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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키7 미키7
에드워드 애슈턴 지음, 배지혜 옮김 / 황금가지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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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미키7은 오랜만에 읽는 SF소설이었다. 봉준호 감독이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하여 미키17이라는 제목의 장편 영화를 제작 중이라는 소식을 듣고서 알게 된 책이었지만 그 이외에는 별다른 정보를 모르는 채 읽었고, 결과적으로는 좋았다.



미키7의 저자인 에드워드 애슈턴은 미국 작가인데 한국에 따로 알려진 특별한 장편 소설은 없는 것 같다. 검색해보아도 미키7이 워낙 유명해진 건지 이 책 밖에 나오질 않았고, 단편은 주로 발표한 것 같다.




미키7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지금껏 죽어 본 중에 가장 멍청한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 같다.


책을 끝까지 보고 난 입장에서 이 문장을 다시 보니 이후의 전개를 함축해놓았다는 생각이 든다.





! 주의 !

이 아래로는 책의 내용을 인용하면서

감상을 정리했기에 스포일러에 주의가 필요하다.





치명적인 방사능에 노출되어야 하는 임무를 비롯한 여러 작업은 기계보다 인간의 몸이 훨씬 더 오랫동안 견딜 수 있었고, 기계로는 할 수 없는 의학 실험과 관련된 임무도 있었다. 게다가 상륙거점에서는 익스펜더블이 기계보다 교체하기 훨씬 쉬웠다.


반면 나를 하나 더 만드는 데 필요한 원료는 농산물 생산 라인이 돌아가기만 하면 얼마든지 얻을 수 있었다.



미키7의 가장 주요한 키워드를 말하라면 '익스펜더블'일 것이다. 익스펜더블은 이 소설에서 '위험한 임무를 할 때 소모품처럼 쓰이는 복제 인간' 같은 의미로 쓰인다.


이 키워드를 통해 인간이 소모품으로 다뤄지기 시작할 때, 얼마나 그 가치를 추락시킬 수 있는가를 생각할 수 있었다. 우리는 인간이라는 이유로 인간을 인간답게 여기려는 원칙을 도덕이나 윤리로서 고수하지만, 인간을 소모품으로서 다루기 시작한다면 얼마나 소모적으로 이를 대할 수 있는가.


기계보다 교체하기 쉬운 게 인간이라는 사실은 참 아이러니하고 우스운 일이다. 인간을 복제하는 게 기계를 다시 만드는 것보다 쉽다는 건 생명 경시적인데도 소모품으로 여겨지는 익스펜더블을, 인간은 다시 자신들과 구분하는 방식으로서 인간에서 분리한다. 인간은 항상 누군가를 분리하고 구분하는 식으로 자신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한다. 이기적이다. 그런 인간이 생명을 얘기하려는 게 때론 가식적으로 느껴질 때가 있다.



당연히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이나 광산, 군대에 가는 사람 도 없었다. 내게 주어지는 생활비는 먹고 살기에 충분했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그런 삶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답을 찾을 수 없었다. 어느 날 아침, 문득 내가 발코니 밖으로 몸을 던진들 아무것도 달라지는 게 없을 텐데.



노동이 없는 삶을 살게 되면 인간은 정말로 무료함을 느끼며, 기본적 삶에 대한 의미를 고민할까? 죽음과 삶에 아무 차이가 없다고 생각할까?



하지만 지금 상황과 이제까지의 죽음에서 가장 중요한 차이는 불확실성이 아니다. 이전까지는 내 기술자들이 떠들던 불멸을 적어도 반은 믿었다는 것이 가장 큰 차이였다. 미키3가 죽고 나면 몇 시간 후 미키4가 재생 탱크에서 나올 것이고, 눈을 감았다 뜬 것처럼 두 버전 모두 나라고 생각했다.



기술의 입장에서 육체가 동일하다면 동일성은 있다고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전의 기억과 지금의 ‘나’라고 여겨지는 것이 선명히 구분된다면 거기서부터 이미 단절은 발생한 것 같다. 연속이라 볼 수 없다.



나샤는 고개를 저었다. "나한테는 좀 힘들어. 그리고 네가 죽을 때마다 매번 더 힘들어져. 지난밤에는 정말 괴로웠어. (중략) 하지만 지금 네가 여기에 있고, 네 이야기처럼 내가 만약 어젯밤에 너를 구했다면 지금의 너는 여기 없을 거야······. 그래서 나는 지금 어떤 감정을 느껴야 하는지 모르겠어."



소중한 이의 죽음을 겪는 슬픔 또한 반복되면 무뎌질까? 아니면 미키 또는 나샤처럼 그 순간마다 별개처럼 느끼며 매번 감정을 새로이 갱신할까. 그리 생각하면 감정이란 정말 무뎌지는 것일까? 늘 같은 양의 감정을 느낀다면 우리는 왜 그걸 무뎌진단 표현을 할까? SNS에서 봤던 글처럼 과거의 크기가 그대로여도 우리가 성장하기 때문일까? 감정도 같은 것일까?



"내가 화가 난 이유는 내 삶이 엉망진창이기 때문이야. 숙취에 시달리는 느낌으로 보존액이 덕지덕지 붙은 채로 잠에서 깰 때마다, 나한테 뭔가 끔찍한 일이 일어났다는 건 아는데, 무슨 일이 왜 일어났는지, 그 일이 다시 일어나는 걸 막기 위해 뭘 할 수 있는지 기억이 안 나. (하략)”



자신의 마지막 순간을 알지 못한 채 다시 눈을 뜨면 삶이 이어지고 있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이쯤 되고 보니, 그다지 긍정적으로 그려지지 않은 베르토와 내가 애초에 어떻게 친해졌는지 궁금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간단히 말하면 내가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믿은 덕분이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그렇듯 완벽한 친구란 있을 수 없고, 저마다 가지고 있는 다양한 단점들을 이유로 사람들을 내친다면 그들이 가져다줄 기쁨과 행복 역시 누릴 수 없게 된다.


베르토와도 마찬가지다. 다만 베르토는 밥값 때문에 치사하게 구는 대신 가끔 내가 구덩이에 빠져도 얼어 죽을 때까지 내버려 두고 자신이 한 일에 대해 거짓말을 할 뿐이다. 베르토는 그런 사람이다. 받아들이고 대수롭지 않게 넘기면 모든 일이 한결 쉬워진다.



미키는 관용적인 사람인 것 같다. 자신에게도 까다롭지 않으니 타인에게도 그런 걸 수도 있겠다. 어쩌면 자신에게 대해 희박한 관심을 가지는 만큼 타인과의 관계에도 큰 관심이 없는 걸지도 모른다.


본인이 본인의 삶에 대해 집착하지 않기에, 상대의 단점이 자신에게 미치는 영향을 그리 크게 느끼지 않는 걸 수도 있다. 미키는 벤과 제 지갑을 저울질했다고 했지만 결국 벤에게서 미키가 얻는 장점은 묘사되지 않았다. 놀랍게도 베르토에 대해서도 그랬다. 미키가 누군가에게서 얻는 장점이란 대체 무엇인가?




"이 임무를 맡는 데 가장 핵심이 되는 내용이에요. 당신이 바로 테세우스의 배라고요. 사실 우리 모두 그렇죠. 지금 내 몸을 이루는 세포 중에서 10년 전에도 존재했거나 몸의 일부였던 세포는 없어요. 당신도 마찬가지죠. 우리는 계속해서 새로 지어져요. 한 번에 한 부분씩 수리되는 셈이죠. 당신이 이 임무를 맡게 된다면 당신은 한꺼번에 새로 지어지는 셈이에요. 하지만 결국 똑같지 않나요? 익스펜더블이 재생 탱크에서 나오는 건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적으로 천천히 진행될 일을 한 번에 처리하는 셈이에요. 기억이 남아 있는 한 진짜 죽은 게 아니에요. 비정상적으로 빠른 리모델링을 할 뿐이죠."



이 이야기는 이론적으로 보면 언뜻 논리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여기에는 ‘시간’이 빠져 있다. 세포가 조금씩 바뀌어 나갈 때에도, 배가 수리되는 과정에서도 ‘시간’이 존재한다. 그것을 압축시키는 순간 이미 달라진다.




그 몇 마디 말에 따져 묻고 싶은 것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일단 나는 죽기 전까지 얼마나 버틸 수 있느냐 또는 업로드를 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보다는 죽는 문제에 더 관심이 있었고, 아무도 내 의사를 묻지 않았으면서 으레 내가 이 임무를 맡으리라고 가정하는 것도 불만스러웠다.


하지만 사실은 그녀 말이 맞았다. 나는 이 일을 해야만 했다. 젬마는 필드 생성기가 얼마나 중요한가에 대해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자세히 이야기했고, 망가진 부분을 교체하지 않으면 이 우주선이 얼마나 큰 위험에 처하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미키의 상충적인 부분이 잘 드러나는 문단이라 생각한다. 미키는 자신이 죽은 거란 걸 인지만 하고, 실감하지 못하고 있지만 자신이 죽음으로 가지 않으면 다른 이들이 죽을지도 모른단 사실에는 또 신경 쓰고 있다. 그는 죽음이 두렵지만 실감은 안 나고 한편 제 자신의 죽음보다 타인의 죽음에 더 무게를 두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건 자신이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 처해도 어? 설마? 진짜? 하고 실감을 못하는 걸지도 모른다.


죽음을 예감하는 건 자연스러운 걸까? 아니면 수많은 인간이 그러하듯 갑작스레 맞이하는 죽음이 더 자연스러운 걸까? 죽음이 당연하다면 우리가 맞이하는 죽음의 형태나 순간은 왜 늘 다른 것일까? 죽음 그 자체는 평등하면서 왜 방식에서 차이를 가는 것일까?


생명도 죽음도 공평하지 않다. 생명과 죽음 그 자체가 동일하다 해서 그 이후와 둘러싼 것들이 다르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그걸 만들어낸 것도 인간 또는 생명체 그들이라 말한다면 할 말이 없기는 하다. 우리는 왜 비참한 삶이나 죽음을 맞을 가능성이 있는 채 존재하는가.


삶이나 죽음에는 왜 고통이 있어야 할까? 고통은 삶에도 죽음에도 불멸에도 모두 존재한다. 그 이유는 뭘까? 벗어날 방법은 정녕 부처가 말하듯 해탈 뿐일까?


내 친구는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은 고통에의 초월이고, 안락사와 같은 죽음은 고통에서의 도피라고 그랬다. 그리고 죽기까지의 고통이 있는 이유는 고통에는 역치가 없고, 이는 고통이 죽음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려주는 것이고, 이를 통해 생존을 도모하라는 생명체의 진화의 산물이라고 이야기해주었다. 그러면 안락사는? 그건 약물이다. 약물은 고통의 역치를 반하기 위해 인공적으로 만들어지기 위한 것이니까 그렇다고 그랬다. 그렇다면 왜 고통이 심해질수록 도파민이 나오나? 그건 쇼크사를 방지하기 위한 게 아닐까? 그것 또한 죽음이기 때문에 그렇게 죽는 것보다는 고통을 경감하는 도파민이 나오라고 뇌가 으악 나 죽어 하는 것이 아닐까라고.




가장 이상적인 원재료는 당연히 살아 있는 인간이다.



인간을 만들기 위해 인간이 필요하다는 건 오래 픽션의 소재이지만 어찌 생각해보면 너무 당연한 건데 기괴하게 느껴지는 게 이제는 좀 더 이상하게 느껴진다. 인간의 탄생이 인간 없이 가능할 리가 없지 않은가? 인간을 희생해서 인간을 만든다는 걸 무서워하는 건 존재가 사라지는 것에 대한 공포라고 느껴진다. 자연계에서 어떤 곤충들은 다음 세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거나 하는 경우도 있다. 인간에게도 종종 일어나지만 흔하지는 않다. 뭔가 생존에 대한 욕구나 죽음에 대한 공포보다는 존재의 부재를 더 두려워한다는 느낌을 받곤 하는데 인간은 왜 유독 그런 게 심한 걸까?




매니코바는 자신에게 잘 대해 준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을 바이오 프린터에 던져 넣어 그의 분신으로 만든 다음 무기를 쥐여 주고 가장 가까운 이웃 공동체를 습격했다. 살아남은 공동체들이 힘을 모아 그에게 대항해야 한다는 의견을 모으기까지 거의 1년이 걸렸다. 그때 이미 매니코바는 행성에서 절대다수가 되어 있었다.



매니코바는 자아가 비대한 인물이었을까? 그가 자신의 복제를 계속해서 만들어 행성을 차지하려 한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자신같은 인간만 세상에 남아야 한다고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




사람이 살 만한 행성은 그리 많지 않다. 그중 하나를 잿더미로 만든다면 유니언에서 저지를 수 있는 가장 큰 범죄를 저지르는 셈이다.


하지만 누구도 파홈을 비난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매니코바를 비난했고, 그 후 유니언 대부분 지역에서 중복된 익스펜더블은 아동 납치범이나 잔혹한 연쇄살인범보다도 못한 취급을 받게 되었다.



파괴는 참 쉬운 해결책이다. 왜 폭력이 사라지지 않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넌 네가 불멸이라고 생각해?"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다.

"뭐라고?"


“이런 이야기를 내가 왜 하냐면, 네가 미키 반스가 맞는지, 아니면 그의 껍데기를 쓴 다른 사람인지 알고 싶어서 그래.”

“말했잖아, 모르겠다고. (중략) 즉, 나로서는 확실히 알아낼 방법이 전혀 없다는 뜻이지. 답할 수 없는 질문이라고.”

“그래도 네가 미드가르드의 미키 반스가 아니라고 인식하는 건 아니지?”

“응, 모르겠어.”

캣은 답이 없었다. 우리는 한참 동안 정적 속에 앉아 있었다.




캣의 등장과 이야기 내에서의 부상은 내겐 예상치 못한 전개였다. 그가 처음 등장했을 때만 해도 별 생각없던 캐릭터였다. 어느새 그는 세븐의 옆자리를 파고들었고, 함께 죽을 고비를 넘기고, 그의 비밀도 알아챘다. 그가 불멸에 관심을 크게 갖게 된 것도 물론 세븐과 함께 살아남으면서 동료를 잃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캣은 젬마가 말하던 불멸을 믿었다. 미키가 불멸에 대해 어중간한 답을 했을 때 테세우스의 배에 대해 다시 언급하며 설명을 잘 못한다 언급한 것이 그 증거이다. 미키의 대답보다는 자신이 믿는 걸 믿는다. 그는 죽음의 공포로 맛본 이후 죽음을 받아들이기 너무 어려웠던 것 같다. 그런 측면에서 세븐이 뭐든 받아들이는 성격인 탓에 지금까지 살아온 걸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캣의 욕망도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아니다. 미키의 중복 문제를 덮어주려한 것은 세븐에 대한 일말의 애정 탓이었을리라 예상되는데, 세븐이 캣에게 제멋대로 했던 기대가 무너져 자포자기 삼아 에잇과 나샤를 받아들인 걸 들켰을 때, 캣은 이 또한 마찬가지로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것은 아닐까?




"(상략) 지금 우리를 봐. 내 삶은 지난 6주에 불과하고, 네 삶은 지난 며칠에 불과해. (중략) 나인은 내가 아니니까. 나인은 그냥 내 침대에서 자고 내 배급 카드를 사용해 배를 채우고 내 물건들을 사용하는 다른 사람일 뿐이야."


에잇은 고개를 저었다. “(상략) 그가 나라고 생각하는 이상, 사람들이 그를 나라고 생각하는 이상, 그는 내가 아니라는 걸 증명할 방법이 없고, 그럼 그는 나야. 네가 지금 하는 생각, 바로 그 생각 때문에 익스펜더블이 중복되는 걸 허용하지 않는 거야."


나는 눈을 굴리며 대꾸했다. “익스펜더블 중복을 허락하지 않는건 앨런 매니코바가 우주를 정복하려고 했기 때문이야."

"그렇게 생각하시든지."



세븐의 말에 납득을 하면서도 에잇의 말에도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같은 존재는 둘일 수 없다. 그저 이름을 공유하는 다른 존재일 것이다. 하지만 다른 두 사람이 동일한 사람이라 생각하더라도 다른 지점이 생긴다면 거기서 이미 고유한 지점은 망가진 것이라 본다. 이미 이전에 말했듯 ‘시간’에 차이가 존재하면 고유성은 망가진 것이기 때문이다.



미키7의 엔딩은 초반부부터 촘촘하게 깔아뒀던 복선 회수를 하면서 끝이 난다. 세븐이 살아날 수 있었던 이유, 여러 죽음들, 그리고 세븐과 에잇의 결말까지.


내 개인적으로는 이 소설과 가장 어울리는 인용 부분은 아마 여기가 아닐까 생각한다.




“긴장 풀어, 미키. 잠이나 좀 자.”




무언가를 유연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면 죽음이든 삶이든 이어가기 어렵다. 나샤와 미키를 보면서 강렬하게 그 생각이 들었다. 미키는 무료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창 밖으로 뛰어내리지 않고, 나샤는 연인의 죽음에 매번 슬퍼하면서도 그것을 마주하는 의외로 강한 인물들이다. 그건 생각없거나 나태하다 느껴지기도 하지만 상황이나 환경에 빠르게 적응하기 위한 태도나 삶의 방식으로도 느껴진다. 어쩌면 그게 개척지민으로서 더 어울리는 낙관적 삶의 태도, 방식일 수도 있겠다. 그곳은 안정적인 곳이 아니니 말이다.


우리는 때때로 미키처럼 세계를 그저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무작정 그래서는 안된다. 그것이 익스펜더블의 중복이 허용되지 않게 된 사건과 무관계하지 않기 때문이다. 세븐도 이제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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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이라는 세계 십 대와 사회를 연결하다 2
최진우 지음, 도아마 그림 / 리마인드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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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환경연합에서 <숲이라는 세계> 서평단을 모집하길래 신청했다가 선정이 되었다.

환경에 관심이 많아진 시점이라 좋은 책을 받아 읽을 수 있게 되어 즐겁게 독서했다.

원래 1월 9일에 받을 수 있었는데, 책이 등기로 발송되는 바람에 다음날인 1월 10일에 수령했다.





녹색의 시원스럽고 귀여운 일러스트가 들어간 표지와 한 손에 들기 좋은 A5 정도 되는 앙증맞은 크기의 책인데다 페이지 수도 144페이지로 그리 두껍지 않아서 왼쪽 상단에 적힌 대로 '십 대와 사회를 연결하기' 좋은 책이란 생각이 여러모로 들었다.




<숲이라는 세계>, 이 책에는 '생물다양성'이란 단어가 참 많이 나온다. 책에서는 '지구상의 생물종, 생물이 서식하는 생태계, 생물이 지닌 유전자의 다양성을 모두 포함하는 말' 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숲은 어떤 생태계보다 생물다양성이 풍부한 장소'라고 한다. 우리나라는 아무래도 '산'이 '숲'보다는 좀 더 가까운 단어같다. 내가 가진 '숲'의 이미지는 평평한 지대에 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선 느낌인데 우리나라에서 그런 곳을 보기란 어렵다보니 '숲'보다는 '산'으로 나무가 있는 곳이 대변되는 느낌이고, 그래서인지 내게는 숲이 그리 가까운 장소이자 단어는 아니었다.

<숲이라는 세계>에서 또 자주 언급하는 단어는 '탄소중립'이다. 탄소중립은 내가 요즘 가장 관심을 갖고 있는 분야다. 주로 경제적인 이유에서 갖게 된 관심이지만 기후위기가 실제 내 생활에서 은은하게 느껴지기 시작하면서부터는 환경적으로도 관심이 생겼다. 전세계적으로 탄소중립을 위해 전략을 세우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지만 정작 탄소중립에 대해서 우리는 잘 알고 있을까? 탄소중립이란 '대기 중에 있는 온실가스 농도가 증가하지 않게 하기 위해 인간 활동에 의한 배출량을 감소 시키고, 흡수량을 증대하여 순배출량을 0으로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탄소 '배출량'이 0이 되더라도 탄소를 흡수해야 하는 '숲의 보호와 복원'이 없다면 대기 중 탄소 농도가 증가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 저자의 설명이다.

나는 '생물다양성', '탄소중립' 이 두 가지가 저자가 하고 싶은 말을 가장 대표하는 단어가 아닌가 싶다.

숲이나 산, 나무에 대한 나의 생각은 '나무를 훼손하지 않고', '숲이나 산에서 불낼 일을 하지 않으며', '산에 나무를 많이 심기' 정도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그저 나무를 심거나 산불을 내지 않거나 나무를 훼손하지 않는 건 '당연한' 일이다. 저자는 우리에게 숲에 사는 나무의 종류를 다양하게 하고, 다양한 생물이 어우러져 살 수 있는 숲을 만들어 생태적으로 관리해야 할 필요성을 주장한다.

또한 도시에서도 숲을 조성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가로수를 보는 우리의 시선과 생각부터 바뀌어야 한다고 그는 이야기한다. 우리는 이제 '나무의 입장'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나무는 '살아있는 생명체'이고 나무에게도 '권리'가 있다는 걸 나는 이 책을 보고서야 어? 하고 깨닫게 됐다.

나무의 권리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이런 류의 책들에서 항상 느꼈던 아쉬움으로는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실천적 방법에 대한 제시가 없다는 거였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주요 독자인 십 대도 할 수 있을 법한 것들을 제안하고 있어서 참 좋았다. 바로 '가로수 시민조사단'이다. 도심에 있는 가로수를 조사해 트리맵을 만드는 것인데 '전국가로수연대 트리맵'이나 '우리동네 가로수지도'를 인터넷으로 검색해 혼자서도 참여할 수 있다. 내가 직접 검색을 해보니 이 활동은 서울환경연합과 저자가 실제로 주도하여 하고 있는 활동이기도 했다. 이런 지점에서 환경에 관심이 생긴 사람이 바로 접근해볼 수 있는 활동을 소개해주어 아주 큰 의미가 있었다. 당장 도시에 사는 이들에게 '숲'은 멀게 느껴지지만 '가로수'는 늘 볼 수 있는 가까운 존재가 아닌가.





내가 가장 마음에 들었던 단락은 41 <아낌없이 주는 나무는 없다> 였다. 여태 나무를 '식물'이라고는 생각했지만 나무의 '삶'에 대해선 생각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때때로 지나치게 인간중심적으로 모든 대상을 대하고 있지는 않았을까 고민해보는 계기가 됐다.

전반적으로 이 책에서는 전문용어를 쉽게 전달하려는 저자의 시도가 느껴졌지만 일부 단어들은 좀 더 쉽게 풀어서 설명하고, 그에 대한 예시를 주거나 초반에 좀 더 많은 페이지를 할애했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약간의 아쉬움이 있었다. 하지만 십 대를 대상으로 '숲'이나 '나무'에 대해 재미있는 이야기들, 특히 '한국의 숲' 챕터에는 정말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많아서 좋았다. 백두대간이 한반도의 지역과 문화를 나누었고, 인문지리가 발전했다는 이야기나 60년대 우리나라 민둥산의 녹화사업에는 동남아시아 열대림의 훼손이 따랐다는 안타까운 이야기는 생각할 지점까지 심어주었다. 그리고 그 외에도 나무의 권리나 삶, 생태감수성, 숲과 산의 보호와 보전에 대한 경제적인 접근과 같은 새로운 시각도 알 수 있었던 데다 숲과 나무를 보호하고 지켜나가는 실천적인 방법 등을 다양하게 제시해주어서 숲에 대해 가볍게 접근해보기 좋은 책이었다.

특히 '기후위기와 숲' 챕터에서는 요즘 같은 기후위기 시대에 우리가 '숲'을 중심에 두고 어떤 것을 생각해볼 수 있고, 또 어떤 것을 논의해야 하며, 어떤 것에서부터 실천할 수 있는지를 조금 무뚝뚝하지만 다정한 낯으로 이야기해주는 어른을 만난 것 같아서 아주 만족스러웠다. 144페이지라는 그리 길지 않은 분량에 귀여운 일러스트가 내용을 마냥 묵직하지 않게 느끼게 해주어, 이제 막 환경이라는 주제에 관심이 생긴 나같은 이들이라면 한번쯤 읽어보면 좋을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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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열한 계단 : 나를 흔들어 키운 불편한 지식들 - 나를 흔들어 키운 불편한 지식들
채사장 지음 / 웨일북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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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사장 글은 불편하다. 읽으면 너무 잘 읽히고 생각도 공감가는 지점이 있고 그래서 무언가 불편하다. 닮은 지점이 많아서 더 그런 것 같다. 그의 삶은 나와 다른데 이상하게 그가 나와 닮아있는 게 나를 불편하게 한다. 그의 삶에 대해 궁금한 지점이 많았다. 거기에 대해 충분히 해소시켜주는 책이었다. 그의 삶을 따라 가다 보면 그를 이해하고 싶어진다. 그리고 불편한 책을 읽어야겠단 생각을 하게 된다.

이 책에서 인상 깊었던 부분을 정리하니 7가지의 소제목이 나왔다. 해당되는 소제목마다 인상 깊었던 구절과 감상을 기록한다.


1. 불편한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

우리에게 주어진 독서 시간은 물리적으로 한정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삶의 방식도 제한되어 있는 것이다.

내가 들춰내기 전까지 세계의 신비는 나에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하나의 분야에 대한 깊이 있는 지식은 우리를 먹고살게 하고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게 하며 사회를 발전시킬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내 세계의 전부라면 그 삶은 너무나도 아쉽다. 우리는 노동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 아니라 즐기고 여행하고 놀라워하기 위해 온 것일 테니까. 인생이라는 제한된 시간 속에서 세계의 다양한 영역을 모험하는 가장 괜찮은 방법은 불편한 책을 읽는 것이다.

이 챕터가 이 책의 가장 처음을 차지하고 있는 건 아주 적절하다. 채사장은 이 챕터를 통해 이 책뿐만 아니라 다른 책들 또한 읽어야 하는 이유를 아주 명쾌하게 설명한다. 그리고 채사장의 책이 불편하다며 피하고 싶었던 나를 저격해서 이 책으로 끌고 들어온다. 계속해서 ‘편하다’는 이유로 표류하는 삶을 택할 것인지 묻는다. 그리고, 그것은 ‘성장’을 바라는 나 같은 사람들의 심중을 꿰뚫는 통쾌한 저격이다.

2. 자기만의 세계

누구나 자신만의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여행을 마친 사람이 여행을 시작하는 사람에게 아무리 여행의 장단점과 주의사항을 말해줘봤자 소용없다. 스스로 밟아가야 한다. 직접 경험하고 실패하고 배우는 과정을 통과해야 한다. 그래야만 여행을 시작한 사람은 여행이 끝날 무렵에 자신이 처음 들었던 이야기들이 무엇을 의미했는지 이해하게 된다.

이제 그만 살아도 되겠다고 생각한 건 바로 그때였다. 그 순간 너무나도 맑은 정신 속에서 나는 정확히 느낄 수 있었다. 지금 이 순간이 과거와 미래를 관통하는 나의 삶 전체를 통틀어 가장 행복한 순간임을. 그것은 시간의 한계를 초월한 느낌이었다. 잠시나마 인생 전체를 조망한 느낌. 아름다운 자연 속에 너무도 좋은 사람들과 이렇게 함께 있는 완벽한 순간은 다시는 반복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신이 준비해놓은 가장 완벽한 순간임을 선명하게 알 수 있었다. 그러니 더 살아간다는 건 무의미한 일이다. 무의미한 삶을 구차하게 끌고 간다는 것은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지금의 계단에 머무를지, 아니면 한 걸음 더 오를지.

나는 실패가 유독 싫었다. 그걸 피하기 위해 애썼고, 타인에게 전하곤 했다. 이제야 그 과정이 필연적이었음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됐다. 하지만 그럼에도 누군가에게 말하기를 꺼려해서는 안되는 것 같다. 늘 그렇듯 오지랖과 조언의 경계는 흐리다.

나의 작은 세계로 충분했던 시절에, 나 또한 같은 기분을 느낀 적이 있었다. 유사하게도 거대한 자연은 작은 우리에게 무언가를 주는 존재인 걸까. 아니면 우리가 그렇게 느끼는 것뿐일까. 이것을 설계라 느끼는 순간이 오기도 하지만 어쨌든 나는 그때의 충만함 이후로도 무언가를 끊임없이 추구해야 했다. 나 또한 완벽한 하나의 진리를 찾고 있었기에 스스로가 세상은 단순하게 보고 복잡성을 받아들이면 된다는 관점의 전환을 이해할 수 없었다. 세상에 진리가 있다면 그것을 찾아내면 이 모든 것은 명쾌해질 터인데 찾기를 포기하고 관점을 바꾸는 건 당시의 나로서는 한심하게 느껴졌었다.

지금도 여전히 하나의 진리가 있을 거라는 믿음은 포기하질 못했다. 이 수많은 세상의 구체적이고 복잡한 사정들을 더는 외면하지 않기로 했을 뿐이다. 단순한 진리조차 개인의 관점에서 무조건적으로 우기기에 우리가 보아야 하는 관점들이 너무 많아졌다. 한편으론 그런 생각이 든다. 세상은 지금에 와서 복잡해진 게 아닐지도 모른다. 처음부터 그랬음에도 나의 작은 세계에서는 360도로 시선을 아무리 돌려보아도 좁은 시야가 전부였기에 그렇게 보였을 뿐이었다는 걸.

3. 이상적인 인간

이상에 가깝다 X 이상을 품은 인간 O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안 병장의 판단이 틀렸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나는 무수히 많은 생각의 가지를 뻗었다. 자신의 시간을 포기할 만큼 군대라는 집단이 그렇게 윤리적인 집단이 아님을 생각했고, 한국의 군대문화가 만들어낸 관료주의와 권위주의를 생각했으며, 국수주의와 애국주의가 어떻게 전체주의적 폭력으로 귀결되는가를 생각했다. 안 병장을 만나면 이런 것들을 말해주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는 그 모든 이유와 무관하게 옳다. 그는 자기 삶의 입법자이고, 자기 삶의 대지를 걸어가는 자가 아닌가.

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타자의 평가는 이상적인 인간에게 불필요하기 때문이다.

환경이 인간에게 끼치는 영향은 엄청나다. 대부분의 인간은 환경을 버텨내거나 어떻게든 적응하기 위해 애쓴다. 적응해내는 게 8할이라면 적응하지 못해 버티거나 튕겨나가고 마는 게 1.9할 정도가 될 것이다. 남은 0.1할은 그러면? 환경을 나에게 맞추는 사람이다. 이들은 ‘이상을 품은 인간’이다. 이들은 환경을 자신의 이상에 맞춰 바꾸어 나간다.

이 소수의 사람들이 바꾼 환경은 처음에는 이미 환경에 적응한 8할의 거센 저항을 받지만 이들에게 감화된 인간들과 함께 구체적이고 확연한 변화가 된다. 이런 식으로 사회는, 환경은 변화해온 것은 아닐까. 그들이 ‘이상적인 인간’으로 불려도 되는 의미가 있다면 여기에 있다.

4. 사람은 변한다

우리는 선입견이 있다. 내면의 성숙은 고결한 방식을 통해서만 이룰 수 있다는 선입견. 그것만으로는 얻지 못하는 절반의 배움이 있다. 고결하지 않고 만나고 싶지도 않은 세계에서의 경험들. 부당함에 굴복하고, 부조리에 타협하고, 옳은 주장을 꺾고, 스스로의 초라함에 몸부림칠 때에만 얻게 되는 그런 배움이 있다. 슬프게도 우리에게는 이런 세계에 머무르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야만 우리는 나와 타인의 한계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고, 그때에야 비로소 나에게 엄격하고 타인에게 너그러운 성숙한 어른이 될 수 있다.

내가 분을 삭이며 말했다. “사람들은 변하지 않아.” 누나가 대답했다. “그래, 사람들은 변하지 않지. 그런데 우리 동생은 그동안 많이 변했구나.”

어떤 사람이든 자기만의 울타리를 부숴야 하는 순간이 있다. 울타리 자체가 아주 넓어 그 순간이 와도 그 안에서 겪은 것들로 손쉽게 "아! 보수해야 하는구나!" 하는 사람도 있지만 좁은 울타리로 인해 그 안에서 겪은 게 적은 사람은 부당함, 부조리, 초라함, 한심함 같은 것들을 마주하고 부수고 더 넓은 울타리를 세워야 함을 또, 그 경계를 지정해야 하는 일을 받아들이기 어렵다. 겪는 시점에 따라 책에서 말하는 나약함을 부정하고 자신을 보호하려는 사람이 되기도 하고 현실에 적응해 자신에게 너그러운 사람이 되기도 한다. 물론 좁은 울타리는 상대적으로 여전히 좁고, 넓은 울타리도 또한 그렇다. 울타리 자체의 재질이나 소재도 쉬이 바뀌는 일은 잘 생기지 않는다. 그럼에도 사람은 변한다.

5. 삶을 수용한다는 것

그 순간이 가장 완벽한 순간임을. 더 이상 그렇게 행복한 순간은 두 번 다시 반복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더 살아간다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무의미한 삶을 구차하게 끌고 간다는 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이제 그만 살아도 되겠다 싶다. 너무 오래 끌어가고 있다. 당시의 나는 한없이 나약해져 있었다.

삶에서 발생한 고통을 그저 받아들이라고요? 아뇨. 그건 너무 무책임한 말이에요. 자신에게 발생한 상실과 고통을 수용하라는 충고는 겉으로는 평화로운 해결책을 제시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세상의 부조리와 모순에 눈감으라는 비겁하고 나약한 제안이에요.

직접적인 저항도 필요하지만, 주어진 삶의 고통을 인내하는 용기도 필요하다는 말씀이군요.

생각해보면, 세상에 정말 힘든 일 같은 건 없다. 두 가지 조건만 충족하면 된다. 충분한 시간과 집중할 수 있는 여건. 우리는 어떤 어려운 문제든 처리할 수 있다. 문제는 힘들지 않은 일이 동시다발적으로 주어질 때 발생한다. 정신은 분산되고 신경은 예민해진다. 간신히 처리하던 일들에서 예상치 못한 문제가 생긴다. 도미노처럼 일들이 꼬이기 시작하더니 결국 모든 일에서 문제가 연쇄적으로 터진다.

어느 순간 모든 일을 망쳤다는 생각이 든다. 다시 시작하고 싶다.

자연의 거대한 아름다움을 마주했을 때 나 또한 느껴본 적이 있는 감상이라 조금 어색했다. 인생을 굴곡있는 선으로 계속 표현해야 한다면 그 선이 고점을 찍는 한순간 이후로는 다시는 그 고점보다 높은 순간이 오지 않을 거라고 느끼는 내 자신이 있다.

노력은 보답받지 못할 수도 있고, 반드시 보답받을 이유도 없다.

참 공감이 간다. 연쇄적으로 문제가 터지면 힘들어진다. 그리고 내가 감당하기 어려워지면 모든 걸 리셋하고 싶다. 현대인 중에 리셋증후군을 겪지 않는 이가 있기나 할까?

6. 죽음에 대하여

모든 것은 내 마음의 투영물이다. 내 외부에 실재하는 절대적 심판자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나의 행위를 평가하는 건 사실 자기 자신이다.

우리는 삶 속에서 나의 의미를 찾으려 하지만, 이건 처음부터 잘못된 접근이었는지도 모른다. 삶 안에 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나라는 존재 안에 삶이 일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일 수 있다. 나는 삶의 세계와 죽음의 세계를 포괄하는 존재인 것이다.

이러한 사고는 두 가지 기능을 한다. 첫째는 육체와 자기 자신을 동일시하는 상식적인 견해를 넘어서게 해준다. 둘째는 삶과 죽음을 관통하는 존재로서의 나의 의미를 다시금 고민하게 한다.

죽음은 삶이 끝난 뒤에 오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니 나에서 벗어나는 것이 죽음이라 여겼다. 그게 내가 육체와 나를 동일시하는 것이었다는 걸 깨닫자 죽음까지도 나의 삶이고, 내 마음에 있는 것이었구나 싶어졌다.

7. 나는 나다

세상과 단절된 나의 작은 공간에서 나는 회복되어갔다. 그것은 마치 차라투스트라의 동굴과도 같았다. 세상에 나가서 자신을 비워낸 차라투스트라가 스스로의 내면을 다시 채워나가는 공간. 물론 영원히 머무를 수는 없다. 잔이 채워지면 다시 비워내야 한다.

나라는 구면의 밖으로는 어떻게 나가는 것인가? 하지만 그런 것은 없다. 우리는 이 의식의 지평을 떠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나를 벗어나지 못한다.

나는 고정적이지 않다. 나는 나라는 걸 받아들이고 나의 영역을 넓히되 그 속이 채워지면 다시 비워내며 나를 돌아봐야 한다. 그래야 나를 넓힐 기회도 생긴다. 채우고 비우며 나를 드러내야만 결국 나를 알게 되는 것 같다. 내가 나라는 걸, 내가 모르던 나조차 나로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결국 모든 건 내 안에 있고 내가 마주하는 외부의 것들조차 나에서 비롯되어 나로 귀결된다는 걸. 환경이 나를 옭아매는 듯 해도 그걸 받아들이거나 바꿀 의지는 나에게 있다는 걸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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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쿠바산장 살인사건 히가시노 게이고 산장 3부작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민경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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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랜만에 읽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이었다. 읽으면서 꽤 정적인 분위기를 느꼈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하쿠바산장 살인사건>의 출판연도가 1986년이었다. 아무리 고립된 산 속의 산장이라지만 이렇게까지 놀 거리가 없고 아날로그적일 이유가 있단 말인가라든가 의아하던 지점들이 단숨에 해소되었다.

책의 시작점은 단순한 편이다. 여행 중이던 오빠가 자살을 했다는 산장에 그 죽음에 대한 의문을 품은 여동생과 그 친구과 함께 방문하면서다. 소설의 앞쪽에 이들이 어떻게 산장에 합류하게 되는지, 또 여동생이 친구에게 동행을 설득하는 과정이 제법 구체적으로 묘사되고 있는데 후반으로 갈수록 그 이유에 대해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다소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는 앞부분이 캐릭터의 언행에 힘을 실어주는 중요한 단락이었음을 깨닫고 나면 히가시노 게이고의 호흡 분배에 경탄할 수 밖에 없다.

이 작가의 작품을 팬들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종종 읽을 때마다 세심한 캐릭터에 대한 설득력을 느끼고는 한다. 그의 추리소설은 상황이나 트릭보다도 거기에 처해진 캐릭터들의 숨결 덕분에 더 치밀하고 생동감있게 느껴지는 것 같다.

이 책에서는 마더구스가 굉장히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뿐만 아니라 수수께끼 같은 마더구스의 해석에의 차이가 주는 맛도 있다.

에필로그까지 여운이 남는다는 점에서 참 좋았다. 고립된 장소이기에 추리의 맛을 더하기 위해서라도 인물이 꽤 많이 등장하는 편인데도 인물들이 어느 쪽에 크게 쏠리지 않고 다양하게 조명받는다는 점과 탐정의 역할이 스무스하게 분배되어 있다는 게 상당히 흥미로웠다. 이 작품이 연작으로 나왔다면 아주 흥미로운 콤비물이 되었을 수도 있었겠다. 내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모든 작품을 알지는 못해서 아직 알아보지는 못했지만 혹시 연작이 있을까?

아직 찾아보지 못한 시점에서 연작이 아니라는 가정을 하고 생각해보면, 출판연도만으로는 한계가 있었을 거란 예측도 든다. 아마 그런 이유로 등장했던 또, 행적을 보인 캐릭터로 추정되는 인물도 있어서 그렇다.

그래도 순식간에 몰입해서 이 산장의 쌓인 눈이 녹기를 바라게 되는 차갑지만 따뜻한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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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를 덫에 가두면 - 2021 뉴베리상 대상 수상작 꿈꾸는돌 28
태 켈러 지음, 강나은 옮김 / 돌베개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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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 내용이 책 스포일러가 될 수도 있으니 주의.

이 책의 저자인 태 켈러는 한국인 할머니를 둔 쿼터 혼혈이다. 그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바탕으로 한 자전적 소설을 썼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 릴리는 ‘조아여’ (조용한 아시아 여자애의 줄임말)의 고정관념 같이 보이는 여자 아이이고, 릴리의 언니는 거기서 벗어나기 위해 탈색을 하고, 까만 립스틱을 바르고, 거칠게 말을 뱉는다. 릴리의 어머니는 병에 걸린 어머니 즉, 릴리의 외할머니와 살기 위해 두 딸과 함께 할머니가 살고 있던 집으로 이사한다.

릴리는 이사 오던 길에 ‘호랑이’를 목격하고 그 호랑이는 릴리에게만 나타나 할머니가 옛날 옛적에 훔쳐간 걸 돌려주면 할머니를 낫게 해주겠다고 한다. 처음에 릴리는 새로 알게 된 친구 리키의 말을 듣고 함께 호랑이를 잡기 위한 덫을 만들어 놓는 등 최선을 다한다. 마법과도 같은 호랑이와 하나씩 풀리는 옛날 이야기들에 어우러진 한국계 미국 소녀 릴리가 고군분투하며 여러 감정들을 느끼고 어떻게든 소화하며 성장해나가는 모습은 자꾸 내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그래서일까 그것을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응원을 보내게 된다.

마법 호랑이와 릴리가 분투하는 동안 릴리의 시선에서는 잘 알 수 없는 언니의 싸움, 엄마의 싸움, 할머니의 싸움 또한 이어지고 있다. 이 소설에서는 아시아계로서 미국에서 살아가는 여성들의 자아정체성에 대한 고민이나 그들이 느끼는 감정들, 가족에 대한 정과 약간의 마법적인 (아마 그들의 입장에서 그렇게 느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것들을 직간접적으로 보여준다.

릴리는 성장한다. 그러면서 마주 보기 어려웠던 진실을, 마법이 걷히는 순간을, 제대로 보는 힘이 생긴다. 그 과정을 따라가는 것은 나에게도 성장의 한 순간이 되는 마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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