는 <제인 에어>속으로 들어가 제인과 로체스터의 만남을 극적으로 만들었고,

 로체스터는 부상을 입은 서즈데이를 치료해주고 사라진다.

 이처럼 허구와 현실 세계의 경계가 미묘하게 비틀리면서 사건은 재미있어진다. 

 악당 아케론 하데스가 이용하려는 것이 바로 이 어긋난 경계의 틈새이다. 

그는 온 국민이 사랑하는 <제인 에어>의 제인을 납치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모든 것은 그의 계획대로 되어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소설은 마지막까지 이 틈새를 이용한 유머를 잃지 않는다.

 서즈데이가 사랑하는 남자를 잃을 위기의 순간, 그 남자의 결혼식을 방해하러 오는 것은 소설 <제인 에어>속에서 로체스터의 중혼을 폭로했던 변호사이다. "제인과 로체스터가 나를 보냈죠"

 또한 시간의 틀에서 이탈한 서즈데이의 아버지를 잡으러온 시간경비대의 ‘낯익은’  청년은 자조적인 한 마디를 내뱉는다. “혹시나 시간경비대가 되려고 하는 아들이 생기면 꼭 말리세요.” (하하-)

 마지막까지 이어지는 작가의 재치에 씽긋 웃고야마는 경쾌한 결말.

 무척 재미있게 읽었던 <개는 말할 것도 없고>와의 유사성 때문에 읽게 되었는데, 그에는 조오금 못 미치지만 나름대로 소소한 유머가 넘치는, 즐거운 소설이다.

 기발한 상상력에서 비롯되는 SF적 재미에다가, 익히 알고 있는 <제인 에어>의 스토리를 잘 녹여냄으로써 평소 영미문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더욱 흥미롭게 읽을 수 있을 매력을 지녔다. 브론테뿐만 아니라 셰익스피어 희곡의 작가 문제 등 문학사에 있어서의 이슈를 엿보는 것도 색다른 재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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