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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자치, 학생주권시대를 열다
김요섭 외 지음 / 테크빌교육 / 2020년 5월
평점 :
학생자치를 논하려면 우선 해야 할 것은, 교원들의 노동자로서 단체행동권이 인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도 '공무원의 정치적인 중립'이 교육계에서 얼마나 부당하게 적용되는가를 지적하고 있어 동의하는 바이다. 일반 시민의 권리도 보장 받지 못하며 행동하지 못하는 것은 교원 자신이 아니었던가. 이렇게 손발이 꽁꽁 묶인 채 어떻게 자치 교육을 하라는 것인가. 학생 자치에 대해 강력히 주장하며, 교원의 단체행동권을 이슈로 함께 끌어올리지 않는 소위 전문가들의 위선적인 태도에 쓴물이 올라올 정도이다.
학생들에게 자치를 가르쳐야 하는 교원들은 사실 시민의 반례가 될 수밖에 없다. '교원은 기득권자이다, 약자는 선하다'는 프레임으로 교육 현장에서 교원이 되어 얻었던 최소한의 권리들이 마치 특권인냥 공격당하거나, 교원의 권리는 학교에 들어오는 교직원이라면 당연하게 동등하게 적용되어야 하는 양 손쉬운 목표물이 되고 있지만, 막상 교원들은 부당 요구에 대항할 스피커도 없는 불완전한 시민이다.
그래서 교육계의 다른 노조의 저항을 조정하기 골치아파 하는 당국이 무조건적으로 정책의 처리와 책임은 교원에게 밀어붙이는데, 민감한 복지 정책이나 민심 달래기용 정치적 생색내기를 사전 논의도 없이 손쉽게 학교에 끌어들여 정책의 잡화점을 만드는 자신감의 근거는, 어차피 교원의 입에 재갈을 물렸기에 부당함을 호소할 수 없고, 시키는 일은 아이들을 볼모삼아 도덕성 운운하며 끝끝내 할 수 밖에 없는 집단이기 때문일 것이다. 예를 들어, 현재 감염병 현장에서도 긴급 돌봄은 변함없이 하겠다는 보여주기 쇼는 카메라 앞에서 먼저 질러 놓고, 뒤로는 학교에 예산도 주지 않은 채 일단 교사들이 제 살을 깎아 모든 사무와 책임을 떠맡으라니 황망하기 그지없다. 결국 학교의 일반 예산까지 손대며 극소수의 긴급돌봄이 운영된다. 정작 학부모들은 자신의 자녀들에게 공평하게 돌아가야 할 학교 예산이 정부의 주먹구구식 전시행정에 오용되는 것도 간파하지 못하고, 교사들은 왜 이 시국에 놀면서 돈받냐는 저급한 선입견에 휘둘리며 칼춤을 춘다. 대중은 예산의 향방이나 학생 관리의 책임 등 복잡한 내용을 생각하는 것보다 한 집단을 매도해 곤죽을 만드는 것에 입질이 좋고 짜릿해 할 것이란 예측 하에 설계된 여론전에, 결국 교육 3주체가 희생양이 되고 있다.
그리고 이 시국에 지난 16년간 격렬한 반대를 겪고 저지된 사안인, 지자체의 돌봄, 방과후 책임을 다시 학교로 밀어 넣기 위해, 이를 초중등교육법에 끼어넣으려는 꼼수 입법 예고를 하는 것이, '지금은 전시를 방불케 하는 위기상황이나 전세계를 선도하는 k-방역, k-에듀를 위해 학교에 모든 지원을 하겠다'고 선전하는 교육 당국이 실제로 하고 있는 일이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정치적 행동을 할 수 없는 교원은 모든 과를 끌어 안은 채, 이를 저지할 힘은 커녕 최소한의 부당함을 호소할 힘도 없는 입장이다. 학교 안에서 같은 일을 지시해도 직원은 건드릴 수 없지만, 교원은 노동자로서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없으니, 당위성만 주장하며 거부 의사는 곧 도덕성 결여로 공격하며 교원을 정치의 방패막이로 입맛 당기는대로 사용하고 있다. 단체행동권이 없는 시민은 이렇게 무력한 것을 학생들에게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으니, 참으로 참교육이로다.
그런데 이 책의 근간은 학생과 교사를 강력한 대치 구조로 세워, 배타적인 관계로 세우는 데서 큰 오류를 범했다. 학생자치를 쟁취하려면 교사를 '보수적'이라고 폄훼하여 교사가 잘못 됐으니 학생 자치는 중요하다는, 단순하고 손쉬운 흑백논리를 장착하고 있다. 이렇듯 어설프게 교육 현장을 훑고 피아식별이 안 된채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려는 내부 인사가 교육 정책을 망쳐왔다. 학생자치는, 무엇이든 학생들이 자유롭게 주장할 권리가 보장된다는 점도 중요하지만, 그들에게 시민으로 책임을 일깨우는 더 큰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미 '학생조례인권'이라고 쓰고 '학생만능민원', '교원능력개발평가'라고 쓰고 '정부욕받이악플대회'로 읽는 괴물들을 무수히 낳았다.
책 날개에 구구절절 읊은 저자들의 교육 경력은 무엇을 위한 것인지 묻고 싶다. 분명히 좋은 의도로 신설된 제도들이 그 의도가 왜곡되지 않도록 제도적 밑받침과 사전 교육이 이뤄지지 않아서
교원들이 무차별적으로 인신공격을 받고 정당한 교권 활동에 침해를 받고 있음이 상당하다는 것을 알고 있을 텐데, 용어만 들어본 호사가들이 가십거리를 생산하는 듯한 서술로 '학생자치'를 논하고 있다. 그렇게 좋아하는 핀란드, 독일, 프랑스, 영국, 호주, 캐나다에서 한국의 학부모와 학생들의 악질적인 행태에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지, 아니, 담임교사와 무제한적으로 접촉할 수 있는 기회 자체가 원천 봉쇄되어 있어 상담이라는 미명으로 밑도 끝도 없는 이기적인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교사들이 골병에 빠뜨리는 일 따위는 있을 수가 없음은 왜 쓰지 않는지 궁금하다.
학생자치에 관해 교원단체가 가정 보수적이라는 주장은 어디서 기인했는지도 확인해야 한다. 19년 정책연구에서 했다는, 교원의 생각을 설문했다는 것이 대체 누구를 대상으로 몇 명 중 몇 명이 참가하였는지, 대표성이 입증된 자료인지 알 수 없다. 학생들의 선거권 확대로 교육의 최전선에 서서 자치 교육을 실현시켜야 하는 것은 교사인데, 책의 근간을 세우는 첫장부터 유의미하지 않은 일부 교원단체의 주장을 과반수가 반대하고 있다는 식으로 곡해를 해서 자치 교육을 강조하는 저의가 무엇인지 묻고 싶다.
내부 사정을 잘 아는 교육계의 사람들이, 일단 교사부터 때리고 시작하면 새로운 교육 도입의 정당성이 확보된다 안일하고 자극적인 서사를 사용하는 것은, 교원들이 철밥통이라며, 무조건 이 나라의 교육은 우매한 교원 때문에 되는 것이 없다는 식의 일부 몰지각하고 편협한 무리들의 무차별적 난사보다 더 질이 나쁘다.
이 책에서 제안한 기계적인 임원 선출, 행사 위주의 학생 자치에서 벗어나자는 메시지에 당연히 공감하지만, 실제로 많은 부분 실천하고 있고 이미 정착되어 있다. 학급부터 전교까지 유기적으로 이어지는 학생 대표단이 스스로 꾸리는 친구사랑의 날, 버스킹 등의 자치 활동 운영, 학년군 대토론 대회 및 학생 생활 규정 제정, 프로젝트 학습을 통한 학생 주도의 교육 활동 등이 만족스럽게 운영되고 있다. 정말로 학생자치를 새롭게 이룩하겠다는 마음이 있는 저자들이라면, 학교 환경을 바꿔온 그간 노력을 찾아보고 소개하려는 마음은 왜 도통 없는 것인가. 도대체 이 책의 예상 독자를 누구로 설정한 것인가.
이 책이 2020년 5월에 출판됐는데, 3년 전 민주시민교육과에서 발송된 공문이나 교육정책 보고서같았다. 앞으로 이런 류의 책을 내려면 적어도, 책을 쓰는 저자부터 학교 현장을 존중하고 함께 실천하겠다는 진정성을 가지고 출발했으면 좋겠다.
[본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도서 협찬을 받고
본인의 주관적 견해를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