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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SE (dts 2disc) - 아웃케이스 없음
송해성 감독, 이나영 외 출연 / 에이치비엔터테인먼트 / 2006년 12월
평점 :
품절
본 지는 좀 됐는데, 차일피일 미루다 오늘 간략 느낌을 적게 됐다.
발단은 다름 아닌 한 기사 때문이다.
영화를 보면서, 보고 나오면 쭉 느낀 것은, 그놈의 기자들, 평자들의 하기 좋은 이야기들 - 의식적으로 눈물선에서 더 밀고 가지 않는 감독의 자의식, 혹은 이래도 안 울래 하는 영화, 혹은 조금 더 사형 제도에 집중했으면 좋았을 걸, 혹은 스치듯 나온 교도관들의 이야기가 더 나왔으면... 등등 - 은 x에게나 주라였다.
그런데 한 기사를 보면서, 정확하게 마음에 걸리는 대목을 발견하고 말았다.(어느 문화에세이스트라는 양반이 썼다)
"작가는 소설의 곳곳에서 사형제도의 존폐를 둘러싼 사회적 이슈를 부각시키려 애썼던 반면 영화에서는 등장인물간의 애틋한 감정, 숨겨진 이야기가 압축적으로 강조되었다"라는 대목.
혹은 "감독의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이 점은 영화의 주제가 사형제 존속을 둘러싼 진지한 사회적 프로파간다가 아닌 최루물이라는 지적을 가능하게 한다. 터무니없이 잘 생긴 배우가 터무니없이 비극적인 최후를 맞는다."라는 대목.
일단, (원작을 보지 않은) 나는 영화를 보면서, 결코 이 영화가 최루물로만 다가오지 않았다. 물론, 슬몃 눈물을 흘리긴 했지만, 같이 본 처는 많이 울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그 몫(혹은 잘못)이 터무니없이 잘생긴 배우의 죽음에만 있지 않았다. 어린애도 아니고, '잘생긴' 배우 때문에 감정이입이 되고, 더 슬프고 하는 사람이 어딨단 말인가.
그러면서 필자는 묻는다. "여기서 역설적인 혼란이 발생한다.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는 것은 억울한 사형수가 불쌍해서인가 아니면 잘생긴 사형수가 불쌍해서인가?"
참, 할 말이 없는 대목이다.
그런데 사실 대부분 평자, 기자의 글도 비슷한 지점에서 이 영화에 태클을 걸었다. 그리고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무지막지한 최루물이라는 생각도, 너무 의식적으로 눈물선을 멈췄다는 생각도, 혹은 좀 더 다양한 인물에 포커스를 맞췄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저 그만큼 딱 좋고, 딱 슬펐고, 딱 고민이 됐다.
분명 원작과 영화는 다를 것이다.
매체가 다르니 당연히 다를 수밖에.
근본적으로 서사의 장르일 수 있지만, 분명 소설은 영화에 비해 더 설명적일 수 있고(작가의 의도와 방식에 따라), 더 세밀할 수 있다. 물론 영화도 설명적이고 프로파간다일 수도 있다. 그러나 (대중)영화는 러닝타임이라는 한계, 그리고 영상이라는 다른 매개물을 지니고 있다. 똑같이 사형제도에 대해 얘기를 하더라도, 어떤 영화는 좀 더 주인공에 포커스를 맞출 수도 있고, 혹은 다중의 인물을 내세워 수다를 떨 수도 있다. 혹은 (글에 나온) <데드 맨 워킹>처럼 작정하고 사형에 포커스를 들이댈 수도 있다.
영화 속 두 주인공의 과거가 극단적일 수도 있지만, 아무도 가지고 있지 않은 과거는 아니다. 특히 여성들이라면 끔찍하게 느꼈을 이나영 캐릭터의 과거는 더 그러하며, 강동원의 과거 역시, 자본과 계급이 세습되는 사회에서 완전 예외는 아니다. 그러한 경향성을 반영한 부분이라고도 보여진다.
이 영화는 두 주인공을 축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는, 감정선을 자극함으로써 이야기에 리듬을 얹는, 그리고 당연하게도 플래시백을 통해서 두 사람의 벽을 허무는... 그 부분에 집중해서 이야기를 풀어 가고 싶은 감독이, 그렇게 만든 영화다.
다시 문제의 글로 돌아가면, 필자는 말미에 옥의 티를 하나 잡아내면서 득의만면해 하고, 이나영 캐릭터가 쓴 폴라로이드에 대한 짤막한 설명까지 덧붙인다. 참 또 할 말이 없다.
예를 들어 미국에 대해서 알고자 할 때 접할 수 있는 건 여러 가지가 있다. 김동춘 교수가 쓴 <미국의 엔진, 전쟁과 시장> 같은 진지한 연구서를 볼 수도 있고, 박노자 선생의 조금은 다른 접근 방식과 글쓰기로 된 <하얀 가면의 제국>을 보면서 다양한 부분에서 접근할 수도 있고, 그저 마이클 무어의 <볼링 포 콜럼바인>이나 <화씨 911>을 볼 수도 있다. 아니면 김태권의 <십자군 이야기>는 어떠한가, 개인적으로 이 만화는 미국에 대한 이야기로 읽혀졌다. 각각은 다 다른 방식이고, 다 다른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그저 미국을 제대로 알고 대응하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 그런데 김동춘 선생이나 박노자 선생에게 '조금 더 대중을 배려하는 글쓰기를 했으면'이라는 평을 하거나, 마이클 무어나 김태권에게 '조금은 더 진지한 접근을 했으면, 더 깊이 파고들었으면'이라는 평을 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만큼 얻고, 그만큼 고민하면, 그 다음은 또 수용자의 몫인 것이다.
물론, 각각의 분야에서, 각각의 매체에서 요구되는 밀도는 분명히 있고, 거기서 더 좋다, 더 안 좋다를 이야기할 수는 있다. 그러한 평가가 없다면 당연히 발전은 없다. 하지만 너무 욕심을 내지는 말자는 것이다.
차라리 문제삼으려면, 위의 글처럼, 더 깊이 들어가도 시원찮을 판에, 뜬금없이 이상한 두 개의 사족으로 글을 마무리하는 성의없는 태도에 X을 날리는 게 더 맞지 않을까?
영화는 영화일 뿐! 예전 이명세의 <형사>가 나왔을 때처럼, 평자들과 기자들은 참 이상한 직업병에 빠져 영화를 평하곤 한다. <괴물>, 혹은 <범죄의 재구성>처럼 웰메이드 영화라고 해도, 모든 걸 가지고 있는 건 아니다. 어떤 영화든, 어떤 문학 작품이든, 각각의 작품에서 추구하고자 하는 바는 한정돼 있다. 모든 걸 다 가지고자 한다면 그냥 아주 맛없는 비빔밥이 될 뿐인 것이다. 간혹 이 모든 걸 뛰어넘는 작품이 나오기도 하지만, 그 역시 수용자에 따라 엇갈리기도 하는 법.
남과 다르게 쓰고 싶어서, 그냥 좋다고만 하기 멋쩍어서 자꾸 사족을 다는 듯한 '평', 이제 그만 보고 싶다. 뭔가 다르게 쓰고 싶거나, 정말 걸리는 게 있다면, 그야말로 정성일처럼, 꼼꼼하게 보고, 꼼꼼하게 고민하고, 확 뒤집어서 다른 방향에서 보고, 그러고 원고지 10매 내외의 짧은 글이 아닌 좀 더 넓은 지면에서, 혹은 같은 10매라 할지라도, 평범한 글쓰기의 방식이 아닌 의도에 맞는 글쓰기로 재무장하여, 다시 도전해 보기 바란다.
모두가 다른 듯 하나같이 똑같은 이야기를 하는 그런 평을 보기 위해 아까운 지면이 있는 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